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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맥과 중요 지맥 산행(완료)/금남기맥(호남·완)

대동금강기맥 제4구간 23번 국도에서 다리실재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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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전라북도 익산시와 완주군 그리고 군산시의 대동금강기맥(금남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6월 20일 (금요 무박 토요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엔 흐리고 박무가 있었으며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던 산행에 어려움을 남겼던 날씨

산행온도 영상 13도에서 영상 26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금남기맥 종주대 총 5명

산행코스 : 23번 4차선 국도(정금주유소)-익산대로-정착길 시멘트 포장도로-(유)대한신재생산업기계-닭사료공장-호남선 철도 건널목-시멘트 포장도로-축사단지-이리노회회관 이정판-지하통로(황등오산간 4차선 도로 통과)-2차선 포장도로-황교1길-황교2마을회관-용산리 이정석-황성로-구자 버스정류장-구자마을 이정석-탑고지복지마을 버스 정류장-에바다교회-봉곡1길-봉곡버스 터미널-봉곡마을 이정석-신대길-갈마 이정석-(주)포듀-(유) 서해물류-익산군산축협-함라마을돌담길과 함라삼부잣집 이정판-함안로-함라초등학교-수동길과 용산로-함라파출소-조해영가옥-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이정석-익산 둘레길 안내판-천남1길-김안균가옥-함라성결교회-겟세마네기도원-함라어린이집-함라산 둘레길 가든-육각정자-안전목책-이정표(함라3부자집과 야생차군락지)-산죽지대-이정표(수동마을, 3부잣집. 돌담길 양반길, 야생차 군락지 2.4 Km 명상길)-벤취 쉼터-함라재 이정표(함라산 정상 0.6 Km 등산로, 야생차 군락지 2.0 Km 명상길)와 돌탑-현위치 이정표(삼부자집 1.1 Km, 생태통로 2.1 Km와 봉수대 0.7 Km)-안전목책과 로프구간-한라산정상(240.5봉)-함라산 헬기장-웅포재-이정표(봉수대 0.4 Km, 함라삼부자집 1.3 Km, 생태통로 2.4 Km, 임도 0.2 Km)-통나무 계단과 안전목책-벤취2개쉼터-봉화산(236.3봉, 함라산소방봉봉수대 산불감시초소와 사각정 그리고 무인산불감시카메라)-안전철봉과 로프구간-169.5 벤취봉-군부대 사격장 경고판-154.6 벤취2개봉-무명묘지 공터-벌목된 묘지지대-142.3봉-무명묘지지대-칠목마을민가-칠목재(722번 2차선 지방도로)-칠목재휴게소-콘크리트 포장도로-칠목마을 민가와 폐가들-가선대부묘지-178.9봉 삼각점-쓰러진 나무와 잡목지대-묘지지대-비포장임도-잡목과 묘지지대-콘크리트 옹벽 임도-무명봉-공동묘지지대-19번 송전탑-편백나무와 은사시나무지대-공동묘지지대-잡목이 우거진 묘지지대-소나무 군락지-18번 송전탑-무명묘지4기-소나무 군락지-송전탑-통덕랑경주이공묘지(아침식사)-수레재(15번 2차선 포장도로) 이정표(흥법마을입구 0.3 Km, 와촌마을입구 0.5 Km)-편백나무-대나무 숲-안부 이정표(흥법마을입구 0.9 Km, 망해산정상 2.1 Km, 와촌마을 0.3 Km, 흥법저수지 0.3 Km)-벌목된 묘지지대-통나무 오르막 계단-묘지지대-이정표(흥법마을입구 1.7 Km, 흥법저수지 0.6 Km, 망해산정상 1.7 Km)-무명묘지와 수원백공 납골묘-잡목과 칡넝쿨지대-무명안부-당산나무-통나무계단-비포장 임도 이정표(망해산정상 0.6 Km, 흥법마을입구 2.4 Km, 팔각정자 0.1 Km, 축동리순환등산로입구 1.6 Km)-능선진입 이정표(망해산 정상 0.61 Km, 금강 4.01 Km, 팔각정자 0.1 Km)-통나무 오르막 계단-망해산 동봉(320봉, 불지산, 팔각정)-구불길-편백나무-비포장임도 이정표(망해산정상 0.23 Km, 팔각정자 2.1 Km)와 구불길 안내도-산불감시초소-헬기장-헬기장2-취성산 갈림 삼거리-망해산(230봉, 헬기장, 삼각점)-취성산 갈림 삼거리 복귀-통나무 내리막 계단-벌목지대-비포장임도 이정표(축동리순환등산로입구 0.18 Km, 축동리순환 등산로입구 1.41 Km)-비포장 임도따라 진행-이정표(망해산정상 1.5 Km, 축성산정상 0.3 Km, 축성리순환등산로입구 1.6 Km, 흥법마을 입구 2.5 Km)-구불길 안내판과 이정표(망해산정상 1.25 Km, 축성산 0.86 Km, 원부곡마을 2.13 Km)-능선진입-잡목구간-취성산(219봉, 철망, 산불감시초소, 무인산불감시카메라)-150봉-묘지공터지대-묘지안부지대-시멘트포장도로-공동묘지지대-시멘트포장도로-시온동산 빗돌-거점재(11번 2차선 포장도로)-용천산(136봉)-비포장임도-편백나무-행복한농장-2차선 포장도로와 우곡제-능선진입-시멘트 포장도로-민가와 밭-생명수교회 입간판-상직2길 도로표지판-축사건물-비닐하우스-녹색 철망지대-성산양수장(금강2지구 옥구2-1공구 현황판)-우곡2교(서해안고속도로) 통과-1차선 포장도로-논과 비닐하우스지대-까치멀권역 창안마을 이정판-창안마을버스정류장(744번 2차선 포장도로)-1차선 포장도로-갈림삼거리-민가한채-대나무 숲-잡목지대-대명산(129봉)-비포장임도-콘크리트 포장도로-뽕나무 오디지대-지독한 잡목과 칡넝쿨지대-비포장임도-편백나무-망경산(129봉)-편백나무지대-송전탑-다리실재(27번 2차선 포장도로)-거시기삼계탕식당-산행종료-함열로 이동해 샤워한 다음 국밥으로 뒷풀이 후 귀경

산행거리 : 약 28.02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흐리고 가랑비 내리는 날씨에 카메라 조심하며 꾸준하게 진행하며 10시간 09 (02시 14부터 12시 23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군산 콜택시 이용

금남기맥(금강정맥)이란 ???

금남기맥(금강정맥)이란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지나 백운산에 내려서기 전에 영취산에서 장안산, 신무산, 팔공산, 성수산 및 마이산을 거쳐 진안과 전주 사이의 모래재고개 위 조약봉(주줄산 또는 주화산)에서 두줄기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남서쪽 만덕산으로 해서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 제암산, 존제산, 조계산과 백운산등 전라남북도를 휘돌아서 섬진강하구의 망덕산까지 이어지는 호남정맥이고 또 한줄기는 북진하여 연석산, 운장산, 장군봉을 지나서 싸리재와 봉수대 사이의 싸리재 분기봉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북진하여 인대산,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서 부여 부소산에서 맥을 다하는 산경표의 금남정맥이고 또 한줄기는 서진하여 왕사봉을 거쳐 칠백이고지, 시루봉, 장재봉, 작봉산, 천호산, 미륵산, 함라산, 망해산, 고봉산을 지나 장계산에서 서해바다로 잠긴다.

이산줄기를 보통은 금남기맥 혹은 원 금남정맥이라고 부르는데 신산경표는 조약봉 분기봉에서 군산의 장계산까지 가는 산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부르고 싸리재 분기봉에서 부여의 부소산까지를 금남정맥이라고  부른다.
거리는 조약봉에서 부소산 조룡대까지나 군산의 장계산까지나 신기하게도 같은 도상거리로 131.4 Km이다

그렇게 이름지어진 이유는 정맥은 강을 구획하는 경계가 되고 맥이 바다에 닿아야 하는데 신산경표의 금남정맥은 이 모두를 충족하지 못하니 온전히 금강의 남쪽과 만경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이 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산줄기이기에 걸어가면서 그 의미를 새겨보고 실제 마루금을 살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흐리고 가랑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 비산비야의 마루금을 걸으며 미지의 세계와 자연을 즐겼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산행일이 다가오면서 걱정도 늘고 고민도 해 보는 시간이지만 늘 지나고 보면 찰나의 순간을 스치듯 지나는 시간임을 알게 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무더운 날씨에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하니 다행이란 마음과 걱정이 교차하고 특히 기맥 산행일이 몸을 담고 있는 산악회의 정기산행일이다 보니 공식적인 산행 공지를 올리기도 어려워 이렇게 도둑고양이처럼 다녀와야 한다는 사실도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들고 있지만 다녀 와 생각해 보면 모두 부질없음을 알게 되기에 마음 비우고 하고 싶은 산행을 무탈하게 마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지난 5월 첫날 마음 맞는 산친구 4명과 함께 총 5명이 시작한 대동금강기맥 산행도 이제 벌써 마지막 구간만 남겨 놓고 무사히 진행하고 있으니 처음 시작이 어렵지 시작을 하고보면 무엇이든 그 결과는 금새 찾아 온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며 행복한 산행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다.

이제 7월 초에 실시될 대동금강기맥 마지막 구간은 마음 편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오며 모두 함께 마지막 탁배기 한잔 나누며 지나간 산행을 안주 삼아 마음껏 웃어 볼 수 있는 시간이길 바래 보기도 한다.

 

 

산행 초반부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야 하고 특히 오전부터 내린다는 비 예보가 있기에 새벽 일찍 시작해 조금 일찍 마치기로 하고 출발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즐기고 웃으며 진행하여 수레재 근처에 도착을 해 흐리지만 아직 비는 내리지 않은 통덕랑경주이공의 묘지 위에 앉아 아침식사를 마치고 수레재를 넘으니 이제부터 약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무더위는 달래주지만 등로조차 보이지 않게 자라고 있는 잡목들로 인해 온 몸은 비맞은 생쥐꼴이 되어 어렵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래도 한발 두발 걸어 마지막 망경산에 올라 사진 한장 만기는 시간은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안도의 마음과 함께 이 고통스런 맥 잇기 산행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교차하는 얼굴로 추억 한장 남기며 멋진 산행의 완주를 자축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도 역시 정예화된 종주대 4명이 사당에서 밤 12시 정각에 출발을 하고 그곳 익산이 고향인 종주대 한명은 먼저 내려가 새벽 2시 30여분에 산행 들머리인 함열의 정금주유소에서 만나기로 한다.

뻥 뚫린 도로를 타고 탄천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내려가니 약속장소인 정금주유소에 도착을 하니 새벽 2시를 막 넘기고 있고 그곳 주유소 앞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산행 준비를 하다보니 그곳이 고향인 종주대 한명도 생각보다 일찍 합류해 새벽 2시 21분에 멀고도 긴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다송리는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에 있는 리로서 해발고도 10미터 미만의 충적평야로 되어 있는데 본래 함열군 동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방교리와 와야리의 전 지역과 상마리와 익산군 사제면 만대리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방교, 박전, 와야, 상마마을이 있으며 방교마을은 지형이 밑으로 가면서 넓어지거나 길이 두갈래로 갈라진 Y자형 또는 삼각형으로 된 곳인데 디딜방아의 다리와 같다 하여 방아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바뀌었다.

박전마을은 밭이 많은 곳이라 하여 넓밭이라 부르던 것이 변한 지명이고 다송리는 다송리 선사유적지로 유명한데 다뉴세문경, 검은 간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애마를 주차시키고 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곳 정금주유소가 문을 닫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산행 후 애마를 회수하러 와 보니 정상적인 영업을 하고 있어 주인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미안함을 전하니 쿨하게 상관없다며 이해를 해 준다.

 

 

정금주유소에 애마를 잘 주차시킨 후 23번 4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인 남쪽으로 걸어가니 도로 우측에 익산종합의류과학산업단지로 갈 수 있는 이정판이 보이고 곧이어 직진 방향으로 익산과 김제로 그리고 좌측으로는 제4산업단지와 삼기 가는 갈림 삼거리 도로 표지판이 반긴다.

그곳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 포장도로 방향으로 정착길이란 도로 표지판이 보이는데 그 정착길 방향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90도 꺽어 진행을 한다.

잠시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들어가니 도로 좌측은 인공수로가 우측에는 대한신재생산업기계 건물이 보이고 곧이어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은 닭사료를 만드는 공장으로 코를 자극하는 심한 부패된 냄새가 아침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저 앞에 호남선 철도 건널목이 보이는데 지금 시간 새벽 2시 32분인데 아직도 역무원 두명이 지키고 서 있어 의아한 순간이다.

 

 

그 호남선 철도 건널목을 무탈하게 통과하니 곧바로 갈림 삼거리의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우측 진행 방향으로 이리노회화관 350미터 이정판이 반겨주고 우측 방향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는 거대한 축사 건물들이 보이는데 이곳 역시 코를 찌르는 부패한 냄새로 인해 진행에 어려움이 있는 시간이다.

그 축사를 지나 계속 걸어가니 이제 도로 좌측에 이리노회회관100미터란 이정판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오산황등간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보이고 그 통로를 통해 맥 잇기 산행을 계속 이어가 본다.

 

 

그 황등오산간 도로를 지하통로를 통해 건너니 다시 사거리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살펴보니 도로 옆에 한국농어촌공사익사지사장과 익산소방소장이 세워 둔 저수지 관리 경고판이 보이는데 어둠속이라 그 저수지는 확인을 못한다.

그곳을 지나 계속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다시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로 인해 숨쉬기조차 힘이 드는데 그 도로 좌우측으로는 모내기를 끝낸 논이 보이는데 생각보다 물이 저수되어 있어 의아한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도로 좌측에 민가와 큰 건물을 지나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우측으로 그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데 도로 위에는 황교1길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이곳 황교마을은 황교리였다가 지금은 용산리의 한 마을이 되었으며 황교마을의 원래 이름은 황새 다리였는데 그것을 한자로 고쳐서 황교가 되었다.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니 도로 좌우측으로 황교마을의 민가들이 보이고 잠시 후 황교2마을회관도 통과한다.

계속 그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도로 우측에 커다란 용산리 빗돌이 어둠속에 서 있어 사진에 담아 본다.

황등면 용산리는 1914년 황교리, 대산리, 소산리, 대동, 송곡리의 전 지역으로 구성되었고 리의 이름은 이내(마을이내)의 산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황교(황새다리)의 본 이름은 황새 다리인데 그것을 한자로 황교로 쓴 것으로 마을이 황새의 다리처럼 길게 빠져 있어 생긴 이름으로 다리를 다리 교자로 쓴 것은 새김의 음만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내(성안)은 세종 22(1440)에 쌓은 주위 3603척의 용산성 안에 있는 마을이고 송곡(솔안)과 새터는 솔밭에 쌓여 있던 마을이다.

소산은 작은 산 옆의 마을이란 뜻이고 우렁샘골은 동리 가운데에 물이 넘쳐 흐르는 샘이 있는데 그 전에는 그

샘에 들어가는 길이 우렁이처럼 나선형으로 생겼었기에 생긴 이름이다.

대동(큰골)은 전에 용산성 안에서 제일 큰 마을이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갈림 사거리를 지나 계속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위에는 황성로란 표지판이 보이고 곧이어 용산삼거리슈퍼와 성내보건진료소 입간판이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니 황교란 이정석이 보이고 이제 도로 양쪽으로는 고구마 밭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가뭄으로 인해 고구마 잎새들이 들어간 풍경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제 구자란 버스정류장을 지나 도로 좌측으로 구자마을 이정석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황등면 구자리는 1914년 구자리, 무동, 봉곡리의 전 지역과 신성리 및 군내면에 속했던 진등리의 각 일부 지역으로 구성된 마을로서 무동은 풍수설에 선인무수혈이라 하여 일컫던 이름이라 한다.

구자마을은 지형이 거북의 형상이라 하여 본시 구자로 썼었는데 거북 구자가 너무 어려워 아홉 구자로 바뀐 마을이고 봉곡(충동)은 동쪽을 향한 마을인데 우리 지명에 동남향의 마을에 봄골이라는 이름이 많으니 이 곳도 봄골에서 봉골로 다시 봉곡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또 전에는 봉곡으로도 썼고 벌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구자마을 이정석을 지나서도 걸어가야 할 2차선 포장도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구자마을 이정석을 지나 계속 2차선 포장도로를 걸어가니 탑고지복지마을이란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커다란 이정석도 서 있다.

탑고지마을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금성리에 있는 자연마을호서 금성리는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대부분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본래 함열군 군내면 지역으로 1914년 간성리, 동길리, 박상동, 금곡리의 전 지역과 동일면의 상와리와 종촌리의 일부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금성리의 자연마을로는 금곡마을, 탑고지, 간성마을이 있는데 금곡마을은 쇠실이라고도 불렸으며 이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 금곡이란 지명이다.

탑고지는 예전에 뒷산에 탑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간성마을은 함열리와 사오재뜸 사이의 재 근처이므로 샛재라고 부르던 것을 한문으로 옮겨 적어 생긴 이름이다.

그곳 탑고지 마을을 지나 계속 2차선 포장도로를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서 자주 만났던 에바다교회 이정석과 십자가가 보인다.봉곡1길 도로 표지판을 보고 버스 정류장도 지나니 봉곡마을이란 커다란 이정석이 눈에 들어 온다.이곳 봉곡마을 역시 구자리에 속해있어 앞서 구자리 소개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대신해 본다.

 

 

봉곡마을 이정석을 지나니 도로 위에는 신대길이란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갈마게시판도 서 있다.

그곳을 지나니 갈마라는 커다란 이정석도 서 있고 효도의집도 보인다.

이곳 갈마마을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마을로서 함열리는 대부분 전업농가가 대부분이며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함열군의 읍내이므로 함열읍내 또는 그냥 함열이라 하였고 1914년에 갈마동, 행동, 천남리, 천북리, 수동, 안정리, 교동을 병합하여 함열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교동, 안정, 수동, 천남, 행동, 역말, 갈마 마을이 있는데 교동마을은 향교골이라고도 하는데 향교가 있어 생긴 이름이고 안정마을은 안가말이라고도 하는데 우물이 많아서 이루어진 이름이며 천남마을은 내의 남쪽이므로 일컫던 이름이다.

행동마을은 마을 내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일컫던 이름이고 갈마마은은 마을이 야산 속에 들어 있어서 갊마골이라 했다고 하며 지방민속자료 제23호 김안균 가옥이 있다.

다시 계속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우측에 (주)포듀라는 큰 공장 건물과 이정석이 서 있고 도로 좌측에는 서해물류 건물도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커다란 익산군산축협이 보이고 곧이어 함라마을 돌담길과 함라삼부잣집(김안균, 조해영, 이배원 가옥)이란 이정판도 서 있다.

함안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이곳이 고향인 산친구가 다녔다는 함라초등학교 정문이 보여 잠시 머물며 사진 몇장 남겨본다.

1908년 사립 창명학교로 개교하여 초대교장으로 권병의가 취임하였고 1909년 5월 4년제의 사립 창명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09년 12월 함열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12년 4월에는 여자학교의 병설 인가를 받아 1917년 개교하였으며 1913년 공립간이농업학교 부설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는데 이 공립간이농업학교는 1920년에 폐지되었고 1923년 함라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38년 함라공립심상학교로 개칭하였다.

1941년 함라공립국민학교로 다시 196년에 함라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99년 3월 신남초등학교를 통폐합하였고 2009년 9월 전라북도교육청 선도학교로 지정되었다.

 

 

함라초등학교 앞에서 옛추억에 젖어있는 산친구를 바라보며 이 산객이 다녔던 학교도 잠시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다시 몇채의 민가들과 일진슈퍼 같은 가게들을 지나 수동길과 용산길 갈림길 도로 표지판을 보고 조금 더 걸어가니 함라파출소도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방금 전 봤던 함라마을 돌담길과 함라삼부잣집(김안균, 조해영, 이배원 가옥)이 줄지어 서 있고 각각의 장소에는 설명판도 서 있어 읽어보며 걸어보는 시간이지만 어둠속에 볼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조해영가옥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고가이며 1986 9 8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는데 본래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안채 1동과 별채 1동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상량문에 대정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으로 보여지고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은 정남향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며 건물들의 전체적인 배치는 알 수 없으며 안채와 별채는 모두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남쪽으로, 별채는 서쪽으로 향해 자리 잡고 있는데 안채의 난간은 상당히 훼손되었으며 모든 건물의 기와가 퇴락하였고 또 일부 건물은 누수공사가 필요한 곳도 있어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나쁘다.
안채와 별채가 둘러싸인 공간을 제외하고는 뒷담이 없이 거의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원래의 대문은 없어지고 좁은 문이 남아 있는데 보존상태가 불량하다.

별채 동편 울타리 밖으로 가까이에는 김육의 선정비가 있고 울 안에는 한말 사람의 것으로 추측되는 비 2개가 가로 놓여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 근방에 비석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해영가옥의 대문채 안쪽으로는 화려한 담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최근에 새롭게 보수한 담장이 기억자로 꺾여 있고 담장은 붉은 벽돌로 쌓아 그 중앙에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네모나게 흰 회칠을 하고 돋아나게 그린 그림 속으로 학, 사슴, 구름, 연꽃과 산삼 등 십장생이 보이고 그 뒤쪽에 소담스런 항아리가 엉덩이를 붙이고 백 년 가까이 버티고 있다.

담장 뒤로 돌아가면 그림이 있는 부분을 돌로 쌓아둔 것이 보이며 담장의 구조로 보아 집을 지을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담장은 단순한 담장이 아니라 대문을 들어서 만나는 바람벽의 기능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밝은 낮에 꼭 다시 한번 들려 천천히 가옥들과 돌담을 둘러 볼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조해영가옥 좌측으로는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이란 안내판이 서 있어 읽어 본다.

이곳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있는 담장으로 2006년 6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되었으며 박진순 등 소유이다.

이곳 돌담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며 토담, 돌담, 전돌로 쌓은 담 등 종류가 다양한데 평쌓기 방식을 이용하였으며 담의 지붕은 시멘트 기와로 되어 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일반 농가의 담장임에도 높이가 높으며 차순덕 가옥의 담장은 담장 양편에 거푸집을 대고 황토흙과 짚을 섞어 쌓은 전통적인 축조 방식으로 보기 드문 사례로서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314번지 등에 있다.

쉽게 사라지고 잊혀지는 세태에서 옛 것을 고스란히 지키고 보존시키며 후세에 남기려는 노력에 눈물겨운 현장이기도 하다.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 안내판를 지나 포장도로를 타고 양쪽에 옛 가옥들을 두고 천천히 걸어가니 도로 우측에 다시 김안균가옥 설명판이 보인다.

김안균 가옥은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는데 대지 2318평에 건평 188평으로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에 동과 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변모를 보여주며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구조와 의장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었다.
서양식을 본떠 거실과 침실을 구별하였고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두르고 유리문을 달아 채광을 조절하였으며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그리고 향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하였다.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정교한 아자 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행랑채 끝에 정문이 있고 곳간은 정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연결한 포치 형식으로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서 통로로 이용하였으며 뒤쪽 집들을 사들여 점차 넓힌 탓에 넓은 대지에 비해 건물이 앞쪽으로 몰려 있다.

볼수 있는 밝은 날이었으면 잠시 들려 그 가옥들을 살펴보고 진행하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어둠속에 대문도 잠겨있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함라마을 옛 가옥들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에 함라성결교회라 서 있고 조금 더 걸어가니 수동마을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겟세마네기도원 안내화살표와 주차장 안내표시도 눈에 들어오고 계속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민가 지나 우측에 함라어린이집 이정석도 서 있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에는 함라산 둘레길 가든이란 식당이 보이고 커다란 느티나무 지나 육각정자도 지난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도로 우측에 황칠나무의 효능에 관해 적어 놓은 플랭카드가 보이고 주식회사 예광의 이정석도 서있다.

 

 

둘레길 이정표를 만나 지나고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르막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오르니 직진의 눈 앞에 커다란 건물을 버리고 좌측으로 나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 본다.

약 6 Km 정도의 포장도로를 따라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 왔기에 푹신한 흙이 깔려 있는 산길이 그리운 시간이기도 하다.

다리를 건너 우측의 논둑 같은 등로를 따르니 풀잎 위에는 벌써 제법 많은 양의 이슬이 내려 앉아 그 풀섶을 헤치고 걸어가는 산객들의 등산바지를 완전히 적시고 있다.

 

 

안전목책이 설치된 등로를 따르니 함라3부잣집과 야생차군락지 이정표를 지나 거목과 산죽이 어우러진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로 접어 든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벤취가 있고 그곳 지나 좌측에 이정표가 보이는데 지나온 방향으로 3부잣집과 돌담길(양반길)이 진행방향으로 야생차군락지 2.4 Km (명상길) 그리고 좌측 숲 방향으로 수동마을 방향의 이정표이었다.

그곳을 지나 다시 등로 한가운데에 있는 시멘트 벤취를 지나니 함라재라 생각되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작은 돌탑과 우측으로 함라산 0.6 Km란 이정판도 만난다.

이곳에서 마루금에서 600미터 떨어져 있는 우측 함라산을 다녀 오기로 하고 잠시 더 올라 나타나는 벤취 위에 배낭을 벗어 놓고 우측 함라산 방향르호 진행을 한다.

하지만 지도에는 이곳 지나 봉화산 방향으로 나 있는 작은 다리가 웅포재로 되어 있어 헷깔리기만 하다.

 

 

웅포재 가기 직전 벤취에 배낭을 벗어 놓고 우측 등로를 따르니 초입에는 부드러운 뚜렷한 등로가 열려있고 가끔 멋진 거목들이 반겨준다.

잠시 더 그 편안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에는 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이 나타나고 점점 더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더니 금새 넓은 공터에 많은 벤취들이 설치되어 있고 한쪽에 스테인레스 스틸목으로 이뤄진 함라산정상목이 서 있다.

함라산(240.5)은 전라북도 익산시의 함라면 함열리와 웅포면 웅포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 함열현의 별호인 함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함열에는 함라산은 현의 서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라는 내용이 있고 조선지지자료의 함열 군내면에는 함라산(함나산)은 읍내 서북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해동지도의 함열과 대동여지도의 함열 및 1872년지방지도의 함열 그리고 한국지명총람에도 표기자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쪽 봉우리인 소방봉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으며 북쪽에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숭림사가 있는데 숭림사 경내의 보광전은 1345(고려 충목왕 1) 때 창건된 것으로 보물 제825호로 지정되었다.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산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고 신기해 할 정도의 나즈막한 산 정상이다.

 

 

그 함라산 정상에 도착 해 여종주대가 준비한 시원한 참외 한쪽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정상목 뒷편의 전망대로 가 보니 보여야 할 웅포면과 금강 그리고 베어리버골프장은 어둠과 박무속에 잠겨 하나도 보여주질 않는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하며 산행지도를 살펴보니 실제 정상은 직진 방향으로 조금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다고 표기가 되어 있어 잘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올라보니 정상은 그저 평이한 헬기장이고 혹시나 몰라 어둠속에 삼각점을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헬기장에서 내려와 함라산 정상에서 잠시 더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방금 전 벗어 놨던 배낭을 찾아 메고 출발을 서둘러 본다.함라산의 이름을 낳게한 함라는 전라북도 익산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서쪽으로 고도 250미터 내외의 함라산, 봉화산, 일치봉 등이 있고 산지 동쪽과 남쪽으로 낮은 구릉지대와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면의 중앙을 남북 방향으로 관통하는 24번 국도를 통해 충남 논산시 강경읍과 군산시로 연결된다.

조선 시대 함열현의 읍치가 있던 곳으로 함열 향교 등이 있으며 현재 면 소재지인 함열리, 금성리, 신대리, 다망리 등 6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함라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 함열현의 별호인 함라에서 유래한 지명이고 고려사 지리지함열현은 원래 백제의 감물아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임피군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에 본 목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6년에 감무를 두었던 바 이를 함라라고도 부른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유사한 내용이 세종실록지리지 함열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함열의 이명칭인 함라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한편 동일한 지명소를 지닌 함라산 지명이 해동지도 등의 고지도에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면은 조선 시대 현내면과 남이면 지역이었는데 호구총수에 현내면은 향교리, 천북리, 역리 등 7개 리를 그리고 남이면은 양지리, 다은리, 마포리)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전라북도 함열군이 되었다가 1914년 기존의 함열군 현내면(군내면)과 남이면이 통합되어 함라면이 신설되어 오늘에 이른다.

일 때문에 자주 들렸던 함라였는데 이렇게 산줄기를 타고 다시 걸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새롭기만 하다.

 

 

그렇게 함라를 생각해 보고 배낭 둘러메고 그 옆에 서 있는 이정표를 살펴보니 함라산 방향은 표시가 없고 어둠속에 만났던 함라삼부자집 1.1 Km와 진행방향으로 봉수대 0.7 Km와 생태통로 2.1 Km란 글귀가 눈에 보인다.

넓은 등로를 따라 잠시 진행을 하니 바로 눈 앞에 작은 다리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지도상 표기가 되어 있는 웅포재로서 일명 함라재라 불려지는 장소인듯 보인다.

웅포재는 전라북도 익산시의 웅포면 웅포리에서 함라면 함열리 행개골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관련 지명인 웅포면과 웅포나루터 등이 여러 사료에서 수록되어 있다.

웅포(곰개)에서 유래한 고개 지명으로서의 곰개재웅포재란 지명은 한국지명총람의 익산편웅포면 웅포재는 재궁에서 함라면 함열리 행개골로 가는 고개이며 함라면 함열리 곰개재(웅포치)는 천북에서 웅포면 웅포리 곰개로 가는 고개이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고 있다.

나루지명이 먼저 형성된 후 웅포(곰개)라는 나루 지명의 전부 지명소를 활용하여 고개 지명이 이후에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함라재를 찾아보니 유사한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함라재는 금강변의 웅포(곰개)와 평야지대인 함라를 잇는 가장 짧은 산마루 고갯길로서 예전부터 이 길로 많은 사람과 물건이 넘나들었던 곳이다.

이 길에는 짐꾼들이 금강을 따라 웅포항(곰개나루)에 들어 온 진귀한 상품과 풍성한 농산물을 보따리와 지게에 실어 함라로 나른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재 아래에는 금광이 있었고 숲이 울창하여 호랑이에게 봉변을 당했다던 이야기와 3부잣집을 드나들던 과객들의 사연과 함라로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의 추억 등 수많은 사연과 전설이 곳곳에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웅포재 다리를 건너가니 함라삼부자집에서 1.3 Km 지나왔고 봉수대까지 4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고 그 이정표 지나 통나무 계단과 안전 목책 및 로프가 설치된 본격적인 오르막 등로를 오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벤취2개가 설치되어 있는 무명봉에 올라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는 등로를 따라 내려간다.

한동안 내려가 안부를 지나니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산불감시초소와 사각정자가 서 있는 봉화산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사가정자 한쪽에는 봉화산이 아닌 함라산소방봉봉수대란 설명판이 서 있다.

소방봉송수대는 전라북도 익산시 봉화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봉수대로서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일종의 통신방법으로 주로 외적의 침입에 대하여 높은 산꼭대기에서 봉홧불을 올려 상황을 알렸으며 조선 전기에는 전국의 약 650여 곳에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소방산봉수대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와 함라면 함열리에 걸쳐 있는 봉화산(236.3봉) 꼭대기에 있는데 조선조 함열현 소속으로 봉수산봉수 또는 봉화산봉수라 불리기도 했다.
서울까지 전달되는 다섯 가지 봉화로 중에서 전라도 순천에서 충청도 공주와 천안을 거쳐 서울 목멱산(남산)으로 연결되는 제5거 봉화로의 직봉에 속하는데 서쪽으로 임피현 불지산봉수의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용안현 광두원봉수에 전달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의 함열현 봉수조에 그 기록이 있다.
1942년경까지는 둘레 약 144미터의 직사각 토루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사각정자에 배낭 내려 놓고 물 한모금 마시며 쉰 후 주위 풍경을 살펴 보지만 흐린 날씨에 아직 여명이 밝아 오지 않고 박무가 낀 날이기에 조망은 없다.

 

 

그래도 그렇게 더 정상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맞으며 흐르는 땀방울을 닦다 보니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하고 이제 진행 방향으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마루금을 살펴 본다.

저 멀리 칠목재로 이어지는 이름없는 나즈막한 마루금이 올망졸망한 높이를 자랑하며 이어져 있는 풍경이 생각보다 멋진 아침 새벽 시간이다.

봉화산(236.3)은 함라면 신대리와 웅포면 웅포리 및 입점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조선조 때 동쪽으로는 용안현 광두원산과 서로는 임피현 오성산 봉화대에 응했던 산이다.

웅포면 입점리는 1914년에 입동리, 입북리, 서방동의 전 지역과 상웅리, 소룡리의 각 일부로써 구성된 마을이다

신기(새터, 서면)과 궁골마을은 220여 년전 평택임씨가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새터라고 했으며 서면은 전에 함열군의 서이면에 속했던 곳이다.

입점(갓점, 입점리)와 넘말의 갓점은 전에 패랑이와 백립을 만들던 곳이기에 일컫던 이름이고 넘말은 너머의 마을이란 뜻이다.

구룡목과 서방동(서방골)1972년 서방동과 합쳐 분리가 된 마을로서 구룡목은 좌우에서 내려온 두 능선 끝이 거의 마주친 낮은 곳이기에 구렁목이 변한 이름이고 서방골은 전에 행정 중심지의 서편 마을이기에 생긴 명칭이라고도 하고 또 문장가가 끊기지 않던 곳이었으니 서방에서 이루어진 말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한동안 그 봉화산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천천히 배낭을 둘러메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봉화산 정상의 함라산소방봉봉수대에서 다시 배낭 둘러메고 내려가니 초반부터 안전철봉과 로프구간이 나타나고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붉은색의 구급신고이정판이 보인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오르니 자갈들이 박혀있는 무명봉을 넘고 멋진 소나무 구간을 지나니 잠시 잡목이 사라진 평이한 등로가 나타난다.

등로 우측으로 입점리방향이 잠시 조망되는데 생각보다 박무가 심해 자세한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다시 잠시 더 진행을 하니 169.5봉 을 넘어 154.6봉의 벤취를 지난다.

 

 

그 벤취 봉우리를 넘으니 등로 옆으로 군부대 사격장이니 접근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사격장 접근금지란 콘크리트 사각목도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 이어지는 경고판을 바라보며 나즈막한 무명봉과 안부를 번갈아 타고 넘으니 입남마을 하산 등로가 갈리는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묘지지대도 통과한다.

다시 나타나는 벤취봉을 지나 내려가니 짧은 공터같은 나무가 비어있는 잡풀지대를 지나 진행하게 된다.

 

 

공터의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그공터 한쪽에도 결국은 무명묘지가 자리를 하고 있어 처음 느꼈던 감흥은 많이 사라진다.

잠시 더 잡목숲으로 들어가 걸어가니 다시 눈 앞에 하늘이 열리면서 등로 우측 바로 앞에 묘지들이 보이고 그 묘지 지나 저 멀리 파란 지붕을 한 건물들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구급신고판을 지나 쓰러진 나무를 고개숙여 통과하니 묘지지대를 지나 이번에는 등로 좌측으로 함라가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 역시 박부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다.

다시 등로 양쪽으로 펼쳐진 묘지들을 지나 무명봉을 넘고 또 다시 나타나는 무명묘지들을 통과하니 등로 우측으로 멋진 민가 한채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그 등로 우측으로 보이는 민가를 바라보며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또 다른 마을의 민가들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고 곧이어 함라산등산로안내판이 서 있는 722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칠목재에 도착을 한다.

함라에서 웅포로 가는 고갯길에 있는 칠목재는 길목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고갯길 옆의 길목이 전라도 사투리 질목이 되고 이것이 다시 거센소리로 변해 칠목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와 함께 고갯길 일대에 옻나무 즉 칠나무가 많아 칠목이라 했는데 한자가 너무 어려워 칠목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곳 칠목재가 있는 입점리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위치한 마을로서 함라산을 뒤에 두고 있으며 금강변을 따라 입지한 마을로 백제 고분이 많은 마을로 유명하고 1914년 입동리, 입북리, 서방동의 전 지역과 상웅리, 소룡리의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신기, 입점, 구룡목이 있는데 신기는 새터라고도 불리는데 220여년전 평택임씨가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새터라고 했다.

입점마을은 갓점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갓점은 전에 패랑이와 백립을 만들던 곳이기에 일컫던 이름이고 구룡목은 좌우에서 내려온 두 능선 끝이 거의 마주친 낮은 곳이기에 구렁목이 변한 말이며 사적 제347호 입점리 고분이 있다.

 

 

 

칠목재인 722번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 와 도로 옆에 있는 함라산등산로 안내도를 사진에 담고 좌측으로 도로 따라 내려가니 도로 좌측에 문을 닫은듯한 칠목재 한우촌 식당의 입간판이 보이고 그 한쪽에 칠목재 휴게소 식당이란 커다란 이정석이 서 있는데 이곳 역시 문을 닫았는지 인기척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그 식당 앞 탁자 벤취에 배낭 내려 놓고 수돗가로 가 세수를 한 후 물을 마시니 이제사 정신이 돌아 오며 살 것 같다는 기분이다.

잠시 탁자벤취에서 휴식을 취하고 준비한 떡으로 허기를 달랜 후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칠목재 건너 마루금을 살펴 본다.

 

 

배낭을 둘러메고 다시 722번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 와 살펴보니 도로 옆에 특이하게 생긴 버스노선도가 보이고 그 옆으로는 35번 노선도도 별도로 세워져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도로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 뒤에 서서 방금 전 칠목재로 내려온 722번 지방도로를 사진에 담은 후 종주대 뒤를 빠르게 따라 올라가 본다.

잠시 오르니 민가 한채와 폐허로 변한 두어채의 민가들이 보이고 견공들이 새벽의 고요함을 깨우는 울부짖음이 강해 조금은 빠르게 그 민가쪽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 본다.

 

 

그렇게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견공들의 지대한 환영을 받다 보니 도로 좌측의 마지막 민가에선 아주머니가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나 나와 본다.

미안한 마음에 인사를 드리고 오르니 칡넝쿨과 쑥이 웃자라 이슬에 젖어 있는 잡풀지대를 지나 더욱 무성하게 자란 잡목들로 인해 등로도 보이지 않는 마루금을 찾아 올라가 본다.

오를수록 잡목은 덜해지지만 경사도가 심하고 그렇게 오르니 가선대부를 지냈다는 비석이 있는 묘지를 지나 우거진 잡목과 잡풀속에 숨어 있는 178.9봉의 삼각점을 어렵게 찾아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어렵게 올라 찾은 178.9봉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다시 내려 와 이제 남쪽으로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우거진 잡목 위로 지난 몇해전 강력한 태풍으로 쓰러진 거목들이 뒤엉켜 진행에 여간 어려움이 있지 않다.

때로는 쓰러진 나무 위를 타고 넘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깊숙히 숙여 엎드려 총 자세로 넘기도 하면서 몇번인가를 이리저리 요가를 하듯 통과해 본다.

그렇게 다시 무명봉을 넘어 진행하니 다시 조금은 편안한 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를 타고 한동안 걸어 본다.

 

 

한동안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잘 조성된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 위을 통과하니 다시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들어간다.

많이도 자란 잡목들과 잡풀들로 인해 보이지 않는 등로를 어렵게 찾아 진행을 하니 다시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등로 한쪽에 많이 걸려있는 선답자들의 띠지를 감상해 보는 호사도 누려본다.

그곳을 지나 넓은 비포장 임도로 내려서고 그 비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능선을 타고 내려가며 진행을 해 본다.

묘지 이장을 알리는 안내판을 지나 계속되는 묘지들을 차례로 통과하니 저 멀리 송전탑이 보이고 다시 만나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잠시 내려가 한쪽에 높은 콘크리트 옹벽이 쌓여있는 폐허가 되어가는 비포장 임도와 만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를 살펴보지만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의 비포장 임도인데 주위를 살펴보니 오래전 송전탑을 건설하며 만들었던 비포장 임도에 콘크리트 옹벽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안부이다.

  

 

그 무명의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의 고갯마루로 오르니 우측의 잡목과 칡넝쿨이 우거진 등로가 열려있는데 그곳으로 오르니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며 우거진 잡목들로 인해 한발자국 걸어 오르기도 힘이 든다.

어렵게 그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타고 오르니 다시 평이한 등로가 나타나고 완만하게 올라 본다.

다시 나타나는 쓰러진 나무들을 지나 무명봉을 넘으니 무명묘지 3개가 나타나고 다시 무명봉을 넘어 걸어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를 만나 걸어 내려간다.

 

 

비포장 임도를 만나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살펴보니 작은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그 묘지 아래에는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이제부터 등로는 그 묘지 위 등로를 따라 진행된다.

묘지 위 능선으로 오르며 묘비를 보니 전주이공과 부인의 묘지로서 잘 관리가 되고 있는 듯한 풍경이다.

다시 묘지를 지나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들어 조금 진행을 하니 등로에는 19번 송전탑이 서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을 해 본다.

 

 

그 19번 송전탑을 지나 걸어가니 뚜렷한 등로에는 편백나무가 짧은 거리에 심어져 있고 곧이어 은사시나무라 생각되는 나무들이 식재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자라고 있는 풍경도 보인다.

다시 나타나는 묘지지대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이제부터 올라야 할 능선의 송전탑이 박무속에서도 저 멀리 올려다 보인다.

다시 큰 잡목 숲을 지나 걸어가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다가가 살펴보니 작은 공동묘지지대인데 관리가 되지 않아 잡풀과 관목이 자라면서 그 공동묘지란 풍경이 사라지는 듯한 그런 장소이다.

 

 

그 무명묘지에는 많은 엉겅퀴가 자라고 다시 그 공동묘지지대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이제부터는 잡목이 사라지고 멋진 소나무들이 자라는 군락지가 보인다.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또 다른 18번 송전탑이 보이고 잡풀을 헤치고 걸어가니 또 다른 4기의 무명묘지가 보이는 장소를 통과한다.

다시 나타나는 소나무 군락지로 들어가 걸어가니 번호를 알수 없는 송전탑 하나를 더 지나 잡목과 소나무가 혼재된 마루금을 따른다.

그렇게 한동안 어렵지 않게 산행을 이어가니 차량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소나무 지난 저 앞으로 몇기의 묘지들이 보이는 곳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묘지 바로 아래에는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수레제인 듯 보인다.

 

 

그곳 묘지지대에서 배낭 내려 비가 내리기 전에 아침식사를 하고 진행하기로 한다.

좋은 많은 반찬은 아니지만 이세상 식사 중 가장 맛있고 온정이 흐르는 즐거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으니 허기가 물러나며 다시 체력보강이 이뤄진 듯 하다.

묘지를 지나 내려가니 금새 15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수렛제에 도착을 해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올라가 본다.

 

 

15번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으로 민가가 보이고 그 앞에는 사각정자도 보여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던 아침식사 시간이었다.

민가로 들어가는 임도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지나온 방향으로 흥법마을입구 0.3 Km 방향표시가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와촌마을입구 0.5 Km란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다.

수레재(수내미재)는 서수면에서 나포면 장산리 와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재의 모양이 수레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관원리는 군산시 서수면에 위치한 마을로서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이고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관원, 원관원, 산간, 작은관원, 방령마을 등이 있는데 관원마을은 관원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고 원관원마을은 관원리의 원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산간마을은 관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작은관원마을은 관원 동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방령마을은 방고개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상리는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에 위치한 마을로서 낮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은 평야로 되어 있다.

고상곡, 군둔, 나귀당 등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고상곡은 고상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장상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며 군둔은 전에 군대가 주둔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나귀당은 마을 지형이 나귀 형상이라 붙여진 것이다.

 

 

수례재를 지나 좌측에 민가를 두고 우측에 밭을 두고 그 사이로 나 있는 능선 등로를 따라 오르니 칡이 우거져 있고 잠시 후 평이한 넓은 등로가 나타난다.

묘지 위로 멋진 편백나무 몇그루가 굵게 자라고 있는 곳을 지나 잡목속으로 들어가니 금새 등로는 대나무 밭으로 변하고 있다.

대나무 밭을 지나 잠시 더 걸어가니 안부가 나타나고 그 안부로 내려가니 망해산정상까지 2.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 사진 한장 남기고 그 안부를 통과한다.

지도를 살펴보니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 안부이기에 더욱 상세히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가 의아하게 생각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를 지나 통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니 그곳은 많던 대나무 숲이 사라지고 금새 잡목이 우거진 등로로 변한다.

주능선으로 오르니 묘지들이 나타나고 진행방향의 망해산이 박무속에 올려다 보인다.

다시 능선속 잡목으로 들어가니 또 다시 통나무 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잘 관리된 멋진 묘지 하나를 만나고 그 아래에는 많은 묘지들이 산재해 있는 비포장 임도와 잘 가꿔진 잔디가 내려다 보인다.

 

 

그 묘지지대를 지나니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하니 이제사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해 배낭 커버를 씌우고 진행을 해 본다.

생각보다 많은 비가 아니기에 비옷을 걸치지 않고 그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걸어가니 더위를 피할 수 있어 좋지만 조망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에 망해산까지 1.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계속 그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이제 그 임도에도 칡넝쿨이 자라며 걸어가기에 쉽지 않는 등로로 변하고 있다.

그렇게 걸어가니 다시 공동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를 타고 오르니 정상부에 수원백씨 납골묘가 보이고 그 묘지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며 이어가는 산행이 되고 있다.

 

 

묘지지대를 넘어 능선으로 들어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잡목지대가 나타나고 이제부터는 한발자국 진행하기도 어려운 지독한 잡목 구간에 갇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 되어 있다.

잠시 더 내려가니 완전히 잊혀져 가는 안부라 생각되는 곳을 지나 다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칡넝쿨 구간을 헤치고 어렵게 오른 후 뒤따르는 종주대를 내려다 보이 단지 얼굴 하나 보일정도로 심각한 등로로 변해 버렸다.

 

 

그 지독한 칡넝쿨 지대를 어렵게 빠져 나가니 다시 잡풀이 자라고 있는 무명묘지를 만나 지나고 잠시 평이하게 걸어가니 당산나무처럼 보이는 거목도 지난다.

다시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통나무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약간 오른 후 뒤돌아 보이 안개속에 방금 전 지나온 마루금이 희미하게 다가온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잡목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힘들게 오르니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이제 망해산정상까지 0.6 Km 남아 있고 비포장 임도 우측으로 걸어가면 금강까지 4.01 Km 의 거리라는 방향과 거리표시가 보인다.

다만 오늘은 박무와 안개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으니 금강도 다음을 기약해야 됨이 안타까운 시간이다.

 

 

이제 팔각정자까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0.1 Km 남아 잇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기에 무심으로 그 오르막 등로를 타고 발걸음을 옮겨 본다.

통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니 이곳에서 부터는 지자체에서 정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등로를 잘 정리하여 오르는데 아주 편안하게 올라 본다.

그렇게 등줄기에 땀방울이 흐르도록 오르니 드디어 저 멀리 팔각정이 보이고 그곳으로 올라 배낭 내려 놓고 잠시 쉬어 간다.

그 팔각정 옆에는 서래야 박건석님이 망해산동봉 불지산(320봉)이란 종이 코팅지를 붙여 놨다.

불지산(일명 망해산동봉)에는 불지산 봉수대 터가 있었는데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옥곤리 불지산 정상부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대 터로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응지(일명 매마루) 봉화로 증보문헌비고, 대동여지도 등에는 불지산 봉화로 기록되어 있는데 불지산 봉수는 전라도 순천에서 충청남도 공주와 천안을 거쳐 서울 목멱산(남산)으로 연결되는 제5거 봉화로의 직봉에 해당하며 서쪽의 오성산 봉수(일명 도진 봉수)와 동쪽의 함열 소방산 봉수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전라도 임피현 소속의 봉수대로 조선 건국 이전에 설치되었다가 1895년 봉수군 폐지 때까지 존속했는데 불지산 정상부를 평탄하게 터를 다진 후 흙으로 쌓은 원형의 3층 축대 위에 조성되었고 축대의 둘레는 하층 109미터에 상층 50미터 정도이며 상층 축대의 높이는 3미터 정도였다.

조선 보물 고적 자료에는 3층의 토단이 있고 하단부의 둘레가 약 60간(약 109미터)이며 북쪽의 요부에는 1개소의 우물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봉수대 터 자리에 2기의 민묘가 들어서고 등산로가 개설되면서 봉수대의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다만 일부 토단의 형태가 남아 있으며 봉수대 남쪽으로 봉수군 막사 자리로 보이는 40여 평 가량의 터가 확인되고 있다.

불지산 봉수는 대응 봉수인 오성산, 소방산 봉수와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전라도 순천에서 한성 남산으로 향하는 5봉수로의 직봉 노선 상에서 운영되었고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금강과 서해안을 통해 침입했던 왜구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통신, 방어시설로 중요성과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한동안 그 불지산 팔각정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흐르던 땀방울을 닦아내니 조금은 편안한 시간이 되었다.

내려가니 가파른 내리막 등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 큰 불편함이 없이 내려가고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옆에는 작은 안내판에 구불길이란 팻말도 보인다.

다시 안부를 지나 오르니 잘 식재된 편백나무 등로가 이어지고 잘 자리를 잡고 자라고 있는 멋진 등로를 따르니 금새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그 옆에는 구불길 안내판이 서 있다.

 

 

그 비포장 임도의 구불길 안내판을 사진에 담고 다시 잘 닦여진 등로를 따라 오르니 잡풀속에 산불감시초소가 보인다.

그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오르니 잘 정리된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헬기장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다시 또 다른 헬기장이 나타난다.

잠시 심호흡 한번 더 하고 잡목속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갈림 등로가 보이는 갈림 삼거리를 지나 곧이어 헬기장으로 이뤄진 망해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망해산 정상에서 보면 금강이 내려다 보인다고 해 기대를 많이하고 올라 왔는데 안개와 박무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아 아쉽기만 하다.

나무 벤취 옆 이정표 옆에 서서 사진 한장 남기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하는 시간이 무척이나 안타깝기도 하다.

망해산(230)은 전북 나포면과 서수면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해동지도에 망해사가 등재되어 있어 망해산이란 지명이 사찰의 명칭에 유래함을 알 수 있다.

불지산봉수는 서쪽으로 오성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동쪽으로 함열현 소방산 봉수에 신호를 보낸다.

망해산은 바다를 바라보는 산이란 뜻이며 망해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비단처럼 반짝이는 금강과 철새들의 낙원인 나포십자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망해산 정상에서 추억 한장씩 남기고 삼각점을 찾아 보는데 보이지 않아 그 헬기장 넘어 조금 더 걸어가 보니 그곳 언덕에 예쁜 삼각점 하나와 한산459란 삼각점 번호가 보인다.

보이는 것이 없어 아쉬운 마음을 지도를 살펴보며 달랜 후 다시 헬기장을 통해 올라갔던 등로를 타고 조금 더 내려가 이제는 내려가는 진행 방향의 우측으로 나 있는 마루금을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망해산 정상을 다녀 와 다시 우측 내리막 등로를 타고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구불길 띠지들이 보인다.

통나무 계단을 타고 조금 더 내려가니 안부 지나 벌목된 후 관목이 자라는 등로를 만나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니 짙은 안개와 박무로 인해 조망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진행을 하면서 계속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 잠시 짙은 안개가 춤을 추며 부곡저수지와 부곡리 마을의 민가들이 살짝 드러난다.

그곳 지나 서해안고속도로의 군산 IC와 군산휴게소 지나 금강이 보여야 하는데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음이 그저 안타까운 시간이다.

 

 

다시 나타나는 키 작은 관목을 헤치며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이제부터 올라야 할 취성산 방향의 풍경도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앞서 걸어가는 종주대의 뒷모습 넘어 제법 웅장하게 나타나는 취성산 자락이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오늘은 조망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니 다음을 다시 한번 기약해야 할 시간은 아닐련지 아쉽다.

그렇게 걸어 진행하니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데 등로 옆에는 소나무들이 식재된 듯한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다 등로 우측으로 부곡리와 대명리를 살펴보니 여전히 안개의 춤사위가 변화 무쌍하다.

부곡리는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에 있는 마을로서 그 이름유래를 찾아보면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는 조선 시대 임피군 하북면 지역으로 부유한 장자가 살았다고 하여 장자벌, 장재밀, 부자계곡이라는 의미로 부곡이라 불렸고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옛 지명을 빌어 부곡리라 칭하게 되었다.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는 망해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쪽과 동쪽에 걸쳐 산지를 이루고 서남쪽에 소규모의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부곡리는 동쪽으로 임피면 축산리와 접하고 서쪽으로 성산면 여방리와 대명리에 접하며 남쪽으로 성산면 창오리와 인접하고 북쪽으로 나포면 옥곤리와 접한다.

후죽 마을, 원부곡 마을, 입점 마을, 진장 마을, 뒷멀 마을, 봉림 마을, 부곡 마을, 새떰 마을, 새태 마을, 서죽동 마을, 쇠적굴 마을, 신기 마을, 장자멀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지방도 744호선이 중앙을 지나 북쪽에 인접한 나포면 옥곤리로 이어진다.

조금 더 진행을 하니 하늘을 뒤덮는 잡목과 활엽수 등로가 나타나고 다시 나즈막한 오르막 등로를 올라 급하게 내려가니 금새 통나무 계단을 지나 구불길인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한다.

 

 

이제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취성산 방향으로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보여야 할 부곡리와 금강 그리고 서해바다가 안개속에 숨어 산객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한동안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취성산까지 3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벤취들과 이정표 그리고 군산걷기여행의 구불길 안내도가 보인다.

우측으로 원부곡마을 하산 등로가 있는 이곳에서 축성산까지의 거리는 0.88 Km 가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간이다.

방금 전 만났던 이정표와 완전히 다른 거리표시 때문이다.

 

 

구불길 안내판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약간의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지며 옷깃을 적시기 시작을 한다.구불길은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조성한 도보 여행길로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길을 뽑아 오랜 시간 거닐 수 있도록 만든 군산시의 도보 여행 코스이다.

비단강 길, 햇빛 길, 큰들 길, 미소 길, 구슬뫼 길, 달밝음 길, 물빛 길, 탁류 길, 새만금 길, 고군산 길, 금강 하굿둑 길의 열한 개 코스에 210여 Km 노선으로 개발된 구불길은 2009년 7월 1일 구불길 코스를 개발하는 공사를 시작한 즈음 종합 포털 사이트 다음에 군산 구불길 카페가 개설되었다.

매주 수요일 달밤 걷기와 매주 토요일 시민 함께 걷기 등을 통하여 의견을 같이하는 회원들이 모여 2010년 12월 5일 사단 법인 구불길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였고 최초 발기인은 22명이었다.

2011년 7월 2일 사단법인 구불길이 출범되었고 2014년 현재 사단 법인 구불길 회원들은 군산시 자원 봉사 및 군산 구불길 축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2013년 9월 구불길의 전체 코스가 개통되었다.

전라북도 군산시 구불길은 여덟 개 코스(162.2 Km)와 테마 길 세 개 코스(45.2 Km)가 있으며 걷기 동호 회원과 블로거 들이 100년 후에도 걷고 싶은 명품 구불길 또는 자연이 선물한 구불길이라고 평하여 널리 알려지고 있다.

2009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2010년 3월 특허청에 상표 등록하였고 2013년 9월 모든 구불길 코스가 개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동안 그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다 보니 취성산 오르는 등로는 비포장 임도를 벗어나 우측의 능선으로 이어지고 어렵게 그 능선 입구를 찾아 오르니 이곳부터 취성산 정상까지는 제법 잡목들의 저항이 심해 어렵게 오르는 시간이 되었다.가랑비가 내리면서 바람 한점 없는 잡목이 우거진 오르막 등로를 오르다 보니 온몸에선 다시 굵은 땀방울이 흘러 빗물과 함께 등로를 적시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니 무인산불감시카메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취성산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취성산(219)은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에서 임피면 축산리까지 펼쳐져 있다.

취성산이란 이름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취성산은 현의 서쪽 4( 1.6 Km)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동지도, 대동여지도, 1872년 지방지도에도 표기의 변화 없이 취성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의 모양이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의 영취산과 비슷하다 하여 취성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취성산은 군산 지역의 대표적 지형인 취성 산지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취성 산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함라산에서 시작하여 군산시 대야면까지 이어지는 산지 지형이다. 주로 서산층군에 속하는 선캄브리아기 화강질 편마암과 결정편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취성산은 해발 고도 219미터의 산으로 나포면 부곡리에서 임피면 축산리까지 펼쳐져 있는데

백두대간 금남 기맥에 포함되며 군산 지역에 있는 망해산(230), 오성산(228)과 함께 200미터급 산 가운데 한 곳이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인 불주사가 있으며 대웅전은 1985 8 16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바 있다.

또 백제 의자왕 때 창건된 절로 전해지는 상주사가 있는데 상주사 대웅전은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취성산은 군산시가 조성한 구불 2길 햇빛길 코스에 속해 있으며 정상까지 임도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으며 정상에는 산불 감시 카메라와 감시탑이 있다.

서수면과 임피면 일대와 금강 하구 및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한산면 일대를 전망할 수 있고 멀리는 전라북도 익산시 시가지까지 보인다.

 

 

취성산 정상에 서도 역시 안개로 인해 보이는 조망이 없어 아쉽기는 매일반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추억 사진 남기고 이제부터 직진의 뚜렷한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저상 종이코팅지가 달려있는 우측 잡목 사이 능선으로 들어가며 맥 잇기를 이어가 본다.

잠시 내려갔다 평이하게 걸어가니 152.3봉을 지나는데 아무 표식도 없는 정상에 누군가 노란 우비인지 아니면 배낭 커버를 흘려 나뭇가지에 매달아 놔 특이한 정상으로 기억을 해 본다.

 

 

다시 잡목이 발걸음을 붙잡는 등로를 걸어가니 무명봉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고 잠시 더 내려가니 넓은 공터에 무명묘지가 보인다.

그 공터 묘지지대를 지나 진행을 하니 쓰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능선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무명봉을 지나 작은 공동묘지가 보이는 등로로 걸어간다.

그 묘지지대에서 직진의 시멘트 포장도로 방향으로 내려갔으면 되었을 것을 묘지를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길게 돌아가니 안부에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곳을 지난다.

 

 

소나무 한그루가 멋지게 서 있는 안부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묘지지대가 보이고 곧이어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 그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내려가 본다.

내려가다 다시 도로 우측의 능선으로 들어가니 권사라 적혀있는 종교적 작은 공동묘지들이 보이고 그 묘지들 사이를 타고 내려가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난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잠시 가파르게 내려가니 거점재로 이어지는 11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우측으로 오르며 진행을 해 본다.

 

 

시멘트 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11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그 도로 옆에는 시온동산이란 빗돌이 서 있고 이제부터 11번 도로를 타고 우측 고갯마루로 올라가 거점재에 도착을 한다.

거점재에서 살펴보니 좌측 시멘트 도로가 아닌 능선으로 내려와야 되지만 절개지로 되어 있고 잡목이 우거져 어쩔 수 없이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내려 와 11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거점재로 오르는듯 보였다.

부곡재(거점재)는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와 임피면 축산리를 이어주는 11 2차선 지방도로인 축성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거점재 일명 부곡재에서 고갯마루 직전 좌측의 전봇대 옆 잡풀이 무성한 등로를 타고 들어갔다 우측 능선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은 이어지고 있다.

 

 

잡풀을 헤치고 능선으로 들어가 다시 우측 주능선으로 오르니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그렇게 한동안 굵은 땀방울을 흘리니 주능선에 도착을 해 평이하게 걸어 본다.

주능선을 등로 우측에 두고 잘 발달된 사면 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보니 등로 우측으로 용천산을 알리는 종이코팅지가 보여 잠시 올라 사진 몇장 남기고 내려 온다.

용천산(135.8)은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에 있는 산으로 용천산의 산줄기는 군산시 임피면 교동에서 나포면에 이르는 고개에까지 이어져 있다.

용천산은 취성산과 대명산 등과 함께 군산 지역의 대표적 지형인 취성 산지에 포함되고 취성 산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함라산에서 시작하여 군산시 대야면까지 이어지는 산지 지형인데 주로 서산층군에 속하는 선캄브리아기 화강질 편마암과 결정 편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천산은 해발 136미터의 구릉성 산지로 군산시 나포면과 임피면의 경계에까지 산줄기가 닿아있고 백두대간 금남 기맥에 포함되며 북쪽으로 망해산, 대명산, 오성산 등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용천산의 정상에서 보면 서쪽으로 서해안 고속 도로가 지나며 역시 서쪽으로 국도 27호선이 군산 시내 방향으로 지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임피면 읍내리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정상부에는 마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천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용천 산성은 포곡형(산 정상과 계곡을 함께 두른 산성)에 가까운 산성이라 할 수 있는데 동국 여지 승람에는 예산은 진산으로서 형상이 봉황과 같고 옛 성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적 조사 자료에는 둘레가 1417미터의 토성이며 예산성이라고 적고 있다.
용천 산성은 군산 지역에서는 드문 포곡형 토성 형태로 추정되는데 성벽의 높이는 2.5에서 3미터 정도였고 회랑의 넓이는 1.5미터 정도였다.

삭토법(지형의 안팎을 적절히 깎아 급경사의 성벽을 조성하는 방법)과 판축법(흙을 얇게 다져서 쌓아올리는 방법)을 병행한 토성으로 용천산 봉우리에서 시작하여 새의 두 날개와 같은 양쪽 능선을 따라 흘러내려 서쪽에서 양쪽 능선이 만나는 부위에 성문이 만들어져 있는 형태이다.
용천 산성, 임피 읍성, 남산 산성이 모두 한 지역에 모여 있어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고 보전이 절실한 곳으로 성터 및 성 내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요구된다.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뚜렷한 사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앞서 진행하던 종주대들은 용천산을 들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아쉬움을 표현한다.

그렇게 잠시 더 잡목 사이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이제부터 넓은 비포장 임도와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진행된다.

약간의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지만 거목들의 잎새들이 빗줄기를 막아 줘 산행하기에는 큰 지장을 초래하지 않지만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 한명은 이미 운동바지가 완전히 젖어 있다.

큰 어려움 없이 평이하게 즐기며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그 임도 우측으로 묘지지대들이 보이고 잠시 후 납골당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을 하면서 비산비야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묘지들을 만났는데 그 묘지들로 인해 훼손된 산림 면적을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잠시 편백나무 군락지도 지나고 임도 우측으로 거대한 축사 단지도 지나며 잣나무 군락지를 통과하니 우측에 행복한농장 입간판이 보이고 이제 등로는 좌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게 되어 있다.

 

 

행복한 농장을 우측에 두고 좌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잘 익은 오디들이 뽕나무에 매달려 있어 가랑비속에서도 맛있는 모디를 따 먹어 본다.

잠시 더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가니 임도 우측으로 행복한 농장의 주인이 살고 있는 멋진 민가가 보인다.

그 민가를 지나 계속 걸어가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도로 우측 저 멀리에는 넓은 우곡재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

이곳에서 그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니 능선을 지나기 바로 직전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일부는 그곳으로 들어가 걸어 보지만 잘못 들어 와 짧은 알바 후 그 능선을 넘어 정상적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등로도 없는 쇠실목장 들어가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 들어가니 트랙이 다르게 표시되고 잠시 헷깔려 하다 좌측 능선을 넘어 어렵게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 우측으로 걸어 본다.

시멘트 포장도로 좌측으로는 멋진 민가들이 보이고 밭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우측 능선 옆으로 나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평이하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민가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가랑비 속에 밭 작물들을 보살피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잠시 인사 나누는 시간은 정감있는 한국 시골의 풍경 그대로이기에 산행에는 약가늬 지장이 있지만 조금 더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를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는 성산면에서 관할하는 여덟 개 법정리 중 하나로 성산면 주민 센터 동쪽 방향에 위치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이 지역에 있는 대명산의 이름을 빌려 대명리라 칭하였고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는 조선 시대 임피군 상북면 지역이다.

1914 3 1일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옥곡리, 우곡리, 신기리 일부를 통합하여 대명리를 개설하였고 성산면에 편입시켰으며 1995 1 1일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면서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로 편제되었다.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의 지형은 크게 남쪽과 북쪽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북쪽은 대명산을 중심으로 해발 고도 200미터 이하의 산지 지형이며 남쪽 대부분은 우곡 저수지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대명리는 동쪽으로 나포면 부곡리, 서쪽으로 도암리, 남쪽으로 창오리, 북쪽으로 여방리와 접하고 있고 서쪽에 서해안 고속 도로가 지나며 대명 터널이 위치해 있다.

지방도 744호선이 남서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경유하며 나포면 부곡리로 빠져나가는데 대명 마을, 우곡 마을, 들건너뜸 마을, 모기장뜸 마을, 배양굴 마을, 상림골 마을, 신기리 마을, 옥곡 마을, 중뜸 마을, 한천 마을, 행정 마을 등의 이름을 가진 자연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대명리 우곡마을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대나무 숲을 통과해 상작2길 도로 표지판이 보이는 커다란 축사 건물 옆으로 걸어 본다.

 

 

큰 축사 건물과 밭 사이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이제는 거대한 비닐하우스가 반겨주고 곧이어 측백나무 도로를 따른다.

또 다시 나타나는 민가와 창고 건물을 지나 도로 좌측에 녹색 철망이 쳐져 있는 도로를 타고 걸어도 본다.

그렇게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금강2지구 옥구2-1공구현황이란 홍보물이 보이고 그 옆으로 성산양수장이란 건물 안내판도 보인다.

금강을 막은 옥구쪽 양수장 임을 알 수 있는 장소도 지나며 즐겨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드디어 양수장을 지나 저 멀리 서해안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지하통로가 보인다.

그곳 서해안고속도로 지하통로에서 배낭 벗어 놓고 준비한 간식을 꺼내 먹으며 잠시 쉬어 가며 허기를 달래 본다.

서해안고속도로는 서울특별시와 전라남도 목포시를 잇는 길이 341 Km의 고속도로로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고속도로이다.

1990년 12월 27일 착공하여 2001년 12월 21일 완공했는데 인천국제공항 및 국제해양관광단지, 태안반도, 변산반도, 다도해 등 천혜의 아름다운 관광지와 연결되며 서해안시대를 맞이하여 서해안고속도로의 개통은 교통량 분산 및 지역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로폭은 인천에서 당진 구간이 왕복 6차선으로 폭 30미터이고 서천에서 목포 구간은 왕복 4차선으로 폭 23.4미터이다.
또 아산만에는 길이 7.3 Km, 너비 31.4 m(왕복 6차선), 높이 62 m의 서해대교가 1993년 11월 착공되어 2000년 11월 완공되었으며 인접한 아산항에 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사장교로 건설되는 이 다리는 교각 사이가 470 미터에 달해 대형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

이제 산행 날머리인 다리실재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에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그 서해안고속도로 지하통로에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배낭을 둘러메고 출발을 하니 가랑비가 조금 더 많이 내리고 있지만 아직 산행에 큰 지장은 없다.

모내기가 끝난 논과 밭 그리고 민가들이 보이는 창오리 마을을 통해 걸어 진행을 하니 저 멀리 이제부터 올라야 할 마지막 대경산에서 망경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안개속에서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다시 등로 좌측에 거대한 비닐하우스촌을 지나 걸어가니 744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 744번 2차선 포장도로를 향해 걸어가니 도로 우측에 깐치멀권역 창안마을이란 안내판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깐치멀권역이란 단어가 생소해 찾아보니 이곳 깐치멀마을은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산곡리에 있는 마을로서 고봉산 밑 골짜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중보들이 작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깐치멀, 바깥깐치멀, 산남, 웃골 등이 있는데 깐치멀은 산곡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뒷산이 깐치(까치)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어로 작촌이라고도 한다.

바깥깐치멀은 깐치멀의 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바깥깐치멀 또는 외작이라 불리며 산남은 산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을 향했다고 하여 산남이라 칭하였으며 웃골은 산곡의 동북쪽 위에 있는 마을이라 웃골이라 불린다.

바로 이곳 깐치멀마을에 있는 역이라서 깐치멀권역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깐치멀권역 창안마을 이정판을 지나 744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니 그곳에는 창안마을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보성사란 절 안내판도 보인다.

그곳에서 744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버스정류장 옆으로 나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 본다.

우측에 건물을 두고 좌측에 모내기를 끝낸 논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저 멀리 갈림 삼거리가 보이고 그곳 갈림 삼거리에서 직진의 좌측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우측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 본다.

 

 

우측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이제 도로 양쪽으로는 밭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마지막 민가 한채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 민가를 지나기 직전 좌측 마당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곧이어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따라 우측의 비닐하우스와 저 멀리 대나무 숲을 향해 걸어가니 이제 등로는 그 대나무 숲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곳 창오리는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에 위치한 마을로서 성뜰산을 중심으로 낮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고개가 발달해 있고 창안 남쪽으로 못이 분포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돈담, 창동, 창안 등이 있는데 돈담은 창동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의 지형이 돼지형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창동은 창오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창고가 있어서 창동이라 불린다.

창안은 창동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도암리에 있는 창암의 안쪽이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문화재로 문창서원, 보성사가 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다시 잡목이 우거진 등로가 나타나는데 이제 제법 많은 가랑비가 내려 키 큰 잡목을 헤치고 지날 때마다 빗방울이 튀어 올라 온몸으로 비산하고 있다.

다시 짧은 대나무 밭을 지나 걸어 오르니 잡목이 우거진 등로 위로 거대한 소나무들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등로가 나타난다.

기온이 오르면서 우거지는 잡목과 잡풀로 인해 한여름 산행의 어려움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마루금으로서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자꾸만 느려지고 있다.

 

 

이제 온몸에 비를 튕기며 완만하게 오르니 다시 가시덩쿨이 자라며 옷가지를 잡아 채고 있다.

등산화에서는 서서히 개구리 울음소리가 날 정도로 등산바지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많아지는 시간이다.

잡풀과 잡목이 자라고 있는 무명 묘지를 지나 빗물을 머금은 카메라로 어렵게 사진을 남기며 오르니 드디어 대명산 정상에 도착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대명산(128.5)은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와 대명리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이 지역에 있는 대명산의 이름을 바탕으로 대명리라 칭하게 되었다고 하며 대명산의 명칭 유래와 관련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금남 호남 정맥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지역을 각각 금남 정맥과 금북 정맥이라고 하며 이러한 지역 중 금남 정맥을 이루는 구릉과 산 중 하나가 대명산이다.
대명산은 군산시 대야면과 개정면에 걸쳐 있으며 대야면과 개정면 일대는 나포면, 서수면, 성산면 일대까지 이어진 취성 산지에 해당되는데 취성 산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함라산에서 시작하여 군산시 대야면까지 이어지는 산지 지형으로 선캄브리아기 화강질 편마암이 대명산의 주요 구성 암석이다.

대명산은 해발 129미터의 저산성 산지로서 북쪽에 망경산이 있고 북쪽 금강 변에 위치한 오성산이 있으며 정상에서는 성산면 소재지와 개정면과 임피면 읍내를 조망할 수 있다.
산세가 높지는 않으며 입구 쪽은 포장이 되어 있어 산을 올라가기는 어렵지 않는데 고려 시대에 세금으로 걷었던 곡식을 쌓아 두었던 조창이 대명산과 망경산을 끼고 있는 성산면 창오리 창안 토성 자리에 있었으나 현재는 토성의 흔적만 남아있으며 현재 서해안 고속 도로 일부 구간인 대명 터널이 대명산을 지난다.

 

 

대명산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지독한 잡목이 온몸을 붙잡고 늘어지고 어렵게 그 잡목 구간을 지나니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 오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분간하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어렵게 그 잡목 구간을 빠져 나오니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타고 편안하게 걸어 본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내려오니 등로는 다시 1차선 포장도로와 연결되고 그 포장도로를 걸어가니 도로는 다시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있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등로는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로 이어지고 그 고갯마루로 올라 도로 반대쪽으로 들어가다 뒤돌아 보니 지도상 보이는 임도로 내려오는 등로는 우측이 아닌 좌측으로 내려오는 등로가 있으며 그 마지막 구간에는 운동기구도 보인다.

그 시멘트 도로를 건너 다시 반대편 능선으로 들어가니 잡풀과 잡목이 점점 더 우거지기 시작하고 잠시 더 능선으로 오르니 칡덩쿨이 완전히 등로를 뒤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스틱으로 어렵게 등로를 만들며 천천히 진행하며 걸어가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이제부터 빗줄기는 가랑비가 아닌 조금 더 굵은 빗방울로 변하고 있다.

 

 

참으로 어렵게 그 잡목과 칡넝쿨 지대를 벗어나니 이제부터는 잡풀지대가 다시 나타나고 또 다시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가 발길을 붙잡는다.

온 몸에 생채기를 내며 힘들게 그 잡목 구간을 넘으니 갑자기 등로에 많은 뽕나무들이 보이고 잘 익은 검정 오디 몇개를 따 입에 넣으니 무척 달콤한 오디맛이 일품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함께 모여 많은 오디를 따 먹고 다시 나타나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편백나무 숲을 지나 드디어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망경산에 도착을 한다.

망경산(129)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에 있는 산으로 금남 호남 정맥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지역을 각각 금남 정맥과 금북 정맥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지역 중 금남 정맥을 이루는 구릉과 산 중 하나가 망경산이다.
취성 산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함라산에서 시작하여 군산시 대야면까지 이어지는 산지 지형인데 망경산은 대명산과 함께 취성 산지에 포함되며 선캄브리아기 화강질 편마암이 주요 기반암이다.

망경산은 해발 129미터의 저산성 산지이며 북쪽으로 대명산이 있고 남쪽으로 고봉산이 이어진다.

정상에는 특별한 시설물이 없고 잡목으로 덮여있고 정상에서 대명산 정상으로 능선을 따라 이동할 수가 있으며 지정된 등산로는 없다.

성산면 읍내와 성산면 농공 단지 및 서해안 고속 도로의 성산면 통과 구간이 보이고 임피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 27호선이 지난다.
망경산 아래 창오리 창안 방죽 근처에 고려 시대의 13개 조창 가운데 하나인 진성창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창안 토성의 흔적만 남아 있다.

 

 

마지막 봉우리인 망경산 정상에서 사진 한장씩 남기는 시간은 빗물이 카메라로 스며들어 사진 남기기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망경산에서 추억을 남기고 내려가니 다시 편백나무들이 보이고 그곳에서 익산의 콜 택시를 부르니 이곳 다리실재 지명을 몰라 포기하고 내려가 본다.

잠시 더 내려가니 멋진 편백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그곳을 가로 질러 내려가니 번호를 볼 수 있는 거대한 송전탑을 통과한다.

송전탑을 지나니 다시 비포장 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그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임도 양쪽으로 멋진 편백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2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다리실재에 도착을 해 배낭을 정리하고 산행을 마무리 한다.

진행 방향 반대 방향인 창오리 방향으로 걸어가니 거시기삼계탕 식당이 보이고 그곳으로 들어가 군산 택시 전화번호를 받아 택시를 부른 후 배낭 정리하며 길고도 멀었던 산행을 정리해 본다.

다리실재는 전라북도 군산시의 성산면 창오리에서 도암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다만 최근의 문헌에서 이 고개가 조선 시대 전라도 내륙에서 수취한 세곡미를 금강가의 군산창으로 운반하던 중요한 길목에 위치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지명은 현재 다양한 지명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한국지명총람에 고봉리 다리실재(월곡재, 월곡치)로 귀리에서 창오리 중오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고 산곡리 다리실재(풍덕매)는 상동에서 고봉리 다리실로 넘어가는 고개로 또한 창오리 다리실재라는 기록이 있어 다리실재의 다리를 훈차 혹은 훈음차 표기한 월곡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다른 명칭으로 풍덕매가 있다.

이제 대동금강기맥 산행도 7월 초 다시 한번 내려오면 마무리가 될 것이다.

시작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시작을 하고 나니 또 하나의 마루금 잇기 산행이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마지막 구간은 버스와 기차를 이용해 산행 후 맛난 탁배기 한잔 나누며 자축하는 시간이길 바래 본다.

 

군산 택시로 정금주유소로 뒤돌아 와 애마를 회수한 후 다시 함열읍으로 이동해 지난 구간 이용했던 함열모텔 사우나에서 샤워 후 이곳에서 유명한 순대국밥으로 식사 후 곧바로 서울로 복귀하니 오늘도 저녁 이른 시간에 집으로 복귀해 편히 쉴 수 있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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