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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검단지맥(한남·완)

검단지맥 마지막 제2구간 이배재에서 창모루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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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 그리고 하남시의 검단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4년 03월 16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화창한 기온에 약간의 박무가 있어 시야가 제한되었고 산행하기 약간 무더웠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03도에서 영상 14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이배재(389번 2차선 지방도로)-이정표(이배재고개 0.4 Km, 망덕산 왕기봉 1.3 Km와 보통골 2.3 Km 그리고 안말 2.5 Km)-현위치 4.2 이배재고개 정상 이정목과 이정표((이배재고개 1.0 Km, 망덕산 왕기봉 0.7 Km와 보통골 1.7 Km 그리고 안말 1.9 Km)-바위봉-현위치 4.1보통골하산갈림길 이정목-이정표(이배재고개 1.3 Km, 망덕산 왕기봉 0.4 Km)-망덕산 왕기봉(500.3봉)-두리봉과 군드레봉 갈림 이정표-현위치 5.4 사기막골산 갈림능선 이정목-이정표(검단산 1.0 Km와 지화문 남문 4.0 Km, 사기막골 0.5 Km)-현위치 5.3 사기막골갈림길 이정목-윗말 갈림 이정표-현위치 남한산성 16 약수터-현위치 5.2 상대원뒷능선 이정목-506봉 돌탑-불당리 갈림 이정표-검단산(534.7봉) 헬기장-현위치 5.1 검단산 이정목 시멘트 포장 임도-약 30분간 알바-시멘트 포장 임도-남한산성 등산안내도-남사랑약수터 이정표(자하문 남문 0.8 Km)-남한산성제1남옹성-지하문 남문-현위치 남한산성 2 돌탑-현위치 1.1 영춘정 이정목-제6암문-청량산(480봉) 삼각점-남한산성 사적 제57호 안내판-수어장대와 청량당-수어장대 탁지부측량소 삼각점-수어장대 무망루-우익문 서문-현위치 2.8 서문매표소-매탄터-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현위치 2.7 연주봉옹성-북장대터-현위치 2.6 북문-제1군포터-제4암문-제2군포터-제3암문(봉암성 암문)-현위치 2.4 동장대터-위례둘레길코스 이정표-봉암성-남한산성 여장 안내판-한봉 갈림길 이정표-현위치 2.3 동림사(벌봉) 이정목-고골-벌봉 바위봉(512.2봉)-외동장대터-무너진 암문-삼각봉-큰골과 한봉 갈림 이정표-엄미리계곡 갈림 이정표-벤취봉-엄미리계곡 갈림 이정표-엄미리 갈림 이정표-벤취봉-철탑봉-송전탑 84번-엄미리계곡 갈림 이정표-301.5봉 삼각점-은고개(43번 4차선 포장도로)-은고개입구 버스 정류장-엄미1리 버스 정류장-이정표(검단산 6.56 Km)-녹산보리밥식당에서 점심식사-지하통로-산양산삼농장-지하통로-지하통로-낚시터-이정표(검단산 6 Km)-죽림원-이정표(검단산 5.61 Km)-능선 안부 이정표(검단산 5.31 Km)-송전탑 41번-희망봉 갈림 이정표(검단산 4.95 Km)-벤취봉-어진마을버스정류장 갈림 이정표(검단산 4.49 Km)-삼성리와 각화사 갈림 이정표(검단산 3.77 Km)-용마산(595.5봉)-삼성1리 갈림 이정표(검단산 3.7 Km)-524봉-큰고개-고추봉(두리봉, 555봉) 하남공영차고지 갈림 이정표(검단산 2.1 Km)-무명봉-철탑고개-수자원공사 갈림 이정표(검단산정상 1.1 Km)-현위치 5.1 용마산 등산로 이정목-현위치 산곡초교등산로 이정목-산곡초교 갈림 이정표(검단산정상 0.5 Km)-헬기장-현위치 2.4 호국사. 산곡초교 등산로 이정목-곱돌약수터 갈림 이정표(검단산정상 0.1 Km)-검단산(657봉), 아랫배알미 이정표-현위치 3.3 유길준묘등산로 이정목-650봉 이정표(검단산 0.27 Km)-억새동산 전망대-현위치 3.2 유길준묘등산로 이정목-전망바위-459봉 이정표(검단산정상 1.38 Km)-벤취봉-해발 288봉 이정표(검단산정상 1.90 Km)-현위치 3.1 유길준묘 등산로 이정목(창모루마을 1.3 Km)-큰고개-292봉 삼각점-바위봉-창모루마을 빗돌-산행종료-하남환승버스정류장-30.3번 버스-잠실역-집-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7.00 Km (알바거리 포함)

산행시간 : 많은 사진 담으며 꾸준한 속도로 10시간 20분 (06시 25분부터 16시 45분까지)

교통편 갈때엔 옆지기 도움으로 애마 이용

           귀가할 땐 30-3번 공용버스로 잠실역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해 귀가

 

한남정맥 검단지맥이란 ???
칠장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은 석성산을 거처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아차지고개를 지나 수원 광교산으로 이어가고 또 하나의 산줄기가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법화산(383 미터), 불곡산(335 미터), 영장산(414 미터), 검단산(542 미터), 청량산(438 미터), 용마산(596 미터), 검단산(657 미터)을 거처 하남시 창모루 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한강에 넘겨주는 도상거리 약 53 Km인 이 산줄기를 한남검단지맥이라 부른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성곽을 따라 많은 생각을 하며 또 하나의 지맥 산행을 마무리했던 멋진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토요일 새벽같이 일어나 진행중인 영산기맥이나 진양기맥에 들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산객이 오래전 만들었던 산악회에서 연락이 오고 이번주 토요일 북한산 포금정사터에서 2014년 시산제를 시행하니 얼굴 좀 보자는 내용이다.

오랫만에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기에 기맥 산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토요일 불광역에서 포금정사터로 올라 정성스런 시산제를 지내고 내려 와 저녁 늦게까지 탁배기를 마시다 보니 일요일 산행이 걱정이다.

3차와 4차의 유혹을 어렵게 뿌리치고 밤 9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 와 남아 있는 검단지맥 제2구간을 다녀오기로 하니 금새 피곤이 밀려오고 조금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일요일 새벽 4시 30분에 눈이 떠지고 준비 할 것도 없는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서는데 옆지기가 함께 애마를 몰아 준다기에 지난번처럼 이 산객이 아침 해장국으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생각보다 쉽게 아침 밥도 먹고 오늘 출발지인 이배재에 도착을 하니 새벽 6시가 가까워 오는데 아직도 주위 사물이 분간이 안될 정도로 암흙속의 세상이다.

잠시 여명이 밝아 오길 기다렸다 아침 6시 20여분에 옆지기를 먼저 보내고 지난 번 내려 와 통닭 장사와 주차된 승용차들로 인해 담지 못한 이배재 표지석을 담고 산행 준비 후 천천히 2차선 지방도로를 건너 길에 이어진 나무계단을 타고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이 아침 6시 25분이다. 

 

 

은고개에서 맛난 쌈밥으로 배부르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용마산 오름 등로를 타고 오르던 시간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산행이 되였다.

배는 불러오고 기온은 자꾸만 올라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데 아침에 불어주던 산바람도 멈춰 굵은 땀방울을 참으로 많이도 등로에 뿌린 후 도착한 용마산에서 마침 그곳 정상에 머물던 부부산객에게 부탁해 멋진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만 이곳에서 기대했던 한강기맥과 앵자지맥 그리고 오늘 걸어 내려가는 검단지맥의 마지막 산줄기를 조망하고 싶었지만 박무로 인해 기대했던 풍경을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새벽 일찍 도착한 이배재에서 잠시 내려 이배재 표석을 사진에 담아 보지만 빛이 약해 제대로 담지를 못했다.

이곳 이배재고개는 338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도로로서 성남시와 광주시를 이어주는 도로의 고갯마루로서 이배재 고개 명칭은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으로 예전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임금이 있는 쪽으로 한번 그리고 부모가 계신 쪽으로 다시 한 번 절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또한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서 광주읍 목현리로 이어지는 고개로 상대원 동쪽에 있는데 광주장 보러가는 길로 퇴계 이황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다가 이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넘고 보면 황성이 보이지 않으므로 임금 계신 한양쪽을 향해 두 번절하고 떠났다고 하여 이배재라 칭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많은 통행량으로 인해 이곳 역시 터널을 뚫고 4차선 도로로 확장을 한다니 몇년 후에는 이곳 풍경도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안말과 보통골 그리고망덕산 왕기봉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생각보다 날씨가 푹해 금새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그 계단을 올라 입었던 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조금은 쌀쌀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상쾌하게 오른다.

한동안 이어지던 안전목책과 로프가 끝이나고 평이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는데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하였던 일출은 등로 우측 저 멀리 짙게 내려 앉은 구름과 안개로 인해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통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니 이배재에서 0.4 Km 올라 왔고 망덕산 왕기봉까지는 1.3 Km남아 있다는 첫번째 이정표를 지난다.

아주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며 등로 좌측의 성남시 중원구쪽을 내려다 보지만 그곳 역시 안개로 인해 보이는 것이 없고 다만 잡목 사이로 올라야 할 망덕산 왕기봉만이 드높이 하늘 위로 솟아 있다.

그렇게 다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쯤 벤취와 원형탁자가 있는 465봉에 도착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이제 이배재에서 1.0 Km올라왔고 망덕산 왕기봉까지는 0.7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와 그 옆에는 현위치 4.2 이배재고개정상이라는 이정목이 서 있다.

그곳 465봉을 넘어 내리막 등로로 내려가니 길이 벌써 질척이기 시작하고 조심하며 진행하니 갑자기 바위봉을 넘어 부드러운 등로가 열리고 있다.

다시 계단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현위치 4.1 보통골하산갈림길 이정목과 망덕산 왕기봉까지 0.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보통골은 상대원동에 속한 마을로서 그 고개는 보통골에서 사기막골로 가는 고개 를 일컬는다.

다시 475 바위봉을 넘어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금새 벤취들과 탁자 그리고 정상석이 있는 망덕산 왕기봉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다만 이곳 망덕산 왕기봉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자료를 찾을 수 없으니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곳 망덕산 왕기봉은 또한 우측으로 두리봉과 군두리봉을 분기시키는 분기점 역활도 하고 있는듯 보였다.

셀카 놀이를 즐긴 후 이제 검단산 방향으로 나 있는 부드러운 직진 등로를 따라 상쾌하게 걸어 본다.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계단지대을 내려서니 사기막골산갈림능선 이정목이 서 있는데 이곳 사기막골은 예전에 도자기를 굽던 지역으로 이제는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옛날 형태를 재현한다고 하니 기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등로 우측으로는 다시 두리봉 가는 갈림 이정표가 서 있고 안부에는 몇개의 벤취들과 탁자가 보인다.

 

 

두리봉 갈림길을 지나 질척이는 등로를 따라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사기막골 갈림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지화문 남문 4.0 Km란 남한산성 이정표를 만난다.

잠시 더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 등로를 타고 가 시원한 검단 약수 한사발을 마셔 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갈증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맛 좋은 약수를 마시고 좌측 등로로 다가가 용천약수와 황송공원 갈림 이정표를 지나 검단산 갈림길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다시 올라 안부에 도착을 하니 상대원뒷능선이란 현위치 이정목과 이정표가 서 있고 좌측 주능선을 우측으로 우회하는 뚜렷한 등로가 보이는데 그쪽 방향으로 검단산과 지화문 남문 가는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잠시 그 좋은 등로를 따라 걷다 좌측 봉우리가 궁금해 다시 뒤돌아 와 주능선으로 오르니 잡목과 억새가 자란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부드러운 등로가 열리더니 등로가 좌측으로 꺾여 곧바로 넓은 공터에 돌탑과 벤취들이 설치되어 있는 봉우리가 나타난다.

지도를 보니 506봉 쯤 되는 봉우리인듯 한데 왜 이곳에 이런 돌탑이 세워져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돌탑 봉우리를 내려오니 다시 부드러운 등로가 열리는데 등로 좌측으로 스피커가 4개나 달려있는 인공구조물이 보이는데 등산객들에게 방송이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한 목적 같아 보인다.

다시 질척이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불당리 윗말 갈림 이정표가 보이고 검단산 방향으로 진행을 해 넓은 등로를 타고 좌측 검단산 정상부로 오른다.

정상은 넓은 헬기장으로 되어 있고 한쪽에 정상석이 서 있는데 실제 정상은 바로 앞에 보이는 인공 구조물인 송전탑이 보이는 곳으로 현재는 이동통신사와 공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부득이 이곳 헬기장에 정상석을 세워 놓고 정상으로 대접하고 있다.

이곳 검단산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단대동과 은행동과 그리고 광주군 중부면 검복리에 걸쳐 있는 산인데 해발고도는 534.7미터로 북쪽의 청량산과 남쪽의 갈마현과 이배현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성남시와 광주군의 경계가 된다.

검복리와 단대동 사이에 위치하므로 검단산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전하는데 성남시의 동쪽에서 가장 높은 산에 해당한다.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산맥상으로는 광주산맥과 연결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기도 광주의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대동여지도에는 광주 북쪽에 이 산이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 이 산은 남한산성 도립공원 안에 포함된다.

 

 

한동안 검단산 정상에서 셀카 놀이를 한 후 뒤돌아 나오며 살펴보니 이곳 정상은 남한산성에 포함되어 있으며 성남시 선정 우수 일출명소로 선정되어 있다는 안내판도 보인다.

검단산 정상에서 아쉬운 정상부를 살펴보고 내려오니 황송공원과 성천약수 갈림 이정표가 보이고 곧이어 좌측 정상부의 KT 통신사로 통하는 시멘트 포장 임도와 만난다.

시멘트 포장 임도를 만나 오르지 못하는 좌측을 아쉽게 바라보고 우측으로 내려가니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난다.

좌측으로는 공군부대 진입 이정표가 보이고 직진으로 남한산성 지하문인 남문으로 가는 시멘트 임도가 보이는데 이곳에서 독도와 이정표 확인을 잘못해 약 30여분간 알바를 하게 된다.

시멘트 포장 임도 우측에는 나무데크가 보이는데 그 데크는 좌측의 검단산을 우회하는 등로처럼 보인다.

 

 

공군부대로 진입하는 시멘트 포장 임도를 버리고 직진의 시멘트 임도를 따라 완만한 내리막 포장도로를 따랐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을 우측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좌측으로 폐화장실과 콘테이너 박스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 오르니 금새 드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 공터 주위에는 많은 통신 안테나들이 보인다.

이곳을 오르면 알바인데 아직도 그 알바인줄도 모르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그 공터를 가로질러 낙엽진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낙엽속으로 들어가 본다.

  

 

잠시 더 내려가니 낙엽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내리막 경사도는 더욱 가파라지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지나다닌 발자국 표시도 많지 않고 급경사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기에 잠시 멈춰 자세히 독도를 해 본다.

독도를 해 봐도 방향을 잘 모르겠는데 등로 좌측을 보니 그곳이 더욱 지맥 산줄기 같은 풍경으로 다가 와 배낭 내려 놓고 정독을 해 본다.

그리고는 다시 스마트 폰을 켜 선답자의 산행 후기를 살펴보니 이곳이 아닌 군사용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지하문인 남문까지 가야 맞는 다는 사실에 다시 뒤돌아 올라 시멘트 포장 도로 삼거리로 복귀한다.

 

 

삼거리로 복귀해 이정표를 자세히 살펴보니 시멘트 포장도로 방향으로 종로 2.7 Km와 지화문(남문) 2.4 Km 방향과 거리 표시가 잘 되어 있는데 방금 전 진행하며 이정표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사진에 담기 바쁜 시간이였기에 정상 등로도 알지 못하고 진행을 하였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등로 좌측엔 적사함이 보이고 일정 거리마다 검단산에서 내려온 거리와 남한산성유원지와 화문(남문)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를 보며 진행을 한다.

이른 아침인데도 두어명의 사람이 올라오고 혹시나 하는 걱정에 남한산성 남문 가는 길을 물으니 이 길이 맞다는 대답에 인사를 하고 이제 마음 놓고 콧노래를 불러 보는 시간이다.

 

 

검단산에서 0.4 Km 왔고 다시 0.5 Km 지나 왔다는 이정표를 지나 한동안 내려가니 1.0 Km 지나 왔다는 이정표가 다시 보인다.

시멘트 포장도로 좌측으로도 많은 산길이 보이고 안내판도 보여 혹시나 하고 긴장을 하며 내려가니 등로 좌측에 검단산에서 1.2 Km 지나 왔고 좌측으로는 남한산성유원지까지 1.5 Km 남아 있으며 우측으로는 지화문(남문) 1.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보고서야 긴장이 풀리며 제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한동안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도로 좌측에 남한산성 등산안내도가 서 있고 곧이어 저 앞에 매점을 하는 작은 트럭과 여성 2명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계속 걸어가니 트럭 위에 간이 매점이 보이고 그 옆에는 남사랑약수터 가는 방향의 이정표가 서 있다.

좌측으로는 남한산성유원지로 가는 길이고 직진은 이제 지화문(남문)까지 0.8 Km 남아 있다는 거리와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그 트럭을 지나 우측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보내고 좌측 능선쪽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드디어 남한산성의 남쪽 성곽이 보이기 시작하며 성곽을 따라 걷게 된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57호로서 둘레는 약 8000 미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하고 있고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는데 4문과 16암문, 성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1897개, 옹성, 성랑,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도총섭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는데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고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반과 하궐 154칸이었는데 1688년(숙종 14) 좌덕당을 세웠다.

1711년(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을 두었으며 1624년에 세운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했고 관청으로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을 두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당, 여단 등을 두고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을 두었으며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 좌, 중, 우, 후의 5관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그리고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서장대(일명 수어장대)만 남아 있다.

이밖에 현절사, 연무관, 지수당, 영월정, 침과정 등이 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첫번째 만난 성곽을 지나 좌측으로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운동시설과 6각정이 보이고 이제 지화문(남문)까지 0.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다시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이제 본격적인 남한산성 성곽이 나타나고 첫번 만나는 성곽으로 가 보니 제1남옹성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옹성이란 일반적을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는 이중의 성벽을 말하는데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물이다. 

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미 오래전에 복원된 연주봉 옹성과 장경사 신지옹성은 여러번 소개 한 바 있으나 성의 남쪽에 위치한 제 1에서 3 남옹성은 성의 남쪽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그 중 제1남옹성은 3개의 옹성중 서쪽 첫번쨰 옹성으로 둘레가 약 426미터이다.

제1남옹성은 복원되지 않아서 아직도 돌무더기로 남아 있거나  성벽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제1남옹성 안내판을 읽어 본 후 진행을 하니 곧이어 남한산성 본성에 도착을 해 그 성벽을 따라 지화문인 남문으로 향한다.

계단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금새 남문앞 역사터 안내도가 보이고 이정표가 서 있으며 그 옆에는 지화문 안내판이 서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지화문인 남문을 통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 이제부터 남한산성 내벽을 따라 걸어 보기로 한다.

지화문(남문)은 성의 서남쪽 해발 370미터에 위치한 문으로서 산성 수축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고 지화문이라 하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되며 홍예문은 높이 4.75미터 너비 3.35미터 길이 8.6미터로 원상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문루는 정면3칸 측면3칸으로 건축양식이 잘 갖추어져 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남문을 통해 성곽 안으로 들어가 그 성벽을 따라 수어장대 방향으로 걸어 본다.

복원된 성벽을 따라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계단을 타고 이마와 등줄기에 땀방울을 흘려 본다.

그렇게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바로 아래에는 지화문인 남문이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제1남옹성이 올려다 보인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도 길게만 느껴지는데 지나 온 등로는 왜그리 쉽고 가깝게만 느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성벽 넘어 저 멀리에는 산상에 인공 구조물을 이고 있는 검단산 정상이 아스라히 멀어져 간다.

등로 좌측 저 멀리에는 성남시의 건물들이 박무속에 희미하기만 하다.

계속 오르니 성벽 우측에 돌탑이 보이고 그 돌탑 옆에는 현위치 남한산성2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그곳에서 올라야 할 영춘정과 청량산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성벽을 따라 오르니 현위치 1.1 영춘정이란 이정목이 보이고 그곳에는 남문에서 0.7 Km 지나 왔고 수어장대까지는 0.3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와 방향 표시가 함께 보인다.

그곳 이정목을 지나자 마자 성벽 우측으로 복원중인 영춘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오는데 몇년전 올랐을 때도 오늘과 똑같이 복원중이였다고 기억하는데 이곳만 왜 이리 늦게 복원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영춘정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8각정으로 남문에서 성벽을 따라 수어장대 방면(북쪽)으로 6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일명 팔각정이라고도 하는데 남문 아래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으며 청량산의 높이 462미터에 이르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성벽 바깥쪽 경사가 급해 현 위치에서 서울과 경기지방 일대를 관망할 수 있다.

 

 

 

그곳 영춘정을 지나 진행하니 성벽 바깥쪽에 제1남옹성에서 부터 함께 걸어 오던 등산객 한명이 앞서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다시 나무계단을 타고 등줄기에 땀방울을 흘리다 보니 제6암문(서암문)이 나타나고 잠시 사진 한장 남기고 그 글귀를 읽어 본다.

제6암문은 수어장대에서 서남쪽으로 100여미터 지점의 해발 474미터 지점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성벽이 청량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크게 회절하며 곡성의 형태를 이루고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회절부이다.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북동쪽의 돌출된 성벽이 적대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암문은 장경사 옹성부근에 설치된 2암문과 함께 개구부가 평거식인데 암문의 너비는 77cm로 매우 좁고 높이도 155cm 정도여서 성인은 서서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협소하다.

체성벽의 축조방법이나 위치상 이곳은 암문을 설치하기 위하여 설계된 것으로 보지만 현재 남아있는 암문 주변의 성돌이 체성벽의 성돌과 달리 정형성이 없고 축조방법이 다른 것으로 보아 후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암문은 폐쇄되어 출입이 안되며 이 암문의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남한지에 기록되어 있다.

 

 

제6암문인 서암문을 지나 오르니 우측으로 100미터 거리에 수어장대가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 진행한다.

그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성벽 옆에 처음보는 형태의 삼각점과 그 옆에 483봉인 청량산 정상을 알리는 삼각점 하나가 더 박혀 있다.

남한산성은 남한산(522m)과 청량산(462.6m) 두 개의 산에 걸쳐 있는 석성으로 남한산성의 주봉은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이다.

산성 이름을 유래시킨 남한산은 내성에서 벗어나 벌봉과 한봉으로 이어지는 동쪽 끝자락에 자리하며 서울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남한산은 주변이 평지여서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 주장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중심지로 볼 수 있는 경기 광주시의 지방지인 중정남한지에 따르면 남한은 북한에 대비하여 한강 남쪽이라는 의미로 광주의 별칭이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남한산도 북한산과 대칭되는 산 이름으로 풀이되는데 위키백과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대한민국 남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설명돼 있다.

 

 

청량산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잠시 더 오르니 성벽 우측으로 8각 원판이 놓여 있는데 아무 설명이 없어 무슨 용도인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조금 더 전진하니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설명판이 서 있고 그 좌측에는 남한산성 본성이라는 간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등로 우측에 있는 수어장대와 청량당을 들려 살펴 보고 출발하기로 한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인데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나 인조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당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1989)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랑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는데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와 청량당에 대한 글을 읽고 한바퀴 돌아 보니 우측 끝자락에  무망루가 있고 수어장대 좌측 기단 위에는 탁지부측량소 삼각점이란 안내판이 보인다.조선 영조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회는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점검을 하여 공사를 진행하다가 기일내에 완공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사 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결국 이회는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고 그는 죽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그가 절명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슬피울다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탁지부측량소 삼각점은 그냥 보면 한자가 새겨진 볼품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지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우리가 흔히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말 할 때 그 기준점은 어디일하고 궁금해 하였을텐데 이러한 기준점을 도로원표라 하는데 현재 서울의 도로원표는 세종로 4거리의 중심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대한제국 말기에도 이러한 기준점이 있었는데 바로 이 탁지부측량소 삼각점이 그것으로 대한제국의 탁지부라는 부서에서 우리나라의 토지측량을 위해서 삼각점 즉 세 개의 점을 정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의 것과 구분해 구소삼각점이라 하는데 남한산성에 위치해있는 이것은 장대라고 하며 머리 부분에 열십자가 새겨져 있고 옆 부분에 탁지부라고 새겨져 있다.

 

 

수어장대와 청량당을 둘러보고 다시 나와 겅벽 옆 넓은 등로를 타고 다시 우익문(서문) 방향으로 전진하니 수어장대에서 0.3 Km 지나 왔고 우익문(서문)까지 0.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등로 좌측 성벽쪽으로 약간의 공터가 보이고 그곳에 간이 매점을 운영하며 커피를 말고 있는 쉼터를 지나니 금새 국청사와 학암동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 우익문(서문)에 도착해 쓰여진 글귀를 읽어 본다.

이 우익문(서문)은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의 4개 성문 중 하나로서 산성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인조 2년(1624년) 산성을 축조 할 때에 세운 문이다.

정조 3년(1799)에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는데 서문 밖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의 연주봉옹성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과 서울 강남의 야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뛰어난 조망권을 가진 명소로서 4대문 중 서문의 규모가 제일 작다.

성문의 크기는 폭은 146cm이고 높이는 210cm인데 이렇게 작은 문을 만든 이유는 적이 송파의 진터벌에 진을 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서문의 크기를 큰 암문 수준의 작은 문으로 만들어 산성 축성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서문을 지나 다시 가파른 오르막 성벽을 따라 걸으니 등로 좌측으로 성남시와 서울 송파구가 내려다 보이고 아주 가까운 곳에는 남성대CC가 박무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천천히 성벽 따라 걸어가니 등로 우측에 매탄터라는 글귀가 보이고 잠시 발걸음 멈춰 읽어 본 후 진행하니 이제는 등로 우측 높은 곳에 바위로 된 병암남성신수비라는 글귀가 보여 읽어 본다.

읽고 난 후 진행하니 다시 금새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이 나타나 몇장의 사진을 담아 본다.

병암남성신수비는 정조3(1779) 6 18일부터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금석문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산성을 증축 또는 개측하는데 돈1만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과 석회 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와 보수할 곳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정조는 즉위 후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자주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의 관리실태와 주민들의 생활상 등 민의를 살핀 개혁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동문밖에 있는 기해주필이 그 사실을 잘 반증해 주고 있으며 이 비문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이 짓고 광주부윤 이명중이 쓴 것이다.

 

서문에서 북동쪽 능선 방향에 있는 이곳은 매탄터()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의 중간 부분에는 지름 5미터 깊이 1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 데 이곳에 매장되어 있던 목탄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소금과 마찬가지로 숯도 산성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물품 중 하나였는 데 남한지에는 숯을 묻은 것이 94곳에 24192석이라 하였고 천주사 별관에서부터 북장대까지 묻은 양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5암문(연주봉옹성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미터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미터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이며 통로의 길이는 5미터 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 있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며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근래의 발굴조사 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고 연주봉 옹성의 둘레는 315미터이고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 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제5암문인 연주봉옹성 암문을 지나 전승문(북문) 0.8 m 방향으로 다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현위치 2.7 연주봉옹성이란 이정목도 보이는데 각 성마다 거리 표시가 일반 이정표와 차이가 많아 헷깔리게 만든다.

이제 전승문(북문)까지 0.7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소나무 향이 그윽한 등로를 타고 콧노래를 불러 보는 시간이지만 역시나 많은 역사 공부를 하면서 걷다보니 속도는 전혀 나질 않는다.

 

 

굴곡이 없는 평이한 성곽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전승문(북문)까지 0.5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이고 잠시 후 다시 0.3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또 만난다.

다시 성곽에 붙어 걸어가니 북장대터가 나타나고 이곳에서도 그 글귀를 읽으며 역사 공부와 성곽 공부를 해 본다.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고 이곳은 북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장대라 불렸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는 수어청 소속의 5영중 중영장을 지휘했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였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한성봉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국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계속 성곽을 따라 걸어가다 앞을 보니 저 멀리 올라야 할 벌봉이 어서오라 손짓하고 있다.

 

 

그렇게 주위 풍경과 성곽의 건물이나 장소를 공부하며 걸어가니 금새 북문에 도착을 해 우측 넓은 시멘트 포장 도로로 내려가 사진 몇장 남겨 본다.

북문은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의 4개 성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 성곽 북쪽의 해발 367미터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하남시 상사창 하사창리로 이어진다.

정조 2년(1778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전승문이라 칭하였고 북문 밖은 가파른 계곡인데 병자호란 때에 이 골짜기 전투에서 적장 용골대의 사위 법화장군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여 산성 전투에서 승전보를 전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승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한강의 지천인 덕풍천으로 이어지는 수운을 통하여 걷어 들인 세곡을 등짐으로 운반하여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며 성문의 크기는 폭이 325cm 이며 높이는 365cm 이다.

 

 

 

종로로 내려가는 이정표와 남한산성도립공원안내도를 본 후 다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성곽 옆 등로로 올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저 앞으로 제법 많은 단체 등산객들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보이고 그들 뒤를 따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이제 하남시의 마을들이 박무속에 나타난다.

잠시 오르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연주봉옹성에서 이어져 온 남한산성이 비극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맙게 펼쳐져 있다.

조금 더 오르니 제1군포터가 나타나고 제4암문을 오르며 뒤돌아 본 성벽이 역사의 비극과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이어져 오고 있다.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로서 중정남한지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데 조사결과 이 군포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한 대지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춧돌이 발굴되고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다.

군포는 목조가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어 토석벽을 두른 건물로 보이며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서 온돌이나 난방용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남한산성 성곽길을 뒤돌아 보며 다시 오르니 등로 우측 멋진 소나무 옆에 높은 돌탑이 보이고 곧이어 제4암문 안내석이 박혀있다.

제4암문(북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으로 1 m 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이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다.

제4암문을 지나니 제2군포터가 다시 나타난다.

 

 

등로 우측의 제2군포터를 살펴보고 다시 성곽을 따라 걸어가다 성곽 좌측을 내려다 보니 하남시 삼사창동에 내려다 보인다.

조금 더 진행하니 전승문(북문)에서 1.4 Km 지나왔고 직진 방향으로는 좌익문(동문)까지 1.5 m 거리가 남아 있는데 좌측 제3암문(봉암성 암문) 방향으로 벌봉 가는 방향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가 서 있다.

제3암문(봉암성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 미터 높이가 2.65미터에 달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 제3암문을 통해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남한산성 내부 성곽을 벗어나 외부 성곽을 따라 걸어간다.

  

 

성곽 내부에서 외부로 나와 이제 성곽을 우측에 두고 걸어가니 현위치 2.4 동장대터란 이정목이 나타나고 위례둘레길코스란 이정표에 위례둘레길(벌봉) 0.7 Km 남아 있다는 거리와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다시 복원된 성곽을 벗어나는 곳에 또 다른 성문 하나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봉암성이다.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내부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게 뺏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때 성을 쌓았다고 한다.

 

 

봉암성을 지나자 마자 아직 복원되지 않은 성벽이 우측에 있는데 그곳에는 남한산성 여장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여장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의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로 축조한 평여장이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의 여장 규모는 길이 4.2미터, 높이 1.3미터, 폭 0.8미터 내외가 일반적이다.

여장 안내판을 지나 무너진 성곽길을 걸어가니 한봉 갈림목 이정표가 나타난다.

직진 방향으로 한봉과 노적산 가는 글씨가 보이는데 좌측으로 가야 할 벌봉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 벌봉 가는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한다.

 

 

 

잠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벌봉 앞 이정표가 서 있고 곧이어 현위치 2.3 동림사(벌봉) 이정목이 나타난다.

앞에 남한산성 제13암문이 보이고 그 암문 좌측에는 고골 안내판이 보이는데 지역명칭이 변화하는 뜻을 설명하고 있다.

제13암문에서 우측 바위봉으로 오르며 벌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 정상에는 아무 표식도 없이 큰 바위가 덩그러니 서 있다.

그 바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우측 바위 옆을 통해 조심하며 내려 오니 저 앞에 벌봉 설명석이 서 있다.

 

 

바위를 타고 조심하며 내려오니 벌봉(515봉) 안내석이 서 있고 읽어 보니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흡사 벌과 같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 있어서 침략하면서 즉시 깨뜨리므로 산성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실제로 청군이 이 봉우리에서 성내를 관찰하며 아군을 공략하였다.

이제 벌봉을 떠나 무너진 남한산성 외벽 성곽을 따라 남한산으로 오른다. 

 

 

무너진 성곽길을 타고 오르니 외동장대터란 안내석이 서 있고 다시 글귀를 읽으며 역사와 성곽 공부를 해 본다.

이곳은 외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동장대와 벌봉 일대를 조망 할 수 있는데 외동장대는 조선 숙12년(1686) 윤지선이 수어청 군사를 동원하여 봉암성을 축성할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측되며 들이 진을 치고 훈련하던 곳으로 보인다.

고지도를 보면 다른 장대와는 달리 외동장대는 누각에 대한 기록이나 표시가 없어 처음부터 누각이 없이 축대만 설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외장동대터를 지나니 무너진 성벽에 알 수 없는 암문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고 조금 더 올라 최고 높은 곳에 박혀 있는 남한산 삼각점을 담아 본다.

북한산과 대별되는 남한산은 역사적인 아품과 함께 그 이름조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까움만 이 산객의 가슴에 남겨진다.

 

 

그곳 남한산 정상에서 우측 저 멀리 바라보니 희미한 박무속에 아침에 넘어 온 검단산의 인공 구조물이 반짝이고 있다.

시원한 조망이 아니기에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볼 수 있는 조망이 있기에 다음을 기약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이곳 남한산성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무너진 성곽을 타고 조금 더 내려가니 벌봉에서 0.4 Km 진행했고 한봉과 큰골은 우측으로 흘러 내려가며 이 산객이 가야 할 등로는 엄미리(은고개) 3.9 Km 표시가 되어 있다.

이제부터 남한산성과 헤어져 은고개로 향한다.

 

 

헤어지기 아쉬워 무너져 가는 남한산성 외벽을 다시 사진에 담고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오랫만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러 본다.

잠시 더 내려가니 푹신한 낙엽이 깔린 등로가 나타나고 한동안 그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엄미리계곡 하산 갈림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도 엄미리(은고개) 3.3 Km 방향으로 내려가니 평이한 등로를 지나 통나무 오르막 계단이 보이고 곧이어 벤취 2개가 정상을 지키는 415봉에 도착을 한다.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평이한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엄미리계곡 하산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도 좌측 엄미리(은고개) 3.0 Km 란 방향이 진행 방향이고 또 다시 벤취 2개가 있는 무명봉을 넘어 엄미리 갈림 이정표를 만나 이곳에서는 은고개 방향이 지맥길이다.

엄미리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에 있는 법정 리로서 남쪽으로 번천이 흐르고 서쪽으로 남한산 자락이 위치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자연마을은 미라울, 벽수골, 새말, 안말 등이 있는데 미라울은 밀양박씨가 이곳에 묘를 쓰고 난 후부터 밀양골이라 하다가 이 말이 변하여 미라울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벽수골은 이 마을 뒷산부터 흘러내리는 냇물이 하도 맑고 푸르러서 이 마을을 벽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새말은 옛날에 이 마을을 원님이 이곳을 지날 때 엄나무 가지에 새들이 쉬고 있는 모습이 하도 평화스러워 이 마을을 새말이라 했다고도 하고 또 이 마을은 새로 만든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엄미리는 한양에 살던 엄정승이 이곳에 명당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보니 이 고개의 형태가 뱀의 꼬리 같아서 엄미리라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은 본래 대한제국 시절까지는 엄현과 미라동이 각각 다른 동리였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축소 개편하면서 엄현의 엄과 미라의 미를 따서 엄미리라고 마을이름을 짓고 1개리로 만들었다.
중부면사무소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하남시 방면으로 약 1.5 Km 지점에 마을 어귀가 나오며 엄현을 속칭 은고개라고도 하는데 은고개 마루턱에서 서쪽을 향하여 들어가면 미라동(속칭 미라울)과 벽수골 그리고 새말이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남한산성의 동쪽 밖에 형성되어 있기도 하며 이 마을은 미라울, 벽수골, 은고개, 새말, 안말 등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은고개를 경계로 하여 하남시 상산곡동과 접하고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금새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다시 나즈막한 안부로 내려가 통과하니 등로 좌측으로 가족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벤취 2개가 설치된 안부를 지난다.

낙엽이 깔린 푹신한 등로를 타고 조금은 여유를 부려 보지만 새벽 같이 밥을 먹어서 그런지 벌써 허기가 밀려오고 점심 식사가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시간을 보니 이제 아침 10시 50여분을 지나고 은고개에 내려가면 정확히 점심시간이 될 듯 하다.

물 한모금 마시고 다시 전진하니 등로 양쪽으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등로를 타고 편안하게 걸어 본다.

 

 

그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을 따라 내려가 안부를 지나고 다시 오르막 등로에도 설치된 안전목책과 로프를 타고 오르니 드높아 보였던 346봉의 송전탑을 우측 사면 등로로 우회하고 있다.

그 우회 등로를 타고 진행하며 정상으로 오르지 않음을 안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그곳을 지나니 등로 위에 많은 바위들이 박혀 있는 등로를 따라 조심하며 걸어 본다.

 

 

그 바위 등로를 지나니 송전탑 84번 밑으로 통과하고 그 송전탑 밑에서 등로 우측을 올려다 보니 오늘 지나온 검단산에서 남한산성을 돌아 내려 온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온다.

그곳 송전탑을 지나 안부로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엄미리계곡 하산 갈림길이 나타나고 이곳에서도 엄미리(은고개) 0.9 Km 방향으로 진행한다.

그곳을 지나 오르니 금새 301.5봉 삼각점을 만나는데 그 삼각점 뒤로는 학교법인 대림학원 학교림 안내판이 서 있다.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부드러운 낙엽 등로가 연결되고 곧이어 등로 우측으로 중부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그곳을 지나 내려가니 가족 묘지들이 나타나고 이제부터 많은 땀방울 흘리며 올라야 할 용마산과 검단산 줄기가 눈 앞에 드높게 올려다 보인다.

돌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벌봉에서 4.4 m 지나 왔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시멘트 포장 임도를 만난다.

시멘트 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내려가니 마실 가마솥 밥상이란 식당 간판이 크게 서 있는 은고개에 도착을 한다.

은고개는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와 하남시 상산곡동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동국여지승람이나 남한지에 엄현으로 표기되어 있다.

43번 4차선 지방도로 상의 고갯길을 은고개 또는 엄현이라 하고 고개 밑에 있는 작은 마을도 은고개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약간의 헷깔림으로 인해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43번 4차선 포장도로인 은고개로 내려가  우측으로 잠시 걸어가니 은고개입구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곳 정류장을 지나니 도로 우측으로 은고개계곡(엄미리계곡) 갈림 도로 이정표가 서 있다.

그곳 갈림길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넌 후 우측으로 내려가다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잘 몰라 도로 옆 주민에게 물어 보니 은고개 지하통로를 가려면 1 Km 이상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는 말에 이 산객이 준비한 자료와 차이가 많아 잠시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가 정독을 하면서 잠시 쉬어 간다.

한동안 정독을 하고 스마트 폰을 이용해 선답자들의 산행후기를 살펴보니 이 43번 지방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500여 미터 내려가면 맞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내려가니 엄미1리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곳에서 좌측으로 들어가 적당한 식당을 찾아 점심식사를 하고 진행하기로 한다.

 

 

도로 좌측으로 내려가니 용마산과 고추봉 그리고 검단산 이정표가 보이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우측으로 보이는 2중 지하통로를 타고 들어가 좌측의 녹산보리밥집으로 들어가 8000원짜리 쌈정식으로 거창한 점심을 해결한다.

약 40여분 간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배부르게 하고 따뜻한 커피 한잔까지 마시니 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 배부름이 용마산 오름길엔 죽음의 등로가 될 줄은 이때까지는 몰랐었다.

 

 

이곳 은고개는 원래 내려 온 고갯마루에서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이어가야 하지만 새로 생긴 중부고속도로와 그 고속도로 건너 마루금에 용마산 산양산삼농장에서 산삼을 심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엄미1리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 와 우회해야 하는 실정이다.

다시 점심 식사 전 통과했던 지하통로를 통해 43번 4차선 도로를 통과하고 용마산과 고추봉 그리고 검단산 안내 이정표를 지나 다시 나타나는 2중 지하통로를 통해 중부고속도로 2개를 통과해 진행하니 시멘트 포장 도로 좌측으로 원 지맥 마루금이 빼꼼히 올려다 보이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길목은 전부 검정 햇빛 차단망으로 막혀 있다.

그곳을 지나 전진하니 금새 도로 우측으로 작은 낚시터가 나타나는데 그곳에도 몇 명의 낚시꾼들이 손맛을 기대하며 더워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넓은 도로를 타고 처넌히 오르니 생각보다 더워진 날씨에 벌써 등줄기와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연신 떨어진다.

잠시 더 오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몇 년전 진행할땐 보지 못했던 녹색 철망이 밭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다.

 그 갈림 삼거리 중간에 엄미1리 버스정류장에서 0.56 Km 올라 왔고 검단산까지 6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우측 도로를 타고 오른다.

오르니 도로 좌측에는 녹색 철망이 가로막고 우측으로 큰 느티나무 한그루를 지나 용마산밀봉원 이정표를 지난다.

 

 

용마산 밀봉원을 지나 오르니 녹색 철망이 끝이나고 도로 우측에는 죽림원이란 커다란 빗돌이 서 있는데 대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고 커다란 소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에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그 가운데에도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이제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 임도를 우측으로 보내고 비포장 도로인 좌측 등로를 타고 올라 간다.

엄미1리 버스정류장에서 0.95 Km 올라 왔고 검단산까지 5.61 Km 남아 있다는 거리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벌써 뜨거워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묘지지대를 통과하며 등로 좌측을 바라보니 산삼 재배지역인 원 마루금에는 여전히 검정 햇빛 가림막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저 멀리 지나온 검단산과 지맥 마루금이 희미하게 다가오지만 뚜렷하게 분간하기는 어려울 정도이다.

그곳 묘지지대를 지나 오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엄미리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산이란 경고판과 식당 입간판들 그리고 검단산까지 5.31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좌측 원 마루금과 만나는 지점인데 그곳 산삼 재배지역은 여전히 검정 햇빛 가림막으로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 두측으로 90도 꺾어 오르막 등로를 타고 용마산 방향으로 오른다.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오르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지나온 검단산과 남한산성이 희미하게 박무속에 빛나고 참으로 멀리 걸어 왔노라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며 대견해 한다.

잠시 오르니 등로 옆에 41번 송전탑을 지나고 아주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희망봉과 광지원리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다.

등로 우측으로 희망봉과 광지원리로 가는 등로 표시가 되어 있고 좌측으로는 검단산까지 4.95 m 남아 있다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반갑다.

낙엽이 깔린 푸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벤취 2개가 놓여 있는 무명봉에 오른다.

 

 

무명봉을 떠나 출발하니 잡목 사이로 올라야 할 용마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기온이 오르면서 점심식사 후 오르는 시간이 생각보다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적당한 바위와 낙엽이 깔린 등로를 따라 오르니 어진마을버스정류장 갈림 이정표가 서 있고 이제 검단산까지 4.49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갑다.

그 안부 이정표를 지나니 통나무 계단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는 시간이 참으로 어렵고 힘이 든다.

굵은 땀방울이 오르막 등로를 적시는 시간이 꽤나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다.

 

 

약간의 바위가 산재한 등로를 지나 부드럽게 이어지는 낙엽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과 우측에 큰 바위가 나타나 그 가운데로 통과한다.

꽤나 많은 땀방울을 흘려 체력적으로 약간은 걱정이 되는 시간이지만 이제 그 끝자락이 멀지 않으니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조금은 빠르게 오르니 삼성리와 각화사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나타나고 이제 용마산 정상까지는 50미터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갑기만 하다.

그곳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니 곧바로 용마산 정상이다.

경기도 광주 하남시 남종면에 위치한 용마산(595.7봉)은 교통이 편리하고 한적해서 산행하는 맛이 호젓한데 등산기점은 거문다리 마을에서 고속도로 밑을 지나 계곡길을 따라서 안부로 오르는 길과 도마리 버스 정류소에서 포장길을 따라서 각화사로 들어가는 길등이 있다.
각화사는 전망이 좋고 물 맛이 특히 좋은데 절간 뒷편 능선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수림이 특히 울창하여 낮은 산에도 불구하고 서울 근교의 특성으로 인하여 주말이면 산행 인파가 제법 많다.
정상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검단산까지 종주 할수도 있으며 두번째 십자로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능선을 넘어 계곡을 따라서 내려가는 길은 진달래 나무와 암봉으로 이어지고 사충사당을 지나면 수박과 참외를 많이 재배하는 동수말에 닿는다.

이곳 용마산 정상에서 부부산객을 만나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한강을 내려다 본다.

 

 

 

용마산 정상석 우측으로 가 내려다 보는 한강이 너무나 도도하고 아름다워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지만 보고 싶은 두물머리와 천마지맥 줄기를 자세히 볼 수 없으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저 도도한 한강 지나 한강기맥 마지막 줄기인 두물머리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잡목 사이로 조만간 올라야 할 앵자지맥의 줄기도 보이니 이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시간일 것이다.

아쉬움 남기로 몇장의 사진을 담은 후 곧바로 용마산 정상을 출발한다.

 

 

잡목 사이 저 멀리 고추봉 지나 아련하게 보이는 검단산 봉우리가 고생한다며 조금만 더 참고 오라 손짓을 하고 있다.

낙엽이 깔린 푹신한 등로를 타고 황량하게 겨울을 이겨낸 활엽수를 바라보는 마음이 봄날이 되어 간다.

잠시 더 내려가니 잡목 사이로 고추봉과 검단산이 올려다 보이고 그 길이가 점점 가까워지니 그 푸근한 마음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니 무명봉이 나타나고 그 무명봉 넘어 평편한 장소에서 준비한 사과 하나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사과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안부로 내려가니 참나무시들음병 방제 사업 실행지란 안내판이 보이고 잠시 낙엽 깔린 평이한 등로를 따른다.

앞으로 걸어가니 참나무 잡목 사이로 올라야 할 고추봉과 그 뒤로 검단산이 얼굴을 내밀며 체력적인 부담을 가중시키지만 어짜피 올라야 할 봉우리이기에 체념한 듯 주위 풍경을 구경하며 전진한다.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또 다른 참나무시들음병 방제 사업 실행지란 안내판을 지나 낙엽 등로를 타고 오르니 몇명의 등산객들이 쉬고 있는 고추봉 정상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을 한다.

그런데 왜 하필 고추봉일까 하고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지 못하고 국토지리원의 두리봉이란 이름만 찾아 본다.

 

 

등로 좌측으로 하남공영차고지 2 Km란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내려가니 바위가 눈에 들어 오고 잠시 의아한 생각에 사진에 담아 본다.

남한산성을 지나 진행하면서 늘 낙엽 깔린 등로만 보고 걷다가 이런 평범한 바위만 만나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이 산객의 마음이 그렇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큰 바위 하나를 넘으니 등로에 작은 바위들이 산재해 박혀있고 그 바위 사이에는 떨어진 낙엽들이 쌓여 또 새로운 등로를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잠시 진행하니 용마산에서 봤을 때 두개의 봉우리가 낙타 등처럼 보였던 우측의 마지막 봉우리에 도착을 한다.

이곳 봉우리에서 등로는 좌측인 북서 벙향으로 떨어지며 진행된다.

 

 

고추봉 지나 마지막 높은 무명봉을 내려가니 등로 좌측 저 멀리 오늘 올라야 할 마지막 봉우리인 검단산이 빼꼼히 올려다 보인다.

시 후 공터같은 무명봉에 고사목 한그루가 박혀 있는 곳을 지나 이제 잡목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검단산을 바라보며 안부로 내려가 본다.

북사면의 등로엔 이제 얼음이 녹으며 질척이고 있어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는데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큰 활엽수 한그루가 자리하고 있는 작은 안부를 지나 계속 내리막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송전탑 하나가 나타나고 곧이어 등로 우측으로 수자원공사 3.4 Km란 이정표가 보인다.

그곳 우측 수자원공사 방향으로도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오르고 내려가는지 등로는 번질거린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검단산을 향해 남아 있는 체력을 모두 소진하는 시간이다.

날씨가 더워지며 산행도 점점 더 힘들어짐을 온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현위치 5.1 용마산등산로 이정목을 지나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공터에서 다시 잠시 쉬며 남아 있는 사과 하나를 더 먹으며 목마름과 더위를 식혀 본다.

잠시 휴식 후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통나무 계단이 이어지고 그 계단을 지나 뒤돌아 보니 멋진 소나무 한그루 저 멀리 지나온 고추봉과 그 우측 희미하게 고개만 내밀고 있는 요마산이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이제부터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검단산 정상으로 또는 그곳에서 내려오는 모습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바위 하나를 지나 오르니 이제 잡목 위로 부드럽게 드러난 검단산 산줄기가 이 산객에게 조금은 위안을 주고 있다.

무명봉을 지나 내려가니 파란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고 있는 임시 막걸리 매점이 보이는데 간절하지 않기에 그냥 지나쳐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임시 매점을 지나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 입구에 현위치 1.3 산곡초교등산로 이정목이 보이고 그 옆에 검단산 등산 안내도도 보인다.

좌측으로 산곡초교 하산 갈림길이 있는 곳으로 이제 검단산 정상까지는 0.5 만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갑기만 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굵은 땀방울을 흘리니 등로 좌측으로 헬기장이 보여 잠시 올라 검단산을 조망한후 내려 와 현위치 2.4 호국사-산곡초교등산로 이정목을 만난다.

좌측으로는 호국사 하산 내리막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그 등로를 따라 내려가고 이 산객은 100미터 남은 검단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곱돌약수터 갈림 이정표를 지나 오른다.

어렵게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드디어 이 산행의 이름을 만들어 준 검단산 정상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하며 많은 사진을 남겨 본다.

검단산 (657봉)은 한강과 접해 있어 산세의 막힘이 없고 동, 서, 북 3면의 조망이 뛰어 난 산으로 호수같은 팔당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검단산이란 이름은 충북 괴산에 거룩한 산이라는 뜻의 산이 있고 성남시 상대원동에도 535미터의 산이 또 하나 있다.
검단이란 산 이름은 백제 위덕왕 때 검단이라는 도인이 은거하여 유래했다는 설과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이 이곳에서 검사를 받고 단속을 하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위례성의 외성이 있던 산으로 조선시대까지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 하며 동쪽으로는 한강과 접해있어 산행이 어려우며 주로 서쪽과 북쪽으로 등로가 개설 되어 있다.

팔당댐 아래쪽 배알미동은 임금을 배알 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지명이며 이곳에서 동쪽으로 자리한 도미진은 백제 제4대 개루왕과 도미의 아내와의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 와 있어 복잡한 그곳 정상에서 잠시 하산 등로를 두고 고민을 하다 결국 배알미동 대신 창모루마을로 한산하기로 하니 아직도 약간은 찜찜한 면이 남아 있어 조만간 다시 올라 배알미동으로 하산을 해 볼까 생각을 해 본다.

 

 

이 산객이 자료를 찾아 보니 팔당대교쪽 바깥창모루마을까지를 검단지맥 종착지로 여기고 산행을 한 선답자드이 많은데 일부는 검단산 정상에서 팔당대교 쪽이 아닌 팔당댐의 배알미동쪽으로 하산해 마무리한 선답자들도 있어 조금은 고민을 했던 것이지만 역시나 많은 선답자들이 이용한 팔당대교쪽 창모루마을로 정하니 산행은 빨라진다.

하지만 조금은 여운이 남아 시간과 기회가 된다면 배알미동으로도 꼭 한번 내려가 두 등로를 비교 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바래 본다.

결정을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배알미동 하산 등로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이제 에니메이션고(현충탑) 방향의 등로를 타고 내려가 본다.

 

 

몇 년 전 함께 산행을 즐겼던 산친구들과 에니메이션고에서 올라 남한산성까지는 산행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등로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역시나 산줄기를 이어 걷는다는 것이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때는 그저 검단지맥이 있는지도 모르고 산이 좋고 산친구들이 좋아 올랐던 시절이였는데 이제는 걸었던 그 등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걷는 기분이 묘하기도 하다.

하산하기 전 아쉬움에 지나 온 등로도 한번 더 확인을 해 보니 가운데 고추봉 넘어 저 멀리 용마산이 드높게 높아 보이기만 하다.

 

 

산상 우측의 한강과 양평의 두물머리 그리고 그곳으로 산줄기의 역활을 다하고 사라지는 한강기맥과 좌측의 천마지맥 그리고 우측 저 멀리 조만간 들려야 할 앵자지맥이 이 산객의 가슴에 많은 추억과 상념을 남기며 펼쳐져 있다.

한번씩은 모두 걸어 지났던 산줄기들인데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낮설게만 느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저 산줄기에 올라 다시 이곳 검단산을 바라 보는 시선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한 시간이기도 하다.

 

 

검단산을 출발해 내려가 돌탑을 만나고 조금 더 내려가니 현위치 3.3 유길준묘등산로 이정목을 통과한 후 검단산 정상에서 0.27 Km 내려왔다는 이정표를 다시 만난다.

잠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간이매점이 보이지만 그냥 지나쳐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내려가니 등로 우측에 전망데크가 서 있고 우측에는 억새동산이란 안내판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해 잠시 물 한모금 마시며 주위 풍경을 조망해 본다.

벌써 지나온 검단산 정상부가 저 멀리 멀어지고 있다.

 

 

전망데크에서 바라 본 한강과 두물머리 그리고 한강기맥을 포함한 3개의 산줄기가 좌우측으로 펼쳐지며 다시 한번 이 산객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추억을 꺼내 본다.

어려운 시기에 홀로 오르며 산에 대한 편견과 자만심을 버렸던 천마지맥과 어머님을 잃은 슬품으로 고통스러움 속에 마지막 아버님과의 추억을 만들었던 한강기맥을 마치고 아버님마저 떠나 보냈던 상처가 남아 있는 한강기맥 그리고 산줄기 이어 타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산이 좋아 홀로 올랐던 앵자지맥 마지막 구간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두 눈에 촉촉함을 안겨주는 시간이다.

 

 

다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철쭉 군락지를 지나 현위 3.2 유길준묘등산로란 이정목이 나타나고 검단산 정상에서 0.96 Km 내려 왔다는 이정표도 서 있다.

그곳에서 좌측 편안한 등로를 버리고 우측 바위 능선을 따라 내려가니 암봉 전망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이 참으로 환상적이다.

좌측인 북서쪽으로 팔당대교쪽 내려가야 할 검단지맥 마지막 산줄기가 내려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한강 넘어 천마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예봉산과 운길산 자락이 올려다 보인다.

몇 번인가 올랐던 곳들이지만 이렇게 산줄기를 타고 산행을 하면서 바라보는 시각은 또 다른 시각으로 다가오고 있다.

 

 

잠시 그 전망바위를 내려가ㅣ 이제 검단지맥의 마지막 산줄기가 한강에 빠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그 끝자락에는 팔당대교가 내려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는 이미 도시화 되어 버린 하남시가 펼쳐져 있다.

다만 고속화 도로가 생기면서 검단지맥 마지막 줄기가 한강에 빠지는 그곳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워 한강에 손을 닦을 수 없음이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일 것이다.

 

 

그 암봉 전망대를 떠나 조심하며 내려가니 다시 좌측으로 이어져 온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안전한 등로와 만나 편안하게 진행을 해 본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한강과 팔당대교가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다시 나타나는 안전목책과 로프를 타고 내려가니 검단산정상에서 1.38 Km내려 왔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다시 가야 할 지맥 마루금을 살펴보며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저 앞에 벤취들이 있는 쉼터에 도착을 하는데 몇명의 등산객들이 그 밴취에 앉아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걸어 내려간다.

 

 

그 벤취 쉼터를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설치된 안전목책과 로프를 타고 계단을 내려가니 다시 벤취 쉼터 공터가 나타나는데 이곳에도 등산객들이 쉬고 있어 등로를 타고 계단을 내려가 본다.

잠시 더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운동시설이 있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벤취들이 설치되어 많은 등산객들이 쉬고 있는 장소에 도착을 한다.

그곳을 지나니 검단산정상에서 1.90 Km 걸어 내려왔고 에니메이션고는 좌측으로 크게 꺾여 내려가야 한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그 옆에는 처음으로 직진 방향으로 창모루마을까지 1.3 Km 남아 있다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목을 만난다.

이곳에서 창모루마을 방향의 직진 등로를 타고 내려가며 막바지 힘을 내 보는 시간이다.

 

 

 

좌측으로 에니메이션고 하산 등로를 보내고 직진으로 진행을 하니 나즈막한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앞에 푸른산 사랑운동안내판이 서 있다.

그 봉우리를 지나 잠시 더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생각지도 못한 삼각점 하나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성동 489에 해발고도가 292봉이다.

지도를 보니 그곳에 삼각점 표기가 되어 있어 이제서야 정확한 거리감이 생긴다.

삼각점을 지나 아쉬워 뒤돌아 담아 보니 저 멀리 내려온 검단산 정상이 잡목 사이로 빤히 올려다 보인다.

 

 

 

이제 고속도로같은 뚜렷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에니메이션고 내려가는 등로와는 달리 산행하는 등산객들도 만나기 힘이 들 정도로 호젓한 등로로 바뀌어 있다.

점점 낙엽 등로가 되는가 싶더니 그저 동네 앞산이나 뒷산같은 느낌으로 평이하게 걸어 본다.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공터를 지나니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그 끝자락에 암봉이 보인다.

그 암봉에서 주위 등로를 찾아 봤으야 하는데 그저 편안하게 진행 방향에서 좌측을 살펴보니 희미한 등로가 보여 그곳으로 내려가며 마지막 산행을 갈무리 한다.

 

 

암봉을 지나 내려가니 안창모루마을 가운데로 떨어지고 그 마을을 지나 내려가니 창우동마을버스종점이란 버스 정류장과 함께 2차선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창모루마을 표지석을 보기 위해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드디어 바깥창모루마을 입구에 큰 창모루미을 빗돌이 서 있고 사진에 담은 후 다시 걸어 왔던 도로를 따라 원위치를 해 본다.

 

 

도로를 타고 서쪽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 내려가니 하남정수장을 지나 밭이 나타나는데 벌써 농부들이 밭갈이를 하고 있다.

큰 식당 하나를 우측에 두고 내려가니 하남시 시청으로 통하는 도로 표시판 우측으로 환승주차장 글씨도 보인다.

그곳으로 가 운전기사에게 물어 보니 생긴지 얼마 안된 환승 주차장으로서 이곳에서 서울의 왠만한 장소는 모두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으로 들어가 배낭 정리를 해 본다.

 

 

정류장 내로 들어가지 않고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라는 기사님의 의견에 배낭 정리한 후 옷가지들을 정리하니 기다리는 30-3번 버스가 출발을 해 오르니 그 종점이 바로 잠실역이다.

잠실역까지 30-3번 버스에 올라 자리를 차지하고 귀가하니 생각보다 편안하게 돌아오고 잠실역에서 2호산 지하철을 이용하니 계획보다도 훨씬 일찍 집으로 돌아 와 가족 모두 함께 저멱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또 검단지맥도 무탈하게 완주를 하면서 다음에는 남아 있는 기맥 산행에 집중을 해 보자 마음 먹어 보지만 함께 산에 오르는 산친구들도 있으니 이번처럼 내려가기 힘들면 다음에는 앵자지맥에 올라 볼 계획을 세워 본다.

 

읽어 부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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