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울산시 울주군의 호미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5년 01월 17일(토)과 18일(일)-토요 무박 일요일 산행
산행날씨 : 약간 춥고 바람이 불었지만 청명한 하늘에 산행하기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8도에서 영상 05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호미기맥 종주대 총 13명과 함께
산행코스 : 소호분교-소호경로당-마지막 민가-비포장 임도 이정표(소호분교, 능선까지 630 m, 상북태종, 상북소호 두서차리)-낙동정맥 마루금-억새능선-삼강봉 이정봉(845봉, 낙동정맥과 호미기맥, 산신제)-삼강봉(845m, 호미기맥 분기봉)-급경사 내리막 등로-656봉-400봉 삼각점-묘지2기-소나무 군락지-시멘트 임도-탑곡고개 이정표(탑골샘 2.2 Km, 유촌마을, 영남알프스 둘레길)-태화강 100리길 안내판-비포장 임도-준.희님 응원판-482봉 묘지1기-준.희님 응원판-깊은 낙엽 등로-일출-565봉 묘지-산죽지대-천마산(613봉)-557 바위 전망대(아침식사)-잣나무 군락지-절개지 시멘트 수로-상동재(2차선 지방도로)-404.7봉-시멘트 임도-복안고개(비포장 임도)-삼봉(359.2봉, 산불감시초소와 묘지1기)-소나무 군락지-송전탑 11번-돌담 산성터-철조망 묘지-미호육교(35번 4차선 지방도로)-경부고속도로-절개지 철계단-묘지1기-시멘트 포장 임도-비포장 임도-226봉 삼각점-시멘트 포장임도-능선진입-시멘트 포장임도-비포장 임도-묘지1기-비포장 임도-이정표(두동구미와 두동월평, 두서미호와 두서활천, 막다른길 200m)-납골 가족묘지-능선진입-붉은 송전탑-비포장 임도-과수원-소나무 군락지-중리고개(31번 2차선 지방도로)-한국전력울주변전소 입간판-포장도로-비포장 임도-송전탑 1번-한국전력울주변전소 철조망-녹슨 철조망-묘지1기-송전탑 3번-비포장 임도-묘지1기-묘지2기-체육시설-비포장 임도-소나무 군락지-능선진입-묘지-당산고개(28번 2차선 지방도로)-산행종료-경주남산원전탕에서 샤워-배양골 국밥집에서 매식 후 귀경
산행거리 : 약 20.23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여유롭게 사진 찍으며 꾸준하게 7시간 52분 (04시 59분부터 12시 51분까지)
교통편 : 호미기맥 25인승 전용 버스 이용
호미기맥이란???
부산 몰운대에서 북진하는 낙동정맥이 영축산,가지산,고헌산,백운산을 지나 경주의 단석산으로 이어지며 북진해 올라간다.
단석산에 이르기전의 백운산은 붕우리가 4개 있는데 맨 아랫쪽의 892m봉이 주봉이고 그 북쪽으로 860m봉, 845m봉, 855m이 연이어 있는데
호미기맥은 그중 아래에서 세번째 봉인 845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천마산(620.5미터 봉)과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치술령(766.9미터 봉)에서부터는 북동진하여 포항의 호미곶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호미기맥이라 부른다.
이 산줄기는 도상거리 약 98 Km나 되는 산줄기로 형산강의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여 일부에선 형남기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통상은 땅끝기맥과 같이 지역의 특수성을 살려 호미기맥이라 부른다.
이산줄기 북으로 흐르는 물은 형산강으로 들고 남쪽으로 흐르는물은 태화강으로 들며 일부는 장기천, 대화천으로 들어 동해바다로 들어간다.
새로운 호미기맥 마루금에 안겨 무한한 행복감을 마음껏 누렸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무탈하게 진행하던 땅끝기맥 산행이 남녁에 내린 폭설과 등로 위 암봉에 얼어 붙은 빙판으로 인해 중단되고 2014년 한해를 마무리 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는데 새해 들어 여전히 동장군의 기세가 무섭기만 하다.
그래도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걸어 보고 싶었던 호미기맥으로 발길을 돌려 보지만 준비 기간이 너무나 짧고 땅끝기맥 산행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새로운 산줄기를 찾아 나서기에 생각보다 적은 산행 참여 인원으로 처음 구간부터 마음 고생이 심하다.
그래도 좋아 진행하는 산행이기에 마음 다잡고 하나 둘 준비하다 보니 13명의 종주대가 참여를 결정하고 25인승 버스를 임대 해 어렵게 출발을 하는 호미기맥 산행이 되었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호미곶까지 무탈하게 걸어 갈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잘 훈련된 종주대 13명이 출발을 하다 보니 선두 후미도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진행 해 어렵게 천마산을 지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 오는 등로 옆 낙엽속으로 들어가 허기진 배를 채우고 따뜻한 커피 한잔까지 마시니 이제사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식사 후 옆에 보이는 바위 전망대에 오르니 일망무제 끝없이 펼쳐진 지나온 낙동정맥 마루금이 북쪽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에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는 단석산이 우뚝 솟아 있어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바로 아래에는 천년고도인 경주의 내와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 역시 생각보다 오지의 느낌이기에 직접 와 보지 않고 상상으로 알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지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해 들어 회사일이 바빠지고 많은 외국 손님들이 방문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된 산행 한번 하기 힘이 드는 상황이지만 일을 마친 후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자 취미 생활이기에 마음의 아쉬움을 떨쳐 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호미기맥 산행을 위해 출발한다.
기흥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 후 곧바로 달려 건천휴게소에서 마지막 허기진 배를 채우고 어렵게 돌고 돌아 산행 들머리인 궁근정초등학교 소호분교장 앞 다리에 도착을 하는 시간이 새벽 4시 42분을 지나고 있다.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와 기온이기에 중무장을 한 다음 소호리 마을 유래를 읽어 보고 소호분교 안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를 사진에 담은 후 단체 사진 한장을 남기고 곧바로 멀고도 긴 호미기맥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 새벽 4시 56분을 지나고 있다.
오늘 호미기맥 산행 출발지인 소호리는 본래 경북 경주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풀이 많고 수원이 좋아서 학자들이 소호리라 하였는데 고종 광무 l0년(1906)에 울산군 두서면에 편입되었고 l9l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종동을 병합하여 소호리라 하였는데 l973년 7월 l일 대통령령제 6542호에 의하여 상북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이 소호리에는 여러마을들이 있지만 오늘 호미기맥 산행을 위해 알아 둬야 할 마을 몇 군데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보인다.
먼저 대리란 마을은 마을에서 제일 오랜 부락이라고 하여 대리 라 호칭하였는데 당리의 남서 쪽 400 m 쯤 덜어진 곳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소호리 중에서도 가장 큰 마을로 대리라 하게 되었으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큰 불로집 뜰이 모두 소각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소호리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로 되어있다.
다음으로 당리란 마을은 당수말이란 당수나무가 마을복판에 있다는 뜻으로 당리 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당수말이 라고 하는 것은 발음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호리 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은 마을로 옛날 이곳에 느티나무 숲이 우거져 마을의 당제를 모시던 곳으로 당리라 불리웠으며 현재도 그 숲자리에 소호초등학교가 있고 운동장 느티나무 거목이 있어 지금도 매년 음력당제를 지내고 있다.
이 당리가 실질적인 오늘 호미기맥 산행 출발지인 것이다.
그외에 와리 즉 기와목 또는 잿목이라 불려졌던 마을로서 당리의 서쪽 l.5 Km쯤 떨어진 곳으로 재목이라 불리우다 재가 재(기와)로 변해서 와리로 바뀌어 졌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한편 와리는 기와를 제조하던 곳이라 하여 와리 또는 기왓목 이라 호칭되는 마을이다.
소호분교 정문 앞에서 우측 포장도로를 타고 마을길을 걸어가니 금새 소호경로당 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 앞을 통해 진행해 마지막 민가까지 오른다.
그곳에서 잠시 사라진 등로를 찾아 헤맸지만 금새 민가 뒷쪽 대나무 밭을 통해 좌측 능선쪽으로 오르니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파란 지붕을 한 마지막 민가가 나타난다.
자세히 살펴보니 소호분교에서 분교 담을 따라 좌측으로 조금 더 돌아 마을 도로를 타고 올랐으면 조금 더 편안하게 올랐을 것을 아무튼 이곳 마지막 파란 지붕을 한 민가에서 좌측으로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임도 우측 능선 방향으로 선답자들의 띠지들이 바람에 나풀거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능선 등로를 타고 산행을 시작해 보는 시간이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등로는 잘 발달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사면 등로를 타고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속을 걷다 보니 낙엽 산행을 하는듯한 착각에 빠져 보는 시간이다.
약간씩 뒤로 밀리는 낙엽을 밟으며 서서히 고도를 높히니 벌써 등줄기와 이마에선 굴근 땀방울이 흘러 내리기 시작하고 오늘 처음 산행에 참여한 종주대 한분이 조금은 힘들어 하기에 제일 후미에서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를 따라 걸어 본다.
그렇게 30여분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드디어 넓은 비포장 임도와 이정표가 보이는 고세 도착을 해 입었던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이정표를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제일 후미로 천천히 걸어 오르니 등로는 점점 더 가파라지기 시작하며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한다.
서서히 고도를 높히니 등로는 더욱 가파라지고 등로 위에 쌓여 있는 낙엽으로 인해 오르기가 더욱 힘이들고 속도도 나지 않는다.
다만 힘이 들어 가끔 쉬면서 심호흡 하는 동안 뒤돌아 보니 외항재와 소호리쪽 불빛들이 아름답게 어둠을 밝히고 있어 위안을 삼아 본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어느덧 낙동정맥 마루금에 ㄷ착을 하고 잠시 헷깔려 등로 좌측이 아닌 우측의 백운산 방향으로 진행을 하는데 앞서 진행하던 산정님이 좌측이 삼강봉이라면서 앞서 진행을 한다.
내심 모르는 척 하면서 백운산을 다녀오고 싶었는데 마지막 후미에서 함께 진행하던 종주대의 한마디에 사진과 어플를 확인한 후 백운산을 포기하고 낙동정맥 마루금을 타고 좌측으로 진행해 삼강봉으로 향한다.
잠시 진행하니 더욱 강렬한 밤바람이 불어오고 곧이어 빛바랜 억새 능선이 보이는가 싶더니 잠시 내려가며 진달래 터널을 통과한다.
그렇게 전진하니 금새 삼강봉 이정표가 서 있는 호미기맥 분기점에 도착을 해 강철대장님이 간단히 준비한 제물을 펼쳐 놓고 호미ㅣ맥 산행도 안전하게 지켜 주길 바라며 산신령님에게 간단히 제를 올리고 본격적인 호미기맥 산행을 시작해 본다.
간단히 제를 올리고 탁배기 한잔을 마신 후 살펴 보니 선두는 이미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고 준간과 후미만 몇명이 남아 간단한 제를 올리게 되었다.
제를 올린 후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호미기맥 분기봉인 삼강봉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하지만 얼마나 강한 바람이 불어 오는지 잠시 사진 한장 남기기도 어려워 주위 조망은 보는듯 마는듯 곧바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먼 호미기맥 산행을 시작해 본다.
이곳 호미기맥 분기봉인 삼강봉 정상은 그리 넓지 않은 봉우리에 작은 정상석 하나가 달랑 서 있는 곳이지만 사위 전망이 탁월한 곳이지만 오늘은 어둠속이다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간이다.
해발 845미터인 삼강봉이 새겨진 정상석이 당당해 보이는 이유도 조망의 탁월함 때문일 것이지만 오늘은 그 탁월한 조망을 즐길 수 없으니 그 안타까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이곳 능선은 조선 말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탑골마을을 빙 둘러 싸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경북 경주시 도심과 남산, 토함산, 천마산이 펼쳐지며 날씨가 맑으면 포항 앞바다까지 아스라이 보인다고 한다.
뒤돌아서 남쪽을 보면 울산 시가지와 크레인들이 줄지어선 울산항이 보이며 울산 앞바다에는 수출입을 위해 정박한 배들이 점점이 떠 있다는데 지금은 볼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이곳 삼강봉 정상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산봉우리 이름에 강이 들어간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이 봉우리에서 세 개의 강이 분기한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실제 삼강봉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지세를 따라 울산 태화강과 경주 형산강 그리고 낙동강으로 갈라져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삼강봉이란 이름이란 의미이다.
삼강봉에서 분기봉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북쪽으로 빛나는 경주시의 야경을 바라 본 후 강한 바람으로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동쪽으로 급격하게 떨어지는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 가 본다.
등로엔 암릉들이 버티고 서 있어 더욱 조심스럽고 그 바위 암릉 구간을 급하게 내려가니 이제 등로에 쌓여 있는 낙엽이 또한 진행하는 발끝에 힘을 주게 만들고 있다.
오늘 13인 중 4명의 정주대가 새로 합류를 했는데 모두가 준족들이라 후미도 없이 선두 5명을 제외하곤 모두 한 그룹이 되어 진행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내려가 조금은 평온한 등로가 이어질 쯤 등로 좌측에 묘지 하나가 보이고 그 묘지 뒷쪽 나즈막한 봉우리에 삼각점 안내판과 삼각점 하나가 박혀 있어 사진에 담아 본다.
해발고도 400미터인데 준.희님의 이정판에는 398.7봉이라 되어 있고 삼각점에는 언양 412라 표기되어 있다.
묘지 2기를 지나 계속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낙엽은 더욱 그 깊이를 더하며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빠지기도 한다.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묘지 옆으로 오르니 방금 전 지나 온 호미기맥의 분기봉인 삼강봉이 저 멀리 아스라히 멀어지며 어둠을 밝히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그 아름다운 산하를 올려다 보는 시간은 정말로 가슴으로 느껴보는 자연 그대로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다시 소나무 군락지로 들어가니 주위 사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어둠이 남아 있고 계속 이어지는 나즈막한 내리막 소나무 군락지를 내려가니 앞서 진행하는 종주대 앞으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지금까지 쌓여 있던 횔엽수 낙엽과 달리 넓은 등로에 떨어져 있는 솔잎이 참으로 정겹게 발끝을 간지럽히는 좋은 촉감의 시간으로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그 소나무 군락지가 끝나는 곳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삼강봉이 환히 올려다 보이는데 오늘 우리 종주대는 그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진행을 해야 한다.
좌측으로 포장도로를 타고 내려가니 도로 우측에 벤취 2개가 보이고 곧이어 탑골고개인 내와리고개에 도착을 해 주위 풍경과 이정표를 사진에 담는다.
이곳 탑골고개엔 영남알프스둘레길과 탑골샘 2.2 Km 그리고 유촌마을 5.0 Km란 이정표가 서 있고 매화강 100리길이란 안내판도 서 있다.
그 옆에는 영남알프스 가매달이란 안내판도 보이고 구화사와 탑곡공소 안내판도 보이는 삼거리 갈림길인데 이곳 탑골고개 자료를 찾다보니 내와리에 대한 자료가 있어 적어 본다.
내와리는 두서면이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에도 내와라 불렸다가 울산군 두북면으로 이속되고 나서 1911년에는 내와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내남면 고사리 일부를 합하여 내와리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고 내와와 외와의 두 행정 마을이 있다.
내와라는 마을 이름을 갖게 된 유래에 대하여 옛날 기와를 굽던 곳으로 안에 있는 마을은 아네, 밖에 있는 마을은 바데라고 불려진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자료는 없다.
또한 일설에는 내와 마을 뒷산이 골처럼 생겼다하여 안은 내와 밖은 바데라 했다고도 한다.
내와 마을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 통일의 영기를 얻은 영산인 백운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있는 해발 400미터의 고지대 산촌으로 비교적 오지에 속한다.
이 마을에는 경주 최씨와 오씨가 약 300여 년 전부터 거주하였다고 전해오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없는데 한편 안동 권씨는 약 300여 년 전에 입향한 이래 현재까지 토박이로서 집성촌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성씨가 들어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대다수 주민들은 농·축산업에 의존하고 있는데 특히 이 마을은 산간분지로서 한서의 기온 차가 심해 볍씨도 조생 종자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수원이 길지 않은데다 지하수도 별로 개발되지 않아 관개 용수가 부족하여 항상 영농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특산물로서 과거에는 식정, 농기, 기타 철물 목탄(숯) 등이 있었고 현재는 인삼, 한약제, 납석, 자연석(수석) 등이 유명한데 특히 내와 혹돌은 전국적으로 우리 내와에서만 발견되는 명품으로, 많은 수석애호가들이 찾아오고 있다.
한편 내와는 옛날부터 도시와 거리가 먼 두메산골로 교통의 불편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오랜 세월 북으로는 괘밭, 덕천, 이조까지 걸어가서야 경주로 왕래할 수 있었고 동으로는 활천 봉계를 지나 울산으로 통하였으며 서로는 소호령을 넘어야만 청도와 밀양 등지로 통할 수 있었다.
경주나 언양에 있는 시장으로 나들 경우에도 고작 말이나 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와 같이 원거리 시장터에 겨우 반출한 농, 축산물이 때로는 시기를 놓쳐 당일 처분이 불가능할 때도 있어 이럴 경우 보통 2∼3일이 걸려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71년의 새마을 운동은 우리 고장의 교통사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주민들의 피와 땀에다 정부의 지원으로 새마을 사업에 뛰어든 이후 드디어 마을 앞까지 자동차가 들어오게 되었고 지금은 더 넓혀져 포장된 도로에 노선 버스가 운행됨으로써 교통 불편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농업의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 기후와 토질에 맞는 영농 방법을 모색하고 아울러 복합 영농, 상업 영농에 힘쓴 결과 단위 수확량을 예전 보다 수배로 더 거둘 수 있어 이를 기반으로 비교적 안정된 농촌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2 Km 떨어진 곳에 탑곡이라는 자연 마을이 있었는데 한 때는 27여 가구가 이곳에 살았으며 천주교 공소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다.
다만 그때의 집터나 담장과 과목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날의 마을을 짐작케 하고 있으나 차츰 농경지로 전환되는 추세이다.
이곳에서 좌측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 밭 가장자리로 나 있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잠시 올랐다 밭을 좌측에 두고 좌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능선으로 진입하며 호미기맥 산행을 이어 가 본다.
이제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에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탑골고개 뒤 저 멀리 삼강봉이 환히 올려다 보인다.
다시 조금씩 더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등줄기에 땀방울이 흐를 쯤 거대한 소나무 위에 준.희님이 붙여 놓은 호미지맥 종주 응원 이정판에 잠시 발길 멈추고 웃음을 지으며 고마운 마음을 전해 본다.
전국 산하를 다니며 가장 많이 만나는 준.희님의 이정판이기에 더욱 고맙고 친숙한 이미지마저 드는 것은 산꾼으로서 어쩔 수 없는 고마움의 표시일 것이다.
다시 어렵게 한발 두발 걸어 오르막 된비알을 오르는 시간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의 시간이다.
그래도 여명이 밝아 오는 새벽 이 시간이 좋아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도 참고 또 밤새 달려 내려 와 이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드높은 아미산을 가운데 두고 한동안 그 아미산을 두고 돌고 돌아 진행하는 형국이 되었다.
한동안 힘들게 오르니 유인김해김씨 묘지가 나타나고 그 봉우리를 넘어 나즈막하게 내려갔다 다시 오르니 준.희님의 또 다른 응원 이정판이 힘과 용기를 주고 이제 잡목 사이 저 멀리 아미산 능선 옆으로 아침 일출이 시작되고 그 핑계를 삼아 잠시 발걸음 멈추고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아름다운 하루의 일출을 사진에 담아 본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무명봉을 지나 낙엽진 할엽수의 도열을 지나 앞으로 올라야 할 천마산을 올려다 본다.
이제 지나온 등로를 바라보니 삼강봉 좌측으로 고헌산도 올려다 보이고 우측으로는 아쉬움을 남긴 백운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기에 다시 잠시 발걸음 멈추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에 남겨 본다.
작은 바위가 있는 560봉을 지나 묵묘를 넘으니 천마산이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와 있고 등로는 이제 완만하게 나겹진 활엽수를 따라 나 있다.
천마산이 바로 눈 앞으로 성큼 다가온 곳에서 다시 무릎까지 빠지는 낙엽길을 걸으며 그 위에서 영화같은 인생을 그려 보기도 해 본다.
낙엽 등로를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갑자기 짧은 거리의 키 큰 산죽지대가 나타나고 등로는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져 산행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거대한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오르는 등로 역시 이 산객들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특권은 아닐까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나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완만하게 한동안 무심으로 걸어 오르니 앙증맞은 정상석이 반기는 해발고도 613미터의 천마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이곳 천마산에 대한 자료는 울주군 두서면 자료에서 인용해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천마산은 높이 610미터의 가파른 산으로 천마란 하늘을 나는 말을 뜻하기도 한다.
또 처음에는 높다는 뜻으로의 하늘 천과 산의 우리말인 산 뫼를 합쳐 천뫼로 불리다가 차차 뫼가 마로 전이되면서 나중에는 천마산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복안리에 말먹이통을 뜻하는 굽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산 형세가 말과 같다하여 천마산으로 불려진 듯 하다는 설도 있다.
또 천마산 중턱에 마당미기라는 넓은 사면이 있는데 옛 신라에서 말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는 산이다.
또 다른 설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백운산 굴에서 기도를 하여 신검을 받은 후에 백운산에서 천마를 타고 이곳으로 뛰어 내렸다 하여 천마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전에는 이 앙증맞은 정상석 조차도 없이 그저 작은 돌무덤이 전부였다는데 이번에는 작은 정상석이나마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첨마산에서 잠시 더 능선을 타고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너무나 멋진 557봉 바위 전망대가 보인다
그곳으로 올라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들을 하나 둘 가슴속에 남겨 보는 시간이다.
먼저 동쪽 저 멀리 끊어질듯 이어지는 호미기맥 마루금이 동해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그 끝자락 저 멀리에 천년고도 경주의 진산인 토함산이 우뚝 솟아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호미기맥 마루금 좌측으로는 천년고도인 경주 시내가 가물거리며 저 멀리 산객을 부르고 있다.
좌측인 북쪽으로 낙동정맥 마루금을 두고 우측으로는 동해바다로 흐르는 호미기맥을 사이에 두고 천년고도인 경주가 하얀 건물들의 집합체처럼 멀어 보인다.
경주의 역사는 신라와 별도로 생각하기 힘든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경주시에서 신라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본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있던 여섯 부족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된 나라인데 그 후 밖으로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였으며 안으로 정치체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22대 지증왕대에는 국호를 신라로 확정지었으며 23대 법흥왕대에는 불교를 공인해 찬란한 불교문화의 막을 올렸다.
이처럼 국가의 면모를 일신한 신라는 그 기세를 몰아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676년에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한 후 통일국가 신라는 평화로움 속에서
눈부신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 갔다.
그 찬란한 천년고도의 역사를 가진 경주시는 보이는 것 모두가 역사가 되는 역사의 도시로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북쪽으로는 낙동정맥 마루금을 따라 저 멀리 OK 목장과 단석산이 아스라히 멀어 보인다.
몇 년 전 낙동정맥 종주대와 함께 당고개에서 저 단석산까지 단숨에 오르며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는지 모를 고운 추억이 깃든 곳이기에 그곳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속에서는 그때 그 순간의 열정을 생각해 본다.
끝없이 펼쳐진 산그리메가 산객의 가슴을 파헤집고 그 속으로 하나 둘 고운 추억으로 남겨지는 그림이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북서쪽으로는 소나무 가지 아래 낙동정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이런 호미기맥 산행이 아니라면 이곳에 올라 이런 벅찬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시간이니 그저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자연에게 고개를 숙여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언제 다시 저 멋진 마루금을 타고 다시 걸으며 이곳 호미기맥 마루금을 생각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슴 한쪽에 그 고운 추억을 남겼음에 감사한 시간으로 남겨 본다.
많은 시간 멋지고 황홀한 풍경에 취해있다 보니 아침 시간이 지나 허기를 느끽 이곳 양지 비탈에 자리를 잡고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을 해 본다.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니 종주대들은 벌써 사라지고 이 산객 홀로 후미에 쳐져 걷게 된다.
557봉 바위봉을 좌측에 두고 사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멋진 잣나무 군락지가 펼쳐지고 곧이어 잡목 사이로 등로 우측으로는 미호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다시 급경사 내리막 등로를 따라 한동안 정신 없이 내려가니 저 멀리 앞으로 올라야 할 404봉이 드높게 올려다 보이고 바로 발 아래에는 포장도로도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조금 더 내려가니 콘크리트 수로가 보이고 그 수로를 타고 내려가니 도로 건너 저 멀리 올라야 할 404봉쪽 봉우리가 참으로 예쁘게 다가온다.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 마을이 그림처럼 다가오고 곧이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상동재에 도착을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 상동마을에 있는 상동재는 미호리와 복안리를 잇는 2차선 고개로서 이 고개 아래에 있는 미호리의 서편 위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고개 이름이 바로 상동재이다.
미호리는 경주 남면 당시 사음, 마리골로 불렀으며 울산군에 이속되어 두북면에 속하였던 때에도 사음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때 미호리라 고쳐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명을 미호리라 고쳐 부르게 된 이유로 종전의 사음이 지주가 소작료를 받고 관리함을 뜻하는 말로 별로 좋지 못한 용어라 하여 이를 버리고 그 대신 아미산에서 미자를 따고 가메들의 많은 호수에서 호자를 따서 미호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마리골과 관련하여 신라 설총의 이두문에 의하면 사음이란 맑음을 뜻하는 말임을 볼 때 원래 마을 이름이 맑은 골이었던 것이 내려오는 동안 마리골로 바뀌게 된 것이라 추리되며 미호리는 상동과 하동의 두 행정 마을이 있다.
미호리 상동 마을은 미호리의 서편 위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약 400여년 전 조선조 광해군 때 지금의 저수지 근처에 김해 김씨가 자리를 잡았는데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가 자주 내려와 사람을 해치므로 공포에 질려 지금의 상동 마을로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나주 임씨가 들어와 다래나무 덤풀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정착하였고 뒤이어 각 성씨가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미산과 천마산 사이의 가메들 계곡은 백운산 탑곡에서 시류하는 태화강 최상류 발원지로 자연 경관이 빼어난데다 그 긴 계곡 중간 중간에 거울 같은 석반을 끼고 호박소, 구이소, 가마소 등 아름다운 소가 많아 지금도 이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1955년 정부에서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재건국민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당시 이장으로 있던 홍순해가 앞장서서 1970년대 초 새마을 사업이나 마찬가지로 도로 확장과 울타리 없애기, 부엌개량, 화단 가꾸기 등 환경개선 사업을 일찍 추진한 결과 우리 면내에서 가장 먼저 개화된 문명 마을로 변모된 곳이다.
당시의 한가지 특이한 사례는 음력 과세를 폐지하고 양력 과세를 실행한 것인데 이때 65세 이상 노인들을 한데 모시고 젊은 사람들이 합동과세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군수가 현지에 방문하였을 때 동민들이 재건의 노래를 제창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돌아가서 곧 상금 오십만원과 리어카 40대를 상으로 보냈다.
그때 기증 받은 리어카가 얼마나 견고하게 제작되었던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때 부르던 동민의 노래는 뒤의 제9장 민요편에 수록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의 주된 생업은 역시 농, 축산업이며 아직 정기적으로 운행되는 노선 버스가 없어 교통이 불편한 편이나 신설 중인 도로가 개통되면 곧 교통 문제는 해소될 것이며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가 올 전망이다.
한편 1985년∼1991년에 완공된 농업용 미호 저수지가 상동 마을에 있는데 그 규모가 면내에서 가장 클 뿐 아니라 전체 울주군 내에서도 대표적인 수리 시설이다.
이 마을 아미산 중턱 광활한 부지에는 규모가 큰 신우목장이 개설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가로이 풀 뜯는 소떼가 그저 풍요롭기만 하다.
이 산객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두서면 미호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어 봄으로서 이곳과의 좋은 인연도 또 만들어진것은 아닐까 생각 해 본 시간이다.
상동재 도로 좌측에는 멋진 단독 주택 한채가 서 있고 잠시 산객의 눈길을 사로 잡는데 나이 들어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꿈이기에 더욱 글헌 마음과 눈빛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동재 도로를 건너 나즈막한 콘크리트 옹벽을 넘어 콘크리트 수로를 따라 오르니 절개지 정상부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등로는 좌측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급하지는 않지만 이어지는 지루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땀방울을 흘리니 드디어 404.7봉 정상에 도착을 해 큰 한숨을 내 쉰 후 우측으로 꺽이는 등로를 따라 계속 전진해 본다.
이제 낙엽도 사라지고 약간의 잡목과 거목이 이어지는 평이한 등로를 타고 약간의 여유를 부려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나온 천마산 줄기가 올려다 보이고 사진에 담은 후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금새 넓은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는 임도에 도착을 해 앞으로 올라야 할 359.2봉쪽 봉우리를 올려다 보니 생각보다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콘크리트 공터에서 좌측으로 나 있는 콘크리트 임도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살펴보니 이곳이 복안고개라 생각되는 고갯마루이다.
이곳 복안고개는 미호리의 상동에서 복안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1980년대 초에 광역권 사업으로 고개길을 넓혔으나 가파른 경사 때문에 도로 기능이 원만하지는 못한 편이라 이제는 이렇게 호미기맥 산행이나 약초를 구하는 산꾼들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잊혀져 가는 고갯마루처럼 보인다.
보간고개 아래에는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가 있는데 아마도 이 복안리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곳이다.
복안리는 두서면이 경주의 남면이었을 때에 지금은 활천리로 된 전천동에 소속되어 있던 마을이었다가 그 후 정조때 외남면으로 분면 당시 전천리에서 분동된 다음 복안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복안리에는 양지 마을과 음지 마을 등 2개 행정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이 처음에는 봉안이었던 것이 뒤에 보안으로 고쳐 불리다가 언젠가 다시 복안이라 개칭되었다 한다.
이러한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마을이 복안산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라시대 이곳에 보안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복안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라 하나 자세한 내력은 잘 알 수가 없다.
이제 이곳 복안고개 삼거리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며 다시 호미기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복안고개를 지나 오르막 등로를 오르다 힘이 들어 잠시 뒤돌아 보니 좌측으로 아미산이 높게 솟아 있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천마산이 보이며 우측으로는 방금 전 지나온 404봉쪽 봉우리가 보인다.
한동안 오르니 무명묘지가 나타나고 몇그루의 멋진 소나무들이 반기는데 그곳을 지나자 마자 곧바로 정상에 무명 묘지 한기와 산불 감시초소가 있는 359.2봉인 삼봉에 도착을 한다.
산불감시초소에는 아주머니 한분이 머물며 어렵게 이곳에 올라 온 산객들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람이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드로 좌측인 북쪽으로 준주봉 넘어 저 멀리 천년고도인 경주시의 회색 건물들이 아스라히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삼봉의 북동쪽으로는 활천리와 봉계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그 사이에는 경부고속도로도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 뒤 저 멀리에는 앞으로 걸어가야 할 호미기맥의 마석산 지나 경주의 토함산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잠시 주위 조망을 즐긴 후 배낭속에 남아 있던 과일과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며 달콤한 휴식 시간을 가져 본다.
간식을 먹은 후 다시 출발에 앞서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치술령 방향을 바라보니 그곳에도 시원한 호미기맥 마루금이 드높게 펼쳐져 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기온도 많이 올라가고 바람도 약해지면서 걱정을 했던 조망은 생각보다 좋아 멋진 산행으로 기억된다.
많은 시간 휴식을 취했기에 산불감시초소 안에 머물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남아 있는 간식을 약간 전해 드리고 인사를 나눈 후 배낭을 둘러 메고 다시 산행을 이어 가 본다.
출발에 앞서 359.2봉 삼봉이란 이정판 앞에서 증명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곳 삼봉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미호리와 활천리 그리고 복안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막힘없는 조망으로 인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좋았던 곳으로 기억된다.
이제 우측 내리막 등로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숲을 타고 천천히 걸어 내려가 본다.
제멋대로 자란듯 그러나 질서를 갖춰 멋지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군락지를 통해 내려가니 다시 활엽수 낙엽진 허허벌판의 평이한 등로로 바뀐다.
그렇게 조금으 빠르게 진행을 하니 금새 11번 송전탑 아래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잠시 발걸음 멈추고 주위 풍경을 담아 본다.
앞으로 진행해야 할 호미기맥 마루금이 높지는 않지만 올망 졸망 이어진 풍경이 인상적이다.
송전탑을 지나 다시 급하지는 않지만 꾸준한 속도로 진해을 하니 등로 옆에 제법 그럴듯한 돌담들이 너부러져 있고 그곳을 지나며 사진 몇장 남겨 보지만 왜 이런 돌담드리 이곳에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지자체에서라도 고증을 통해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면 잘 보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래 본다.
성터 같기도 하고 집터 같기도 한 돌담이 크지는 않지만 제법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성터 같은 돌담을 통과하니 갑자기 녹슨 철조망이 있는 묘지 하나가 나타나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기만 하다.
월성이씨 묘지인데 제법 높은 직책의 공무를 지낸 듯 묘비가 조금은 복잡하기만 하다.
이곳 묘지를 지나 나타나는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미호천교를 통해 통과하려 했으나 새로운 등로를 찾아 미호육교를 통해 경부고속도로 위를 통해 무탈하게 통과해 본다.
이곳을 미호고개 또는 열박재라 불려지는 곳인데 지금은 4차선 지방도로와 그 아래 경부고속도로가 뚫려있어 지금은 고개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일반 복잡한 고갯마루가 된듯 하다.
미호육교를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하자 마자 도로 우측으로 드높은 철 계단이 보이고 그 계단을 통해 호미기맥 마루금으로 어렵게 복귀를 한다.
계단 정상부로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통과한 미호육교가 내려다 보이고 그 아래에는 차량들이 빠르게 달리는 경부고속도로가 보이며 그 도로 건너에는 359.2봉의 삼봉 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사진 몇장 남기며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능선으로 들억며 진행을 이어가 본다.
진행하다 등로 우측 뒤를 살펴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정상에 누런 억새들이 펼쳐져 있는 고헌산 정상부가 올려다 보이며 그 옛날 고운 추억을 남겼던 시간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조금 더 능선을 타고 오르니 잘 정돈된 묘지 한기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뒤돌아 보니 아미산과 고헌산이 아스라히 멀어져 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부터 시멘트 포장 임도가 ㄴ타나고 그 임도와 능선을 번갈아 타며 조금은 편안하게 호미기맥 마루금을 걸어 본다.
잠시 콘크리트 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다 좌측 능선 등로를 따라 들어가니 능선 등로는 짧게 이어지더니 다시 콘크리트 포장 임도와 만나 그 임도를 따르게 되어 있다.
그렇게 콘크리트 포장 임도를 따르다 보니 등로 좌측으로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잘 정돈된 유인정래정씨 묘지를 통과한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하다 지도를 살펴 보니 콘크리트 포장 임도를 따라 진행하느라 225.2봉 삼각점을 보지 못하고 진행하였음을 뒤늦게 알고는 약간의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다녀 오기엔 먼 거리이기에 포기하고 계속 전진해 본다.
잠시 더 진행하니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곳 삼거리에 이정표 하나가 보이는데 두동구미 방향이 기맥 등로이다.
이곳 두동면 구미리와 월평리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남아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구미리는 본래 경주(월성)군 외남면의 지역으로서 밀구미이가 변하여 구미리라 하였다.
구미리를 조선 초에는 구시라 하였고 경주 외남면 때에는 밀구미동이라 불리었으며 밀구미란 대밀과 구미가 합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되어진다.
구시라 함은 목조를 뜻하며 목조란 명사로 구유(소먹이통)를 지칭하는데 구시는 지역이 굽은데서 나온 말이다.
그후 구시가 구미로 변하였지만 뜻의 의미에는 변함이 없으며 1906년 울산(울주)군에 이속되었고 1911년 두북면 구미동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중리/주원/당산을 병합하여 구미리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포항시 북구 죽장면의 월평리는 갈뫼봉(438미터) 서편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서 청송군과 경계를 이루는 꼭두방재(415미터)에 이르기까지 밖골, 안골, 우마동, 살마골, 꼭두방과 같은 작은 자연부락이 산재하고 있다.
1914년 소월, 고평, 현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평리라 하였다.
일선 김공 선략장군 묘소 입구 이정석을 지나 비포장 임도를 계속 따르니 가족 납골당이 나타나고 곧이어 조측 능선쪽으로 보이는 송전탑 방향으로 호미기맥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 송전탑을 보고 오르니 송전탑 앞에는 넓은 공터가 보이고 그 뒷편으로 칼라풀한 송전탑이 하나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송전탑을 지나 진행하니 비포장 임도 우측으로 과수원 같은 밭이 나타나고 그 밭에 자라고 있는 과수 나무 위엔 많은 철망들이 덮혀 있어 산새들을 쫓기위한 주인장의 바쁜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 과수원 지나 저 멀리에는 연화산과 옥녀봉이라 생각도는 산군들이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산객의 눈에 비춰진다.
그 과수원 지대를 ㅈ나니 멋진 왜송 지대가 나타나고 잠시 더 걸어가니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나타난다.
한동안 지루하지 않은 소나무 밭을 통해 진행하니 갑자기 눈 앞에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중리고개에 도착을 한다.
이곳 중리고개는 울주군 두동면 구미리의 중리마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중리마을은 구미리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서 울산과 언양 및 경주 방면의 중간교차 지점이라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이곳 중리고개에서 부터도 역시 포장도로와 비포장 도로를 타고 한동안 진행을 해야 한다.
중리고개에서 좌측 도로를 타고 조금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한국전력공사로 들어가는 입간판이 서 있고 그쪽 방향으로도 1차선 포장도로가 보인다.
그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한국전력공사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니 출입금지 바리게이트가 보이고 그 앞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보이는데 호미기맥 마루금은 그곳 비포장 임도로 진행을 해야 한다.
다시 한동안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1번 송전탑이 보이고 곧이어 한국전력공사 철조망이 나타나는데 그 철조망을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따라 진행을 한다.
그곳 한국전력공사 철조망을 벗어나니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 같은 등로가 나타나며 많은 선답자들의 띠지들이 반겨 준다.
한국전력공사 철조망울 완전히 벗어나니 다시 묘지 한기를 지나고 금새 3번 송전탑을 통과한다.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룰루랄라 걸어가니 금새 비포장 임도를 벗어나 능선으로 등로가 이어지고 희미한 등로를 찾아 진행하니 무명 묘지를 지나 전병구의 묘지도 지난다.
다시 잘 발달된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등로 옆에 체육 시설들이 있는 장소를 지나 오늘 산행도 막바지로 접어 들고 있음을 직감하는 시간이다.
체육시설을 지나 계속 걸어가니 드넓은 비포장 임도 주위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그곳을 지나 평이하게 걸어가니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와 만나 그 임도를 따른다.
잠시 비포장 임도를 따르던 마루금은 갑자기 임도 좌측의 능선 방향으로 바뀌고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려 보는 시간이다.
잠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이장된 묘지였는지 아니면 봉분이 없는 묘지 지대에 도착을 해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빙 돌고 돌아 지나온 한국전력공사의 수많은 송전탑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저 울주군 한국전력공사를 돌고 돌아 진행하느라 진을 다 뺀 그런 시간이 되었지만 이제 막바지 구간이기에 힘도 새로 생기는 시간이다.
그 한국전력공사 내부를 조망한 후 다시 힘을 내 걸어 진행하니 무명 묘지 하나를 지나 정상 등로를 버리고 우측 희미한 등로를 찾아 내려가니 전봇대가 서 있는 포장임도로 내려간다.
원래 당산고개보다 우측으로 야간 치우친 방향으로 내려 왔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마지막 구간을 무탈하게 내려오니 앞서 내려 온 종주대가 사진 한장을 남겨 준다.
그 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 더 걸어 내려오니 드디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당산고개에 도착을 해 도로 옆에 서 있는 제당산 등산 안내도를 살펴 본다.
살펴 보니 방금 전 내려왔던 산 이름이 이곳에서는 제당산이라 불려지는 산이였나 보다.
그 제당산 정상을 확인하지 못함이 아쉽지만 그래도 새로운 산줄기를 찾아 사고 없이 무탈하게 완주하였음에 감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곳 당산고개는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와 구미리를 이어주는 28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고개 바로 아래에 당산마을이 있어 당산고개라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 당산고개에는 영농조합이 세워져 있지만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는지 네비게이션에도 나타나지 않아 길찾기가 쉽지 않음이 아쉽기만 하다.
당산고개에서 무탈하게 호미기맥 제1구간을 마치고 이미 알아 두었던 목욕탕으로 가지만 문을 닫아 폐쇄가 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스마트 폰을 찾아 주위 목욕탕을 찾아 보니 경주 시내쪽으로 들어 가는 길목에 남산온천탕이 보인다.
전화를 걸어 약간의 D/C를 받은 후 목욕탕에서 흘린 땀방울을 닦아 내고 시원하게 찬물에 몸을 맡기니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이 되었다.
남산온천탕에서 나와 주위 주민들에게 물어 보니 가까운 배양골 국밥집이 맛이 있다고 해 그곳으로 들려 국밥으로 허기를 달래니 또 하루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생각보다 참여 인원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있지만 발 맞는 종주대들만이 참여를 하다 보니 산행 시간 조절은 매우 잘 되어 모든 이정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그렇게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와 조금 일찍 미니 버스를 타고 서울로 복귀하니 오랫만에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을 해 집으로 보구귀해 마음 편히 잘 마무리한 호미기맥 첫 구간을 자축해 본다.
남아 있는 4구간도 함께하는 종주대와 함께 즐겁고 무탈하게 잘 진행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먼 꿈나라로 향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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