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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산행(완료)/낙동정맥(완료)

낙동정맥 제19차 부산지경고개에서 개금고개까지 산행 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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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부산직할시의 낙동정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2년 01월 27일과 28일 (무박 2일 토요 산행)

산행날씨 : 산행하기 좋은 기온과 날씨속에 약간의 박무가 있었던 날씨

산행온도 : 영하 06도에서 영상 10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낙동정맥 종주대 27명과 함께

산행코스 : 부산지경고개-자두농원-계명봉(601.7봉)-장군봉 갈림삼거리-장군봉(734.5봉)-

               장군봉 갈림 삼거리 복귀-옹달샘 약수터-89번 송전탑-고당봉 0.75 Km 이정표-

               산죽밭-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갈림 삼거리-가산리 마애여래입상-삼거리 복귀-

               가산 5.5 Km 이정표-93번 송전탑-20번 송전탑-양산 0.35 Km 이정표-거북바위-

               고당봉 0.1 Km 및 금샘 0.35 Km 이정표-나선형 철계단-금정산 고당봉(801.5봉)-

               고모당-고당샘-금샘 왕복-미륵사 갈림 삼거리-금정산 등산문화탐방지원센터-

               세심정-금정산성 북문-상사마을과 금성동 이정표-원효봉(687봉)-의상봉(641봉)-

               제4망루-동자바위-부채바위-제3망루-나비바위-금정산성 동문-산성고개-

               대륙봉(520봉, 평평바위, 망바위)-제2망루-케이블카와 남문마을 갈림 삼거리-안부 사거리 간이 화장실-전망대-

               초읍 어린이대공원 갈림 삼거리 이정표-만덕고개-23번 송전탑-KBS 중계소-367봉-동래구와 북구 이정표-

               백양산 3.7 Km 이정목-쇠미산 구민의 숲 안내도-알바시작-소나무 숲-돌탑봉-쇠미산(399봉,금정봉)-제1초소-편백나무 숲-

               구포동 운수사 이정표-정맥 마루금 복귀-백양산 2.65 Km 이정표-만남의 숲 이정판-백양산 2 Km 이정목 돌탑봉-

               불웅령(616 미터 및 돌탑봉)-초지조성 안부-백양산 전위봉 암봉-백양산(641.7봉)-애진봉(헬기장 안부)-유두봉(589.1봉)-

               백양산 1.4 Km 이정목-무명 돌탑봉-24번 송전탑-삼각봉(454봉)-한효아파트와 탑골약수터 갈림 이정표-갓봉(405.6봉)-

               개림초등학교 갈림 이정목-산불감시초소-임도-헬기장-꽃동산 쉼터-비포장 임도-임도 반도보라 이정표-무명 돌탑봉-

               13번 송전탑-돌탑-14번 송전탑-15번 송전탑-16번 송전탑-개림중학교 정문-개금과선교-개금고개-산행종료

               산행 후 구포에서 재첩국과 숙회로 저녁 식사 후 귀경

산행거리 : 약 23.50 Km (실 산행거리는 약 28.00 Km)

산행시간 : 여유롭게 진행하다 알바하며 사진 찍으며 꾸준한 속도로 13시간 00분 (04시 28분부터 17시 28분까지)

               알바하는 종주대를 기다리며 약 1시간 30여분 산행 시간 연장됨

 

낙동정맥이란 ???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바다를 가르는 한반도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내려 금강산과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천의봉(매봉산,1303봉)으로 솟아 오르기 전 1145봉 직전에서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태백 백병산(1259봉), 통고산(1067봉), 울진 백암산(1004봉), 청송 주왕산(720봉), 경주 덕석산(829봉), 울산 가지산(1240봉), 신불산(1209봉), 부산 금정산(802봉)을 지나 백양산(642봉)을 넘어 낙동간 하구인 다대포 몰운대에서 끝나는 약 397 Km의 산줄기를 낙동정맥이라 한다.

낙동정맥 중에서 최고봉은 태백의 백병산으로 그 높이는 1259미터이다.

 

 

설레임으로 만났던 부산의 금정산과 낙동강에 아쉬움을 남겼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정맥 산행을 진행해 무탈하게 맥 잇기 산행을 다녀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정맥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낙동정맥 산행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낙동강이 흐르고 남해 바다가 넘실거리는 부산은 늘 그리움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 낙동정맥 종주대도 강원도 태백에서 시작해 만 1년을 걸어 이제 항구의 도시 부산으로 입성하는 뜻깊은 구간이기도 하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을 오르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낙동정맥 종주대의 산행을 축하해 주기 위해 달려 온 산우님들로 인해 생각보다 많은 인원으로 오랫만에 웃음꽃이 만발한 시간이 되였다.

이제 이번 구간을 완주하면 마지막 남은 한 구간을 걸은 후 마지막 다대포의 몰운대에 안겨 그 동안의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희열과 환호성이 담긴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즐거운 산행이길 바라며 길고도 멀었던 기간 함께 했던 낙동정맥 종주대 여러분들과 온누리산악회 산우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며 그 산행 후기를 더듬어 본다. 

 

생각보다 포근한 날씨로 인해 온 몸에 땀 범벅이 된 후 도착한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의 최고봉인 고당봉에 올라 그 동안의 어려움에 대한 보상을 받듯 멋진 포즈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시간이 지나 추억이 그리울 때 꺼내 보며 오늘을 회산하는 꿈을 꾸며 오늘 하루의 시간도 아름답고 멋지게 녹아 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만 큰 기대를 걸고 올랐던 고당봉에서의 아침 일출은 두꺼운 구름층으로 인해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 하루 올랐으니 다음에 다시 오르기는 오늘보다 수월하게 올라 황홀한 일출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이다.

이 마음과 이 몸 그대로 올 한해도 건강하게 전국의 아름다운 산하를 걷고 또 걸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잠시 부산시청 자료를 이용해 부산을 배워보고 가기로 한다.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2년(태종 2년) 1월 28일 태종실록에 부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며 경상도지리지(1425년)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및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등에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동 동래지부산포라 하고 같은 책 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부산포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부자를 사용하였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 성종실록에 현재 사용중인 부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가 그린 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부자부자의 부산이라 쓰고 있어 이시기는 부자의 부산과 가마골의 부산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로 기록하고 있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현재의 가마골 부산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성종 1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이라고 하였고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래부지(1740년) 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일렀는데 밑에 부산, 개운포 양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년)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1481년) 편찬 이전에는 부자부자의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현재의 가마골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에 실려 있는 등부산시에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에 임하여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에 나오는 산은 좌천동의 증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변박이 그린 왜관도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하여 부산고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 가모령이라 하고 부산호장소의 문서에는 시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 감은 가마를 즉 가마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과 감은 우리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 가마고개(부치),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와 가마는 같은 취기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부형)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한의 소설 사밧재로 인해 그 이름이 알려진 지경고개 아니 지금은 녹동고개나 사밧재로 더 잘 알려진 고갯마루에서 생각보다 따뜻한 겨울 바람을 맞으며 낙동정맥 제19구간을 출발하기 위해 섰다.

지경이란 나라나 지역 따위의 구간를 가르는 경계를 뜻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은 1961년 이곳 지경고개를 자연지명으로 고시하고 그 유래를 부산과 양산의 경계가 된다하여 지경고개라 함이라고 했다.

이 지경고개는 양산시 동면 사송리와 부산직할시 금정구 노포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갯마루이다.

이 지경고개는 옛날에 높고 험준해서 괴나리 봇짐을 싸든 과거길의 선비와 보부상등을 가릴것 없이 몇 번 씩 쉬기 않고서는 오를 수 없는 곳으로서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래와 양산의 신랑과 신부들은 이 고개를 넘나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헌한 고개를 넘어 시집가고 장가를 가면 팔자가 세다는 속설이 있어 울산 방향으로 돌아서 가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고갯마루이다.

그보다 더 먼 옛날에는 죄를 지은 양산의 양반들 대신 돈을 받고 동래 관아에 불려가 태형을 받은 사람들이 걸어 넘어 오기가 힘이 들어 이 고갯마루에서 죽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갯마루로서 양산의 문화에는 지경고개를 사배잇재, 사배재, 사배야현 및 당고개와 병기하고 사배 남동쪽에서 부산시 동래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설명되어 있다.

사배야의 유래에 대해서는 사배야란 새벽이 일찍 온다라는 뜻의 고어인 새배려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는 고갯마루이다.

 

또한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은 농사를 잘 짓는 농부 또는 농사에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늙은 농부을 뜻하는 마을이지만 농사가 잘되는 마을 또는 다른 곳에 비하여 농토가 풍부한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 북면 작장리와 소산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동래군지(1937)에는 작장리와 소산리의 마을 이름은 보이지 않고 노포리로 기록되어 있다.

노포동은 노포, 작장, 대룡, 녹동말의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작장마을이 대표적인 마을이었으나 울산방면으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노포마을이 중심마을로 대두되었다.

1984년 발굴된 노포동고분군은 부산지방의 고분군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적으로 노포동은 다른 지역보다 앞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노포동을 말 그대로 오래된 채밭이라 풀이하기도 하는데 1910년 동래부를 부산부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조정되면서 동래군 북면 노포리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는 이곳에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 서 많은 여행객들과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교통의 중심지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곳으로 변모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 구간 어렵게 고속도로를 건너 온 녹동육교에서 우측 양산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 고갯마루에 서면 남쪽인 부산쪽으로 금정구란 도로 이정표가 서 있고 1077번 도로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 도로 입구에 자두농원 입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멀고도 긴 하루의 산행을 출발하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10여명의 종주대가 함께하던 구간들과 달리 오늘은 총 26명이 참가해 오르지만 두명은 개인적인 바쁜 일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 와 합류하기로 했고 또 세명은 범어사에서 고당봉으로 올랐다 부산의 온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기에 총 21명이 산뜻하게 출발하는 시간이다.

한겨울이기에 방한 조끼를 껴 입고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등줄기와 이마에선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하고 조금씩 워밍업이 시작되는 시간에 임도 좌측으로 자두농원 입간판이 보인다.

어둠속이기에 잘 보이지 않지만 입간판만 봐서는 아마도 농장과 식당을 겸업하고 있는 곳인듯 하다.

 

자두농장 입간판을 지나 오르니 우측으로 어둠속에서도 하얀 건물 한채가 보이고 자료를 살펴보니 해남농장 건물인 듯 하다.

계속 올라 부산시 노포 양묘장 입간판을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고 잠시 더 오르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난다.

우측으로 진행하니 금새 차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통과한 후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낙엽 깔린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진행하니 좌측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가깝게 만나는 듯 하더니 등로는 다시 낙엽 깔린 능선으로 이어지고 한동안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굵은 땀방울을 흘려 본다.

그렇게 오르니 산행 출발한지 약 한시간만에 오늘 산행의 첫번째 봉우리인 계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계명봉(601.5봉)은 특이하게도 돌탑의 제단 안에 그 정상석이 놓여 있는 그런 형태로 있었는데 계명봉도 금정산의 대부분의 봉우리 이름이 불명이듯 이 봉우리 이름도 불명이다.

계명봉 이름의 유래는 그 옛날 스님들이 새벽 예불을 드리러 일어나는 시각이 3시 쯤인데 그때 그 시절은 시계가 없어 항상 예불을 드릴 때 하늘의 별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는데 기이하게도 흐린 날이면 하늘에서 닭울음 소리가 예불시각을 정확히 알려주었다해서 유래된 이름이 계명봉이다.

양산과 부산시의 야경이 밝게 빛나고 있지만 정상을 둘러 싸고 있는 잡목들로 인해 조망이 없고 또한 포근하던 기온도 높이가 높아질수록 차가워지고 바람도 세게 불어 곧바로 우측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장군봉으로 향한다.

 

 

날 밝은 시간에 계명봉 정상부에서 남서쪽을 바라보면 천년이 넘는 고찰인 범어사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금정산 고당봉줄기가 감싸 앉은듯 아름답게 보인다 했는데 오늘 이 산객에게는 어둠이 이 모든 풍경을 빼앗아 가 버렸다.

범어사를 다음 백과사전에서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어 있다. 

범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로서 1700년(숙종 26) 동계가 편찬한 범어사창건사적에는 신라 흥덕왕(826~835 재위) 때 의상이 화엄신중기도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자 왕이 매우 기뻐해 의상을 예공대사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02년에 죽은 의상이 흥덕왕 재위기간에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범어사의 창건 연대는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670년 이후 생존기간의 어느 때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신라 화엄10찰 가운데 하나로서 의상이 창건하고 그의 제자 표훈이 주석했다는 범어사는 왜구를 막는 비보사찰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에 묘전과 현감 등이 법당과 요사채를 갖추어 중창한 이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해 선찰대본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범어사는 산의 지형을 이용해 제일 상단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을 세우고 중단에는 보제루를 그리고 하단에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중심으로 당우를 건립해 전체적으로 3단을 이루는 산지가람 배치로 되어 있다.

다음에 오를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아름다운 범어사와 고당봉을 바라본 후 범어사로 내려가 한번 둘러 볼 수 있기를 바래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매우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한동안 내려가니 땅이 얼어 푸석거리는 곳도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한동안 가파르게 올랐으니 다시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어쩐지 불안하고 또 장군봉으로 오르는 등로는 얼마나 급경사로 올라야 할지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다만 진행하며 등로 옆에 세워진 이정목이 어둠속에 외롭게 맥 잇기 진행을 이어가는 종주대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다.

한동안 내려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 임도를 타고 우측 오르막으로 오르니 다시 등로는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다.

계곡 같은 등로도 건너 다시 가파른 등로를 타고 숨가쁘게 오르니 갑자기 드넓은 관목과 억새가 펼쳐져 있는 등로가 이어지더니 강렬한 바람이 불어 오는 장군봉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그곳 장군봉 갈림 삼거리에서 정맥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야 하지만 언제 다시 이곳에 올라 장군봉을 다녀 갈지 기약이 없기에 배낭을 벗어 놓고 직진의 장군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둠속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장군봉 가는 등로 주위엔 겨울 찬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를 타고 진행하니 바위지대가 펼쳐지더니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곧이어 장군봉 정상석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는 정상에 도착을 한다.

이 장군봉의 유래를 찾아보니 역시 김유신 장군과 관련이 있는 유래가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국 자손으로 상대적으로 경주 황실에서 그다지 높은 지위에 있지 못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전국 명산을 다니며 호연지기를 닦았다고 하는데 젊은 시절 김 유신 장군이 이 봉에 올라 삼국의 통일을 기원했다해서 이름이 장군봉이라 불린다는 설이다.
실제 장군봉 아래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해서 그 소나무가 김유신 솔바위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어 찾아 보지만 어둠속에 정확한 소나무를 찾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시간이다.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지는 바람으로 인해 잠시 머물기조차 힘이 들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주위 야경으로 인해 그냥 내려갈 수가 없다.

장군봉 북서쪽으로 양산시와 물금읍쪽 야경이 참으로 아름답지만 역시 삼각대도 없이 추위에 떨리는 손을 이용해 담다보니 만족스럽지 못한 야경사진이다.

그래도 이곳 금정산 장군봉까지 올라 이렇게나마 양산의 야경을 담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서울과는 또 다른 야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였다.

잠시 야경을 어렵게 담은 후 올랐던 등로를 타고 다시 배낭을 벗어 놓은 장군봉 갈림 삼거리로 복귀해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이제 장군봉에서 내려 와 벗어 놓았던 배낭을 둘러메고 등로 우측을 타고 내려가니 모든 종주대가 떠나고 이 산객이 제일 후미조로 남게 되였다.

잠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자주 세워져 있는 이정목으로 인해 산행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렇게 잠시 내려가니 등로 옆에 옹달샘약수터가 있고 수고꼭지 두군데에서는 제법 많은 수량의 물이 계속 흘러 내리고 있다.

이 한겨울에 저 정도의 물줄기가 흘러 내린다면 여름철 산행을 즐기는 산객들에게는 생명수로서 그 역활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만한 그런 샘이였다.

시원하게 한바가지의 물을 들이킨 후 다시 평이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전진해 본다.

 

약수터에서 목마름을 달랜 후 계속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 좌측에 89번 송전탑이 서 있고 사진에 담은 진행한다.

다시 잡목들이 등로를 가로막은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오르니 돌들이 정상을 지키는 무명봉에 도착하고 곧이어 아름다운 소나무와 산죽들이 어우러진 멋진 등로가 열려 있지만 어둠이기에 바로 옆의 풍경만이 들어 올 뿐이다.

잠시 더 진행하니 호포역과 질메쉼터 이정표가 서 있는 장소에 도착해 잠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제 고당봉까지의 거리가 0.75 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 진행하니 더욱 빽빽하게 등로를 채운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산객을 반기고 그 소나무 아래에는 이 추운 겨울에도 파란 잎을 살랑거리며 가득 채운 산죽이 산객의 발길을 잡는다.

다시 계속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하산 갈림길이 보이고 그 앞에는 마애여래입상 표기가 되어 있다.

정맥등로는 아니지만 가까운 거리이기에 잠시 들려 사진 몇장 남기고 그 역사를 읽어 보고 오기로 한다.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은 범어사 북쪽 금정산 정상 부분의 화강암 절벽 위에 새긴 높이 12 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가는 선으로 불상을 새겼는데 지금은 오랜 비바람으로 손상이 심하게 된 상태이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둥글게 솟아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네모진 형태이고 활 모양의 가는 눈과 큰 코 등이 토속적인 인상을 준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입고 있으나 가슴 아래부분은 많이 닳아서 자세히 살펴보기 어렵다.

토속적인 지방색이 느껴지는 모습과 가는 선으로 불상을 만든 점 등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품이지만 오랜세월 풍파에 시달리며 많이 그 윤곽이 사라지고 있음에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였다.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을 둘러 보고 올라오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고 주위 사물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 온다.

올라오는 등로 우측 저 위로 멋진 암봉이 자리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산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잠시 후 정상 등로를 타고 저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는 세상은 또 어떤 세상일지 벌써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즐긴 후 다시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갈림 삼거리로 복귀하기 위해 뒤돌아 가파른 오르막 된비알을 타고 올라간다.

 

잠시 더 오르니 이번에는 등로 좌측에 많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서 있고 그 언덕에 올라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바위 사이로 박무 때문에 희미하지만 분명 낙동강이 도도히 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그 주위의 양산 물금읍 마을들도 낙동강을 끼고 삶의 현장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인 모습이다.

1년전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 연못이 있는 태백에서 긴 여정의 첫발을 내디딘 후 다시 해가 바뀐 후 이곳 낙동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부산에서 다시 만나니 그 감회가 참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 다시 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갈림 삼거리로 복귀해 벗어 놓았던 배낭을 둘러 메고 등로 우측을 타고 정상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금성산 정상까지 0.7 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니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열려 있는데 그 주위로는 푸르던 잎마저 갈색으로 변해가는 산죽밭이 열려 있다.

그 언덕을 오르자 마자 등로 우측으로 멋진 전망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에 잠시 들려 주위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많은 사진 남긴 후 다시 정상 등로로 복귀해 진행하니 저 멀리 송전탑 넘어 금정산 고당봉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금새 93번 송전탑과  20번 송전탑을 지나고 넓은 공터 위에 등로 우측으로 범어사 하산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제대로 된 금정산 고당봉을 조망해 본다.

 

기획. 테마 산행을 하는 듯 주위 풍경과 금정산의 암봉들을 담으며 진행하니 고당봉 좌측 저 아래 큰 바위지대가 보이고 그 한가운데에 아기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어 그곳으로 올라 보니 가까이 가면 갈수록 거북이 형상은 사라지고 그저 평이한 바위가 바위 위에 올려진 형상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350여 미터 내려가면 금생이 있다는데 이곳에서는 들리지 못하고 조만간 다른 루트를 통해 들리기로 하고ㅓ 나무 계단을 타고 금정산 고당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다 등로 좌측 저 뒤를 바라보니 이미 일출 시간은 지났지만 두꺼운 구름으로 인해 세상으로 빛을 내보내주지 못하던 빛을 잠시 보여주고 있다.

선명한 일출은 아니지만 두꺼운 구름을 뚫고 보여주는 일출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남는 시간이 되였다.

지난 구간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일출을 만났기에 그런 일출을 다시 한번 기대를 하였는데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시간이다.

 

계단을 타고 금정산 고당봉 암봉에 오르니 지금까지 이 산객이 걸어 온 정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바로 아래 우측으로 범어사 내려가는 안부 사거리와 두개의 송전탑 그리고 우측으로 송전탑을 따라 장군봉 갈림 삼거리와 억새밭 그리고 장군봉까지 금새 걸어 온 거리가 저 멀리 멀어져 있다.

다만 한가지 계명봉과 장군봉 그리고 이곳 금정산 고당봉의 삼각점에 위치해 있을 천년 고찰 범어사를 볼 수 없음이 무척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꼭 밝은 날 다시 계명봉과 장군봉에 올라 아름다운 범어사를 내려다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등로 좌측으로는 이제부터 내려가야 할 금정산성의 북문에서 시작한 성곽을 타고 동문 남문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등로가 열려 있다.

바로 아래 멋진 암봉에는 머리에 파란 소나무 잎이 무성한 풍경이 그림으로 다가오고 그 아래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이 아름다운 산하를 지켰을 성곽이 그 옛날의 수많은 민초들의 숨소리를 간직한 채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새벽부터 어둠을 뚫고 봉우리 세개를 넘었으니 거리는 멀지만 이제부터는 산책하듯 걸어가면 될 등로일 것이다.

 

계단을 타고 끝까지 오르니 그곳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나선형 철 사다리가 서 있고 그곳을 통해 정상으로 오르며 앞을 바라보니 앞서 진행한 종주대들이 금정산 고당봉을 가운데 두고 수많은 추억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 고당봉에서 직진하면 금정산성 성곽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겠지만 낙동정맥 마루금은 고당봉에서 좌측 계단을 타고 북문으로 내려가며 이어지고 있다.

그저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금정산 고당봉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들어지게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암봉으로 이뤄진 고당봉 정상부를 걸어 드디어 정상석에 입맞춤을 하는 순간이다.

지난 1년 동안 수없이 힘들었던 고통의 순간도 또 희열에 들떠 잠 못자고 감격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며 그 마지막 장도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무엇이 그리 좋아 잠도 자지 못하고 천리길 먼 길을 달려 내려와 이곳에 모여 있을까 생각에 잠겨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모두 얼굴에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또 이렇게 소중한 추억 한장면 만들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종주대들은 아닐련지...

이제 한구간 남은 구간도 무탈하게 완주 후 탁배기 한잔 앞에두고 무용담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기도 해 본다.

 

여기에서 금정산을 배워 본다.

금정산은 역사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산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범어사)과 국내최대 규모인 금정산성을 아우르고 있으며 동래온천, 금강공원, 범어사, 국청사, 금정산성과 산성마을 등 명소를 두루 지니고 있다.
금정산은 해발 801.5미터의 주봉인 고당봉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727봉)과 남으로 상계봉(638봉)을 거쳐 성지곡 뒷산인 백양산(642봉)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미륵봉, 대륙봉, 파류봉, 동제봉 등의 준봉을 일구어 놓고 있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으나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마다 맑은 물이 항상 샘솟고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하여 아름다운 기암절벽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부산이 자랑하는 명산이 되었다.
금정산 이름의 유래는 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 등에 기록된 전설에 의하면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 가량이고 물이 늘 차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금빛이 있으므로 금색어가 다섯 색깔의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금정산이라고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정산 고당봉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고 또 주위 풍경을 둘러 본 후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고모당이란 조그마한 사당이 눈에 들어 온다.

고모당은 튼튼한 돌담을 두르고 그 가운데에 작은 규모로 지어져 있는데 내부를 잠시 둘러 봐도 특별한 장식이 없다.

특이한 것은 좁다란 두개의 나무 판자에 각각 고모영신과 산왕대신이라 적어 놓은 것만 벽에 기대어 놨을 뿐이였다.

이 작은 사당이 고모당과 산신각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당집 내부가 너무 비좁다 보니 당제를 올릴 때에도 제물만 방안에 차려 놓고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나 그 좁은 돌담 내부에 천막을 쳐 놓고 몇일씩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소원하는 소망을 잘 들어 준다고 소문난 곳이기도 하였다.

이 고모당의 연유가 궤범어사기궤유전(1902년) 산 축령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밀양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 하면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여생을 보내면서 불사로 사부대중들끼리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이 보살은 큰스님께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돕고 지어 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

큰 스님은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일년에 두차례 (정월보름날과 단오 날) 제사를 지내니 범어사가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되였다.

박씨 할미의 높은 덕행을 기리기 위해 인격신이 되어 금정산을 담당한 진호신으로 모셔 백성의 한재 수재 병재 등이 발생되지 않도록 지금도 고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무속에서 인간을 돕고 수호하는 역활로 산신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기도를 밤낮으로 올리고 있다.

범어사 사하 촌에서 살고 있는 주민 몇사람은 매년 정월 보름날 하루 다음날 합동으로 제물을 정성껏 마련하여 이 고모당을 찾아간다고 한다.

그들은 고모당의 내력이나 연유와는 상관없이 가족들의 건강과 액운을 막기 위해 전래 습관대로 제를 올린다고 말한다.

그들은 특정 신앙이라기 보다 산 아래에 사는 주민으로서 이 고모당을 찾고 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한 때 범어사의 젊은 스님들이 고모당에서 당제를 올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집을 훼손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범어사에서 잇따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다시 고모당을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보기에는 좋지 않았지만 토속 신앙으로서의 그 역활이 있었음은 분명한 당집이였을 듯 하다.

 

이제 아침 8시를 넘기면서 서서히 허기가 지기 시작하고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안부인 북문 근처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고 다시 계단과 내리막 등로를 타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가 본다.

나무 목책 등로를 타고 내려 와 뒤돌아 본 금정산 고당봉은 꽤 높은 암봉이 그 위용을 자랑하듯 서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잘 정리된 고당샘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자리를 펴고 아침 식사를 즐기기로 한다.

고당샘에서 늦게 합류한 두명의 종주대를 만나 이제부터 총 23명의 종주대들이 개금고개까지 함께 진행하기로 한다. 

 

40여분간 아침식사를 즐긴 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400여미터 떨어진 금샘을 다녀 오기로 한다.

고당봉을 좌측 위에 두고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고당샘에서 금샘가는 등로 역시 잡목들이 가득한 운치있는 등로가 열려 있다.

빈 몸으로 가니 생각보다 쉽게 금샘에 도착을 하지만 역시나 추웠는지 바위 위에 고여 있던 금샘의 물도 모두 얼어 하얀 얼음만 한가득 담겨져 있다.

그 금샘 아래로 펼쳐진 북문과 금정산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풍경 역시 아름답고 멋지다.

 

금샘
고당봉 동남쪽 8부 능선에 돌출한 바위 무더기 중 남쪽에 우뚝솟아 있는 바위 정수리에 물이 괴어 있는 우물이 금샘이다.
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 산천조에 금정산은 현청에서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다.
산정에 있는 바위가 있는데 높이는 3장(9미터)이며 꼭대기에 우물이 있어 그 둘레는 10여척(3미터) 남짓하며 깊이는 7치(20cm)쯤 된다.
항상 물이 가득하며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금빛을 띤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그 우물에서 노닐었다고 하여 산이름을 금빛 우물이 있는 산 금정산이라"고 기록 하고 있다.
범어사창건사적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문무왕과 함께 금샘 아래에서 왜적침입을 막기 위해 칠일 밤낮을 일심으로 독경한 불럭의 역사 현장이다.
범어 3기중 1기인 금정암 위의 금빛나는 우물에 금어가 노니는 암상금정이라 하였다.

금샘과 범어사 설화
금샘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임을 알려주는것과 함께 금정산이란 산 이름과 범어사의 절 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척이며 깊이가 7촌 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고 하여 금빛나는 우물 금정이란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 곧 범어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범어사 창건 자적과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는데 신라 의상대사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해에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대왕이 근심에 쌓여 있는데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스님과 함께 금정산 금샘"에 가서 칠 일 동안 밤낮으로 기도하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대왕이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샘을 찾아가 기도를 하니 땅이 크게 요동하며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현신하여 동해로 나가 왜적들을 격파했다.
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의상스님을 예공대사에 봉하고 금샘 아래 호국사찰을 세웠으니 곧 범어사이다.

 

그 작은 금샘 하나에 담겨진 의미와 설화가 너무 깊어 숨이 막힐 지경이였다.

 

한동안 금샘을 내려다 본 후 이제 다시 고당샘으로 복귀하기 위해 내려가기 위해 바위에 묶여 있는 안전 로프를 타고 내려가다 위를 올려 다 보니 저 멀리 방금전 다녀 온 고당봉이 바위 사이로 너무나 빛나게 서 있다.

그 고당봉으로 향하는 산상에는 진달래 나무들이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이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견디고 있고 고당봉 우측 아래에는 그 고당봉을 지키려는 듯 또 다른 바위군이 드높게 하늘을 위해 솟아 올라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제 금샘을 출발해 다시 고당샘으로 돌아 나오니 모든 종주대들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등에 메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아침 9시를 넘기면서 많은 등산객들이 등로를 메우기 시작하고 고요한 정적을 깨고 있다.

그 등산객들 속으로 들어가 이제 성곽을 타고 한동안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잠시 내려가니 산죽 등로를 지나 등로 우측으로 다시 금샘을 다녀 올 수 있는 금샘 갈림길이 나타난다.

다시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미륵사 가는 등로 갈림길이 나타나고 세심정도 보여 시원한 물 한모금 마셔 본다.

무등산의 영원한 벗이란 금정산 빗돌을 지나 금정산 등산문화탐방지원센터 빗돌과 건물을 지나니 금새 금정산성 북문에 도착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금성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성이다.

숙종 29년(1703) 경상감사 조태동이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와 동래읍지에 나온다.

그 이전의 기록에도 금정산성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한참 앞서는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파괴하였으나 1972년과 1989년에 복원하였다.
금정산성의 총 길이는 17km에 이르며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있는데 현재는 4k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동래, 양산, 기장의 세 읍에 소속된 군사와 승려들이 차출되어 수비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쌓았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고종 4년(1867) 동래부사로 부임한 정현덕이 금정산성의 성문을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찾다가 사제지간에게 건축을 맡겼다.

동문은 스승에게 맡기고 서문은 제자에게 맡겼는데 스승은 웅장하게 세우고 싶었고 제자는 아름답게 세우고 싶었다.

제자가 서문을 완성하고 스승을 찾아가자 스승은 문도 달지 못한 상태였다.

스승은 제자의 솜씨를 시기하였다.

사람들이 제자의 솜씨를 칭찬하였으나 제자는 스승을 도와 동문을 함께 완성하였다.

뒤에 두 사람은 밀영의 영남루공사를 함께 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은 곳이다.

전체길이는 약 17km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박태항에게 책임지어 쌓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일단 폐지하였다.

순조 6년(1806)에 성을 다시 고쳤으며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 서문, 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금정산성 석성을 좌측에 두고 우측 넓은 임도를 타고 오르니 금새 680봉에 오른다.

그곳에 올라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라 온 금정산성 북문이 바로 발 아래 넓은 안부로 눈에 들어 오고 그 위로 고모샘을 지나 저 멀리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제 제법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는 풍경이 참으로 환상이다.

 

잠시 더 진행하다 등로 우측의 고당봉 좌측 암봉을 담다보니 그 아래 멋진 모습으로 눈에 들어 오는 미륵사가 보인다.

어찌 저런 명당 자리에 그런 사찰을 세웠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정말 기가 막힌 장소인 듯 하다.

금정산의 미륵사는 삼국시대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다.

당시 원효대사가 이곳의 미륵암에 주석하면서 미륵삼일부경의 일부를 썻다고 전한다.

또한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호리병 5개를 구하여 왜구 5만명을 거뜬히 물리쳤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원효대사께서는 당시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구멍이 독성각 옆에 남아 있다.      

미륵사 염화전 뒷편의 거대한 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선바위라 불리우고 있다

바위는 여러개의 바위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데 해가지고 난 뒤 바위와 바위 사이의 금이 보이지 않게 될 때 바위 전체를 보면 그 형상이 분명히 드러 난다고 전한다,

좌선바위 뒷편에는 미륵불과 닮은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하고있는 형상의 절묘한 터에 원효대사가 기도도량을 세워이를 미륵사 라는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전한다.     

원효대사는 왜적 5만 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진을치고 첩자를 뭍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폈다고 한다.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게 하여 탑앞에 나란히 세운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는데 그 장군기를 보고 2명의 첩자가 미륵암까지 올라 왔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호리병으로 신슬을 부려 쳡자의 목을 조르자 첩자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치는 순간 그는 그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한다,

그러자 왜적들은 모두놀라 그대로 달아 났다고 전한다.               

그때 원효대사가 신라의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는 지금도 독성각 옆에 움푹 페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한동안 주위 풍경에 취했으니 다시 성곽을 따라 맥 잇기 산행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680봉을 넘어 계속되는 성곽 산행을 이어가니 저 멀리 원효봉이 보이고 그곳으로 오르다 잠시 뒤돌아 보니 지나 온 마루금 저 멀리 억새초원을 자랑하는 장군봉이 우뚝 드러나 있다.

한발 두발 힘겹게 오르는 종주대들의 모습 역시 맥 산행 잇기의 백미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이 그리 좋아 잠도 못자고 내려 와 새벽 어둠부터 이리도 힘들게 산행을 이어가고 있는지...

 

그렇게 한발 두발 걷다 보니 어느새 원효봉 정상에 도착해 다시 사진 몇장 남기며 추억을 만들고 있다.

원효봉은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아 으뜸의 새벽 원효봉(678봉)이라 불렸다.

금정산성 제4망루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보는 전망대 역활을 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김유신 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 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래 서 있어 선 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어느 낭도가 그 자리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이 땅달보 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 푸르름을 뽐내고 있어 김유신 솔바위라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는 설명판이 정상석 옆에 서 있다.

 

원효봉에서부터는 등로 좌측으로 부산시내를 조망하며 앞으로는 꾸불꾸불 곡선의 미학을 알려주는 금정산성 등로를 타고 내려갔다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암봉의 의상봉을 향한 발걸음이다.

어느 산성이나 비슷하지만 이곳 금정산성도 이곳 원효봉에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다 만나는 풍경이 참으로 푸근하고 고향같은 느낌으로 다가와 좋은 곳이다.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우리 산하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성곽이 이제 후세에 남겨져 역사의 교훈으로 자리잡아가는 그런 느낌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이제 안부로 내려갔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좌측 저 뒤로 의상봉 암봉이 서 있고 그곳을 잠시 들렸다 내려 오기로 한다.

  

100여미터 뒤로 돌아 가 암봉에 올라야 되는 의상봉, 원효봉에서 내려오다 직벽의 암봉이 있어 결국 이 산객이 올랐던 것처럼 우회했다 뒤로 다시 돌아가  올라야 하는 상황이지만 어짜피 역사 한 귀퉁이를 더 알고 간다고 생각했기에 큰 부담이 되는 거리는 아니다.

그곳 의상봉 정상에서 등로 좌측의 부산시내쪽을 바라보니 바로 앞에 거대한 암봉 하나가 더 보이고 그곳 정상부로 향하는 길목엔 안전로프도 보이는 것으로 봐 몇명의 산우님들은 저 암봉 위로 오를 수도 있음을 직감하는 모습이다.

그 아래 펼쳐진 대단위 아파트와 복잠한 시내 풍경이 다시 가슴을 조여 오기에 지나온 꼬불 등로와 그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금정산 고당봉만 몇번 더 살펴 본 후 의상봉을 내려 와 제4망루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의상봉에서 내려 와 벗어 놓았던 배낭을 둘러메고 다시 성곽을 타고 잠시 더 진행하니 금정산성 장대까지 1.4 Km 남았다는 거리표시가 있는 이정표를 만나고 그 등로 좌측엔 제4망루란 이정표와 함께 망루 하나가 보인다.

금정산성 제4망루는 중성과 합류되는 북문 남쪽 1.5㎞ 지점인 해발 620미터의 능선 상에 위치한다.

담장을 쌓고 정면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망루로 복원되어 있으며 이곳은 의상봉 바로 남쪽으로 외성의 동측 성곽과 중성의 동단이 만나는 삼각점이기도 하다.

사진 한장 남기며 제4망루를 바라ㅗ니 그 망루 저 멀리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의상봉의 암봉이 지척으로 남아 있다.

 

제4망루에서 부터 제3망루까지는 별 특징없이 그저 고즈넉한 성곽을 타고 문화 탐방을 하듯 그렇게 구경하며 걸으면 될 등로였다.

잠시 억새가 펼쳐진 능선을 타고 가끔 소나무 숲이 자리한 대평원 같은 곳의 바위 지대를 따라 성곽을 걸으니 잠시 안부로 내려서는가 싶더니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목책이 서 있는 성곽을 타고 한동안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걸었던 무명봉 넘어 제4망루와 그 뒤로 의상봉의 암봉 그리고 그 위상봉 바로 좌측의 부산시내 방향으로 높게 치솟아 있던 암봉 하나가 한눈에 들어 오며 참으로 멋진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진행하지 못하고 한동안 서서 바라보며 그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진행하다 성곽을 좌측에 두고 우측 등로로 갈라지는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동자바위와 부채바위 그리고 제3망루가 보일 것이라 생각되는 시작점 부근에서 금학산의 매바위를 닮은 바위 하나가  부산 시내를 향해 물끄러미 바라보는 형상의 바위를 만나 잠시 쉬어 간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자연미 가득한 바위 하나와 그 아래 펼쳐진 회색 콘크리트의 거대 도시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불규칙한 산하가 가슴에 남겨지며 복잡했던 마음을 조금은 정리를 해 주는 기분이다.

 

그렇게 즐기며 산성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눈 앞에는 큰 바위들과 소나무 군락지가 눈에 들어 오고 걸어 왔던 성곽 옆 등로는 이제 성곽에서 우측으로 멀리 떨어져 벗어나고 있다.

이곳에서 잠시 고민을 해 본다.

성곽을 따라가면 동자바위와 부채바위 및 제3망루와 나비암을 만날 수 있을 듯 한데 갈 수 있는 등로나 있는지 의문이 들고 또한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넓은 성곽 우측의 임도를 타고 진행하기에 잠시 서성이다 우측 임도를 타고 진행하기로 한다.

저 바위 지대를 지나면 볼거리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와 생각해 보니 많이 아쉬운 점이 있는 곳이였다.

  

그곳 제3망루를 보지 못하고 꿈결같은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진행하다 보니 선두권의 종주대를 만나 함께 진행하는 시간이 되였다.

넓은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들이 산행을 즐기는 모습이 눈에 자주 들어 온다.

이런 저런 세상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무다 보니 어느덧 금정산성 동문에 도착해 동문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이곳 금정산성 동문에는 서문과 관련된 전설 하나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예전 숙종년간에 동래부사가 경상 인근에서 가장 소문난 석공 한 명을 불렀는데 그 석공은 일 처리와 눈썰미 그리고 기술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라서 동래부사는 그에게 금정산성 동문과 서문의 건립 공사를 맡겼다.
그러나 그 석공은 오랫동안 외지에 있었던 터라 공사 맡기를 꺼려 했지만 동래부사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동문과 서문 공사를 맡았고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서문 공사는 자신의 제자에게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래부사가 대뜸 스승과 제자가 각각 동문과 서문 공사를 맡아 선의의 경쟁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스승은 떨떠름한 느낌이었지만 부사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그렇게 하고 말았다.
그의 제자 되는 이는 성품이 온후하고 선비처럼 고결한 사람이라 매양 스승의 일을 제 일처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석공의 제자 중 가장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기도 했다.

제자는 스승과 경쟁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부사의 명인데다가 스승과 경쟁하면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승과 성문 축조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제자가 맡은 서문이 섬세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면서 축조되는 반면에 스승이 맡은 동문은 육중하고 둔탁하기만 할 뿐 도시 세련미는 하나도 없었다.

동문과 서문이 점차 완성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서문을 맡은 제자를 칭찬하기 시작했고 스승은 이 제자를 시기하게 됐다.
마침내 질투와 노여움에 불탄 스승은 우연한 사고를 가장하여 제자를 죽일 흉계까지 꾸몄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스승의 이런 행태를 비판하면서 더욱 더 제자를 칭송했고 스승의 질투는 점점 더 불타올랐다.
그러나 제자의 진실한 마음은 스승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두 사람은 서문이 완공되는 날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됐다.

동래부사의 낙성식 축하 인사를 받으며 굳게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영남 제일의 누각 영남루를 완성했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정산성 동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몇장의 사진을 나기고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본다.

잠시 완만한 등로를 타고 오르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고당봉과 북문 그리고 지나온 성고가이 아름답게 놓여 있다.

그렇게 잠시 완만한 무명봉을 넘으니 다시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등로는 이어지는가 싶더니 금새 산성고개에 도착을 한다.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금성동과 장전동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현재 에코 브리지를 만들고 있어 그 산성고개 도로로 내려갔다 올라올 필요 없이 그 에코 브릿지를 이용해 쉽게 건넌다.

 

다시 산성고개를 넘어 약간은 가파라지는 성곽길을 따라 오르니 계단이 보이고 짧은 계단을 타고 오르니 분재형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등로에 자라며 눈길을 잡는다.

그 분재형 소나무를 지나니 다시 나타나는 긴 계단을 타고 힘들게 오르니 저 멀리 지나온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 온다.

사진 좌측 저 멀리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이 우뚝하고 그 앞으로 원효봉과 의상봉 그리고 가까이 안부쪽에 동문까지 시원한 조망이 펼쳐져 있다.

그저 이렇게 힘들게 올라 바라보는 아름다운 조망만으로도 오늘 이곳에 오른 의미가 있는 듯하다.

 

멋진 지나온 금정산을 조망한 후 조금 더 진행해 등로 좌측을 바라보니 부산시 금정구쪽 시내가 발 아래 바로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구월산을 넘어 저 멀리 장산이 우뚝 솟아 있다.

몇번인가 부산으로 내려와 오르려고 준비했다 기회가 맞지 않아 오르지 못한 장산, 조만간 9정맥 완주 후 여유롭게 올라 이곳을 바라 볼 기회도 있을 것이다.

서울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 하면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는 부산시내를 이렇게 내려다 볼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천막처럼 쳐 놓은 임시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지도상에 나와 있는 망바위에 도착을 하지만 그곳 정상에는 대륙봉이란 정상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넓은 너럭바위에 조망이 제법 좋은 곳이기에 다시 주위 부산 시내를 조망한 후 쉬어 가니 시간은 잘도 흘러 예상 시간보다 약간 지체되고 있다.

그래도 어려운 구간은 많이도 지났다는 생각과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던 알바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여유를 부려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몇장의 추억을 남긴 후 긴 여정을 이어가 본다.

 

대륙봉을 떠나지 겆 부산 시내를 살펴보니 장산과 금정구 그리고 동남쪽 저 멀리 해운대와 부산항이 보일듯 말듯 하지만 햇살이 강해져 오며 박무 현상으로 인해 뚜렷한 모습으로의 풍경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다시 평이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조금은 가파라지는 성곽을 타고 오르니 이리저리 갈지자 등로가 이어지더니 제법 큰 바위들이 모여 있는 정상부에 도착을 한다.

주위를 살펴보니 등로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제2망루가 보이고 그곳으로 가 사진 한장 남긴 후 망루로 올라가 보지만 주위에 자라고 있는 잡목들로 인해 조망은 별로 없다.

다시 내려 와 정상 등로로 복귀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많은 종주대를 만나 함께 진행을 한다.

 

시멘트 임도를 타고 내려가니 T형 갈림길이 나타나고 직진의 능선 방향으로는 출입금지 로프가 쳐져 있다.

우측으로 남문마을 가는 화살표가 보이고 그곳으로 가도 낙동정맥은 이어지고 탁배기 한잔 마실 수 있지만 정상 맥은 앞으로 막아 놓은 능선을 타고 올라 진행해야 되기에 눈물을 머금고 금줄을 넘어 무명봉을 오른다.

하지만 이곳에서 부터 많은 종주대들이 흩어져 제각각 알바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지체할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시간이기도 하였다.

 

능선으로 오르니 무명봉 정상에는 바위들이 산재해 있고 그 무명봉을 넘어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이제는 비포장 임도가 기다리고 있다.

이곳 역시 우측으로는 남문마을 이정표와 화살표가 있고 좌측으로는 케이블카 이정표와 화살표가 표기되어 있어 헷깔리는 등로이다.

정상 등로는 이곳에서 좌측 케이블카 방향으로 임도를 타고 진행해도 되지만 직진의 능선 소로 등로를 타고 나즈막한 무명봉으로 오른다.

능선으로 오르니 선답자들이 올려놨던 간이 화장실과 우측으로 만덕고개 하산 이정표가 보이기에 한숨을 내쉬어 본다.

이곳에서 만덕고개 이정표가 있는 우측 등로를 타고 진행해도 되고 직진의 넓은 임도를 타고 진행해도 결국은 만덕고개 근처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정상 등로를 찾아 진행하다 조금은 한적한 곳에서 선두를 잡아 놓고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인원 파악을 하다 보니 선두 몇명과 후미조들이 보이지 않고 이때부터 인원 파악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연락을 하다보니 벌써 한시간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선두조 한명은 남문마을 지나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하다 뒤돌아 오고 후미조는 남문마을쪽으로 진행하며 등산객들에게 물어 물어 어렵게 만덕고개 근처까지 일찍 내려가고 있었으며 또 다른 선두조 몇명은 정상적인 등로를 타고 벌써 만덕고개 가까이 내려가 있었던 것이다.  

인원 파악이 끝난 뒤 다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진행하니 전망데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앞으로 올라야 할 높고 높은 낙동정맥 마루금을 찾아 본다.

그 정맥 마루금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펼쳐진 부산 시내의 조망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박무 현상으로 인해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제 전망 데크를 떠나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제법 잘 발달된 등로가 열려 있고 그 등로를 타고 이어가니 좌측에서 내려오는 넓은 임도를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전진하도록 되어 있다.

이 임도가 혹시 간이 화장실이 있던 곳에서 직진 방향으로 이어지던 넓은 임도는 아니였을까 생각되어 지는 그런 임도였다.

임도를 타고 한동안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초읍 어린이대공원 하산 갈림 이정표가 나타난다.

곧이어 만덕고개가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이기에 반가움이 클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옛 백두대간 동지였던 도롱골 선배님을 만나 너무나 반가운 시간을 가져 본다.

서로 오랫동안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몇년 전 백두대간 산행을 하던 시간으로 뒤돌아 가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 않을 정도로 생생한 시간이다.

감사한 마음 전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도 짧은 시간 뿐 이후에는 후미를 맡아 진행하다 보니 이야기 할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초읍 어린이대공원 하산 갈림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지나 내려가니 드디어 만덕고개 위 터널로 등로는 이어지고 있다.

동래구와 북구를 이어주는 만덕고개는 이 고개를 넘으면 수많은 덕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로 붙여진 만덕고개를 터널을 통해 넘으며 알바를 하고 있던 종주대들과 연락을 취해 보니 이제 조만간 모두 만나 함께 진행 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기는 시간이다.

터널을 건너 앞을 보니 수많은 가파른 계단이 기다리고 있는데 앞서 진행한 종주대가 우측으로 나 있는 우회등로를 타고 진행해도 무방하다는 소식에 북부전력송신소와 KBS 중계소가 있는 367봉 정상의 삼각봉은 오르지 못하고 우회 등로를 타고 진행한다.

 

평이한 등로를 타고 우회 등로로 진행하니 다시 367봉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 후미에서 선두로 뒤바뀐 종주대들이 쉬고 있는 장소에 도착해 합류를 해 본다.

367봉 정상에서 후미를 기다리는 종주대에게 연락해 모두 내려 오게 한 후 인원을 확인해 보니 이제 선두에서 홀로 알바를 하고 있던 종주대 한명과 그 종주대를 마중 나간 종주대 한명 그렇게 두명의 종주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음을 확인한다.

남아 있는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차례대로 모든 종주대를 보내고 제일 후미에 남아 두명의 종주대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드디어 마지막 종주대 두명을 만나 또 한명의 종주대 포함 4명의 종주대가 제일 후미에서 조금은 빠르게 앞서간 종주대의 뒤를 따라 진행해 본다.

백양산 3.7 Km 남 있다는 이정목을 지나 계속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쇠미산 구민의 숲 안내판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아름답게 가꾸어진 소나무 숲이 있고 제법 많은 주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와 주민들의 쉼터처럼 보이는 곳이였다.

이제 두명의 종주대는 앞서 달려 가고 제일 후미에서 어렵게 진행하는 마지막 종주대 한명을 모시고 진행하는 맥 잇기 산행에 어려움이 가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룰루랄라 아무 걱정 없이 진행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오만이 결국 마지막 두명이 또 대형 알바를 하는 기회가 되고 말았다.

그 구민의 숲을 지나니 너무나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지나 넓은 방화선 같은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는데 그 방화선 터럼 넓은 등로 주위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도열해 이 산객에게 인사를 하는 듯 보인다.

그 절경에 취해 한동안 진행을 하다 보니 진행하다 우측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야 할 정상 등로를 잃고 계속 앞으로 진행 해 결국 대형 알바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저 앞으로 진행하는 종주대를 불러 보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지 대답도 없어 그냥 그곳을 통해 마지막 종주대와 걸어 보기로 한다.

 

넓은 방화선 같은 임도를 타고 그 임도 주위에 도열해 있는 멋진 소나무들의 열병을 받다보니 몸도 마음도 콩밭에 가 있어 제대로 된 등로 확인을 못하고 또 앙뚱하게 알바를 하고 만 것이다.

다만 이 산객보다는 앞서 알바를 하면서 고통을 느꼈을 또 다른 종주대의 알바에 다리가 풀리는지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뒷모습이 마음 아플 뿐이다.

더욱이 앞서 간 종주대 한명이 고장난 무전기를 두고 앞서 내달려 진행하니 모바일폰도 충전기가 방전되어 연락도 안되고 무전기조차 무용지물이니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것이 큰 문제인 시간이다.

그렇게 진행하니 등로 좌측에 큰 돌탑 하나가 보이고 그 정상에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곧이어 평평한 바위가 누워있는 바위지대를 지난다.

 

바위지대를 넘어 계속 전진하며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부산 금정구의 고층 아파트와 시내가 바로 발 밑에 펼쳐져 있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이 산객의 눈에 들어 온다.

참으로 자주 들렸던 부산이지만 늘 민초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달리 이렇게 발 밑에 두고 내려다 보는 기분은 어쩐지 묘한 기분이다.

지나 온 낙동정맥 마루금이 도심의 고층 아파트 좌측으로 그 가장자리만 보이고 있다.

 

다시 이어지는 완만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계속 전진해 오른다.

넓은 방화선 같은 임도는 언제 끝날지 기약없이 이 산객의 텅빈 가슴만큼이나 넓어 보이는 시간이다.

이제 한두명의 등산객들의 발걸음도 동행을 하고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오르니 저 멀리 좌측으로 봉우리 하나가 보이고 그 바로 아래에는 신불감시초소도 보인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시 그 가파른 된비알 타고 오르니 그곳 정상에는 만남의 숲에서 1.4 Km 걸어 왔으며  어린이 회관까지는 1.0 m 가 남았다는 이정표 아래에 금정봉이란 정상  표시가 보인다.

사진 한장 남기고 돌아 서는데 봉우리 한가운데에는 399미터의 쇠미산이란 정상석이 보여 어느것이 맞는지 헷깔리는 시간이다.

 

여기에서 쇠미산과 금정봉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보인다.

금정봉(408봉, 금용산 또는 쇠미산)은 동래구에 소재하고 있는 산 중 가장 높은 산으로서 해발 408미터이며 바다를 향해 있는 쪽은 매우 가파르고 금정산쪽으로는 능선이 곱게 뻗어 있다. 

금정봉에 대한 옛 기록을 동래부지(1740) 산천조에 보면 금용산은 동래부 서쪽 5리에 있다라고 했다.

금용산의 금자는 신라에서 쇠라 훈차하여 많이 쓰여진 것으로 금천, 금뇌는 다같이 쇠내로 읽으며 금정을 쇠잣으로 읽는 것 따위가 모두 그런 유례인 것인다.

용자는 솟는다는 뜻이나 솥으로 읽어 마땅하다.

신라고가 균여전미찬여래가에 일념악중용출거량이란 구절은 일념악해솟나가라로 읽지만 계림유사에 보면 왈한세라 했다. 

즉 한은 백색이며 세는 쇠를 말한 것이며 심일급흔이라 했고 또 박인을 박사현이라 기록했을 뿐 아니라, 길어에 굴자는 대성의 뜻이며  막하는 마을의 뜻이 된다.

신라대의 우리말에 대한 한자 빌림은 상상외로 황당했던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이 쇠솥이뫼의 관계로 고려 의종조와 조선초기에 들어 부산포라 기록했지만 부자부자는 가마골 부자와 동음인데다가 훈도 거의 같은데서 잘못 기록된 것에 불과하며 이런 예는 그 시대에는 허다했던 것이다. 

이 금용산을 일러 쇠미산이라 호칭하는데 그 이유는 쇠솥이뫼가 쇠뫼로 쇠모가 다시 쇠미로 와전된 것이다.

쇠미산 산정을 금정봉이라고도 불리는데 산정상 바로 밑에는 넓이가 80여평이나 되는 특이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덕석바위라고 부르며 이 바위 아래에는 약 25m의 동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여인들이 피난해서 군포를 짜서 전장에 나가 있는 낭군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 동굴은 베틀굴이라고 불려 오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시 주민들이 왜군이 올 때마다 피신한 곳이며 굴입구에 항상 거미줄을 쳐주었기 때문에 왜군들도 속았다고 해서 그 뒤로부터 이 산을 생명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옛날 이산에 쇳물(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쇠미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이곳까지 올라 이런 자료를 보고 공부 할 수 있음에 고통보다는 희열이 생기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올랐으니 오른만큼 다시 내려가는 것이 세상사는 이치인 것이기에 돌담을 등로 우측에 두고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해 본다.

선답자들의 산행 후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기에 다시 한번 지도를 펴 놓고 살펴 보지만 역시나 지금 걷고 있는 이 등로는 정상 정맥 등로에서 한참 좌측으로 벗어 나 있는 등로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그곳을 통해 또 새로운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몸으로 느끼는 고통 보다는 마음으로 즐기는 환호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다만 함께 진행하는 종주대 한명이 고통에 얼굴이 이그러지는 모습에서 어떻게 개금고개까지 잘 완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제1초소 이정표가 서 있는데 살펴보니 어린이회관까지 0.4 Km 그리고 만남의 숲이 1.5 Km 로갈라지는 갈림 삼거리 임도였던 것이다.

그 앞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그 옆에 나무 벤취가 몇개 보이는데 그곳에서도 몇명의 등산객들이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이곳에서 내려온 방향에서 우측으로 크게 꺽어 만남의 숲이 있는 방향으로 기수를 돌려 한동안 정상 등로를 찾아 출발해 본다.

 

하나를 잃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다른 하나를 얻는 것이 또한 세상살아가는 이치라 하였던가.

너무나 황홀한 편백나무 숲을 따라 잠시 무심으로 걸어 보는 황홀한 시간도 가져 본다.

일부러 찾아 와 걸어 봐도 좋을만큼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햇빛까지 차단하며 높은 하늘을 향해 경쟁하듯 곧게 뻗어 올라간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진행하다 보니 체력단력장도 잇고 찬물샘도 있지만 음용수로 부적합하다는 글귀에 잠시 실망도 해 보는 시간이다.

몸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지만 눈과 마음은 황홀경에 자연을 즐기는 이율배반적인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약 1.5 Km 이상을 알바한 후 어렵게 정상 등로를 찾아 복귀하는 순간은 다시 정상적인 시간은 아니지만 후미와 크게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이곳에 도착해 어디에서 잘모되였는지 이정표를 하나 둘 상세히 살펴보니 알 것 같다는 느낌이다.

바람고개 하산로가 있는 이정표도 보이고 구포동 운수사 이정표도 보이며 남문과 동래 이정표도 보이는 삼거리 갈림 임도였던 곳이다.

직진 방향의 편백나무 숲을 따라 이제부터 거친 숨소리를 세상에 풀어 놓으며 급하지 않게 올라야 할 불웅령 된비알 등로가 시작되고 있음을 몸으로 알려주는 시간이 되였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어렵게 이어가는 낙동정맥 백양산 구간이다.

수많은 산행을 했지만 오늘 이순간의 고통은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몸으로 전달되고 있다.

다만 뒤따라 올라오는 종주대 한명의 고통이 더 심한 듯 하여 이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그저 무심한 듯 걷고 있지만 산행을 리딩하며 모든 것을 책임 진다는 것이 또 얼마나 강한 압박감으로 다가오는지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등로를 오르다 지나 온 마루금을 뒤돌아 보며 그곳에 펼쳐진 부산시 북구의 아파트들과 지나온 걸음을 바라보는 기분은 그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하는 달콤한 사탕같은 기분이였다.

 

고지가 바로 위라고 생각하고 오르면 다시 무명봉에 올라 더 올라야 하는 불웅령, 오늘 산행 중 가장 험난하고 굵은 땀방울을 요구하고 있는 된비알 오르막이 되고 있다.

다만 뒤에서 열심히 따라 오고 있는 종주대 한명이 한참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면서 잠시 쉬면서 기다려 본다.

그렇게 한발 두발 어려운 발걸음을 하다 뒤돌아 보면 암봉으로 이뤄진 금정산 상계봉이 병풍처럼 둘러치며 북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다시 힘을 내 오르니 드디어 암봉에 도착하고 그곳 넘어에는 백양산까지 아직도 2.0 Km 가 남았다는 1-11 이정목이 서 있다.

이곳이 불웅령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올랐지만 불웅령은 아직도 보이지 않을만큼 저 멀리 존재하고 있는 꿈같은 봉우리로 인식되는 시간이다.

 

한동안 그 암봉 위에서 주위를 조망하며 쉬어 보지만 올라와야 할 종주대 한명이 모습도 보이지 않아 더 기다려 본다.

드디어 저 멀리 아래에서 힘든 모습으로 어렵게 한발 두발 옮기는 종주대를 보면서 매정하지만 다시 발길을 돌려 바위가 듬성 듬성 박혀 있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올라 본다.

함께 오르는 등산객들도 힘이 드는지 몇번씩 쉬었다 오르기를 몇번, 드디어 뒤돌아 보니 지나온 마루금과 이 산객이 잠시 알바를 한 등로와 마루금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등로 좌측 앞으로 저 멀리 부산의 부의 상징인 해운대 고층 빌딩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작년 여름 초딩 친구들과 즐거운 추억을 남겼던 곳이기에 그날의 추억을 떠 올리며 해운대 바닷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눈을 등로 우측인 서쪽으로 돌리니 그곳에는 이 낙동정맥을 가르며 따라온 낙동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낙동강을 가로지르며 서 있는 제2낙동대교라 생각되는 다리 하나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 낙동강 넘어 저 멀리 김해 땅에는 이제 이 산객이 마지막으로 올라 걸어야 할 낙남정맥의 마지막 맥이 다하는 신어산과 그 마지막 산줄기가 낙동강으로 빠져 드는 모습도 찬란히 다가와 있다.

그저 감개무량 할 따름이지만 또 다시 남겨진 숙제에 가슴이 답답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조만간 저 신어산에 올라 오늘 고통속에 오르며 바라봤던 이곳 낙동정맥 마루금을 바라보며 오늘 이시간을 생각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드디어 불웅령에 도착해 제일 먼저 가장 고통속에 올랐으며 잠시 알바를 했던 지나 온 낙동마루금을 시원하게 내려다 본다.

방금 전 참으로 어렵게 올라 온 편백나무 숲과 이 산객과 종주대가 잠시 알바를 했던 능선 그리고 그 능선을 타고 좌측 북쪽으로 올라가며 우뚝 솟아 있는 상계봉과 그 상계봉 남쪽으로 원형의 분지를 그리며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아파트와 민가들 그리고 저 멀리 끝자락에 얼굴을 내밀며 존재감을 알려주고 있는 금정산 고당봉이 잠시 전 고통도 잊은채 멋지게 조망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무심으로 바라만 보다 문득 마지막 후미에서 오르고 있을 종주대를 찾아 보지만 아직도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부산시내에서 살면서 친구 둘이 불웅령에 올랐다는 소녀 둘에게 어렵게 부탁해 사진 두장 남기며 추억으로 묻어 본다.

한동안 쉬면서 많은 사진을 남기다 보니 이제사 마지막 종주대의 모습이 저 아래 능선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그 종주대가 도착해 물 한모금 마시는 사이 이 산객은 다시 백양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천천히 발길을 돌려 내리막 하산 등로를 타고 천천히 진행해 본다.

하지만 이곳 불웅령 정상에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봉우리 정상에 봉이나 산이 아닌 령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였는데 내려 와 후기를 정리하며 자료를 찾다 보니 부산 산객들에게는 이곳 불웅령의 위치와 봉우리 이름을 두고 많은 논쟁과 의견 교환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게 되였고 그중 가장 많은 의견을 가진 자료를 정리해 본다.

불웅령은 불태령이 정확한 지명이며 다른 지명 이름은 예전에 지도 제작 과정에서 태도태자를 곰웅자나 능할 능자로 잘못 오기하야 생겨난 정체불명의 이름들이다.

불태령은 성지곡 북서쪽에 있는 산으로 부산진구 초읍동과 북구 만덕동 그리고 구포동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610.9미터(정상석에는 616미터)의 높이로 낙동정맥 주 능선상에 있는 산정의 하나로 사면이 급한 비교적 험준한 산이다.

남동쪽 사면에서는 성지곡의 상류가 발원하고 서쪽 사면은 구포천의 발원지가 된다라는 설명을 찾을 수 있어 올려 본다.

 

앞으로 내려가며 바라보니 넓은 초지로 이뤄진 방화선 같은 임도를 타고 백양산 전위봉인 돌탑봉이 우뚝 솟아 있고 좌측으로 돌아 오늘 마지막 봉우리라 생각되는 백양산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 가며 이 산객이 지금부터 올라야 할 마루금에도 박무현상처럼 카메라에 잡히는 사진이 희미하게 채색되고 있다.

그 마루금 우측 저 멀리에는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을 받아 붉게 반짝이는 낙동강의 하구쪽 모습과 을숙도가 반짝이고 있다.

참으로 가슴 벅찬 풍경과 조망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불태령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등로 우측을 바라보니 푸른 낙동강과 그 위ㅏ에 세워진 몇개의 다리들이 내려다 보이고 그 낙동강 건너 김해땅에는 9정맥 완주를 위해 반드시 걸어야 할 신어산쪽 낙남 산줄기가 시원하게 조망되고 있다.

올 여름쯤이면 저 산줄기를 타고 낙동강에 손을 담그며 멀고도 길었던 1대간 9정맥을 마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고 또 한 구간 열심히 걸어 보는 순간이다.

불태령을 내려오니 드넓은 임도가 열리면서 초지가 조성된 듯 보인다.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내려온 불태령이 우뚝 솟아 보이지만 마지막 남은 종주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제법 긴 초원지대의 방화선을 타고 전진하니 드디어 백양산 전위봉인 암봉으로 오르는 등로가 가까워지고 이 산객 앞으로 함께 오르는 몇명의 등산객들과 같이 오르는 산행이 되고 말았다.

전위봉을 지나니 이제 백양산이 바로 지척으로 다가와 있고 평이한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백양산 직전의 바위 등로를 타고 오른다.

이제 마지막 백양산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온 시간이다.

 

드디어 백양산 정상에 도착해 잠시 긴 한숨을 몰아 쉬고 주위 조망을 즐겨 본다.

먼저 방금 전 이 산객이 올라 온 지나 온 마루금을 뒤돌아 보며 솟아 있는 봉우리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 본다.

방근 전 지나온 백양산 전위봉이 바로 앞에 위치해 있고 우측으로 돌아 저 멀리 돌탑이 우뚝한 불태령이 보이며 그 우측으로 돌아가며 올망졸망한 낙동의 마루금이 보이는가 싶더니 불태령 저 멀리 금정산 고당봉이 고개를 내밀고 고생했다며 손을 흔들어 주고 있다.

참으로 멀고도 힘든 여정이였지만 그래도 다음을 기약 할 수 있으니 아쉬움은 남지만 안타까움은 덜한 시간이다.

 

이제 정상에 높게 쌓여 있는 거대한 돌탑 정상에 작게 박혀 있는 백양산 정상석을 담아 본다.

돌탑 주위로는 벤취 몇개가 있어 어렵게 정상에 올라 온 등산객들이 쉬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사진 한장 남기고 지나온 등로를 살펴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종주대를 기다려 보지만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아 360도 돌아가며 백양산 주위의 풍경을 살펴 본다.

백양산은 해발 642미터로 부산의 등줄기인 낙동정맥의 주능선에 솟은 산으로서 부산 도심의 주요하천으로 우리나라 상수도의 시초가 된 성지곡수원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천의 발원지가 된다.
백양산은 어린이 대공원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금용산이라 불리어 왔다.

이산의 동편은 새미산인데 이 산은 사직동 사람들은 돌작동이라고 하며 산복에 배틀굴이라는 동굴이 있어 임진왜란 때 연대주민이 피신하여 생명을 건진 곳으로 유명하다.
들머리인 선암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서 창건 당시엔 낙동강이 보여 견강사로 불렸지만 경내에 화랑들이 수도를 했던 바위인 신선암이 널리 알려지면서 선암사로 명명됐다 한다.
정상에서는 장쾌한 조망에 일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이다.

왼쪽엔 낙동강 물줄기와 황금빛 김해평야가, 오른쪽엔 서면시가지와 북항 등 부산전경이 한 눈에 잡힌다.

오른쪽 발밑엔 성지곡수원지와 하얀 사직주경기장이 눈에 들어온다.

시선이 자꾸 도심보다 낙동강과 김해평야 쪽으로 쏠린다.

부산 도심과 주변의 산들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등로 바로 좌측 발 아래로는 부산의 사직야구장이 한누에 내려다 보인다.

야구의 고장이라 불릴정도로 그 열기가 대단한 부산이지만 오랫동안 정상에 서지 못하는 지역 연고 구단으로 인해 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겨 나기도 하는 곳이다.

이 산객도 야구를 좋아하기에 자주 야구장을 들리지만 이제 특정 팀을 위한 응원보다는 야구장에 들려 선수들이 하는 플레이를 보면서 그저 즐기는 쪽으로 많이 변한 듯 하다.

이제 곧 야구 시즌이 돌아 오니 저 사직구강에도 늘 큰 함성이 메아리치는 시기가 올 것이다.

 

다시 한번 지나온 낙동의 마루금을 훌터 본다.

백양산 전위봉과 불태령 그리고 잠시 알바를 경험했던 어린이 회관 능선과 상계봉 그리고 원효봉과 의상봉이 차례로 보이고 그 끝자락엔 역시나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이 우뚝 솟아 하늘로 날아 갈 형상이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이고 들뜬 감정을 표현하고 있기 힘이 드는데 왅 후 몰운대에서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벌써 궁금해 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등로 우측의 북서쪽으로 많이도 봤던 낙동강과 김해 신어산은 다음에 낙남정맥을 오르며 직접 들려 보기로 하고  조금 더 내려와 서쪽을 바라보니 낙동대교와 낙동강 넘어 김해공항이 보일듯 말듯 서 있다.

날씨가 좋으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일 김해공항이지만 오늘은 박무현상으로 인해 그저 짐작으로만 그려 볼 뿐이다.

사업 차 자주 내려왔던 김해공항이지만 이제 KTX와 고속도로가 잘 발달되어 비행기보다는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하다 보니 요즈음을 들린지 오래된 공항이기도 하다.

 

이제 앞으로 내려 가야 할 낙동정맥 마루금을 바라보는 것으로 백양산에서의 추억을 가슴에 묻으며 천천히 돌탑이 있는 정상에서 내려 온다.

마지막 남은 한명의 종주대도 무탈하게 백양산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조금 더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마음 놓고 내려가는 시간이다.

삼각봉과 갓봉도 보이고 오늘 산행 날머리인 개금고개쪽 마을들 그리고 고층 아파트들도 한눈에 들어 오는 조망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 날머리 넘어 다음 구간 올라야 할 낙동정맥 마지막 구간인 엄광산과 구덕산도 2주 후에 만나자 약속이나 하는 듯 지켜 보고 있다.

 

잠시 잘 나 있는 등로를 타고 내려 오니 넓은 임도와 만나 곧바로 넓은 헬기장을 만나는데 그 임도 좌측으로는 작은 사각정 하나가 보이고 그곳에 많은 젊은 등산객들이 모여 맛있게 간식을 들고 있는 모습이 들어 온다.

헬기장 한쪽에는 백양산에서 바라 본 부산전경이란 커다란 안내판이 서 있어 잠시 부산 시내를 내려다 보며 그 이름을 불러 본다.

그리곤 사진을 담으며 안내판과 그림을 맞춰 본다.

좌측 저 멀리 장산이 보이고 그 우측에는 해운대의 고층 아파트들이 정상부만 드러낸 채 드러나 있으며 그 앞에는 황령산이 서울의 남산을 닮아 있는 모습으로 회색 건물들 한가운데에 서 있다.

황령산 우측 저 멀리 오륙도가 가물거리고 그 옆으로 북항과 태종대 그리고 영도가 내려다 보이고 다음 구간 올라야 할 염광산도 시원하게 조망되지만 사진에는 제한적으로 들어 와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부산 시내를 조망한 후 계속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금새 임도 우측 높게 애진봉이란 거대한 정상석이 서 있는데 왜 봉우리도 아닌 이곳이 애진봉이 되였는지 자료를 찾아 본다.

자료를 찾아 보니 진구를 사랑합시다란 의미이라는데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했지만 금새 피식 웃음을 지어 본다.

이곳이 부산진구에 속한 행정구역이고 그래서 부산진구에서 새로 세운 정상석인데 의미는 부산진구를 사랑합시다란 의미였던 것이다.

지자체에서 홍보를 위해 세운 것 까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지만 제대로 된 자료를 찾아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것 역시 지자체를 홍보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 본 시간이다.

 

다시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애진봉을 출발해 오른다.

마지막 뒤 따르는 종주대는 저 멀리 더욱 힘들게 홀로 진행하는 모습으로 따라 오고 있어 마음이 짠한 시간이다.

그렇게 조금 더 오르니 다시 등로가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거친 숨소리를 몇번인가 토해 낼쯤 돌탑이 서 있는 589.1봉인 유두봉 정상에 도착해 잠시 쉬어 본다.

지나 온 애진봉과 헬기장 넘어 백양산이 가깝게 자리하고 불태령이 중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저 멀리 좌측 끝자락에 이제 희미해진 금정산 고당봉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유두봉을 넘어 내리막 등로를 타고 막바지 낙동정맥 산행을 어렵게 이어가지만 역시나 앞서 내려간 종주대들과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한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더 내려가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유두봉이 벌써 저 멀리 멀어져 가고 있다.

그곳에는 작은 암봉들이 보이고 그 옆에는 개림초등학교 2.9 Km 및 백양산 1.4 Km 거리 이정표가 있는 1-5번 이정목이 서 있다.

이제 시간은 오후 4시를 넘어 예정된 시간보다 30여분 늘어지고 있는데 날머리까지는 아직도 한시간 이상 남은듯 하여 걱정이 되기도 하다.

 

그곳을 지나 잠시 앞을 바라보니 앞으로 진행해야 할 송전탑고 삼각봉 그리고 갓봉이 우뚝 솟아 있고 갓봉 넘어 개금고개로 이어지는 등로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고 있다.

마음은 급한데 발걸음은 자꾸만 무뎌지는 시간, 그래도 이 산객은 걸을 수 있지만 뒤 따르는 종주대 한명이 걱정이 되어 자꾸만 뒤돌아 보고 저 멀리 그림자라도 보이면 안심이 되면서 또 다시 전진하는 그런 상황의 연속이다.

개금고개 지나 다음 구간 올라야 할 엄광산과 구덕산 줄기가 드높게 올려다 보이지만 저곳을 오를 땐 힘이 펄펄 넘치는 어둠속에 오르기에 큰 어려움 없이 잘도 오를 것이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낙동강을 내려다 보며 그 건너편으로 김해를 조망하며 걸어 간다.

그 뒤를 바라보면 저 멀리 낙남정맥 마지막 구간의 신어산이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바로 우측 건너편엔 김해공항이 있어야 하지만 강렬한 햇살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소나무 군락지 아래에 갈색 억새가 하늘거리는 호젓한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돌탑이 서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잠시 뒤돌아 보니 지나온 등로가 보이지만 홀로 어렵게 진행하는 종주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잠시 기다려 본다.

 

돌탑이 있는 무명봉에서 앞을 바라보니 송전탑이 이제 가까이에 다가와 있고 그 바로 넘어 삼각봉이 올려다 보이고 좌측 능선을 타고 갓봉도 보인다.

무명봉을 내려가며 진행을 하니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나고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멋진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등로 좌측에만 소나무 군락지로 변하고 우측으로는 잡목지대가 나타난다.

그곳을 통과하니 사거리 갈림 안부가 나타나지만 직진의 등로를 타고 전진하면 된다.

사거리 안부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금새 등로 옆에 24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그곳을 통과하니 지나온 무명봉이 보이는가 싶더니 앞으로 곧바로 삼각봉이 있는 암봉지대에 도착을 한다.

자료를 찾아 보지만 삼각봉에 관한 자료는 찾지 못하고 이 정상석을 사상산악회의 자료만 잠시 찾을 수 있었다.

백양산 줄기의 봉우리 중 사상구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454미터의  삼각봉우리는 암봉으로 이뤄져 있어 대단히 아름다우며 백양산 봉우리중 전망이 가장 뛰어난 봉우리이다란 설명만 찾을 수 있어 아쉬운 시간이다.

 

삼각봉에서 사상구쪽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낙동강이 햇살에 반짝이고 장전동 가기 직전 거대한 축구장이 눈에 들어 온다.

삼각봉에서 좌측 등로를 타고 조금 내려가니 저 멀리 바위 위에 바위가 올라 앉아 있는 멋진 풍경이 들어 오고 잠시 구경한 후 다시 전진한다.

등로 우측 저 멀리 낙동강 하류가 보이고 그쪽에 을숙도도 보이는 듯 하다.

조금 더 내려가니 좌측으로 한효아파트까지 2.5 Km 그리고 우측으로 탑골약수터 0.7 Km 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이곳에서 한효 APT 화살표 있는 곳이 정상 정맥 등로이다.

그렇게 계속 등로를 타고 진행하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삼각봉이 벌써 저 멀리 멀어지고 등로 우측으로는 낙동강이 서산으로 지는 햇살에 반짝이며 붉게 물들어가며 등로 좌측으로는 이제 방금 전 진행하며 지나온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렇게 진행하니 다시 마지막 봉우리라 생각되는 암봉의 갓봉에 올라  잠시 쉬어간다.

멋진 주위 조망을 구경한 후 마지막 종주대가 저 멀리 힘들게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다시 내려가니 개림초등학교 가는 이정표가 보이고 보훈병원 갈림 이정표도 보인다.

직진의 뚜렷한 등로를 타고 계속 내려가니 등로 좌측 저 멀리 백양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낙동 마루금이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조금 더 내려가니 이제 내려가야 할 임도와 헬기장 그리고 개금역으로 이어지는 개금동쪽 아파트 단지들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 산객보다는 저 멀리 뒤쳐져 내려오는 마지막 종주대가 걱정이 되어 불러도 보고 손도 흔들어 보며 서로의 존재감을 알리고 알아가는 사이에 말로 하지 못하는 교류를 하는 듯 하다.

 

다시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굵은 모래로 인해 미끄러워 조심하고 잠시 뒤 넓은 공터를 만나 그 우측에 있는 산불감시초소를 통과한다.

아직도 퇴근하지 못하고 좁은 초소에서 자리를 정리하는 모습만 보고 계속 전진하니 애진봉과 꽃동산 그리고 개림초등학교 갈림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이 임도 사거리로서 직진의 꽃동산 쪽으로 짧게 임도를 타고 직진하다 우측 능선으로 나 있는 마루금을 타고 진행하면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능선으로 들어 조금 더 진행하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이제사 마지막 종주대가 갓봉에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들어 온다.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어 방향을 알려 준 다음 다시 천천히 전진하니 임도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으로 타고 진행한다.

그 임도 좌측에는 파란 그물망이 쳐져 있고 좌측 저 아래에는 민가 한채가 보인다.

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조금 더 진행하니 나무 벤취가 준비되어 있는 꽃동산 쉼터가 나타난다.

 

꽃동산 쉼터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임도를 타고 전진하니 등로는 다시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넓은 임도와 만나는 작은 계단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그 임도로 내려가니 임도 좌측에 산너머 저쪽이란 이문구님의 시 한수가 보인다.

임도에서 시 한수 감상한 후 다시 뒤돌아 와 내려온 등로에서 우측 임도를 타고 진행하니 임도 반도보라란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돌 계단을 타고 잠시 오르며 이어지는 반도보라 아파트 방향으로 정상 정맥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능선으로 들어 진행하니 금새 큰 돌탑 하나가 서 있고 그 돌탑 옆에는 등산객 한분이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그 냄새가 너무 지독해 한마디 하고 출발한다.

계속 진행하니 등로 옆에 13번 송전탑이 서 있고 조금 더 진행하니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좌측 등로를 타고 진행해 본다.

소나무 군락지를 통해 전진하니 또 다른 돌탑 하나가 서 있고 그곳에서 잠시 쉬어 간다.

아직까지도 어떤 종주대와  연락도 못하고 뒤따르는 종주대 한분은 아직 보이지도 않아 걱정이지만 갈림 삼거리마다 스틱으로 땅바닥에 표시를 하면서 진행을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은 없을 듯 하다.

 

계속 능선을 타고 전진하니 금새 개금제3동장이 붙여 놓은 2009년 희망근로사업 안내판이 보이고 곧이어 반도보라 아파트 뒷쪽으로 나온다.

반도보라 아파트를 좌측에 두고 계속 직진하니 저 앞으로 LG 아파트 107동이 보이고 이제 오늘 산행도 막바지인듯 다가오는 시간이다.

그렇게 진행하니 개림중학교 정문을 통과해 마을 길을 타고 G 앛파트를 좌측에 두고 내려가게 된다.

 

잘 정비된 개화초등학교와 중학교 정문 앞을 통과해 진행하니 넓은 6차선 도로가 나타나고 그 앞에 있는 육교를 건너 진행하니 저 멀리 개금역이 보인다. 

그곳 근처 가게에 들려 모바일 폰 뱃더리를 설명하니 친절하게도 방전된 뱃더리와 충전된 뱃더리를 교환해 주신다.

감사한 마음 전하고 나와 종주대에게 전화를 하니 많이 걱정을 하였다면서 버스는 개금역이 아닌 계림중학교쪽에 주차해 있다는 설명이다.

개금과선교만 확인하고 어렵게 다시 육교를 넘어 게림중학교로 뒤돌아 올라가며 계속 전화 통화를 하다 보니 이 산객보다 뒤에 내려오던 마지막 종주대도 무탈하게 버스에 도착해 이 산객만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버스는 LG 아파트 앞 6차선 차로에 정차되어 있어 다시 계림중학교에서 6차선 차로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였다.

순간적으로 너무나 화가 나고 고통이 밀려오며 왜 이렇게 어려운 리딩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 왔지만 천천히 홀로 내려가며 생각을 하다보니 머리가 정리되며 조금은 차분해 진다.

 

이제 다음 구간에 시작해야 하는 개금역 4번 출구를 사진에 담은 후 천천히 버스에 올라 멀고도 길었던 하루를 마감하고 구포쪽으로 이동해 재첩국과 숙회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후 서울로 복귀한다.

처음으로 낙동정맥 종주에 참여해 축하를 해 준 금비령 백두대간 대장의 산행이 걱정이 되였지만 그래도 크게 막히지 않는 도로를 타고 무탈하게 죽전까지 올라 와 무사히 백두대간 산행에 보내고 나니 조금은 긴장이 풀리면서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이제 마지막 한 구간만 남기고 있는 낙동정맥 산행,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잠시도 방심하지 말고 완벽한 마무리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개인적으로는 큰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 되어 낙동정맥 산행 후 기분 좋게 이슬이 한잔 마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 시간이기도 하였다.

 

함께한 종주대 여러분 그리고 축하하러 들려 주신 온누리 산우님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며 다음 구간에도 많은 성원 부탁하면서 산행 후기를 마무리 해 본다.

 

이 산행 후기를 정리하면서 부산시와 각 지자체 그리고 다음백과의 자료를 많이 이용했는데 혹시라도 저작권에 해당되는 내용이 있으면 연락 주시기 바람니다. 즉시 삭제하고 재 정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