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경기도 용인시와 광주시 그리고 성남시의 검단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4년 03월 02일 (일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엔 흐렸지만 아침부터 맑고 따뜻했던 산행하기 무리가 없었던 날씨
산행온도 : 영상 01도에서 영상 11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향린동산 입구-우측 능선진입-용인 숲길-산약초재배 출입금지 경고판-한남정맥 마루금-운동시설봉 이정표(정상, 동백중학교와 향린동산)-한남정맥 이정목(향린동산 0.9 Km, 할미산성 0.9 Km)-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 안내판-한남정맥 이정목(광도아파트 3.6 Km, 할미산성 1.8 Km)-파란색 철그물망-2개의 접시안테나-콘크리트 포장임도-철대문-검단지맥 분기점 송신탑과 군부대 초소-잣나무 군락지-급경사 내리막 등로-88CC 주차장-88CC 본관-10번 홀-태극기 능선-잣나무 군락지-300봉-콘크리트 수로-11번 홀-1차선 포장도로와 사각정-원형 벙커 등로-무푸레고개 비포장임도-계단-안전목책과 로프-벤취봉과 송전탑 27번과 84번-이정표(법화산 정상 0.1 Km, 마북캠퍼스 1.9 Km)-벤취와 운동시설-법화산(383.2봉, 정상석과 삼각점)-이정표(마북캠퍼스 2.0 Km, 모현. 청덕동. 천주교공원묘와 마북동주민센타)-현대인재개발원장 안내문-운동시설과 8각정-계단-이정표(마북캠퍼스 1.85 Km)-벤취2개-마북산(382봉) 운동시설-교동산(349봉) 용인숲길 이정표(법화산 정상 0.8 Km, 할미산성 6.2 Km)-벤취2개-무등재(마북캠퍼스 갈림 이정표-법화산정상 1.5 Km, 마북캠퍼스 0.5 Km)-도태굴고개-328봉 법화산 등산로 안내판-이정표(마북동주민센타 2.7 Km)와 현대인재개발원장 안내문-시멘트 포장 임도-천주교용인공원묘지-천주교서울대교구 용인공원 봉안묘역안내(E블록)-큰무등치고개-이정표(정상 1.4 Km, 죽전동 2.3 Km)-이정표(법화산정상 1.7 Km, 야외음악당, 하늘말, 마북동 주민센타)-309봉-응달길고개 벤취와 운동시설-갈림삼거리 송전탑 93번-322.1봉-화장실-원형 철조망 넘어 잡목지대-절개지-채석장과 유진레미콘 및 희창냉장 조망-절개지와 철계단-대지고개(43번 4차선 포장도로)-강남엔코비 재활용센터-지하통로로 43번 4차선 도로 통과-구43번 2차선 포장도로-하늘의문 성당-산마루포차 휴게소-녹색 철망-송전탑 94번-가족묘지지대-골프연습장 철망-대지산(326봉) 이정표(숫돌봉과 약수터, 대지고개)-328봉(송전탑 63번)-잣나무 군락지-현위치 불곡산 104(죽전동 갈림길)와 제4구간 성남과 용인 갈림 능선 이정표(불곡산 1800 m)-팔각정 왕복-현위치 불곡산 105와 제4구간 성남. 용인 경계능선 이정표(불곡산 1600 m와 태재고개 3600 m)-이정표(구미동 산림욕장, 구미동 주택단지, 불곡산)-현위치 불곡산 106(조류학습장)과 제4구간 불곡산 능선 표고 299미터 이정표(불곡산 1100 m)-현위치 불곡산 107(골안사)-현위치 불곡산 108과 제4구간 부천당고개 이정표(불곡산정상 650 m)-참나무숲 나무 안내판-이정표(불곡산 350 m, 대광사와 구미중학교, 구미동 3350 m)-사각 쉼터-사고다발지역 현위치 행글라이더장-현위치 불곡산 109와 불곡산 갈림길 능선 이정표(불곡산정상 200 m)-현위치 불곡산 110(이마트 갈림길)-산악오토바이 출입금지 안내판-불곡산정상(335봉)-임시매점-현위치 불곡산 112(명상의 숲)-현위치 불곡산 113(수내동)-현위치 불곡산 114(형제봉)-이정표(태재고개 400m, 불곡산 1600m, 광주뒷골, 분당동)-잣나무 군락지-제3구간 태재고개 170m 이정표(불곡산 2000m)-불곡산. 영장산 등산안내도-태재고개(2차선 포장도로)-점심식사(태재 옳거니 식당)-능선진입-한산이씨묘지-묘지지대-태재로4가리(57번 지방도로)-이정표(불곡산, 광주신현2리, 영장산)-돌계단-묘지지대-현위치 영장산 201(태재고개)-골프연습장-현위치 영장산 202와 태재고개 이정표-현위치 영장산 203와 제3구간 넘어골고개 표고200m 이정표-현위치 맹산(3-1) 넘어골-현위치 영장산 204와 제3구간 봉적골고개-제3구간 봉적골고개 이정표-송전탑 5번-현위치 영장산 205-벤취봉-송전탑 6번-현위치 영장산 206(새마을고개)와 제3구간 새마을고개 표고 204m 이정표-송전탑 8번-현위치 영장산 207과 제3구간 율동 능선 표고 222m 이정표-현위치 영장산 208과 제3구간 율동뒤 능선 표고 227m 이정표-현위치 영장산 209제3구간 율동 능선 표고 272m 이정표-폐건물 2채-철그물망 지대-현위치 영장산 210-현위치 맹산(영장산) 3-3 (일곱사거리)-제3구간 일곱삼거리고개 표고 348m 이정표-349봉 강남300CC봉-강남300CC 철그물망-8각 정자-현위치 영장산 211와 곧은골고개 이정표-현위치 영장산 212-현위치 영장산 213(거북터)와 제3구간 거북터 표고 360m 이정표-벤취2개-통나무 계단-영장산(413.5봉)-안전목책과 로프구간-현위치 영장산 219와 야탑. 도촌동 경계능선 이정표-현위치 영장산 220과 제3구간 야탑. 도촌동 경계능선 표고 357m 이정표-이정표(갈마치고개, 영장산, 야탑동 도촌사거리)-357 벤취봉-제3구간 갈립능선 표고 250M 이정표-나무계단-섬말쉼터 사각정과 운동시설-송전탑 19번-제3구간 도촌동 경계 이정표-332.7봉 삼각점(수원 311)-제3구간 갈현. 도촌동 경계능선 표고 332.7 m 이정표-제3구간 영생관리사업소 뒤능선 표고 300m 이정표-고불산(317봉 돌탑과 이정표 및 송전탑 11번)-제3구간 영생관리사업소 뒤능선 이정표-출입통제 안내판-갈마치고개 야생동물 생태통로-중원터널 에코 브리지-성남시계 등산로 종합 안내도-현위치 4.4 갈마터널위 이정목-시계 등산로(갈마치고개-이배재)-송전탑 14번-사랑나무 연리지-송전탑 15번-요골산(제2구간 갈마터널 위 표고 332m)-송전탑 16번-현위치 고개7-송전탑 17번-현위치 고개6-벤취지대-현위치 4.3 이배재고개 이정목-안전목책과 로프구간-이배재(389번 2차선 지방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4.00 Km (지맥 약 22.00 Km, 접속구간 약 2.00 Km-향린동산 입구에서 검단지맥 분기점까지)
산행시간 : 많은 사진 담으며 꾸준한 속도로 08시간 51분 (07시 00분부터 15시 51분까지)
교통편 : 갈때엔 옆지기 도움으로 애마 이용
귀가할 땐 500-5번 강남역에서 광주까지 운행하는 공용버스와 분당선과 2호선 지하철 이용
한남정맥 검단지맥이란
칠장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은 석성산을 거처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아차지고개를 지나 수원 광교산으로 이어가고 또 하나의 산줄기가 향린동산(88CC 입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법화산(383 미터), 불곡산(335 미터), 영장산(414 미터), 검단산(542 미터), 청량산(438 미터), 용마산(596 미터), 검단산(657 미터)을 거처 하남시 창모루 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한강에 넘겨주는 도상거리 약 53 Km인 이 산줄기를 한남검단지맥이라 부른다.
난해한 분기봉을 잘 통과한 후 흥겨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즐겼던 산행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지난 금요일 남쪽 지방인 경남 거창과 산청 그리고 합천에 있는 진양기맥 산행을 마치고 하룻밤 묵으며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산행 후 올라오려는 계획은 예기치 못한 비 소식으로 접고 금요일 밤 늦게 집으로 복귀해 토요일은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토요일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일요일 올라야 할 검단지맥 산행 후기를 살펴보니 거의 모든 선답자들이 검단지맥 분기점과 88CC를 생략한 채 물푸레고개에서 시작을 하였는데 이곳 역시 사유지라서 출입이 용이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남정맥 산행 시 이 산객도 향린동산 뒷쪽의 검단지맥 분기봉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도로 타고 쫓기듯 내려 온 기억이 있어 어떻게 진행을 할 것인지 고민을 하다 일단 네이버 지도로 들어가 향린동산과 검단지맥 분기점 그리고 88CC의 지형도를 그려 본 후 프린팅 해 일단 마루금을 타고 산행을 시도해 보고 여의치 않으면 물푸레고개로 이동해 진행하기로 한다.
다만 새벽 일찍 그곳 향린동산으로 어떻게 가 산행을 시작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옆지기가 도움을 준다기에 새벽 그곳 향린동산 근처에서 해장국 한그릇 사주는 것으로 협상까지 끝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새벽 5시 40여분에 집을 나서 고속도로와 국도를 타고 향린동산 근처에 도착을 하니 새벽 6시 30여분을 넘기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24시간 열려있는 해장국집을 찾아 옆지기에게 아침 식사를 사주고 나와 향린동산 검문소 앞 도로에 도착하니 아침 6시 55분을 넘기고 있다.
산행 준비 후 옆지기를 보내고 천천히 걸어 향린동산 정문으로 가니 두명의 아저씨가 완강히 제지하고 3분여 실갱이 후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 앞에 보이는 영동고속도로 교각 밑으로 나 있는 접속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돌아 가 첫번째 만나는 좌측 능선으로 오르며 약간은 불안한 출발을 해 본다.
높지 않은 야산의 고속도로처럼 반질거리는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다.
대지고개까지는 잡목과 길찾기에 약간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지고개를 지나서부터는 뚜렷한 등로에 수많은 등산객들과 산책하는 주민들로 인해 길찾기보다는 사람들을 피해 진행하는데 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특히나 불곡산 정상부로 가까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는 사람들 행렬과 인파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나 얼었던 등로가 녹으면서 진흙창이 되어 어려움을 가중 시키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걸어 드디어 불곡산 정상에 서서 옆에 있는 학생에게 부탁해 증명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양주에 있는 불곡산은 올라본 적이 있지만 이곳은 처음이기에 자료를 찾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
좌측의 향린동산 정문에서 출입을 금지당한 후 다시 영동고속도로쪽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면 위 사진처럼 저 멀리 앞에 삼거리 갈림 도로판이 보이고 그곳 앞 바로 보이는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 들머리로 오르며 기나긴 하루를 시작해 본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으로 오르면 마성IC가 있는 작고개에서 할미산성을 통해 오르는 327봉으로 오를 수 있을 것 같고 그곳에서부터는 한남정맥 마루금을타고 분기점까지 쉽게 접근이 가능하리란 판단이다.
향린동산 정문에서 아저씨들에게 물어보니 요즈음 시국이 어수선해 사복 경찰들이 자주 출입을 하고 그렇게 외부인들이 자주 이 향린동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민들이 싫어 하기에 어쩔 수 없다며 이곳 산행 들머리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으로 봐 많은 선답자들이 이 산객과 비슷한 상황으로 몰렸던 것처럼 보였다.
넓은 수레길 같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엔 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쌓여 있고 낮동안 기온이 오르면 얼었던 등로가 녹으며 산행에 큰 지장을 줄듯 보였다.
잠시 향린동산 정문에서 실랑이 후 생각을 고쳐 운동하러 왔으니 기분좋게 운동이나 하고가자 하니 다시 상쾌한 아침시간이 되어 오르고 금새 등로 옆 나뭇가지에 매달린 산야초재배지 출입금지 알림판이 계속 나타난다.
그렇게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맺힐쯤 철조망과 묘지가 있는 능선에 도착을 해 우측 저 멀리 한남정맥 산행 때 걸었던 석성산과 할미산성 능선을 담아 본다.
그 넘어 혹시나 하고 일출을 기다려 보지만 두꺼운 구름으로 인해 일출은 보기 힘들것 같아 다시 자켓 하나 벗고 산행을 이어가니 운동시설과 벤취가 있는 한남정맥 주능선에 도착해 잠시 긴 심호흡을 해 본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이 산객이 리딩하며 걸었던 등로라서 그런지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정상과 동백중학교 및 향린동산 이정표가 있는 운동시설을 지나 내리막 등로를 따라 걸어 본다.
이제부터 한남정맥 산행을 하면서 걸어 놨던 선답자들의 띠지를 관찰도 하면서 안부로 내려갔다 오르니 한남정맥 이정목이 서 있다.
할미산성에서 0.9 Km 왔다는 거리 표시가 있는 이정목을 지나 철조망이 등로 좌측으로 따라오는 낙엽 깔린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오르니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 지나 짧은 가파른 등로를 오르니 다시 하나의 한남정맥 이정목이 서 있는데 이제 좌측으로 광도아파트 3.6 Km, 그리고 지나온 우측 방향으로 할미산성 1.8 Km란 방향과 거리 표시 밑에 누군가 향린동산이란 글짜를 적어 놨다.
그곳 이정목에서 잠시 아무 생각없이 진행하다 파란 철망을 우측에 두고 좌측의 두 철망 사이로 진행해야 할 것을 그 파란 철망을 좌측에 두고 우측 등로로 내려가다 뒤돌아 와 괜시리 어색한 미소를 지은 후 정상 마루금으로 걸어 간다.
우측으로는 쓰러진 파란 철망과 좌측 아래로는 하얀 시멘트 포장임도를 두고 가운데로 걸어가니 갑자기 녹슨 2개의 접시 안테나가 예전과 동일한 모양과 위치에 그모습 그대로 놓여 있다.
이제 검단지맥 분기봉이 아주 가깝게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그 접시 안테나를 지나자 마자 좌측 아래에 시멘트 포장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 나가고 그곳에서 분기한 또 다른 시멘트 포장도로 하나가 검단지맥 분기봉쪽으로 나 있는데 바로 그 포장 임도로 내려서서 우측 철조망과 철대문이 보이는 검단지맥 분기봉쪽으로 올라간다.
예전에 한남정맥 산행 시에도 이 철대문 앞에서 보이지 않는 검단지맥 분기점을 사진에 담고 뒤돌아 내려가 삼거리에서 또 다른 우측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88CC 로 진행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잠시 머뭇거리며 분기점 안으로 들어 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데 철대문 좌측 한쪽에 작은 개구멍이 나 있고 배낭을 먼저 넣은 후 조심하며 몸을 숙이니 통과가 가능하다.
속으로 환희의 함성을 지르며 그 정상으로 올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검단지맥 분기점에서 통신안테나와 군부대 초소 그리고 굽어진 쇠파이프들을 사진에 담으며 감격해 본다.
분기점에서 몇장의 중요한 사진들을 담고 검단지맥 등로로 빠져 나갈 수 없을까 둘러보지만 그곳으로 이어지는 쪽문 하나는 자물쇠가 채워져 꼼짝도 하지 않기에 다시 방금 전 통과했던 개구멍을 통해 그 검단지맥 분기점을 빠져 나와 이제는 시멘트 포장 임도 좌측의 철조망을 어떻게 뚫고 잣나무 숲으로 들어 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왔다 갔다 해 보니 철대문에서 접시안테나쪽으로 조금 내려간 지점에 다시 철조망이 잘려있고 사람 하나 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 눈에 들어 온다.
그곳으로 재빨리 조심하며 들어가 이제는 우측의 급경사 절개지와 잣나무 그리고 좌측으로는 철조망을 두고 그 사이로 조심하며 좌측으로 걸어 들어가니 검단지맥 분기봉 바로 뒷쪽으로 도착을 하고 그곳 우측으로 넓은 임도 같은 가파른 내리막 등로가 열려 있다.
많은 낙엽이 쌓여 무릎까지 빠지는 등로를 타고 조심하며 그 내리막 낙엽길을 내려오니 바로 눈 앞에 많은 차량들이 보이고 귓전에도 시끄러운 차량 통행 소음이 들려온다.
88CC 주차장이 내려다 보이는 잣나무 숲에서 동태를 살피니 생각보다 많은 직원들과 캐디들이 이곳 저곳을 청소도 하면서 손님 맞이에 바쁜 풍경이다.
아주 조심하며 개나리 나무로 만들어 놓은 잣나무 숲 담장을 넘어 조심스럽게 직원들 눈을 피해 주차장 가장자리의 차량 뒤를 통해 앞으로 진행하고 계단을 통해 좌측 본관쪽으로 걸어가니 골퍼들이 이상한 차림의 이 산객을 보면서 요상한 복장을 했다는 눈치이다.
그냥 다 무시하고 본관쪽으로 가니 많은 캐디들이 손님 맞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88CC 본관 앞에서 남자 직원 한명을 만나 잠시 실랑이를 벌이지만 이른 아침에 홀로 그것도 골퍼들이 골프를 치기 직전에 빨리 통과를 한다고 하니 많은 경험이 있었는지 고민하다 조심하며 빨리 통과하라고 일려 준다.
본관 앞을 지나 10번 홀이 시작되는 카트 도로를 타고 11번 홀쪽으로 진행하다 보니 10번 홀에서 막 라운딩이 시작되였는지 나이스란 탄성이 들려오고 앞을 보니 10번 홀 중간에서도 몇명의 골퍼들이 라운딩을 돌고 있다.
그곳 10번 호 한가운데에서 우측 카트도로를 버리고 골프장 잔디를 넘어 좌측 태극기 능선으로 붙어 어렵게 오르니 이제서야 긴장이 풀리며 약간은 피곤함이 밀려 온다.
이제 앞에 보이는 태극기를 따라 걸어가며 진행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보니 송전탑 27번과 84번이 동시에 걸려 있는 철탑도 올려다 보인다.
이제 시간이 8시를 넘기면서 그린에는 많은 골퍼들이 라운딩을 즐기기 시작한다.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가능하면 그린에서 먼 주능선 가운데를 통해 진행을 하고 진행하다 가끔 뒤돌아 보면 이제 구름을 뚫고 나온 강렬한 햇살에 반짝이는 88CC 골프장과 그 뒤 저 멀리 멀어지는 검단지맥 문기봉이 우뚝하다.
태극기 능선이 끝나고 일반 잣나무 숨으로 들어가니 식재된 듯한 멋진 잣나무들이 도열해 있고 그 잣나무 사이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깃대봉이 있는 300봉이다.
하지만 깃대는 사라지고 그 깃대를 세워뒀던 지지대만 그곳이 300봉임을 알리고 있다.
깃대봉을 지나 내리막 등로에도 멋진 잣나무들이 일렬로 도열해 헤어지는 산객을 배웅하고 있다.
이렇게 좁게나마 등로를 열어주고 골프공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물망을 설치해 준다면 큰 박수를 받겠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다시 조금 더 잣나무 숲을 내려가니 절개지가 나타나는데 그 앞에 좌측으로 콘크리트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어 그 배수지를 타고 내려가다 우측 능선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니 사각정자가 보이고 앞에는 포장도로가 그리고 그 포장도로 좌측으로는 10번 홀 끝 가장자리가 내려다 보인다.
10번 홀 끝 가장자리에 설치된 포장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타고 능선으로 오르니 역시나 많은 등산객들이 다니지 못한 곳이기에 등로조차 없다.
무조건 능선으로 올라보니 그곳에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걸어 진행하니 갑자기 원형 벙커가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능선 우측으로는 벌써 골퍼들이 그린 홀컵 가까이 와 라운딩을 즐기고 있다.
몇개의 원형 벙커를 지나니 다시 등로는 소나무의 온순한 등로로 바뀌고 이제부터는 88CC와의 예기치 못할 실랑이에 대한 걱정도 사라진다.
어찌되였던 그 88CC 본관 앞에서 만나 검단지맥 마루금을 통해 지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직원과 몇몇 캐디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한 마음 전해 드린다.
원형 벙커가 끝나고 잣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 우측 소나무 가지 사이로 이제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천주교용인공원묘지와 그 뒷쪽의 마루금 그리고 드높게 솟아 있는 송전탑들이 시야에 들어 온다.
평범한 풍경이지만 쉽게 들어 와 담을 수 없는 조망이기에 몇장 더 남기고 다시 가던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옆지기와 많은 양의 뼈해장국으로 배를 채웠지만 긴장과 실랑이로 인해 벌써 허기가 지는듯 체력이 약해짐을 느낀다.
잠시 쉬면서 준비한 간식하나 먹고 물한모금 마시니 다시 정신이 들며 진행에 큰 어려움은 없다.
다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금새 내리막 드올가 이어지는데 등로는 보이지 않고 우측으로 골프장 철망만 따라 온다.
그곳 정상부에서 살펴보니 등로는 우측 철망과 멀어져 좌측으로 휘어지며 완만하게 내려가는데 내려가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풀푸레고개이다.
청덕리 아파트단지에서 올라오는 비포장 임도가 좌측에서 올라오고 우측으로 올라가니 골프장 철문과 철망이 막고 있어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하다.
향린동산 옆 산행 들머리에서 1시간 18분 그리고 검단지맥 분기봉에서는 정확히 38분 걸려 도착한 처음 산행 들머리 풀무레고개에 무탈하게 도착을 한 것이다.
물푸레고개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으로 불리는 탄천의 발원지 부근은 옛날부터 물푸레나무가 많고 항상 맑고 푸른 물이 흘러 내린다고 하여 청덕리 혹은 물푸레골이라 불리던 곳의 고갯마루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물푸레고개에서 이제 완전히 88CC와 헤어져 좌측 고무계단을 타고 우측에 88CC를 두고 가파른 절개지를 오르면 다시 온순한 등로로 변하고 뒤돌아 보면 방금 전 지나온 검단지맥 분기점에서 88CC를 지나 이곳으로 이어져 온 마루금이 햇살에 반짝인다.
조금 더 오르니 등로는 고속도로처럼 넓고 가파르게 변하고 조금 더 오르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있는 등로로 바뀐다.
그 로프지대를 오르니 벤취가 있는 무명봉에 오르고 그 앞에는 27번과 84번이 함께 붙어 있는 송전탑 넘어 천주교용인공원묘지와 그 뒤로는 문수산과 문형산이 가로막아 검단지맥 마루금은 보이질 않는다.
잠시 무명봉에서 조망을 즐긴 후 송전탑을 우측에 두고 넓은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잣나무들이 도열해 있고 잠시 후 안부로 떨어지는데 그 안부 앞 위쪽으로는 팔각정 하나가 올려다 보인다.
그 안부로 내려가니 직진으로 법화산 정상까지 0.1 Km 거리이고 우측 진행방향으로는 마북캠퍼스 1.9 Km란 방향과 거리표시가 되어 있지만 잠시 법화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한다.
오르니 몇명의 산책객들이 운동도하고 쉬고 있는 법화산 정상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기고 지나온 한남정맥과 검단지맥 마루금을 뒤돌아 본다.
법화산 자료를 찾아 보니 법화산은 용인시 구성지역에 있는 385.2 m의 산으로 조선지명지에는 읍내면 상마곡(마북동)와 동변면 수청동(청덕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경기도 용인시의 수지구, 기흥구와 처인구의 3개구 모두에 걸쳐 있는 산이다.
용인시는 본래 용구현과 처인현을 합치고 용구에서 용자와 처인의 인자를 합쳐 용인현이라고 칭하다가 후에 양지군을 합쳐 오늘의 용인시가 되었는데 용구현은 고구려 때 구성현 또는 멸오라고 부르고 신라 경덕왕 때는 거서현으로 개칭되어 한주의 영현에 속해 있다가 고려 초 용구현으로 바꿨다.
1018년(현종 9) 지방 제도가 다시 개편되어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이 설치되는데 이때 용구현은 광주목의 임내로 편입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현으로 남아 있다가 1172년(고려 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으며 후에 승격되어 현령관이 파견되었다.
구에 대해서는 본래 말을 뜻하는 의미라는 견해와 큰 기장을 뜻하는 거서의 거와 함께 크다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견해가 있는데 1413년(조선 태종 13) 처인현과 합해 용인현으로 고쳐졌다.
이처럼 구성지구는 옛부터 용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충지이자 주요 지역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법화산에서 잠시 쉬면서 그 정상석 우측 뒤로 돌아 가 지나온 마루금을 살펴보니 그곳 위에서 떠오른 강한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깨끗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억속에 남겨둘만큼의 추억하나를 남겨 본다.
우측 저 멀리 우뚝한 석성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마성IC가 있는 작고개로 가라 앉았던 산줄기는 다시 고도를 높혀 할미산성을 들어 올리고 그 줄기를 이어 검단지맥 분기봉을 들어 올리고 있다.
그 분기봉 아래로는 파란 그물망이 보이는 88CC가 자리해 이 검단지맥 산행을 하고 있는 산꾼들에게는 마의 구간이 되어 있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제 법화산을 출발해 북쪽 방향으로 내려가니 등로 좌측에 현대인재개발원장의 안내문이 보인다.
운동시설과 벤취를 지나 내려가니 팔각정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니 마북캠퍼스 1.85 Km 이정표가 서 있는.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고속도로 같은 넓은 등로가 열리고 금새 벤취가 있는 곳을 지난다.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동네 주민이 운동을 하고 있는 운동시설의 마북산이라 생각되는 382봉을 통과한다.
이곳 마북산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마북산을 지나 다시 평이한 등로를 따라 가니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길게 이어진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가 본다.
내려가니 다시 평이한 등로가 열리고 그 능선을 따라 걸어가니 소나무들이 정상을 지키는 무명봉을 넘는다.
그 무명봉을 넘어 내려가니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활엽수가 등로를 따라 줄지어 있고 조금 더 진행하니 용인숲길에 법화산 정상에서 0.8 Km 지나왔고 할미산성까지는 6.2 Km 지나 왔다는 거리 표시가 있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 이정표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을 짧게 오르니 벤취 2개가 놓여 있는 349미터의 교동산 정상이다.
교동산을 지나니 그곳에도 현대인재개발원장의 안내문이 붙어 있어 읽어 보니 이 지역이 현대 인재개발원 및 종합 연구단지이니 출입금지 및 기타 금지 사항을 적어 놓은 안내판이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갈참나무 지대를 타고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간다.
잠시 안부를 지나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마북캠퍼스 0.5 Km 갈림 이정표가 서 있는데 법화산 정상에서 1.5 Km 지나 왔다는 거리표시도 함께 되어 있다.
마북캠퍼스 갈림 삼거리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주변의 갈참나무의 많은 부분에 검은 비닐이 둘러쳐져 있는데 살펴보니 해충을 박멸하기 위한 진득이 비닐인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잠시 오르니 바위들이 산재해 있는 무명봉을 넘어가고 곧이어 법화산등산로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해 드넓은 천주교용인공원묘지를 내려다 본다.
마루금은 저 공원묘지 뒷편으로 이어지는데 공원묘지 한가운데에는 몇년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묘지도 내려다 보인다.
무명봉 지나 이제부터 천주교용인공원묘지를 우측에 두고 좌측 가장자리 등로를 따라 걸어간다.
잠시 내려가니 현대인재개발원장의 안내문이 붙어 잇고 그 아래엔 마북동주민센터 2.7 Km란 이정판도 보인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내려가니 법화산정상에서 1.9 Km 지나 왔다는 이정표가 보이고 조금 더 진행하니 또 다른 이정표에 법화산정상에서 1.9 Km 란 글씨가 보인다.
조금 더 내려가니 비포장 임도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바뀌는데 그 우측 옆에 용인공원 봉안 묘역안내(E블럭)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좌측으로 넓은 공터가 보이는데 그 공터로 가 내려다 보니 구성읍쪽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구성읍은 고구려가 자국에 편입한 백제 영지를 구성으로 명명한 것은 우리말의 고어에 크다는 뜻의 말아(예:말매미, 말 잠자리)를 한자음 구로 표기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라 또는 말은 마루의 동의어로서 크다 또는 높다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할 때 구성은 큰 성 또는 마라재(높은 곳)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풀이되며 본래 고구려의 구성에서 유래된 용인시 최초의 행정지명이다.
구성동의 법정동으로 언남동과 청덕동이 있는데 언남동은 언동과 남동이 합쳐진 지명으로 남동은 남쪽에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언동의 언은 선비 언자로 덕망 높은 선비를 지칭하며 이곳에 향교가 있어서 언동이라 하였다고 전해지며 청덕동은 동변면의 수청동과 덕수동에서 각각 청자와 덕자를 따서 정해졌다.
수청동은 마을 뒷산이 물푸레울인데 물푸레는 물푸른의 변음이라고 할 때 물푸른의 한자 표기가 수청동이 되며 덕수동은 예부터 법화산 물푸레울에서 발원하는 물이 유난히 맑고 푸르러 덕수라 하였다고 하는데 덕은 크다는 뜻도 있으므로 큰 물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지명으로 풀이하고 있다.
지금은 모두 도시화가 되어 있어 옛날 지명유래도 변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구성읍을 조망한 후 다시 콘크리트 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임도 좌측에 높은 통신탑이 서 있고 그곳을 지나 진행하니 나즈막한 안부로 떨어진다.
다시 조금 더 걸어가니 좌측 능선쪽으로 등로 하나가 갈라지는 곳에 정상 1.4 Km와 죽전동 2.3 Km 이정표가 서 있는데 죽전동 방향이 지맥길이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법화산정상과 야외음악당 이정표가 서 있는데 등로 좌측으로는 하늘말과 마북동주민센터 갈림 표시도 함께 붙어 있다.
이곳이 무등재라는데 정말 무등재인지도 의문이고 또 다른 선답자들은 도태굴고개라고도 하는데 도대체 어떤 지명 이름이 맞는지 헷깔리기만 하다.
아마도 이 산객의 생각에는 무등재는 마북캠퍼스 갈림 이정표가 서 있던 곳으로 벌써 지나쳤고 이곳이 도태굴고개쯤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하늘말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무등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임도 우측 공원묘지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세워진 고 김수환 추기경의 묘역도 내려다 보인다.
살아 계실때 뵙지 못하고 이렇게 선종한 이후에나 묘역을 통해 만날 수 있음에 조금은 아쉬움도 있지만 그것이 인간사이니 지나갈 수 밖에 없다.
잠시 더 오르니 등로 옆 나뭇가지에 인터넷을 통해 후기글을 자주 접했던 현오김태화님의 홀대모 산줄기를 찾아서란 띠지가 반갑다.
이제 콘크리트 포장 임도와 헤어져 산길로 접어 들지만 여전히 공원묘지는 등로 우측으로 따라오고 있는 풍경이다.
이곳은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지역인데 도태굴고개의 자료는 찾지 못하고 모현면에 관한 자료만 소개를 해 보기로 한다.
모현면은 용인시 2읍7면10동 중의 하나로 본래는 쇄포면이라 하였는데 이는 삼으로 직조한 베와목화에서 뽑아낸 실로 직조한 무명 천을 잿물에 삶아내고 물에 담궜다가 햇볕에 널어 빛이 바래도록 포쇄하던 곳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 후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해를 능원리에 안장한 후부터는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모현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하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묘현이라고 한 기록이 있고 용인현읍지등에는 모현촌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모태골고개에서 지나 온 마루금을 뒤돌아 보는 시간도 의미가 있는듯 하다.
다시 이어지는 능선 등로를 따라 오르니 갑자기 등로 좌측에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그 공터에는 많은 운동시설들이 준비되어 있고 동네 주민인듯한 몇명이 운동과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응달길고개라 생각되는 지점인데 보기에는 고개가 아닌 봉우리처럼 보여 고개가 갸웃뚱 거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곳 응달길고개 자료도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으니 아쉬움만 남는데 아마도 이곳 용인 땅이 예전보다 많이 개발되고 넓어지다 보니 그 마을이나 지명 유래 또한 뒤죽박죽이 되어 제대로 찾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응달길고개를 지나니 다시 산길이 시멘트포장 임도로 바뀌고 그 임도를 따라 우측의 천주교용인공원묘지를 지나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마루금과 그 좌측 저 멀리 멀어지는 한남정맥 마루금을 조망하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오늘은 이곳을 찾는 손님도 또 떠나가는 손님도 없으니 그저 이어지는 산줄기를 타고 걸어가는 길손의 거친 숨소리만이 공원묘지를 맴돌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하니 시멘트 포장임도 좌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갈리고 그 뒷쪽으로 높은 송전탑 하나가 올려다 보이는데 이 길은 저 송전탑 공사를 하면서 만들어진 등로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이곳에서 잠시 93번 송전탑 방향으로 진행을 할까 아니면 공원 묘지를 더 따라 올라 322.1봉을 거쳐 진행할까를 고민하다 322.1봉의 묘지쪽으로 오른다.
드디어 이곳 천주교용인공원묘지의 322.1봉 묘지 위에 올라 지나온 검단지맥 마루금을 뒤돌아 보니 벌써 많이도 진행하여 왔다는 생각이다.
잠시 조망을 즐기고 다시 그 322.1봉 묘지를 지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삼각점을 찾아 보지만 찾지 못하고 내려가 다시 시멘트 포장 임도와 만나니 그 임도 좌측에 간이 화장실 하나가 보인다.
그 화장실 뒷편으로 살펴보니 원형 철조망을 지나 우거진 잡목 사이로 희미한 등로가 보이고 그곳으로 내려가며 어렵게 검단지맥 제1구간을 이어가 본다.
산행 후 살펴보니 방금 전 포장 임도 좌측의 49번 송전탑 갈림 삼거리에서 송전탑 방향으로 잘못 진행하면 우측의 채석장을 보지 못하고 그 좌측 능선으로 내려가게 됨으로 주의를 해야 할 구간으로 생각되어 졌다.
원형 철조망을 넘어 잡목지대를 지나니 짧은 절개지가 나타나고 그 아래에는 드넓은 채석장과 희창냉장 건물이 나타난다.
또 얼마나 많은 자연을 훼손하고 산 하나를 들어내야 저 작업이 멈출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현실에 막막함이 밀려온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겠지만 채석한 이후라도 제대로 된 사후복구를 해 최단시간 내 회복되는 자연을 볼 수 있기를 바랠 뿐이다.
이제부터 잡목과 가파른 낙엽 쌓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우측에 채석장 절개지를 두고 조심하며 내려가 본다.
내려가다 잡목이 사라진 틈을 이용해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온 간이 화장실의 작은 건물이 잡목사이로 멀어지고 있다.
등로 우측의 흉물같은 채석장과 희창냉장 건물을 내려다 보며 잡목과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을 밟으며 진행하니 저 아래쪽에서 차량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지도를 살펴보니 이제 곧 대지고개가 가까워지고 있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43번 4차선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곳까지는 가파른 절개지로 이뤄져 있어 내려가기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조심하며 잡목과 잡풀을 헤치며 내려가니 대지고개 도로 건너 올라야 할 대지산 방향의 마루금이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이제부터 43번 4차선 도로를 좌측으로 한참을 내려간 지하통로를 통해 걸어 통과한 후 다시 도로 건너편 경찰차가 서 있는 뒷편 녹색 철조망 사이로 들어가 저 마루금을 타고 송전탑을 지나면 대지산이 나타날 것이다.
짧은 절개지에 무성한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철제계단이 나타나고 어렵게 그 철제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두번째 안전 공터가 보인다.
그곳에서 좌측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2차 철제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바로 43번 4차선 도로 위이다.
이제 도로 좌측에는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는 공장인지 건물이 보이고 어떻게 신설된 43번 4차선 도로를 건널까 고민하는데 너무나 많은 통행량으로 인해 무단 횡단은 꿈도 꾸지 못한채 좌측 도로를 타고 500미터 이상 내려가 나타나는 지하통로를 통해 그곳 43번 도로를 통과한다.
이곳 대지고개는 옛날 수지읍에 큰 연못이 있어 큰 연못이란 대지라고 불리다 큰 땅이란 대지로 변했다고 하는데 대자는 대나무 죽자로 바뀌어 큰 연못 대지에서 큰 땅 대지로 다시 죽전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거지에 대지고개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대자가 죽자로 바뀌어 죽전고개가 되었는데 대치 또는 큰 고개 뜻이 현재 대지고개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용인에서 제일 길고 높은 고개로 수지읍 죽전리에서 모현면 오산리로 통하는 43번 국도에 위치한 고개를 말한다.
지하통로를 통해 도로를 건넌 후 다시 우측 구 43번 2차선 도로를 타고 오르니 죽전1동 하늘의문 성당이 보이고 그 앞을 지나 산마루 포차가 있는 휴게소에 다시 도착을 한다.
약 20여분을 소비하여 어렵게 43번 4차선 도로가 지나는 대지고개를 건너 산마루 포장마차 휴게소에 도착을 해 잠시 긴 호흡 한번 한 후 녹색철대문과 하늘색 차단막이 있는 사이의 등로를 타고 진행해 넓은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조금 더 오르니 지금까지 봤던 송전탑 94번이 서 있고 그곳을 지나자 마자 등로 좌측으로 죽정쪽 아파트 단지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이제 이곳이 도심인지 아니면 시골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만큼 상전벽해가 되어 있는 풍경에 이 산객도 적잖이 놀라고 만다.
잠시 내려다 본 죽전동 마을쪽인데 그 마을 저 멀리에는 한남정맥 마루금의 수원쪽 형제봉과 광교산에서 부터 우측으로 돌아 강남5산 종주 등로인 청계산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모두 한번쯤 걸어 봤던 산줄기들이지만 이곳에 올라 이렇게 한눈에 올려다 보이는 또 다른 느낌과 풍경으로 가슴속에 남겨진다.
이곳 지명 유래는 이곳으로부터 약 10리 되는 모현면 능원리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와 관계가 깊은데 정몽주 선생은 고려 공양왕 4년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정몽주 선생의 시신은 개성 근처 풍덕이라는 곳에 모셨다가 그 후 19년 되인 1411년(태종 11년 신묘) 선생의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이장하기 위해 풍덕천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 상여에 영정이 날아올라 지금의 묘소에 가 떨어져 사람들이 영정을 따라가 보니 가히 명당이라 여겨 여기다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몽주 선생을 모신 영정과 상여가 이 땅을 지나갔기에 만고에 충신을 사모하는 민초들에 의해 이곳의 지명을 죽절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죽이란 대나무로 충신을 뜻하며 절은 마디가 있는 나무이니 역시 대나무라 충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곳 말고도 정몽주 선생으로 인해 지명이 바뀐 곳이 선죽교이인데 그곳은 처음 이름이 선지교였으나 선행 피살 후 죽자를 넣어 선죽교가 된 것이고 그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죽절이 죽전으로 변했다.
그 후에는 죽전과 선생의 인연은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선조 9년(1576, 병자년)에 선비들이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죽전서원이라 했고 이 서원은 선조 25년에 있었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41년(1608)에 모현면 능원리에 다시 세워 충렬서원이라 했다.
죽전동는 원래 대지, 감바위, 내대지의 세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요즘은 인구 증가로 여러 동네로 분동되었으며 지금처럼 아파트단지가 계속 들어서면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죽전동은 산으로 자지산이 있고 이 산에는 어름박골 이라는 약수터와 괸바위, 덤바위, 지경바위가 있으며 기묘 명현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묘소가 있으며 큰 물로는 대지 앞에 장장포 라는 곳이(용인현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평범한 하천이 되었다.
참으로 많은 유래가 전해지고 있는 죽전이지만 지금까지는 별 생각없이 지방을 다녀오는 길목쯤으로만 알고 지냈으니 앞으로는 조금 더 다른 느낌으로 지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죽전을 내려다 보고 또한 지나온 천주교용인공원묘지쪽을 올려다 보며 오르막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등로 좌측에 용인이씨 가족묘를 필두로 많은 가족묘지들이 있는 묘지지대를 오른다.
그 묘지지대를 타고 올라 위쪽에서 잠시 쉬며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났던 94번 송전탑 넘어 강남엔비코 폐자재 보관 건물 위로 절개지 지나 322.1봉과 작은 간이화장실 건물이 올려다 보인다.
이제 다시 갈길이 머니 뒤돌아 서서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등줄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려 본다.
묘지지대를 오르니 등로는 다시 온순해지고 등로 우측으로는 식재된 잣나무들이 일렬로 도열하듯 이 산객을 반긴다.
잠시 그 멋진 등로를 타고 오르니 이제 등로 좌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나타나고 등로는 활엽수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낙엽 산행이 되였다.
잠시 더 올라 공터를 통과하니 그 낙엽 등로는 더 길게 이어지고 곧이어 등로 우측으로 골프연습장의 철그물망이 함께하는 등로로 변하고 있다.
그 철망 등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좌측에 정상석과 운동기구들 그리고 벤취 쉼터가 준비되어 있는 해발고도 326미터의 대지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대지산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1동과 처인구 모현면 그리고 광주시 오포읍에 걸쳐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326미터이다.
여러 지도에는 산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이곳 읍지 등의 자료에 대치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지산은 대치가 변음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크게 보아 동쪽과 서북쪽 그리고 남쪽으로 능선이 뻗어 있으며 동쪽에 비해 서쪽의 경사가 급하다.
동쪽으로는 숫돌봉(330봉)과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검단지맥인 부처당고개를 거쳐 불곡산(335봉)과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지나 온 대지고개를 거쳐 법화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 위 산이기도 하다.
우측으로 가 숫돌봉을 잠시 들릴까 고민하다 오늘은 참고 좌측 죽전동 방향의 지맥 등로를 타고 내려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곳 대지산부터는 간간히 산책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더욱 반질거리는 등로가 너무나 많이 갈라지고 있어 정상 등로 찾기에 더욱 신경을 쓰며 진행을 한다.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안부 지나 63번 송전탑이 있는 328봉으로 다시 오르도록 되어 있다.
넓은 공터에 잣나무가 식재된 328봉에서는 등로 옆 송전탑을 사진에 담고 좌측으로 꺽여 내려가며 진행한다.
멋진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벤취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꺾어 내려가면 현위치 불곡산 104(죽전동 갈림길)과 제4구간 성안, 용인 갈림능선이란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제부터 이런 현위치와 이정표에서 불곡산 방향을 따라 진행하면 큰 어려움 없이 진행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전동 갈림길에서 불곡산까지는 1.8 Km로서 이제 불곡산 방향만 보고 따르면 된다.
바로 앞 능선에는 팔각정이 보이지만 동네 주민들이 한가득 모여 흥미있게 담소를 나누니 멀리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우측으로 걸어 본다.
조금 더 걸어가니 시계등산로 성남시란 이정목이 보이는데 이 시계등산로 표시판도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활엽수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금새 현위치 불곡산 105와 제4구간 성남, 용인 경계능선 이정표를 만나 불곡산과 태재고개 방향으로 전진한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우측으로 불곡산과 좌측으로 구미동과 구미동 주택단지 하산 이정표를 지나고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한동안 힘차게 걸어가 현위치 불곡산 106(조류학습장)과 해발고도 299미터인 제4구간 불곡산능선 이정표와 벤취 그리고 원형 탁자를 만난다.
다시 안전목책과로프를 타고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 안부에 있는 현위치 불곡산 107(골안사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전진하니 금새 다시 현위치 불곡산 108과 제4구간 부천당고개 이정표에 도착을 한다.
부천당고개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과 구미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해발고도 281미터이며 불곡산 일대에 부처지골, 절골, 불당골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은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청량산과 검단산의 남한산성 지대에서 성남시와 광주시 그리고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대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있는 고개의 하나로 동쪽으로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로 이어진다.
이 산줄기에는 북쪽으로부터 갈마치고개, 곧은골고개, 새나리고개, 새마을고개, 부천당고개 등이 있어 동서간의 교통로 구실을 한다.
부천당고개 서쪽에는 탄천의 동쪽 연안에 구미동이 위치하고 있고 구미동에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있다.
부천당고개를 지나 완만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에 편액형태의 참나무숲이 나타나고 그곳 편액을 지나 오르니 이제 불곡산 350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사각정자 쉼터가 나타나는데 몇몇 산책객들이 그 안에서 쉬면서 탄천과 구미동 그리고 정자동 마을을 조망하고 있다.
이 산객도 잠시 그 넓은 사각정자에 들려 앞으로 내려다 보이는 탄천과 좌측의 구미동 그리고 우측의 정자동 마을을 조망해 본다.
앞으로 한동안 만나야 할 구미동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구미동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법정동이자 행정동으로서 분당구의 최남단에 위치한 구미1동과 행정동인 구미동에서 나누어 관할하고 있다.
분당 신시가지 개발의 마지막 입주 지역이으로 원래 이 지역에는 가운뎃구미(중구미), 뒷구미(후구미), 골안, 낭떨어지 마을, 넘말, 머내(원천), 벌말, 앞구미, 오리뜰, 잣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분당 신도시 개발로 아파트 및 빌라촌 단지로 바뀌었다.
남쪽으로 용인, 수지, 죽전 지구와 경계를 이루고 오리역을 중심으로 역세권이 발달하였다.
구미동의 동명 유래는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으나 탄천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마을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일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라 구미 또는 구산이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또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이 김해김씨, 밀양박씨, 문화유씨 등 9개 성씨가 각각 9개의 마을을 이루어 살아서 구성리라 하였는데 그 성씨들의 음이 모두 다르므로 구음이라 하였다 하기도 하고 그들이 서로 화목하게 살고 사람들도 순박하여 구순으로 부르다가 아름다운 일이 많다 하여 구미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불곡산 기슭 서쪽의 평탄면에 있으며 불곡산 등산 길목인 골안사 입구는 수림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답고 관내 서쪽에서 탄천이 남북으로 흐르며 금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은 광주시 오포읍, 남쪽은 용인시 수지(죽전지구), 북쪽은 금곡동 및 불정동과 각각 접하고 있다.
정자에서 탄천과 구미동 그리고 정자동과 그 뒤로 흐르는 한남정맥과 우측 저 멀리 청계산 자락을 조망한 후 다시 나와 진행하려니 정자 반대편에 위험 사고다발지역이란 경고판에 행글라이더장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 와 살펴보지만 어디가 행글라이더장인지 분간은 못하고 떠난다.
다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현위치 불곡산 109와 불곡산능선 갈림길 이정표를 만나 우측으로 오르니 현위치 불곡산 110(이마트 갈림길) 이정표를 다시 만난다.
그곳 지나 산악오토바이 출입을 금지하는 안내판과 바리게이트를 지나 드디어 많은 산책객들과 등산객들로 붐비는 불곡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불곡산은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 사이에 있는 높이 335미터의 산으로서 산 이름이 한자가 똑같아 경기도 양주의 진산인 불곡산(470봉)과 혼동되는 산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과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문형산(497봉)과 함께 굴곡진 산세를 이루는데 검단산의 검단지맥과 남한산의 남한산맥으로 연결되는 산이다.
분당 지역의 옛지명에서는 큰절골과 작은절골 등에 절터가 있으므로 불곡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지며 또 정자동 웃마을 주민들이 이 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여기고 산신제를 지낸 것에서 유래하여 성덕산이라고도 하고 현지에서는 효종산이라고도 한다.
불곡산은 분당주민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산으로서 성남시 녹지 축의 최남단에 있으며 분당구 정자동과 구미동 기슭에 자리잡았다.
남서와 북서 방향에 행글라이딩 이륙장이 있고 특히 겨울에는 용인의 말아가리산과 더불어 분당에서 생성된 열기류 동호인들이 모여 행글라이딩 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다.
불곡산은 영장산과 함께 성남시에서 지정한 등산로인데 산줄기 북쪽으로는 태현과 새마을고개를 지나 새나리고개, 곧은골고개, 갈마치고개로 이어진다.
남한산성 지대와도 연결되며 남쪽은 성남시와 광주시 오포읍·용인시 수지지역이 경계를 이루는 대지산에 닿아 있다.
이 불곡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면 태재고개(추령) 밑에 있다고 붙여진 태밑산은 임진왜란 때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임진봉 또는 이진봉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불곡산과 연결된다.
불곡산의 서쪽은 단독주택가로 형성되어 있는데 8.15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산신제를 지내던 곳으로 산 중턱의 큰 절골과 작은 절골에 절터가 있어서 불곡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자동 윗마을 주민들이 성스러운산이라 여겨 산신제를 지냈기 때문에 성덕산으로도 불렸더 이곳의 최남단 등산로는 구미동 골안사로부터 시작된다.
어렵지 않은 등산로가 정상까지 이어지며 조선 후기에 창건한 골안사는 원래 이름이 불곡사였으나 분당 신도시 개발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찾아올 때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곳의 옛 지명인 골안을 따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등산로 입구 도로변에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장보살상이 있음은 물론 산이름을 따서 붙여진 불곡사였다.
불곡사는 현재 골안사로 적고는 있지만 순수 한글로 된 이름으로도 보이며 불곡산은 용인 분당지역의 다른 산의 이름처럼 불교에 관련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백과사전 발췌)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재빨리 출발하는데 아무래도 현위치 불곡산 111 위쪽의 태재고개 방향이 틀린듯 하여 잠시 헷깔린다.
진행 방향은 이정표 뒷쪽 임시 비닐주막 옆으로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이정표 방향은 우측인 동쪽으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
불곡산 정상에서 내려오며 자꾸만 헷깔리는 등로로 인해 멈칫멈칫하고 내려가니 등로 우측에 비닐 천막이 쳐져 있고 몇몇 등산객과 산책객들이 탁배기를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주인장에게 태재고개 하산등로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우측 등로가 아닌 정상적인 직진 등로로 알려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이제부터 빠르게 진행하니 등로는 벌써 따뜻해진 기온과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녹으면서 질척이고 있다.
벤취가 있는 평이한 등로를 따고 내려가니 다시 나즈막한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정상 가운데에는 원형탁자와 벤취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시가 전시되어 있는 명상의 숲 정상이다.
현위치 불곡산 112(명상의숲)과 이제 태재고개까지 1550미터 남아 있다는 방향과 거리표시가 반가운 이정표이다.
이정표를 사진에 남기고 다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간 후 평이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걷다보니 현위치 불곡산 113(수내동 갈림길)이정표를 통과한다.
다시 산악 오토바이 출입금지 안내판과 바리게이트를 지나 벤취들과 원형 탁자들이 있는 현위치 불곡산 114 (형제봉)과 해발고도 225미터의 제4구간 분당동 뒤능선 이정표에 도착을 한다.
그곳 이정표를 지나니 복잡하고 번잡했던 등로가 다시 한산해지며 이 산객 홀로 전세내듯 호젓하게 걸어가는 시간이 되였다.
이제부터 아주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홀로 여유롭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기온도 적당히 오르고 등로도 너무나 많은 산책객들이 다니다 보니 고속도로처럼 잘 다져지고 넓어져 산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빠르게 걷다보니 이제 태재고개까지 400미터 남았다는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꺾어 진행해 다시 부드러운 등로를 따라 걸어간다.
잠시 더 걸어가니 등로는 짧은 멋진 잣나무 숲을 지나 고도 170미터인 제3구간 태재고개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꺾어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곧바로 불곡산. 영장산 등산안내도를 지나 포장도로에 도착을 한다.
살펴보니 포장도로 우측으로 많은 음식점들이 있고 좌측으로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난다.
이곳은 옛 태재고개로서 광주시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로 성남시 분당구 율동과 서현동과 접해 있으며 새말에서는 광주시 목동과 새나리 고개를 경계로 하고 있고 남으로는 능평리와 접해 있다.
조선조말 대한제국 때까지 태현리와 신촌리로 2개 마을이었다가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신촌리의 신과 태현리의 현을 따서 신현리라고 하였는데 현재 4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막골, 새말, 태재 및 퉁점골이다.
예로부터 태현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 고개가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어 고려 말의 충신 김자수가 조선 태종의 강제 부름을 받아 경상도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 고개에 다다라 불사이군을 주창하며 자결한 곳이어서 더욱 유명하다.
좌측 2차선 포장도로로 나가 시간을 보니 11시 30여분이 지나고 있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한다.
혹시 몰라 새벽에 옆지기가 준비해 준 김밥 한줄과 컵라면 하나 그리고 김치는 진행하다 허기지면 그때 다시 꺼내 먹기로 한다.
2차선 포장도로로 나가니 도로 좌측에 오포읍 신현4리(웃태재)란 이정석이 보이고 그 위에는 성남시라는 커다란 도로 표지판이 서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도로 우측으로 꺾어 도로 타고 가니 300미터 전방에 용인과 분당 그리고 직진 방향으로 신현리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그 방향으로 잠시 걸어가니 도로 건너편에 태재옳거니 식당이 보이고 깨끗해 보여 들어가 9000원짜리 왕갈비탕을 시키니 아침에 먹었던 해장국보다 더 푸짐하게 나와 30여분간 포식하고 휴식 취한 후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 간다.
생각보다 맛이 있었기에 앞으로 이곳을 산행하는 후답자들에게 강력 추천하는 식당이다.
지도를 보니 능선으로 오르지 않고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이나 좌측으로 갔다 신도로 57번을 만나 진행해도 태재고개에 도착할 것 같지만 확실하지도 암ㅎ고 소위 맥 잇기 산행을 하는데 자존심이 허락도 하지 않아 옳거니 식당을 나와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몇발자국 지나 다시 우측 절개지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니 한산이씨 묘지를 지나 주능선에서 분봉은 없고 그 자리에 두개의 큰 바위가 세워져 있는 이상한 형태의 묘지를 만나 우측으로 90도 꺾어 진행한다.
잠시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등로 좌측의 묘지 뒷쪽으로 분당과 저 멀리 성남시계 산줄기를 바라본다.
조망을 즐기고 다시 걸어가니 금새 등로는 우측 시멘트 포장 임도로 이어지는데 그곳은 민가와 식당들이 있는 곳이다.
내려가 보니 태재사거리로서 이곳이 태재고개인듯 싶다.
내려 와 사거리에서 살펴보니 이 산객이 내려온 건물은 오대오바지락 칼국수 식당이였다.
이곳에서 직접 검단지맥 마루금으로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가 없기에 3번의 신호를 받아 어렵게 세차장 옆 돌계단쪽 산행 들머리로 접근 할 수 있었다.
태재마을은 분당과 신현리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인데 태재란 큰 고개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중정남한지에도 태재는 군사요새지로서 남한산성을 방어하는데 큰 몫을 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고려 말 충신인 상촌 김자수의 묘가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은 웃태재와 아래태재로 두 개의 마을이 되었다.
이 태재마을에 있는 고개이기에 태재고개란 이름이 붙은듯 하다.
3번의 신호등을 기다려 어렵게 270도를 돌아 세차장 앞으로 이동해 그곳의 보도블록을 오르니 작은 콘테이너 박스 옆에 좌측으로 불곡산과 우측으로 광주신현2리 그리고 직진 방향으로 영장산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그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이어지는 가파른 돌계단을 통해 다시 능선으로 오르며 검단지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머리에 내려 쬐는 햇살이 강하다고 느낄 정도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계단 우측으로 다시 한산이씨 묘지가 보이고 능선으로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는 한산이씨 가족묘지가 나타난다.
그 좌측의 묘지지대와 우측의 민가와 공장지대 사이에는 콘크리트 벽과 잣나무가 조성되어 있어 그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앞으로 진행해야 할 골프연습장과 그 좌측으로 무명봉도 올려다 보인다.
잠시 더 진행하니 묘지가 끝나는 지점의 오르막 등로 시작지점에 현위치 영장산 201(태재고개)란 이정표가 서 있고 그곳을 지나 가파르게 오르니 바위 하나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무명봉의 바위를 지나 다시 나즈막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는 민가들과 저 앞으로 골프연습장이 눈에 들어 온다.
곧이어 오르막 등로에서 만나는 골프연습장의 녹색 철망을 따라 오르니 좌측으로 무명봉이 나타나는데 좌측으로도 띠지들이 나부끼고 있어 잠시 헷깔린다.
또한 이 산객이 준비한 자료에도 이곳에서 직진 등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진행하라고 되어 있어 지도와 다르게 좌측으로 진행하며 의심을 갖게 되는데 결국 이곳에서 약 5분간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헷깔린다.
좌측 무명봉을 넘어 진행하니 가파른 내리막 나무계단이 보이고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다시 삼거리 갈림길이다.
처음에는 우측으로 한동안 진행하니 방금 전 헤어졌던 골프장 녹색 철망이 보여 다시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가 좌측으로 가보니 그곳은 방금 전 이 산객이 진행해온 서쪽 방향이다.
고민하다 다시 무명봉 정상으로 올라 와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정독을 해 보니 무조건 골프장 녹색 철망을 따라 직니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얻는다.
다시 무명봉에서 골프연습장에서 만들어 놓은 녹색 철망쪽으로 가 그 녹색 처망을 우측에 두고 좌측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녹색 철망은 곧 우측으로 꺾어 내려가고 다시 호젓한 등로가 열려 있다.
내려가자 마자 다시 새로운 나즈막한 녹색 철망이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고 그곳을 지나니 다시 활엽수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호젓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등로 우측의 잡목가지 사이로는 현대아파트가 언듯 보이기 시작하지만 대단위 아파트 단지는 아니고 자연속에 오래전 지어진 몇동의 아파트처럼 보였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현위치 영장산 202와 고도 205미터의 태재고개능선이란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꺾여 오르며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곳을 지나 잠시 더 걸어가니 또 다른 이정표가 서 있는데 현위치 영장산 203과 해발고도 200미터의 제3구간 넘어골고개란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 넘어골고개는 광주시 넘어골과 성남시 분당 열병합 발전소를 잇는 고개로 큰 이정표 지나자 마자 또 다른 현위치 맹산 (3-1) 넘어골이란 작은 이정표가 서 있다.
넘어골고개 이정표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나무벤취와 통나무 의자들이 산재한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곧이어 현위치 204와 제3구간 봉적골고개란 이정표를 만난다.
분당 율동공원과 광주시 봉적골을 잇는 고개로 사람의 왕래가 많아 등산로가 뚜렷하고 이정표 옆에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넓은 임도 같은 그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타고 내려가니 금새 안부에 또 다른 이정표가 서 있는데 거기에도 제3구간 봉적골고개란 이정표와 이제 영장산까지 4500 m 남아 있다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함께 되어 있다.
다시 완만한 활엽수 오르막 등로를 타고 어렵지 않게 오르니 송전탑 5번이 보이고 곧이어 등로 좌측 앞쪽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저 멀리 희미한 박무속에 암봉으로 이뤄진 두개의 뚜렷한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 온다.
처음에는 무심코 진행하다 다시 살펴보니 서울의 북한산이 아닌가 싶어 지도와 나침판을 꺼내 확인해 보니 방향이 꼭 북한산이고 우측 봉우리는 북한산의 최고봉인 삼각형 형태의 백운봉과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이고 좌측 봉우리는 비봉능선과 의상능선으로 분기하는 문수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이다.
생각지도 못한 북한산 조망에 기분이 들떠 잠시 쉬면서 그 아름다운 조망을 즐기고 물한모금 마셔 본다.
다시 이어지는 호젓한 등로를 따라 홀로 즐기는 시간이 되였다.
가끔 부부인듯한 산책객들과 동네 주민들이 산보하듯 올라 온 모습 이외에는 일요일 오후치고는 사람들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현위치 영장산 205라 이정표가 서 있고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잡목이 사라지며 시원한 조망이 펼쳐져 있다.
신현리 마을과 그 뒤로 우뚝 솟아 있는 문형산이 나는 언제 만나러 올 것이냐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신현리는 고려 말의 충신인 상촌 김자수 묘가 자리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는데 이 마을은 원래 라 부르다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현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신현리에는 신촌(새말), 태현(태재), 동막골, 퉁접골의 4개 마을이 있다.
문형산은 산 이름에서부터 대단한 품위가 느껴지는 산으로 문형이란 고려나 조선 때에 대제학의 별칭으로 학자들에게 가장 품격 높은 벼슬이다.
정2품에 해당하는 관직이기는 했으나 정승 부럽지 않은 벼슬이었고 한번 오르면 죽을 때까지 명예가 지켜지는 자리로서 삼왕비불여일정승이며 삼정승불여일선생이라는 말 또한 대제학을 기리는 것이었으니 문형은 대단한 명예가 따르는 자리였다.정상은 너름 공터로서 운동시설이 있고 긴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으며 북쪽으로만 조망이 좋은데 멀리 분당시가지와 영장산(414.2봉)이 뚜렷하고 뒤로는 서울이 보인다.
정상 표석 앞면에는 문형산 497m, 뒷면에는 1995년 광주문화원에서 주관하고 동원산악회에서 건립한 이 표석은 1998년에 훼손되어 오포면 이장협의회에서 복원하였음이라 적혀 있고 옆면에는 1999년 1월 1일 오포면 이장협의회 증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었다.
문형산의 본디 이름은 문수산이라는 설이 있는데 문수보살을 모신 산이라는 뜻인 듯하다. 또 다른 이름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문현산이 보인다. 오늘날 산 이름은 고려말 대제학을 지낸 이가 이곳에 들러 쉬면서 경치가 아름다워 문형산이라 하자 마을 이름까지 덩달아 문형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정상표석에 기록된 내용이다.
언제 한번 올라 볼 기회가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문형산 우측인 남쪽 저 멀리에는 오늘 이 산객이 산행을 시작한 한남정맥 마루금의 석성산과 법화산 자락이 보인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진행하니 236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에 오르는데 이곳 역시 원형 탁자와 벤취들이 준비되어 있고 동네 주민인듯한 여성 두명이 벤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측으로 꺾여 내려가다 등로 좌측을 내려다 보니 잡목 사이로 작은 분당저수지가 푸른 물을 간직한채 펼쳐져 있다.
송전탑 6번을 통과하고 진행하니 등로 좌측 앞으로 올라야 할 영장산과 그곳으로 이어진 검단지맥 마루금이 환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조망을 즐기며 이제 다시 여유롭게 천천히 진행하니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그곳에서도 지나온 마루금과 저 멀리 한남정맥 마루금을 조망해 본다.
다시 호젓한 등로를 따라 민가가 등로 우측 옆까지 치고 올라온 곳으로 걸어가니 아직도 많은 개인 건축물들이 등로를 자르며 건설중이고 조만간 이 등로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다.
다시 사각 탁자와 벤취가 있는 장소를 지나 걷다보니 현위치 영장산 206(새마을고개)와 고도 204미터 제3구간 새마을고개란 이정표가 서 있다.
새마을고개는 광주시 새말과 분당 율동공원을 잇는 고개로 우측 광주쪽에서 등로 직전까지 밀고 올라 와 등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덩이 앞선다.
새마을고개를 지나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금새 송전탑 8번이 보인다.
그 송전탑을 지나 갈림 삼거리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현위치 영장산 207과 고도 222미터인 제3구간 율동뒤능선 이정표가 서 있다.
좌측으로 율동공원(3.1운동 기념공원 900미터)이 있어 붙여진 이름처럼 보인다.
율동공원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과 분당동 일원에 조성된 근린공원으로서 갈대밭 수면데크는 자연학습장과 각종 전시회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자전거 도로와 100m 높이의 대형 분수대도 이곳의 자랑거리이다.
사시사철 다양하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사계절 꽃동산과 울퉁불퉁한 돌에 체중이 실려 발에 지압효과를 내는 발 지압장 그리고 잔디광장이 잘 조성되어 있어 인근 지역 주민들의 산책과 운동은 물론 2007년 10월 14일 사랑방문화클럽의 클럽축제가 개최되는 등 다양한 문화예술단체들의 공연이 이어지는 공원이기도 하다.
율동공원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또 다른 이정표가 서 있는데 태재고개와 영장산 그리고 율동공원의 방향만 표시를 한 이정표이다.
다시 조금 더 진행하니 현위치 영장산 208과 표고 227미터 제3구간 율동 뒤 능선이란 이정표가 서 있다.
이어 다시 나타나는 산악오토바이 출입금지 안내판과 바리게이트를 지나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소나무 그늘 아래 많은 벤취 쉼터가 조성된 장소를 만난다.
몇명의 산책객들이 쉬고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진행하니 현위치 영장산 209와 표고 272미터 제3구간 율동뒤능선 이정표를 만난다.
그 이정표를 지나 다시 일직선의 멋진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폐가가 나타나는데 건물 외벽 밖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쇠철봉이 튀어 나와 있다.
그 폐가를 보며 오르니 등로 우측 저 멀리 또 한채의 폐가가 서 있고 그 사이에는 벌목 후 소나무가 식재된 풍경이 보인다.
그 폐가가 있는 곳에서 뒤돌아 보니 한남정맥 마루금과 검단지맥 마루금도 보이는 듯 하다.
폐가를 지나 다시 오르니 갈참나무가 낙엽을 떨군채 쓸쓸한 등로를 만들지만 이 산객에게는 참으로 호젓한 산길이 되어 있다.
그 호젓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이 나타나더니 등로 우측으로 짧은 철망이 같이 간다.
그 철망을 우측에 두고 오르니 등로는 진흙창이로 변해 있어 진행에 애로를 느낀다.
그 철망 구간을 지나니 다시 갈참나무 등로가 열리고 더욱 넓어진 등로를 타고 진행해 현위치 영장산 210이란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를 지나 다시 나타나는 안전목책과 로프를 타고 계단을 오르니 현위치 맹산(영장산)3-3(일곱사거리) 안내판이 서 있고 곧이어 이정목에 표고 348미터의 제3구간 일곱삼거리고개란 이정표를 만난다.
우측 문형산으로 이어지는 새나리고개 방향 내려가는 등로를 버리고 등로 우측으로 따라오는 녹색의 철망을 따라 좌측 곧은골고개 900m 방향으로 오르며 진행을 한다.
잠시 그 파란 철망을 따라 오르니 벤취 4개가 있는 349봉에 도착해 우측 강남300CC와 그 넘어의 조망을 즐겨 본다.
349봉 정상에서 물 한모금 마신 후 우측 강남300CC쪽을 바라보니 그린에 몇명의 골퍼들이 라운딩을 즐기고 있고 그 뒤로 문형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 좌측 중앙으로는 강남300CC 본관 건물이 바로 봉우리 아래에 존재하고 그 아래 저 멀리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목동의 마을이 내려다 보이지만 그 옆을 흐르고 있는 경안천은 찾을 수가 없어 아쉽기만 하다.
이곳 오포읍 목동마을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목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부터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나무가 무성하여 산을 의지하고 살아왔음으로 속칭 나무골이라고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나무 목자를 써서 목리라 불렀다.
마을은 원래 광주군 오포면 목리였다가 1970년 행정구역 조정에 의해 광주군 광주읍으로 이속되었는데 광주시청에서 약 8 Km 서남쪽에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성남시 율동과 접해있고 서북으로는 광주시 직동과 연결되었으며 동남쪽은 오포읍 고산리이다.
북서쪽은 광주시 태전동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은 오포읍 신현리이다.
지리적으로 환지였으니 마을 앞은 문형산이 가로 막고 있으며 마을 뒤도 맹산 줄기가 막혀있고 오직 광주 내포로 내려가는 길만이 뚤려 있는 마을 이었다가 최근에는 마을 앞을 통하여 오포읍 신현리로 넘어가는 도로가 1996년 개설되어 광주 시내와 성남시 분당으로 통하게 되어 교통이 많이 좋아졌다.
이 마을은 고려 후기에 동래정씨가 처음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로 능성구씨와 기타 성씨들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지금도 이 마을에는 동래정씨, 능성구씨의 선조 묘지와 사당, 제실이 현존하고 있으며 후손들이 잘 보존해 오고 있다.
자연부락은 옥터골과 나무골이었으나 최근에는 산 좋고 물 좋은 이 마을에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서 새로운 마을이 늘어나서 문형마을이라는 50여호의 자연부락이 더 생겼고 예전에 인가가 없었던 곳에도 집을 짓고 들어와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광주시에서도 이 마을은 장수촌으로 알려져 있는데 90세 이상의 노인이 10여명이나 되고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마을에 70여명이나 된다. 이 마을 노인회장의 말에 의하면 70세 전후의 노인들은 마을 경로당에 가면 젊은이 축에 들어서 심부름꾼 밖에 안 된다고 하며 이 마을 새나리골 위에는 1997년에 개장한 강남300골프장이 있다.
목동에는 고려말에 전라수군절제사와 도원사를 역임한 구성노의 묘가 있으며 조선조 세종대에 우의정을 역임한 이원의 묘와 사당이 있다.골프장 지나 저 멀리 서쪽의 이천과 양평쪽으로는 앞으로 걸어야 할 앵자지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강남300CC 위 349봉에서 멋진 조망을 즐긴 후 다시 배낭 둘러메고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잠시 더 우측으로 강남300CC의 파란 철망을 두고 걸어가니 그 철망이 우측으로 휘어지는 곳에서 등로는 철망과 헤어져 좌측으로 이어지고 곧이어 팔각정을 만난다.
팔각정을 지나 걸어가니 많은 선답자들이 사진으로 담았던 ㄱ자형 소나무를 지나고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 바로 눈 앞에 영장산에 올려다 보이는 곧은골고개 직전의 무명봉에 도착해 영장산을 바라본다.
그 무명봉을 떠나 내려가니 현위치 영장산 211과 표고 300미터의 제3구간 곧은골고개란 이정표가 서 있다.
곧은골은 분당의 율동공원(국궁장)에서 광주시 곧은골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이다.
이제 영장산까지는 800m가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에 큰 바위 하나를 지나고 곧이어 현위치 영장산 212라는 이정표를 만나 진행한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쪽 등로를 따라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새로 만드는 도로와 도시를 위해 깎아지른 절개지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 광주의 오포읍쪽 마을 지나 저 멀리 앵자지맥도 아름답게 다가오는데 언제나 오를 수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로 들어가니 벤취와 사각 테이블이 있고 그 옆에는 현위치 영장산 213(거북터)와 표고 300미터란 제3구간 거북터란 이정표가 서 있다.
등로 좌측으로 새마을 연수원까지 700미터 거리란 방향과 거리 표시가 있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에 벤취 2개가 있는 곳을 지나 영장산 정상부를 올려다 보며 전진하니 멋진 갈참나무 등로가 열려 있다.
이제부터 가파른 오르막 등로에 설치된 계단을 타고 다시 등줄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어렵게 올라간다.
많은 땀방울 흘리며 오르니 주능선에 도착을 하고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진행하니 금새 영장산 정상이다.
많은 산책객들과 등산객들이 정상부를 차지하고 쉬고 있는데 한 등산객인지 산책객이 강아지를 끌고 와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조용히 있으면 좋으련만 다른 등산객을 보며 심하게 짖어대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러진다.
어렵게 셀카로 사진 한장 남기고 영장산에 대한 자료를 생각해 본다.
영장산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과 태평동 사이에 위치하는 작은 산인데 남쪽으로 이어지면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과 중탑동 사이의 매지봉(277봉)이라 부르는 큰매지봉과 작은매지봉(274.5봉) 그리고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맹산(413.5봉)과 함께 몇갈래 산세를 이루고 있다.
작은 영장산의 주봉은 높이 193.6미터의 봉우리로 남한산성이 위치하는 청량산이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에 위치하는 구릉지 모양의 산이고 율동공원의 큰 영장산은 큰매지봉과 작은매지봉을 거늘이고 있는 형세로 분당지역 중심의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각종 고지도에서는 분당지역과 광주시 경계 일대의 산지에 해당하는 맹산과 매지봉을 영장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산지는 분당의 중앙공원에 있는 뒷매산으로 이어지는데 뒷매산을 영장산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 영장산 산자락였다는 얘기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산지들을 합하여 영장산으로 분류하는데 높이는 원래 193.6미터이지만 맹산의 높이로 413.5미터로 통일한다.
이곳 큰매지봉과 작은매지봉 사이의 골짜기에는 새마을 지도자 중앙연수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율동의 분당저수지로 이어져 탄천으로 합류하는 분당천을 만든다.
영장산의 동쪽으로는 남한산성 도립공원이 위치하는 청량산과 남한산으로 이어지고 서쪽과 남쪽의 사면으로는 성남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산 중턱에는 망경암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남쪽의 기슭에는 대한불교조계종의 말사인 봉국사가 위치하고 있다.
작은 절이지만 조계종의 직할 교구로 고려 현종 19년(1028) 때 창건됐다.
이 영장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 명칭의 유래에는 옛날 잘 훈련된 매를 이용하여 이 산 정상에서 매사냥을 한 것에서 매지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전설에는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이 산봉우리에 매 한 마리가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남았으므로 매지봉이라 부른다고도 전해지며 영장산은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매지봉이나 맹산이라고 불렀다.
맹산은 조선시대 세종이 명재상인 맹사성에게 이 산을 하사해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산아래 직동(곧은골)에는 맹사성의 묘와 맹사성이 타고 다녔다는 흑소의 무덤인 흑기총이 있다.
사진 몇장 담은 후 이정표를 살펴보니 갈마치고개까지 3900m 남아 있고 이배재까지는 5900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갑기만 하다.
삼각점을 사진에 담은 후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다시 등로 우측에 비닐로 남든 임시 매점이 보인다.
길게 이어지는 안전목책과 로프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잡목 사이 저 멀리 망덕산과 검단산이 보이는데 이제 그 목적지가 보이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니 현위치 영장산 219와 표고 308미터의 야탑. 도촌동 경계능선 이정표가 서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달린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그 앞으로 무명봉이 올려다 보인다.
그 안전목책과 로프 구간을 내려가니 다시 평이한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더 걸어가니 현위치 영장산 220과 표고 357미터의 제3구간 야탑. 도촌동 경계능선이란 이정표가 서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오늘 올라야 할 마루금이 잡목 사이로 올려다 보인다.
다시 안부로 내려갔다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야탑동 도촌사거리 갈림 이정표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등로 좌측으로 성남. 이천간 고속도로와 성남 분당의 마을들이 잡목사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도촌동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법정동이자 행정동으로 마을 앞과 뒤에 하천이 있고 마을 앞 중앙에 뒤 산맥이 끊어졌다 약간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섬처럼 생겼다 하여 섬말 즉 도촌이라 칭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마을만 섬처럼 남아 섬마을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화한 것이라고도 하나 조선시대 지리지에 이미 도촌리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거가 미흡하며 20세기 초반(1912년, 1917년)에 발간된 지지에는 옹점리로 기재되어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구웠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섬말을 중심으로 양짓말, 응달말, 중말 등의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좌측으로 성남시와 성남 이천간 고속도로를 내려다 보며 걸어가니 사각탁자와 벤취 그리고 송전탑이 있는 357봉에 도착을 하지만 많은 산책객들인지 아니면 등산객들이 모여 막걸리 파티를 열고 있으니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다시 등로 좌측으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잘척이는 등로가 이어지더니 등로 좌측으로 조금 더 선명하게 성남시가 내려다 보인다.
부녀지간에 올라 온 가족을 만나 진행하다 빠르게 추월하니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 쌓여 있는 낙엽을 밟으며 내려가 표고 250미터의 제3구간 갈림능선 이정표에 도착을 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모리아산기도원이 그리고 우측으로는 광주시이당골이 갈리는 갈림 사거리인 곳으로 사진 한장 남기고 비포장 임도를 가로 질러 건너편으로 나 있는 나무 계단을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등로 좌측에 사각정과 운동시설들이 보이고 그 우측에는 섬말쉼터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다시 갈참나무가 등로에 열병하듯 서 있는 낙엽 등로를 따라 오르니 나즈막한 무명봉을 넘고 19번 송전탑을 만난다.
그 송전탑을 지나니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평이하지만 호젓한 갈참나누 등로가 나타나 기분 좋게 걸어 본다.
진행하다 지도를 살펴보니 방금 전 지났던 사거리 갈림길이 바로 성남과 이천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중원터널 위이다.
그 멋진 등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제3구간 도촌동 경계능선 이정표가 서 있는데 그곳을 넘으니 무명봉이다.
무명봉이라 생각하고 그 봉우리를 지나치는데 등로 좌측으로 생각지도 못한 삼각점 하나가 나타나고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해발고도 332.7봉의 삼각점이다.
잠시 더 머물러 몇장의 사진을 담고 물 한모금 더 마신 후 다시 등로를 따라 이배재 방향으로 출발한다.
다시 그 332.7봉 삼각점을 지나니 잡목 사이로 다시 망덕봉과 인공구조물이 있는 검단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처음에는 그곳까지 오늘 넘어야 된다는 생각에 고민이 깊어졌지만 지도를 살펴보니 저곳은 모두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마루금이다.
다시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안부에 표고 332.7미터의 제3구간 갈현. 도촌동 경계능선이란 이정표가 서 있는데 좌측으로는 갈현동 웃말 그리고 우측으로는 광주시 직동으로 갈리는 갈림 사거리이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소나무가 정상을 지키는 321봉에 도착을 하고 다시 호젓한 갈참나무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눈 앞으로 고불산과 317봉 능선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내리막 등로를 따라 안부로 내려가니 표고 300미터 제3구간 영생관리사업소 뒤능선이란 이정표가 서 있는데 등로 좌측으로 영생관리사업소까지 500미터 남아 있다는 방향과 거리표시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이제 등로 좌측으로는 더욱 선명하게 성남시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이정표와 돌탑이 서 있는 고불산 정상이다.
이정표에는 고불산 정상이라 적혀 있는데 그 어디에서도 자료를 찾지 못하니 아쉽기만 하다.
그 고불산 정상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꺾여 진행되지만 우측에 송전탑이 서 있어 가 보니 송전탑 번호 11번이다.
사진을 몇장 담고 다시 고불산 정상의 이정표와 돌탑을 지나 다시 갈마치고개로 향한다.
고불산을 지나 다시 천천히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성남시가 내려다 보이고 등로 우측으로는 경기도 광주시가 가깝게 다가와 있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나무토막을 세운 벤취와 소나무가 있는 무명봉을 지나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다시 사각탁자와 벤취가 있는 장소도 통과한다.
다시 내리막 등로를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더욱 선명한 성남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성남은 말 그대로 성의 남쪽 곧 남한산성의 남쪽을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되는데 실제로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고 성남을 예전에는 성나미로도 불렀다고 하며 이를 표기할 때 성남으로 썼다고 한다.
성남’이란 지명은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누정조에 이문형이 쓴 압구정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성남이라는 지명은 위의 기록과 유상운(1636-1707)의 7월에 성남 옛 집에 갔다가라고 한 묘갈명의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있으며 이런 점은 성남이라는 지명이 오래 전부터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남한산성에 대한 1595년의 수축과 1626년의 증개축보다 100년 이상 앞선 시기에 성남이라는 명칭이 있었다는 것은 성나미=성남의 표기가 그 이전부터 사용돼왔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성남’은 성의 남쪽즉 성 너머 저쪽 또는 재 너머 저쪽을 나타내는 것(성=잣=재)으로 볼 수 있다.
성남은 기원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 위례성의 옛터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지역이기도 하며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고대부터 각국의 주요 쟁탈지중의 하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지역을 점령했다.
신라 문무왕 4년(664)에는 한산주로 757년(경덕왕 16)에는 9주의 하나인 한주로 개칭됐고 고려시대의 성남지역은 940년(태조 23)에 광주로 개칭해 부르게 됐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광주목으로 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광주목은 1577년(선조 10) 광주부로 승격됐고 근대 개화기로 들어서면서 1895년 오랜 전통의 행정 구획인 8도 체제에서 23부제로 개편돼 한성부 관할의 광주군이 됐고 1896년에는 경기도 광주부가 됐다.
1910년에 면에 관한 규정에 의해 중부면이 설치됐으며 1946년에는 종전 세촌면 관할 구역 6개리(단대리, 수진리, 복정리, 상대원리, 창곡리, 탄리)를 관할하는 중부면 직할의 성남출장소를 설치했고 성남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인 행정명칭으로 처음 사용된 것이 바로 이때다.
1971년에는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의 시행으로 광주군 성남출장소 관할 인구가 14만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해 기존 광주군 성남출장소 관내 6개리와 대왕면, 낙생면, 돌마면 지역을 관할하는 구역으로 경기도 직할의 성남출장소로 승격됐다.
1973년에는 경기도 성남시로 승격돼 18개동을 관할하는 시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됐으며 대왕출장소와 낙생출장소가 각각 설치됐고 1975년에는 돌마출장소가 설치됐고 1980년에는 28개동으로 행정동이 분리됐다.
1988년에는 성남시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행정 수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돌마출장소, 대왕출장소, 낙생출장소를 폐지하고 수정출장소와 중원출장소를 설치했다.
1989년에는 수정출장소와 중원출장소를 수정구청과 중원구청으로 승격시켰으며 1991년에는 신도시 분당이 건설되면서 분당출장소를 설치했고 그해 9월 분당출장소를 분당구청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끊임없는 법정동 간 경계조정과 행정동 분동을 통해 1996년 3개구 44개동의행정 동이 형성됐으며 2000년에는 행정 동 명칭을 대폭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3개구 48개 행정 동이 있다.
등로 좌측으로 성남시를 조망하며 진행하니 갑자기 영장산과 갈마치고개란 이름만 있는 이정표를 지나고 곧이어 다음 구간 올라야 할 왕기봉과 검단산도 올려다 본다.
다시 조금 더 진행하니 제3구간 영생관리사업소 뒤능선이란 이정표를 만나고 살펴보니 이제 이배재까지는 2200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다시 갈참나무 숲을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등로 좌측 저 앞으로 중원터널 입구가 보인다.
그곳에서 우측 잡목사이로 광주시도 내려다 본다.
광주는 예로부터 경기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땅이 넓은 고을이라는 뜻에서 한자로 넓을 광자와 고을 주자를 썼다고 하는데 한강은 우리나라의 중앙부를 횡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부터 서로 패권을 다투던 곳이기도 하여 한강 유역을 점거한 나라는 번성하고 빼앗긴 나라는 쇠퇴하였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선사시대는 몰라도 이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최초의 현상은 기자 조선의 마지막 군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쫓기어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그가 한왕이 되어 세운 회안국이니 지금의 경안 일대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경안리 장터에 회안교 다리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세천복개 공사를 하면서 없애버린 것이 참으로 아쉽게 생각하였고 그후 회안국을 토대로 백제가 일어났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국도를 BC 18년에 광주하남 이성산 위례성에 도읍을 세웠고 동왕 14년(BC 6) 한산 아래 고골일대에 도읍을 옮기어 문주왕이 고구려에 쫓기어 공주로 천도하기까지 104년간 남한산성이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온조왕으로부터 21대 개로왕 때까지 고골, 남한산성 등 우리 광주일원에서 493년간을 백제가 도읍한 역사의 고장이다.
도읍을 문주왕이 충남 공주로 천도함에 광주 일대는 고구려땅이 되었다.
백제 성왕 29년(AD551)에 실지 6개군을 회복하였으나 불과 2년 후에는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겨 신라의 땅이 되었고 신라 문무왕 3년(AD663)에 한산주로
명칭이 바뀌고 동왕 8년에 남한산주로 신라 경덕왕 15년(AD756)에 한주라 칭하였고 지금의 광주란 지명이 확정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AD940)부터이다.
고려 성종2년(AD983)에 처음으로 12주에 목(牧)을 두었는데 그중의 하나로
광주목이 되었고 동 14년(AD995)에 12절도사를 둘 때에 광주를 봉국군 절도사로 고쳐 관내도에 소속 시켰다.
현종3년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를 삼았고 동 9년 12목을 줄여 8목으로 고칠 때에도 광주목은 그대로 남았다.
조선조 인조 원년(1623)에 유수제를 실시하였으며 인조4년(1626)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주치를 성내로 옮기었고 동 8년(1630)에는 광주 부윤을 두었으며
당시에 군세는 23개면이 있었다.1914년에는 광주군의 일부였던 의곡면, 왕륜면은 수원군에 편입되고 양평군에서 남종면이 편입되었다.
1917년 12월에 중부면 산성리에 있던 군청을 광주면 경안리로 옮겼다.
1963년 구천면, 중대면, 언주면과 대왕면이 서울시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 성남시가 신설되어 중부면의 일부와 낙생면, 돌마면이 성남시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광주면이 광주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동부면이 동부읍이 되고 1989년 1월 하남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고 2001년 3월 광주시로 승격되어 현재 광주의 행정구역은 3동 1읍 6면이 되었다.
다시 잡목이 사라진 곳을 통해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왕기봉과 검단산을 올려다 보고 전진하니 금새 출입통제안내문과 그물망 그리고 안전목책 및 로프가 있는 갈마치 에코 브릿지에 도착을 한다.
중원구 갈현동과 광주시 삼동의 지방도 389호선을 남과 북으로 잇는 갈마치 고개 야생동물 생태통로를 모니터링한 결과 최근 3년간 979회 야생동물 움직임이 관찰됐다.
생태통로에는 주변 생태계와 유사한 관목과 지피류 등 수목이 식재돼 있고, 야생동물이 이동 중 은신하고 피신할 수 있는 돌무더기, 덤불 등 보조시설, 차량소음·빛을 차단하기 위한 차폐시설이 있다.
성남시 환경보호팀장은 지방도 389호선으로 단절됐던 생태축이 갈마치 고개 생태통로 조성으로 점차 복원돼 검단산에서 영장산 그리고 불곡산을 하나의 생태축으로 연결하고 있다면서 2008년 이전 매년 수 십건씩 발생하던 야생동물 로드 킬 사례가 크게 감소했다고 말했다.
갈마치는 옛날부터 칡이 많은 곳이어서 갈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하고 옛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여 갈증을 풀어주고 다시 길을 떠났다고 해서 갈마치 또는 갈현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평택임씨의 족보에는 갈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에코 브릿지를 타고 389번 2차선 지방도로를 건너며 살펴보니 도로 표지판에는 순암로라는 글씨가 보인다.
나무로 만든 에코 브릿지를 넘으니 성남시계 등산로 종합 안내도가 등로 좌측에 서 있고 그 안내판을 지나니 저 앞에 묘지가 나타난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현위치 4.4 갈마치터널위 이정목이 보이고 살펴보니 갈마치고개에서 0.2 Km 지나왔고 이배재까지는 이제 1.4 Km 남아 있다는 거리표시가 되어 있다.
그 묘지 위 공터로 오르니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왕기봉과 검단산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높이 솟아 있다.
사진을 담은 후 다시 천천히 전진하니 시계등산로 아래 갈마치고개와 이배재 방향 표시가 되어 있는 안부로 내려간다.
계곡의 개울 같은 안부를 지나 오르니 다시 갈참나무 등로가 열려 있다.
다시 그 안부를 지나 오르니 송전탑 14번이 나타나고 곧이어 사랑나무 연리목과 안내판이 나타난다.
연리목이란 맞닿은 두 나무의 세포가 서로 합쳐 하나가 될 때를 연리라고 부르는데 연리는 두 몸이 한 몸이 된다 하여 흔히 남녀간의 사랑에 비유되며 나아가서 부모와 자식, 가족 사이, 친구 사이의 사랑까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하나로 이어진 두 나무로 형상화되며 바로 사랑나무다.
나뭇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라 그리고 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다.
연리목은 가끔 만날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며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닿을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다 하더라도 바람에 흔들려 버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땅속의 뿌리는 우리가 잘 볼 수 없어서 그렇지 이런 연리현상이 땅 위의 줄기나 가지보다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나는데 좁은 공간에 서로 뒤엉켜 살다보니 맞닿을 기회가 많아서다.
연리근이라고 불러야 하나 쓰지 않는 말인데 베어 리고 남아있는 나무 등걸이 몇 년이 지나도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잘리지 않은 옆 나무와 뿌리가 연결되어 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연리목 이렇게 만들어진다.
연리가 되는 과정은 가까이 있는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자라는 동안 지름이 차츰 굵어져 맞닿게 되고 양쪽 나무에서 각각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므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로 심하게 압박한다. 우선 맞닿은 부분의 껍질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파괴되거나 안쪽으로 밀려나고 나면 맨살이 그대로 맞부딪친다.
이제는 물리적이 맞닿음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결합을 준비한다. 먼저 지름생장의 근원인 부름켜가 조금씩 이어지고 나면 다음은 양분을 공급하는 유세포가 서로 섞이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보통 세포들이 공동으로 살아갈 공간을 잡아가면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연리의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이는 것과 같은 원리인데 이런 나무는 잘라보면 마치 쌍 가마를 보고 있는 듯 두 개의 나이테 두름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 나무 세포의 이어짐은 적어도 10여 년이 넘게 걸리고 결국은 한 나무와 같아지는데 양분과 수분을 서로 주고받음은 물론이고 한쪽나무를 잘라버려도 광합성을 하는 다른 나무의 양분 공급을 받아 살아 갈 수 있다.
연리목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4-년 생 정도의 같은 종류의 어린 나무 두 그루를 구하여 한 걸음 정도 떨어지게 심고 뿌리가 완전히 내리기를 기다려 두 나무가 맞닿을 줄기 부분의 껍질을 약간 긁어내고 탄력 있는 튼튼한 비닐 끈으로 묶어두면 연리목이 만들어진다.
나무의 종류는 자귀나무나 음나무가 좋은데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마주 보고 벌린 잎이 증산작용을 줄이기 위해 닫는 현상을 보이는데 이 때문에 이 나무는 의좋은 부부를 상징하며 음나무는 사랑을 방해하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나무와 참나무처럼 종류가 다른 나무는 수 십 년이 아니라 수 백 년 같이 붙어 있어도 그냥 맞대고 있을 따름이지 결코 연리가 되지 않는다.
세포의 종류나 배열이 서로 달라 부름켜가 연결될 수 없으며 양분 교환은 어림없는 일이다.
이런 나무는 엄밀히 말하여 '연리'가 아니다. 완전한 연리란 같은 종의 나무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같은 나무가 아니면서 서로 의좋게 붙어 있는 나무는 충남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 3리의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비롯하여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향소1리의 음나무와 느티나무 등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연리목을 지나 갈참나무와 소나무가 적당히 섞여 있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다시 통나무 계단이 나타나고 힘들게 그 계단을 오르니 송전탑 15번이 반긴다.
송전탑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요골산이란 단어 아래 표고 332미터란 제2구간 갈마터널 위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요골산은 요골(용골) 마을 뒤에 있는 산인데 풍수지리서에 의하면 좌청룡에 해당된다고 한다.
한산이씨 선대묘는 분당지구 개발에 따라 폐묘 되었다.
이곳에서 직진의 목현리 요골 800m 방향을 버리고 좌측 이배재 970m 방향의 내리막 등로가 지맥리이므로 길주의 구간이다.
이제 오랫만에 파란 솔잎이 보이는 소나무 내리막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잡목 사이로 자꾸만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왕기봉과 검단산이 마치 아직도 그곳에 올라야 마무리가 될 것 같은 불안감을 안겨준다.
다시 송전탑 16번을 지나 앞으로 보니 잡목이 사라진 틈으로 더욱 웅장한 왕기봉과 검단산 산줄기가 가슴에 안기는 시간이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진행하닌 다시 호젓한 등로로 바뀌는데 이제 키 큰 갈참나무가 아닌 키 작은 식재된 소나무 등로로 변해 있다.
큰 소나무 한그루가 정상을 지키는 무명봉을 통과하고 현위치 고개7이란 안내판을 지나니 키 큰 갈참나무와 키 작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진 호젓한 등로가 나타나고 그 넘어 저 멀리에는 다음 구간 올라야 할 검단지맥 마루금이 손짓을 하고 있다.
다시 17번 송전탑을 지나니 갈마치고개와 이배재 방향 표시만 되어 있는 이정표를 통과해 사각탁자와 벤취가 있는 무명봉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 무명봉의 벤취에서 쉰 후 다시 출발하니 현위치 고개6이란 안내판이 보이고 또 다른 탁자와 벤취를 지나 등로 좌측으로 성남시와 그 넘어 한남정맥 그리고 청계산 자락이 넘실거린다.
바로 눈 앞에는 성남시와 광주시를 이어주는 2차선 포장도로 위로 많은 차량들이 이동하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이제 오늘 산행도 그 막바지에 도달한 느낌이다.
다시 좌측의 조망을 즐기며 천천히 전진하니 넓은 공터같은 곳에 큰 갈참나무 두어개가 서 있고 그 옆에는 벤취 2개와 현위치 4.3 이배재고개란 이정목 하단부에 갈마치고개에서 1.5 Km 지나 왔고 이제 이배재까지는 0.1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참으로 반가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검단지맥 분기봉으로의 접근로와 분기봉 및 88CC의 통과 방법으로 많은 고민을 하면서도 정확한 해결책도 없이 올랐다 기대 이상의 멋진 산행으로 이곳까지 무탈하게 왔다는 사실에 홀로 감개무량해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다시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등로 우측으로는 하얀 자작나무가 식대되어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앞을 보니 이배재고개 지나 다음 구간에 땀흘리며 올라야 할 왕기봉 능선이 더욱 높게만 다가온다.
등로 좌측으로 계속 바라다 보이는 조망을 감상하며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차량 소음이 들리고 곧이어 성남시와 광주시를 이어주는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해 그곳에 세워진 이정표를 담으며 산행을 마무리 한다.
등로 좌측의 성남시 방향으로는 갈현리가 그리고 우측의 광주시 방향으로는 그냥 광주시로 표기된 이정표이다.
옷 정리를 하고 배낭 정리를 하면서 그곳 고갯마루에서 통닭을 판매하는 아저씨에게 교통편을 알아보니 도로 건너 다음 구간 들머리에서 기다리면 광주에서 성남을 오가는 버스가 오고 그것을 타고 모란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면 편리하다는 설명이다.
잠시 서성이며 사진을 담고 있는데 고갯마루 저편에서 500-5번 버스가 넘어오고 그 버스를 타서 안내도를 보니 강남역과 광주를 오가는 버스이다.
이배재고개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청량산과 검단산 산줄기를 넘는 고개로서 해발고도 300m상에 위치하는데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이배재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조선시대의 유학자 이황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두 번하고 길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북쪽으로는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을 거쳐야 광주시로 넘어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갈마치고개, 새마을고개, 태재 등의 고갯길이 두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현재 이배재를 통과하여 지방도 338호선(공단로)이 지나고 있는데 이 도로는 중원구 상대원동에 위치하는 성남산업단지와 직접 연결되어 출퇴근 차량에 의한 통행량이 많으며 교통량의 증가가 계속되어 도로 확장과 터널 건설이 추진 중이다.
다음 구간 산행을 위해 다시 들려야 할 곳이기에 사진속에 많은 풍경을 담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 시간이지만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기대가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500-5번 버스를 타고 모란역에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니 마침 그 지하철도 선릉역까지 곧바로 가 그곳에서 한번만 갈아 타니 이배재에서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아 무탈하게 집으로 복귀 할 수 있었다.
오늘은 검단지맥 분기봉부터 시작해 이곳 이배재까지 산행을 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고민과 걱정이 있었는데 모든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무 무탈하게 잘 완주하였음에 감사한 하루가 되였다.
다음 구간 산행 시에도 옆지기의 도움으로 편안하게 올 수 있기를 기대하며 멋진 검단지맥 제1구간 산행 후기를 마친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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