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맥산행(완료)/삼신지맥(낙남.완)

삼신지맥 제1구간 청학동에서 삼신봉 분기점 찍고 신촌재 지나 먹점마을까지 산행후기

칠갑산 사랑 2022. 9. 2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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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남도 하동군의 삼신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번호 : 제153-1번째 지맥산행

산행일자 : 2022년 09월 16일 (금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에 짙은 안개 후 오전까지 이슬비 후 오후에 약간의 무더위를 느꼈으며 하루 종일 흐렸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 22도에서 영상 30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지리산국립공원 청학동탐방지원센터(청학동길 1차선 포장도로, 청학동 버스정류장, 고향식당, 김다현길 도로표지판)-도인촌과 김다현 고향집 이정판(0.2 Km)-도인촌 갈림삼거리(삼신산과 삼신산 청학동 표지석) 이정표(삼신봉 2.4 Km, 세석대피소 10.0 Km, 도인촌 0.5 Km)-돌계단-계곡통과-현위치 지리14.01 이정목(해발 883미터)-산죽등로-현위치 지리14.02 이정목(해발 972 미터)-나무계단-현위치 지리14.03 이정목(해발 1083미터)-돌탑샘물 이정표(삼신봉 0.7 Km, 청학동 1.7 Km)-목축등로-갓걸이재(낙남정맥 마루금 접속) 이정표(삼신봉 0.4 Km와 세석대피소 8.0 Km, 청학동 2.0 Km)-현위치 14.04 이정목(해발 1233미터)-삼신지맥 분기점인 삼신봉 이정표(쌍계사 9.0 Km, 세석대피소 7.6 Km, 청학동 2.4 Km)-삼신봉정상(1288.7봉, 정상석, 삼신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종주능선 안내판)-삼신지맥 분기점 복귀-키작은 산죽등로-1301.3 무명봉(집채바위)-공터(1313미터)-1323.2 무명봉(바위와 잡목봉)-현위치 지리 15.16 이정목(해발 1353미터)-바위암릉-내삼신봉(1355.1봉, 삼신산정 정상석, 인식불가 삼각점)-나무계단-바위암릉-바위암벽 등로-1329.1 무명봉(산죽과 가지많은 활엽수)-현위치 지리 15.15 이정목(해발 1327미터)-1326.6 무명봉(굵은 참나무와 고사목)-송정굴-1306.2봉(바위암릉과 암봉)-산죽안부-1249.6 바위무명봉-전망바위-이정표(상불재 1.7 Km와 쌍계사 6.6 Km, 삼신봉 2.4 Km와 세석대피소 10.6 Km)-1271.2봉(쇠통바위-쇠통닮은 바위)-청학봉(1299봉, 독바위 갈림삼거리봉) 이정표(삼성궁 3.5 Km와 쌍계사 5.8 Km, 삼신봉 3.2 Km와 세석대피소 10.8 Km)-하동독바위(황호경 추모비, 짙은 안개로 들리지 못한 아쉬움)-바위암릉-산죽등로-산죽등로 안부(쌍계사 갈림삼거리)-쌍계사 갈림삼거리(길주의-좌측 산죽등로, 로프)-성불재(삼성궁 갈림삼거리 공터, 출입금지 경고판) 이정표(삼성궁 2.0 Km, 불일폭포 3.4 Km와 삼신봉 4.4 Km)-지독한 산죽등로-1100.5 무명봉(전망바위)-관음봉(1153.2봉, 이정판)-산죽터널-1093.7 무명봉(산죽봉)-내원치(1099봉, 바위, 해피마당쇠님 띠지)-1131.1 전망바위봉(해피마당쇠님 띠지)-지독한 산죽터널-원남치와 형제봉 갈림삼거리(숨차 띠지)-거사봉(1133봉, 해피마당쇠님 띠지)-시루봉(1133봉, 정상석, 돌탑과 띠지들)-1113 무명봉(바위2)-바위암릉-1000.3 무명봉(이끼바위)-1003 무명봉(바위, 간식)-1016.7 전망바위봉(짙은 안개로 우회)-시루봉(992.9봉, 해피마당쇠님 띠지)-산죽없는 등로-지독한 산죽등로 시작-939.9 무명봉(굵은 참나무와 미역줄기)-954.5봉(이재구님 띠지)-지독한 산죽등로 종료-923.6 무명봉(바위)-KBS 진주방송국 중계탑(무인감시 카메라, 회남재 설명판)-정리된 산죽등로-906.2 삼각점봉(하동304 삼각점, 띠지들)-정리된 산죽등로-입산통제 안내판(시멘트 포장도로)-회남재(회남정 사각정자, 시멘트 포장도로) 이정표(깃대봉 1.5 Km, 악양면사무소 11.0 Km, 묵계초등학교 4.0 Km, 삼성궁과 청학동 6.0 Km)-능선진입-정리된 산죽등로-무명안부-934.5 무명봉(굵은 참나무2)-낙엽송 등로-바위암릉-전망바위-깃대봉(982.7봉, 해발981미터 원통형 표지석) 이정표(칠성봉 5.5 Km, 회남재 1.5 Km)-급경사 하산등로-굵은 참나무 사초등로-짧은 미역줄기 등로-786.2 무명봉(굵은 소나무, 중부경남팀 띠지)-869.3 무명봉(굵은 소나무와 고사목)-741.9봉(법광님 띠지, 능선상 봉우리)-굵은 소나무와 잡목등로-무명안부-배티재(시멘트 포장도로, 임도표지석) 이정표(칠성봉 3.2 Km, 청암답곡, 악양상중대, 깃대봉 2.3 Km)-능선진입(돌계단)-소나무 오르막 등로-574.7 무명봉(세르파님 띠지)-무명안부(좌측 비포장임도)-통나무계단-680 삼각점봉 갈림삼거리-680 삼각점봉(법광님 띠지, 하동411삼각점 소실)-갈림삼거리 복귀-무명안부(좌측 비포장임도)-통나무계단-이정표(칠성봉 2.2 Km, 배틀재 1.4 Km)-산불났던 등로(고사목과 우거진 잡목 및 잡풀)-오르막 등로 조망처-751.4 우거진 잡풀봉-786.1 무명봉(공터봉) 이정표(칠성봉, 배틀재 )-790 무명봉(이끼낀 소나무)-812.6봉(이정판, 띠지들)-730.6 무명봉(굵은 소나무와 바위)-이낀낀 바위등로-명품소나무봉-봉수대(880미터, 봉수대 이정석, 석축 봉수대흔적)-칠성봉 갈림삼거리 이정표(칠성봉 200 m, 통점재 3.2 Km, 배틀재 3.0 Km)-칠성봉(905.8봉, 정상석, 공터) 이정표(은적암 2.4 Km, 배틀재 3.64 Km, 석계암 2.8 Km)-갈림삼거리 복귀-굵은 소나무와 관목의 참나무 내리막 등로-현위치 칠성봉2 이정목(바위봉)-동점재(갈림길 칠성봉3 이정목)-651.7봉(헬기장)-바위암릉 우회등로-712.8봉(법광님 띠지)-현위치 칠성봉4 이정목-내리막 사각계단-무명묘지-현위치 칠성봉5 이정목-사각계단-595.7 무명봉(바위봉)-비포장임도(칠성봉 등산로 안내도) 이정표(구재봉 2.2 Km, 칠성봉 3.2 Km, 상신대고, 동점)-622.5봉(법광님 띠지)-비포장임도와 시멘트 포장도로 경계지점-길주의 지점(587미터, 삼천포여중 띠지, 우측)-갈림사거리 무명안부-무명봉-무명안부(굵은 참나무)-567.6 무명봉 이정표(구재봉 1.5 Km, 휴양관 1.1 Km)-633.9봉(법광님 띠지)-이정표(구재봉 1.2 Km, 휴양관 1.4 Km)-현위치 구재봉11 이정목-삼화실재(상신대와 구재봉자연휴양림 갈림삼거리, 돌무덤) 이정표(구재봉 0.8 Km, 칠성봉 5.8 Km, 상신대 4.2 Km)-휴양관 갈림삼거리 이정표(구재봉 0.3 Km, 휴양관 2.3 Km, 휴양관 2.2 Km)-활공장과 미동 갈림삼거리 이정표(구재봉 150 m, 칠성봉 6.2 Km, 활공장 1.5 Km와 미동 3.5 Km)-안전목책과 로프등로-전망바위-구재봉(773.7봉, 정상석) 이정표(먹점재 2.0 Km와 분지봉 2.5 Km, 칠성봉 5.4 Km와 회남재 12.4 Km)와 이정표1(문암정 1.0 Km, 휴양관 2.5 Km)-언전목책과 로프등로-길주의 지점(좌측 잡목능선)-사각계단-구재봉 자연휴양림 갈림삼거리 안부(지리산둘레길 이정목, 구재봉 자연휴양림 안내판)-사각계단-725 흔들바위봉-사각계단-무명안부-633.9 무명봉(굵은 소나무와 고사목)-현위치 하동6 이정목-596.5봉(법광님 띠지)-576.4 무명봉(바위)-현위치 하동7 이정목-479.6 무명봉(바위)-현위치 하동8 이정목-신촌재(먹점재, 비포장임도, 둘레길 안내판) 이정표(분지봉 0.5 Km, 구재봉 2.0 Km, 먹점, 신촌)-삼신지맥 산행종료-시멘트 포장도로-산골매실농원-매화골먹점길 시멘트 포장도로-지리산매화골향기황토펜션-매화골먹점길 2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30.20 Km (청학동 탐방지원센터에서 신촌재 지나 먹점마을까지)

             지맥산행 : 25.84 Km (삼신봉 분기점에서 신촌재까지)

             접속구간 : 04.36 Km (02.34 Km-청학동 탐방지원센터에서 삼신봉 분기점까지와 02.02 Km-신촌재에서 먹점마을까지) 

산행트랙 :

20220916 삼신지맥 제1구간 청학동-삼신봉-신촌재-먹점마을회관.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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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시간 : 15시간 32분 (04시 50분부터 20시 31분까지)

교통 및 숙박편 : 갈때 - 02시 30분 하동읍 모텔고궁에서 기상(전날 남원에서 일 마치고 하동으로 이동 후 숙박, 40,000.-원)

                            03시 55분 산행 날머리인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회관 앞에서 예약된 악양택시로 청학동 탐방지원센터로 이동

                                         (전화번호 010-4118-9172, 60,000.-원 새벽 예약이라 추가 비용 지불)

                            04시 50분 먹점마을에서 약 한시간 정도 걸려 청학동 탐방지원센터에 도착 해 산행 준비 후 곧바로 출발

                    올때 - 20시 31분 최악의 산행 조건으로 발가락 물집과 피부 쓸림현상으로 고생하며 밤 늦게 날머리에 도착

                            21시 00분 하동읍 모텔고궁으로 가 샤워하고 환복(40,000.-원)

                            21시 20분 모텔고궁에서 운영하는 해장국식당에서 저녁식사(12,000.-원)

                            22시 20분 사진정리하고 잔무 처리 후 곧바로 취침 

삼신지맥이란?

낙남정맥의 지리산 삼신봉(1288.7m)에서 남쪽으로 분기해서 내삼신봉(1355.1m)과 관음봉(1153.1m) 및 내원치를 지나 거사봉(1133m)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한줄기는 억양 벌 북쪽의 형제봉 (1116m, 성재봉)과 신선봉(615m)을 지나 하동군 억양면 평사리 섬진강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줄기는 억양벌 동남쪽을 따라 시루봉(992.9m)과 회남재, 깃대봉(982.7m), 배티재, 칠성봉(905.8m), 구제봉(773.7m), 분지봉 (627.8m)을 지나 하동군 하동읍 신기리 횡천강으로 이어진다.
신산경표에서는 하동읍 목도리가 옛날에 섬이었다는 이유로 하동읍 신기리 하동 공설운동장 동남쪽 횡천강을 건너는 대석교 앞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31.9km인 산줄기를 삼신지맥이라 명명하고 있다.
그런데 현지 지형을 살펴보면 하동소방서 앞의 인공수로를 빼면 횡천강이 섬진강에 합류하는 하동읍 목도리 끝자락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어 그곳 합수점까지는 도상거리 35.6km인 산줄기를 삼신지맥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슬비로 흠뻑 젖은 키가 큰 산줄등로를 타고 최악의 산행과 흐린 날씨에 무더위로 인한 발가락 물집과 피부 쓸림 현상으로 걷기조차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무탈하게 마무리하며 안도의 함숨을 내셨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이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내려진 올바른 해답이 없기 때문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삼신지맥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경상남도 하동군과 그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및 네이버의 지식백과, 다음의 백과사전, 산림청,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한여름 폭염이 지나면서 얼마남아 있지 않은 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기 위해 산행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남원지방에 일이 생겨 목요일 내려가며 산행 준비를 해 보는데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간 지맥 하나를 마무리하고 올라가면 좋겠다는 계산이다.

목요일 오후에 일을 마치고 이곳에서 가까운 삼신지맥과 선은지맥을 두고 결정을 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여름 한달간 제대로 된 산행을 못하였고 특히나 지난 달 코로나19에 걸려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예상되기에 삼신지맥보다는 선은지맥을 생각해 보지만 남도 특유의 잡목들로 인해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선듯 내려가기가 어렵다.

많은 생각 끝에 결국 삼신지맥 산행을 위해 하동으로 내려가는데 내려가며 산행날씨를 확인해 보니 금요일 흐리고 약간의 소나기만 예보가 되어 있어 날씨에 대한 걱정 없이 시작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짙은 안개와 그 안개로 인한 이슬비로 인해 첫날 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등산복과 등산화가 장마비에 젖듯 흠뻑 젖기 시작해 완전 엉망진창이 되어 산행 시간은 시간대로 까먹고 온 몸은 부상으로 걷기고 힘들게 계획된 신촌재 지나 먹점마을로 내려오니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초반 산죽지대에서 완전 헤매다 보니 풍경과 조망은 전혀 보지도 못하고 비에 흠뻑 젖은 산죽터널을 빠져 나오며 철지난 개구리를 키우고 온 몸이 젖어 등산복에 쓸리다 보니 오후들어 빗물이 사라지고 무더위가 찾아들기 시작하며 발가락은 퉁퉁부어 물집이 생기고 사타구니에는 젖은 바지에 쓸림 현상으로 인해 화상을 입은 듯 쓰라려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준비한 피부약을 바르며 큰 고통속에 마무리를 하다보니 지맥 산행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무탈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 하동읍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자축하며 피로를 풀 수 있어 좋은 산행이었다. 

 

삼신지맥 산행을 결정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지리산의 멋진 풍경과 조망이었는데 초반 출발을 하면서부터 짙은 안개와 이슬비가 내리면서 무참히 깨지기 시작하고 더욱이 내삼신봉을 지나 시작된 키가 큰 거대한 산죽터널을 통과하면서 회남재까지는 무방비 상태로 산죽에 내려앉은 물방울로 인해 온몸은 폭우를 맞은 듯 물이 흘러 내리고 등산화에서 일정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철지난 개구리 울음소리가 리듬이 되어 걷다보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회남재를 지나면서 정비된 등로로 인해 산죽터널의 지옥에서 벗어나니 그나마 살 것 같았지만 발가락에 생긴 물집과 사타구니에 생긴 피부 발진은 산행 내내 큰 고통을 안겨 줬지만 배티재 지나 812.6봉 오름길에 잠시 펼쳐진 지나온 마루금의 깃대봉과 좌측 뒤 저 멀리 여전히 짙은 안개속에 잠들어 있는 내삼신봉과 삼신봉이 고운 추억을 만들어 주니 그동안의 고통은 잊어버리고 몇장의 사진에 담으며 그 시간을 즐겨본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런 순간의 희열 때문에 또 그 고통을 감내하며 다시 산에 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날 남원에서 일을 마치고 하동읍으로 들어 와 편의점에서 필요한 식수와 음료수를 구매해 배티재에 숨겨두고 모텔에 들었다 새벽 일찍 다시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흥룡리 먹점마을회관 앞 공터에 도착을 하니 새벽 3시 40여분이 지나고 있어 간단히 산행 준비하며 기다리니 50여분 쯤 예약한 택시가 도착을 해 조금 이른 시간에 청학동 삼신봉 들머리로 향한다.

한시간 여를 달려 청학동이 가까워지니 해발고도가 높아지며 더욱 짙어진 안개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고 차창에 서리는 이슬비가 오늘 산행의 어려움을 알려주고 있는 듯 고민도 깊어만 가지만 어짜피 각오하고 왔기에 더위를 피해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새벽 4시 45분 쯤 드디어 청학동 정류장과 탐방지원센터 건물이 보이는 버스 회차장에 도착을 해 택시를 보내고 산행 준비 후 곧바로 출발하는데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안개가 이슬이 되어 이슬비가 내리듯 온몸을 축축히 적시기 시작한다.

청학동은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에 있는 도인촌으로 청학동이라고 하면 예로부터 전해 오던 도인들의 이상향을 말한다.

전국의 여러 명산에는 청학동의 전설이 남아 있으나 일반적으로 청학동의 위치는 지리산에 있으며 예로부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청학이 서식하는 승경(勝景)의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청학동은 지리산 청학동의 유래가 존재해 오던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지리산 삼신봉(三神峰) 동쪽 능선 아래 해발 800m 고지인 지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이며 도인촌으로 특정 종교의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종교취락의 성격을 지니며 청학동의 가장 큰 특징은 주민들의 종교적 표상에서 잘 나타난다.

청학동 주민들은 모두 강대성(姜大成, 1898〜1954)이 창시한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라는 신흥종교를 믿고 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 이곳에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갱정유도의 사회적 표상은 집단생활을 한다는 것 이외에도 신도는 한복에 푸른 조끼를 입고 남자와 여자가 모두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늘어뜨린다는 점이고 성인이 되면 옛 선비들처럼 상투를 틀고 큰 갓을 쓰고 도포를 입으며 자녀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 보낸다.

특히 현대문명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라는 점이 갱정유도의 큰 특징이며 또한 주색초(酒色草)를 엄격히 금하나 때로는 허용하기도 한다.

지리산 청학동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으로 노인의 구전에 근거한 것이었고 청학동에는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때는 지원 병사들이 청학동에 들어와 거주하였고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100가구 정도가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 사람들이 이주해오기도 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거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청학동에 살던 주민들이 퇴거당하기도 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외부와 교류를 차단한 채 종교 신봉자들이 모여 독특한 생활방식을 유지해 오고 있다.

등로는 고향식당 앞에서 좌측 청학동 탐방지원센터 하얀 건물 앞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르는데 지난 해 종편에서 준우승과 3등을 차지한 한학자인 김봉곤의 여식인 김다현양의 이름을 따 김다현길이란 도로표지판이 걸려있는 특이한 곳이기도 하다.

 

청학동 탐방지원센터 건물 앞을 지나 김다현길이란 도로표지판을 사진에 담고 조금 더 도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도인촌과 김다현고향집까지 0.2 Km 거리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곧이어 지리산 국립공원 안내판과 삼신산청학동과 삼신산이란 표지석이 서 있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좌측으로는 도인촌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계수대 넘어 돌계단을 타고 삼신봉으로 오르는 오늘 산행 들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인촌(道人村)은 청학동(淸鶴洞)이라고도 하는데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청학리) 지리산 삼신봉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집단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가옥은 한국 고유의 초가집과 기와집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의생활도 전통적인 한복차림을 고수하고 있다.

미성년 남녀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있으나 지금은 이런풍습이 많이 없어졌으며 성인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으며 자녀들은 옛 전통 그대로 마을 서당에서도 공부를 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농업 외에 약초와 산나물 채취 및 양봉과 가축 사육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며 현재는 관광객들을 위한 전통 음식점을 경영하는 곳도 있다.

도인촌의 역사는 조선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는 지원 병사들이 청학동에 들어와 살게 되고 계속해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에 들어와 살게 되어 100가구 정도가 살았으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감시를 피해 사람들이 청학동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1945년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광복(일명 을유 광복, 8·15 광복)을 쟁취한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거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청학동에 살던 주민들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강제로 퇴거당하였다.

그 후 사람이 다시 들어와 지금은 30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민은 갱정유도의 신도가 많고 삼성궁과 증산교 등도 있다.

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담고 있는 마을이지만 지금은 짙은 어둠속에 보이는 것이 없기에 상상으로만 살펴보고 우측 계수대를 통해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 본다.

 

삼신봉까지 2.4 Km 거리라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우측 계수대와 차단봉을 지나 진행하니 돌계단 좌우측으로 키가 크지 않은 산죽들이 펼쳐져 있는데 파란 잎새귀마다 이슬이 내려앉아 물망울들을 한가득 머금고 있는 모습들이 불빛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아직은 견딜만 하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최근에 내린 비로 제법 많은 수량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 산죽밭 사이로 나 있는 뚜렷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첫번째 현위치번호 14-01이란 이정목을 만나는데 해발고도가 벌써 883미터로 표기된 정상이다.

그 이정목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뚜렷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 방향으로 휘어져 있는 잡목들과 산죽들에서 차가운 물방울들이 비산하며 시원함을 전해주지만 금새 등산복을 적실만큼 물방울의 양이 많음에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이어지는 키 작은 산죽 사이로 굵은 낙엽송들이 보이고 곧이어 현위치 지리14-02란 이정목이 보이는 해발 972미터를 지나니 커다란 바위와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니 다시 돌계단이 보이는데 등로 옆으로는 해발 1083미터의 현위치 지리14-03이란 이정목도 다시 나타난다.

세번째 이정목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삼신봉까지 0.7 Km 거리만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나타나고 곧이어 작은 돌탑 아래 제법 수량이 보이는 샘물에 도착을 해 시원한 물로 배를 채우고 갈증도 해갈한다.

 

시원한 샘물로 배를 채우고 이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경사도가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안개가 더욱 심해지며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잠시 후 등로 우측으로 목축을 설치한 지점들이 보이고 사진에 담고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남낙정맥 상 갓걸이재에 도착을 하는데 이정표에는 청학동에서 2.0 Km 지났고 삼신봉까지는 0.4 Km 거리임을 알려주고 있어 사진에 담고 이제 좌측인 북서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가며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 갓걸이재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최치원 선생이 삼신봉을 오르며 이곳 고개에 갓과 의관을 벗어 걸어놓고 잠시 쉬었갔다 해서 갓걸이재에 불리된 이름이라고 한다.

신라 말 최치원 선생은 혼란한 사회 상황을 보며 지리산 화개동천 상류의 절승지를 자기 나름의 이상향인 삼신동(三神洞)으로 정하고 은둔을 꿈꾸었으며 나중에 지리산과 가야산을 맴돌면서 은거하다가 짚신 두짝만 남기고 사라져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곳 갓걸이재는 1백두대간 9정맥의 마지막 구간으로 2012년 5월달에 홀로 걸었으니 만 10년 넘어 다시 찾게 된 지점으로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잠시 9정맥 완주에 희열을 느껴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제 낙남정맥 마루금을 따라 북서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현위치번호 지리 14-04번이라는 이정목이 서 있어 살펴보니 해발 1233미터란 글씨가 눈에 들어 오는데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더욱 짙어지는 안개와 그 안개가 물방울이 되어 이슬비처럼 내리는 날씨로 인해 마치 비를 맞으며 진행하는 것과 다름없어 벌써 등산복은 축축하게 젖어 든다.

이정목을 지나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드디어 여명이 밝아오며 주위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머리에 착용했던 헤드렌턴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잠시 더 전진하니 삼신봉가는길이란 이정판과 해발 1284미터의 삼신봉이란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삼거리 공터에 도착을 해 흐르는 땀방울 닦아 본다.

삼신봉 정상은 우측인 북쪽으로 바위를 타고 잠시 올라야 만날 수 있기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고 곧바로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우측으로 들어서자마자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오를 땐 우측의 바위암릉을 타고 올라 좌측의 안전 등로를 타고 내려오기로 하고 오르니 이슬비에 바위가 젖어 미끄럽기에 조심하며 천천히 오른다.

드디어 바위암릉 위에 오석의 앙증맞은 정상석과 삼신봉에서 바라 본 지리산 종주능선이란 안내판이 세워진 삼신봉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에 담고 추억 몇장 더 남기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화이트아웃된 상황이라 더 이상 머물러 기대할 것도 없기에 곧바로 우측의 안전한 등로를 타고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삼거리 공터로 내려가며 본격적인 삼신지맥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산줄기 탐방에 나서본다.

삼신봉(1288.7m, 정상석과 조망도)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봉우리로서 해발고도는 1,289m이고 청암면과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를 이룬다.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제석봉과 연하봉을 거쳐 촛대봉을 지나 남쪽으로 맥이 뻗어나가서 삼신봉을 이루었으며 삼신봉은 다시 좌우로 팔을 벌려 내삼신봉과 외삼신봉의 지맥을 이루었다.

외삼신봉 아래에는 일월대와 미륵암터가 있고 내삼신봉과 외삼신봉의 품안에 묵계리가 입지하고 있는데 묵계리는 지리산의 청학동으로 잘 알려진 관광지이다.

삼신봉의 지맥 사이에 Y자 모양으로 형성된 골짜기를 따라 농경지가 형성되고 작은 분지상에 나지막한 산언덕을 등지고 자연마을이 입지하였다.

삼신봉의 남쪽 사면 골짜기에는 삼신동(三神洞)이 있는데 진양지에 삼신동은 천왕봉의 남쪽에 있고 신흥사와 의신사 및 영신사의 세 절로 들어가는 길이 모두 이 골을 거치기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이요 수각(水閣) 가에 삼신동이라는 세 글자의 석각이 있다 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시대 하동의 관찬지리지나 군현지도에는 삼신봉에 대한 표기가 없다.

 

삼신봉 정상에서 짙은 안개로 인해 보이는 것 하나없이 아쉬움을 남기고 갈림삼거리 공터로 복귀한 후 이제 직진의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자갈 등로를 타고 삼신지맥이란 이름으로 걸어가니 탐험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날씨로 인한 아쉬움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잠시 후 활엽수 나뭇가지에서 후두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폭탄처럼 느껴지고 비에 흠뻑 젖어 미끄러운 바위들을 우회하니 이 산객의 허리춤 이상 올라오는 빼곡한 산죽밭이 펼쳐지는데 파란 잎새귀에는 온통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매달려있다가 이 산객이 지날때마다 물폭탄을 터트리며 등산복과 등산화를 흥건히 적시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조심하며 진행해 보지만 별 소용이 없음을 알기에 모든 소지품들을 배낭에 넣고 배낭커버를 씌운 후 마음 편히 진행하니 커다란 바위 옆 산죽 등로를 타고 잠시 산죽들이 사라진 1313 무명 공터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삼신봉을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은 벌써 흥건히 젖어들기 시작하고 등산화에서도 철지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려는지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잡목과 산죽등로를 타고 평이하게 걸어가니 다시 비에 젖은 잡목들과 바위가 보이는 무명봉 지나 키 작은 산죽 등로가 길게 이어진다.

잠시 후 해발 1353이란 이정목을 통과하고 등로 양쪽으로 드높게 솟아 있는 바위 사이로 나 있는 바위암릉을 따라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 위로 오석의 정상석과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보여 잠시 올라 몇장으 추억을 남겨본다.

삼신봉(1,284m)은 청학동에서 볼 때 서쪽의 내삼신봉(1,354m)과 중앙의 삼신봉 및 동쪽의 외삼신봉(1,288m)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 구실을 하여 악양으로 흘러내린 성제봉(일명 형제봉)능선과 멀리 탁 트인 남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삼신봉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 지리산 천왕봉(1,915m)에서 반야봉(1,732m) 및 노고단(1,507m)을 잇는 지리산 주능선이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지는데 여기에 전라남도 광양시 백운산과 광양만 및 섬진강 하구에서 이어지는 남해가 시계 방향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내삼신봉에서 성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중에서 청학동 계곡을 바라보는 능선에 마치 자물통처럼 생긴 쇠통바위가 있으며 청학동 사람들은 학동마을에 있는 열쇠처럼 생긴 바위로 이 쇠통바위를 열면 천지개벽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청학동은 전통시대에 이상향의 원형이었으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찬미했던 곳으로 오늘날에는 도인촌과 삼성궁, 청학동 서당 등이 있으며 현재는 관광지화 되었다.

 

정상석과 삼각점이 박혀있는 1355.1미터의 내삼신봉에서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주위를 둘러 보지만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아쉬움만 남기고 곧바로 뒤돌아 내려 와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니 바위암릉 위에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이슬비에 젖어 미끄럽기에 조심하며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들렸다 내려 온 내삼신봉 정상부가 지척으로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어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지만 여전히 아쉬운 시간이다.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그곳 역시 제한된 시야에 뿌연 수묵화가 펼쳐져 있어 확인해 보니 바위암릉이 이어진 듯 보이는데 실제 진행하다 보니 커다란 바위들은 대부분 우회하며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 진행에는 걱정이 없었다.

바위암봉 넘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거대한 바위를 두고 우회하듯 이어지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제법 키가 큰 산죽밭이 빼곡하게 펼쳐지는데 하넛 물먹은 산줄잎들이 이 산객이 지나면서 물방울들을 비산시켜 새워하듯 물방울이 흘러 내리고 배낭 커버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흠뻑 젖어 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드디어 철지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더위와 식수에 대한 걱정은 덜었지만 차가운 물방울 폭탄을 맞을때마다 한기가 돌고 잠시 발걸음 멈춰 사진 한장 남기기도 힘들지만 사진을 담으며 지체되면 추위에 몸이 떨리는 최악의 산행을 이어가는 시간이다.

잠시 후 관목의 활엽수들이 보이는 무명봉 넘어 산죽밭에 가지가 많은 참나무가 보이는 곳에서 잠시 심호흡하며 사진 한장 어렵게 남기고 출발한다.

 

아직까지 선답자들이 최악이라고 했던 키가 큰 산죽지대는 진입도 못했는데 벌써 등산복을 완전히 적시고 온몸은 몽둥이에 맞은 듯 아파오는 고통을 참으며 조금 더 전진하니 해발 1327미터인 현위치 지리 15-15란 이정목이 보이고 굵은 참나무가 서 있는 무명봉 넘어 고사목이 쓰러져 있는 1326.6 무명봉을 통과하니 등로는 우측인 서쪽으로 휘어지고 곧이어 등로 우측 옆으로 송정굴이 나타나 잠시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보지만 가까운 곳조차 흐릿한 모습으로 인해 안타까운 추억만 남기고 뒤돌아 나온다.

송정굴(조선중기 학자였던 송정 하수일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 피난했던 곳)은 양쪽이 트인 암굴로서 임진왜란 당시 문필가 송정 하수일 선생의 피난처였다 하여 송정굴로 불리는데 송정 선생은 진주 출신으로 촉석루 중수기를 쓰는 등 문장력과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암굴속으로 겨울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가고 여름철 올라 이 바람골을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뾰족한 암봉이지만 옆으로 돌아 오르면 쉽게 오를 수 있는 암봉에 로는데 이 암봉은 일명 송정암이라 불려지고 있고 그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또한 일품이다.

날씨만 좋았다면 자세히 보고 올라가 보며 조망도 즐겼을 것을 오늘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니 다음을 기약해 본다.

 

등로 우측 옆으로 보였던 송정굴을 사진에 담고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해 남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니 등로 옆으로 굵은 노끈으로 탐방로란 화살표 표시를 해 둬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암릉을 지나 좌우측으로 솟아 있는 바위들을 올려다 보며 조심해 걸어가니 등로 좌측 옆으로 안개속에 바위암봉이 솟아 있는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1306.2봉으로서 올라가 확인하기에는 부담감이 커 아래에서 사진에 담는 것으로 만족하고 진행을 이어간다.

여전히 짙은 안개속에 이슬비가 내리듯 가느다란 물방울들이 온 몸을 적시니 보이는 것도 없을뿐만 아니라 미끄러워 바위로 오르기도 겁이 나는 산행이다.

 

바위암봉이 솟아 있는 1306.2봉 지나 바위를 옆으로 끼고 돌아가니 다시 가지가 많은 활엽수 아래 우거진 산죽 등로가 길게 이어지는데 아직까진 키가 크지 않아 진행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잠시 더 물 폭탄을 맞으며 전진하니 갑자기 관목의 활엽수 등로가 이어지는데 등로에는 거짓말처럼 산죽들이 사라져 벌써 산죽지대가 끝이 났는지 의아해하며 걸어가니 바위 무명봉 넘어 다시 키작은 산죽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잠시 좋은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올라 무명바위봉을 지나니 지금까지와 전혀 다름이 없는 키 작은 산죽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그 산죽등로를 따르니 다시 산죽들이 사라지며 가지가 많은 관목의 참나무들이 보이는 곳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 우측 옆으로는 조망처가 보여 다가가 보지만 역시나 짙은 안개로 보이는 것 하나없어 조망처만 사진에 담고 뒤돌아 나온다.

뒤돌아 나와 잠시 발걸음 멈추고 지도를 확인해 보니 전앙이 좋으면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저 멀리 황장산에서 불무장등 능선이 보일 듯 한데 오늘은 그저 이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다.

 

조망처를 지나 남동 방향으로 조금 ㄷ 전진하니 상불재까지 1.7 Km 거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고 곧이어 등로 좌측으로 바위암봉이 올려다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도상 1271.2봉으로서 쇠통바위가 있는 곳이지만 바위가 미끄럽고 보이는 것이 없어 이곳 아래에서 위로 올라보며 사진에 담는 것으로 만족하고 통과한다.

쇠통바위(1271.2m)의 쇠통은 자물통의 경상도 방언으로 그 쇠통을 여는 열쇠는 쇳대라고 하는데 자물통은 여닫는 물건에 채워서 열지 못하게 잠그는 쇠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예기(禮記)나 회남자(淮南子) 등 진(秦)과 한의 문헌에서 이미 자물쇠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전으로 소급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충청남도 부여 부소산의 백제시대 성지에서 출토된 철제자물쇠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최고의 유물이다.

자물쇠는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고유기능으로 인하여 일반기명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나 그것이 쓰이는 곳과 시대에 따라 구조 및 형태에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보이고 있다.

장, 농, 뒤주, 가께수리, 의걸이장 등 가구의 기능과 구조가 발전하고 변모하며 새로운 형태의 가구가 제작되면서 그 흐름에 대응한 보다 기능적인 자물쇠가 새롭게 제작되었다.

자물쇠의 종류는 크게 대롱자물쇠, 함박자물쇠, 물상형자물쇠, 붙박이자물쇠 등으로 대별되고 또 자물쇠를 고정시키거나 보강제 구실을 하는 고리, 배목, 뻗침대 등 장석류도 자물쇠 장치에서 빼놓을 수 없다.

재료는 경첩 등 같은 장석류와 더불어 고대에는 철제 위주로 조선후기까지는 구리에 아연과 상납을 합금하여 사용하였으며 조선말기 이후부터는 구리와 니켈합금의 백동(白銅)제가 널리 유행하였다.

그래도 기대했던 풍경과 조망도 없이 등로 가까이에 있는 바위들도 확인하지 못하고 걷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음에 기회되면 이 구간은 꼭 한번 다시 들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는 시간이다.

 

쇠통 본모습도 담지 못하고 통과한 쇠통바위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 바위암봉 지대를 통과하니 비에 젖은 하얀 구절초가 벌써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곧이어 굵은 참나무에 가지가 3개인 곳을 지나 빼곡한 산죽등로를 통과한다.

잠시 후 굵은 참나무 옆으로 바위가 보이는 등로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바위무명봉과 그 앞으로 이정표 및 등산로 화살표가 보이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직진의 삼신지맥 마루금 방향으로는 금줄이 설치되어 있고 좌측으로 휘돌아 가는 하동독바위 가는 방향으로는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잠시 하동독바위 방향으로 진행하다 보이는 것도 없기에 과감하게 포기하고 금줄을 넘어 우거진 산죽들을 헤치며 힘든 산행을 이어간다.

하동독바위(1299m, 좌측 아래 존재)는 삼불재로 가는 등로 옆 삼신봉 남서릉 탐방로에서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바위를 말하며 하동에 있어 하동 독바위라 불리는 이 바위는 함양 독바위 및 산청 독바위와 함께 지리산의 3개 독바위에 꼽힌다.

삼불재의 사면 너머로 보면 독수리 모양의 독바위가 잘 보인다.

 

하동독바위를 고의이든 미필적 고의이든 외면하고 금줄 넘어 우거진 산죽밭을 헤치며 어렵게 진행하니 바위가 나타나고 우회하며 통과하니 다시 키 작은 우거진 산죽 사이로 뚜렷한 등로가 열리는데 산죽잎들이 우거져 등로를 침범하고 있다.

한동안 더 차가운 물방을을 뒤집어 쓰며 우거진 산죽 위로 태풍 시 떨어진 고사목들을 너무나 어렵게 헤치며 전진하니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산죽 사이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 좌측 봉우리 방향으로 선답자의 산행띠지 한장이 나풀거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직진의 봉우리 방향이 삼신지맥 마루금이고 우측의 뚜렷한 등로는 불일폭포와 쌍계사로 내려갈 수 이는 갈림삼거리이다.

오래 전 들렸던 불일폭포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화개면 운수리의 쌍계사 동쪽에 있는 폭포로서 불일폭포라는 이름은 보조국사 지눌의 시호를 딴 불일암이 인접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불일암과 불일폭포 일대는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두류산기행(頭流記行錄),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의 유두류록(遊頭流錄),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지리산청학동기(智異山靑鶴洞記) 등 수많은 유학자들이 유람하여 시문을 남긴 현장이기도 하다.

조식은 유두류록에서 불일폭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는데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소용돌이치며 쏜살같이 쏟아져 내리다가 문득 합치기도 하였고 (중략)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소리가 뒤얽혀 서로 다투니 마치 천지가 개벽하려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를 걸쳐 불일폭포와 불일암 부근을 중심으로 비정된 청학동은 유학자들에게 선경(仙境)이자 이상향의 상징적 장소였다.

 

불일폭포와 쌍계사 갈림삼거리에서 산죽들이 우거진 직진의 봉우리 방향으로 진입을 시도해 보지만 쉽지 않아 포기하고 우측으로 나 있는 뚜렷한 오르막 등로를 오르니 휘돌아 간 지점 우측인 남서 방향으로 다시 뚜렷한 쌍계사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좌측 봉우리 방향의 마루금으로는 굵은 노끈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도 걸려있다.

좌측 쌍계사 방향으로도 많은 산행띠지들이 걸려있어 주의가 필요한 지점에서 등로 좌측 노끈이 설치된 방향으로 오르며 힘든 산행을 이어가는데 이곳을 상불재로 부르기도 하는 듯 보인다.

쌍계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智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삼법이 창건한 사찰이고 시도기념물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로서 관장하는 말사는 43개이며 4개의 부속 암자가 있는데 쌍계사 일원이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절은 723년(성덕왕 23)에 의상(義湘)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는데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하였다.

그리고 한라산과 금강산 등을 두루 다녔으나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하다가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르렀으며 그곳이 꿈에 지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그 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중국에서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하였고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 노전(爐殿), 청학루,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명부전과 팔상전,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적묵당,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설선당,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나한전·육조정상탑전이 있다.

그리고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천왕문·금강문·일주문과 대방 등이 있다. 절에서 500m 거리의 암자인 국사암(國師庵)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았다는 천년이 넘은 느릅나무 사천왕수(四天王樹)가 있고 신라의 원효(元曉)와 의상이 도를 닦았으며 1205년(희종 1) 보조국사(普照國師)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두번의 불일폭포와 쌍계사 갈림삼거리를 지나 우거진 산죽밭을 뚫고 좌측 봉우리 방향으로 오르니 삼성궁까지 2.0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와 출입금지라는 경고판이 서 있는 좁은 공터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좌측으로 삼성궁 가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삼성궁은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도량(道場)으로 환인과 환웅 및 단군을 모시는 배달겨레의 성전이며 수도장으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선도를 이어받은 한풀선사가 수자(修子)들과 함께 수련하며 돌을 쌓아올린 1,500여 개 돌탑이 주변의 숲과 어울려 이국적인 정취를 풍겨낸다. 이 돌탑들은 이 곳에서 원력 솟대라 부르는 것으로 삼한 시대에 천신께 제사지내던 성지와 소도(蘇塗)엔 보통사람들의 접근을 금하려 높은나무에 기러기 조각을 얹은 솟대로 표시를 했으며 지금 성황당에 기원을 담듯 소원을 빌며 지리산 자락의 돌로 솟대를 쌓아 옛 소도를 복원하고 있다. 3,333개의 솟대를 쌓아 성전을 이루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 문화를 되찾아 홍익인간 세계를 이루자며 무예와 가, 무, 악을 수련하는 이들의 터전이다.

그 삼성궁 갈림삼거리를 지나니 등로 옆 산죽밭 위에 노끈으로 탐방로 안내판들이 걸려있어 사진에 담고 확인하며 산죽 아래 쓰러져 있는 고사목들을 주의하며 진행을 이어간다.

 

다시 제법 굵은 활엽수와 관목들 혼재되어 있는 등로 아래 키 작은 산죽들이 우거진 사이로 등로를 찾아 어렵게 걸어가니 여전히 산죽잎에 묻어 있는 차가운 물방울들이 비산하며 온 몸을 적시고 흐르는 물방울과 땀방울을 손으로 닦으며 전진하니 등로 우측으로 노끈 위에 탐방로라는 안내판이 걸려있는 지점에 도착을 하는데 무심코 그 지점을 지나 좌측으로 뚜렷한 등로를 잠시 더 따르다 촉감이 이상해 지도와 트랙을 확인해 보니 마루금은 좌측의 뚜렷한 등로를 버리고 직진의 탐방로 안내판 넘어 산죽이 우거진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어 길주의 지점이다.

 

금줄 위에 걸려있는 탐방로 안내판을 넘어 산죽이 우거진 등로를 찾아 힘들게 전진하니 드디어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사진에 담고 완만하게 오르니 갑자기 이끼 낀 바위가 나타나고 조심하며 그 바위를 돌아 오르니 이제 이 산객의 키만큼 빼곡하게 자란 산죽들이 앞을 막아 난감하기만 하다.

일단 얼굴을 보호하며 어렵게 천천히 걸어 오르니 다시 소나무 사이로 거대한 바위들이 나타나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바위로 오르니 춤추는 안개속에 희미한 풍경들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 자리잡고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본다.

제일 먼저 지나 온 방향인 북서 방향으로 방금 전 어렵게 내려 온 1095미터의 삼성궁 갈림삼거리봉이 지척으로 올려다 보이는데 그 뒤로 보여야 할 1299봉은 앞 봉우리에 막혀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이제 눈을 우측으로 돌리니 삼신지맥 마루금에서 분기한 능선이 우측 뒤 저 멀리 불일폭포와 쌍계사 방향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며 이어지고 그 끝자락에는 짙은 안개속에 희미한 화개면 운수리 방향의 마을들도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뒤로 보여야 할 황장산과 왕시리봉 방향은 안개로 뒤덮혀 전혀 보이는 것이 없어 아쉬움도 남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마루금과 관계없이 다시 한번 더 올라 여유자작 걸으며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과 조망을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해 본 시간이기도 하였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키가 큰 산죽터널에서 고생을 하다 무명바위봉에서 오늘 처음으로 짙은 안개속에 제한된 풍경을 살펴보고 온 몸에서 흘러 내리는 물기를 털어낸 후 다시 이어지는 지독한 산죽터널을 뚫고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봉우리가 보이지만 등로는 자ㅜ만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봉우리를 완전히 넘어간 이후 약간의 산죽터널이 사라진 공터에서 어렵게 지도와 트랙을 확인해 보니 좌츣 봉우리가 바로 1153.2미터의 관음봉이기에 잠시 올라가 보려고 등로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어 입구 방향으로 가 보니 우측 봉우리 방향으로 희미한 흔적들이 보여 어렵게 오르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과 산악회에서 걸어 둔 빛바랜 지리산 관음봉이란 이정판이 보여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다시 뒤돌아 내려오는데 이곳 관음봉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아쉬움도 남긴다.

 

어렵게 관음봉으로 올라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다시 한가득 물기를 머금은 키가 큰 산죽터널을 헤치며 전진하니 얼마 전 불었던 태풍에 고사목들이 떨어져 빼곡한 산죽터널 위에 가로 놓여 그 고사목들을 치우며 전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시간이다.

잠시 후 굵은 참나무가 산죽 사이로 서 있는 지점을 통과하니 주위로 밀려드는 짙은 안개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하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죽터널을 헤치며 힘들게 진행하니 갑자기 산죽터널이 사라지고 좁은 공터의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상 내원치로 표기된 지점이다.

그 안부 옆 거ㅘㄴ목들 사이로 작은 가지들이 꺽여 말라가고 있는 나뭇가지 위로 선답자의 산행띠지가 보이는데 해피마당쇠님이 1099봉임을 알리는 고도 표시를 해 둬 이곳이 1099미터의 내원치임을 알게 되었다.

좌측인 동쪽으로 배달성전 삼성궁과 우측인 서쪽으로 쌍계사를 잇는 고갯마루이지만 주위를 들러봐도 우거진 산죽밭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 지금은 고갯마루로서의 의미는 많이 퇴색된 듯 보인다.

 

실질적인 고갯마루가 아닌 도상 1099미터의 봉우리로 표기된 내원치를 지나 조금 더 산죽터널을 통과하니 굵은 활엽수와 바위가 산죽 사이에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여전히 우거진 산죽터널 위를 가로막는 고사목들을 치우며 어렵게 전진하니 온 몸에선 다시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러 내려 마치 폭우를 맞으며 걸어가는 듯 느껴지는 시간이다.

잠시 후 무명안부를 지나 조금 더 산죽들을 헤치며 걸어 오르니 갑자기 산죽들이 사라지고 몇개의 가지들이 보이는 굵은 참나무가 서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그 참나무 옆 관목으 나뭇가지에는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어 살펴보니 해피마당쇠님이 띠지에 1131.1미터란 고도 표시를 해 둔 도상 1131.1봉에 도착을 해 잠시 한숨을 돌리며 간식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 진행을 이어간다.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고 해피마당쇠님이 띠지에 고도를 적어 둔 1131.1봉에서 잠시 간식을 먹는 사이 흠뻑 물기에 젖은 몸이 미풍에도 한기를 느껴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출발하니 지독하게 우거진 산죽줄기 터널이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지고 고개를 숙이고 힘들게 진행하니 가끔 머리와 이마를 때리는 고사목들이 산죽 터널 위에 걸쳐있어 얼마 전 지나간 태풍의 위력이 다시 실감나는 시간이다.

허리를 필수도 없고 쪼그리고 계속 진행 할 수도 없어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너무나 힘들게 전진하니 오래 전 9정맥 마지막 구간으로 걸었던 낙남정맥의 첫구간이자 이 산객에게는 마지막 구간이었던 영신봉에서 고운동재까지의 산죽터널이 추억되는 시간이기도 하였으나 그때는 날씨라도 좋아 견딜만 했는데 오늘은 폭우같은 물푹탄에 더욱 힘들고 고통스런 산행시간이다.

그래도 스스로 좋아 하는 취미생활이니 감내하면서 물세례를 받으며 전진하니 드디어 지독했던 산죽줄기 터널은 통과했지만 다시 이 산객의 키만큼 자란 파란 잎사귀들이 등로를 숨기고 있는 또 다른 고통의 산죽등로가 기다리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우거진 산죽등로를 타고 물폭탄을 맞으며 남동 방향으로 평이하게 전진하니 산죽 주위로 작은 활엽수들과 가끔 보이는 가지가 많은 관목의 활엽수들이 자라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지독하게 우거져 등로가 보이지 않는 산죽등로이다.

한동안 더 걸어가니 여전히 등로 주위에 밀려와다 밀려가는 짙은 안개는 벗겨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한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 몸으로 저항하며 산죽들을 헤치고 진행하니 갑자기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는데 그중에서 숨차라는 띠지 한장이 무미 건조하던 이 산객의 웃음보를 터트려 잠시 발걸음 멈추고 웃어본 후 어렵게 지도와 트랙을 확인해 보니 이곳이 길주의 지점으로 우측인 남쪽 방향으로는 형제봉(일명 성제봉) 가는 등로로서 삼신지맥 마루금은 좌측으로 크게 꺽어 북동 방향으로 이어져야 할 지점이다.

성제봉은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과 화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115.2m로 세석고원에서 남쪽 삼신봉으로 뻗어 내린 지리산 남부 능선 끝에 솟아 있다.

성제봉에는 옛 산성을 비롯해 신선대, 통천문 등 기암들이 있고 섬진강을 바라보는 조망점으로 그 위치가 탁월한데 명칭 유래를 보면 성제봉은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와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성제는 형제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오래 전 산친구들과 고운 추억을 남겼던 형제봉(성제봉) 산행 후 섬진강 참게탕이 맛있었었다는 추억을 소환하고 출발하는데 이슬비와 짙은 안개로 보이는 풍경 하나 없으니 큰 아쉬움도 남기는 시간이다.

 

형제봉(성제봉) 갈림삼거리를 지나 방향을 북동방향으로 바꿔 진행하니 이곳 역시 키 작은 활엽수들과 가끔 보이는 가지가 많은 관목의 활엽수 아래 우거진 산죽등로가 길게 펼쳐진 풍경 그대로이다.

이제 이슬비는 사라졌지만 등로 주변의 활엽수 잎새귀와 산죽잎에 내려 앉아 있는 물방울들이 이 산객이 지날때마다 차가운 많은 물방울 폭탄을 터트리며 진행을 어렵게 만들고 이제 등산화에서는 철지난 개구리 울음소리에 더해 발가락이 부르트면서 약간의 고통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힘든 산죽 등로를 헤치며 조금 더 전진하니 또 다시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는 1133미터의 거사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해피마당쇠님이 노란 띠지에 고도와 봉우리 이름을 적어 놔 목례를 하고 사진에 담은 후 곧바로 출발하는데 다만 거사봉에 관한 자료를 찾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해발고도 1133미터인 거사봉을 지나니 등로는 다시 북동 방향에서 우측인 동쪽 방향으로 이어지고 여전한 산죽등로를 따르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산죽 사이로 뚜렷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편안하게 전진하니 금새 다시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고 돌탑 앞에 둥그런 화강암에 해발1133미터의 시루봉이란 정상석이 박혀있는 지점에 도착을 해 지도를 확인해 보니 무명봉으로 표기된 곳인데 왜 이곳에 시루봉이란 정상석을 세웠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다만 전국적으로 많은 시루봉들이 있고 대부분의 지명유래는 시루를 닮았다거나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그런 연유는 아닐지 더욱 아쉽기만 하다.

 

원통형의 화강암 정상석과 작은 돌탑이 서 있던 시루봉을 지나 이제 다시 남동 방향으로 휘어지며 진행하니 커다란 바위 두개가 보이고 그 사이로 나 있는 산죽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관목의 활엽수들이 산죽등로 위로 솟아난 듯 보이는 무명안부도 통과한다.

곧이어 바위암벽들이 나타나고 그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나무 한그루가 인생을 되돌아 보게 만들며 그곳을 지나자마자 거대한 바위암릉들이 펼쳐지는데 표면에는 파란 이끼들이 보여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계속 이어지는 바위암릉 사이로 보이는 산죽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선답자의 산행띠지가 걸려있는 1016.7미터의 전망바위에 도착을 하는데 보이는 것이 마무것도 없기에 옆 바위로 올라 젖은 수건과 등산복의 물기를 짜 내고 등산화를 벗어 물기를 제거한 후 잠시 쉬면서 준비한 빵으로 허기를 달래보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가 줄어들고 이슬비도 멈추면서 한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1016.7 전망바위는 올라가 봐도 보이는 것이 없기에 그 앞에 보이는 너럭바위에 올라 젖은 등산복과 등산화의 물기를 짜내고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바위봉을 내려 와 다시 우거진 키가 큰 산죽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물기를 짜 낸 등산복은 금새 흥건히 젖어 온다.

안부 지나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곧이어 키가 작은 산죽들이 누렇게 죽어가는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우거진 산죽 위로 참나무들이 보이고 그 나뭇가지에 해피마당쇠님의 산행띠지 한장만 걸려있는 도상 992.9 시루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정판은 물론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도 보이지 않아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방금 전 지나 온 원통형 화강암 정상석과 돌탑이 서 있던 시루봉과 이곳 시루봉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지점을 잘못 표기가 된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지도와 트랙을 확인하지 않았으면 평이한 능선으로만 알고 지났을 도상 992.9미터의 시루봉 정상을 지나 남쪽과 남동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니 갑자기 우거졌던 산죽들이 사라지고 관목의 활엽수들이 보이는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으로 걸어간다.

관목의 활엽수들이 보이는 무명봉을 넘어 잠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키작은 잡목들과 가을정취가 묻어나는 잡풀들이 보이는 무명안부로 내려가는데 진행 방향으로도 지금까지 지독하게 괴롭혔던 잡목들이 사라져 산행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는데 이제부터는 산죽과 완전히 헤어질 수 있기를 희망해 본 시간이기도 하였다.

 

산죽이 사라진 무명안부를 지나 여전히 뚜렷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갑자기 다시 지독하게 우거진 산죽등로가 앞을 가로막아 난감하기만 한데 방법이 없으니 다시 산죽들을 헤치며 진입하니 약간 말라가던 등산복과 등산화가 다시 흥건히 젖어들기 시작한다.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산죽줄기 사이로 산객 한명만 빠듯이 지날 수 있는 짧은 터널을 빠져 나가니 지금까지 잘 보이지 않던 미역줄기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다시 관목의 참나무들이 보이는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무명봉 넘어 계속 이어지는 산죽이 보이지 않는 참나무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는 관목의 활엽수봉에 도착을 하는데 등로에는 약간의 산죽들도 보이는 도상 954.5봉이다.

이정판을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고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을 확인해 봐도 고도를 적어 둔 띠지가 보이지 않아 전체적인 정상부만 사진에 담아 보는데 잡목들이 우거져 주위 풍경이나 조망 역시 전혀 기대를 할 수 없는 봉우리였다.

 

도상 954.5봉을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바위들이 보이는데 그곳부터는 산죽이 완전히 사라져 마음 편히 걸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바위봉 지나 산죽이 사라진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걸어 오르니 갑자기 다시 우거진 산죽등로 위로 관목의 참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해 긴장하며 전진하니 커다란 두개의 바위가 보이는 923.6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갑자기 녹색철망 안에 무인산불감시카메라와 회남재 안내판 그리고 그 바로 앞으로 KBS 진주방송국 중계탑이 서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진행을 이어간다.

 

회남재 안부에 있어야 할 설명판이 왜 이곳 무인산불감시카메라와 KBS진주방송국 중계탑에 붙어 있는지 의아한 생각으로 그곳을 빠져 내려가니 갑자기 키작은 잡풀들이 보이는 넓은 비포장임도로 된 완만한 내리막 등로가 이어지고 사진에 담으며 진행하니 다시 우거진 산죽들이 보이지만 등로는 누군가 잘 정리를 해 둬 산행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편안하게 내려간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잡풀들이 우거진 사이로 얇은 철봉이 세워져 있는 곳에 도착을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아래 하동304란 삼각점이 박혀있는 도상 906.2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가파르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진행을 이어간다.

 

도상 906.2 삼각점봉을 지나니 다시 우거진 산죽 등로가 이어지는데 이곳은 산죽 사이로 그나마 뚜렷한 등로가 보여 조심하며 따라 내려가니 얼마지나지 않아 입산통제 경고판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고 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회남정이란 사각정자와 나무데크 및 이정표가 서 있는 회남재에 도착을 한다.

회남재(740m, 회남정 정자와 전망데크)는 경의사상(敬義思想)을 생활 실천철학으로 삼은 조선시대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산청 덕산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중 악양이 명승지라는 말을 듣고 1560년경 이곳을 찾았다가 돌아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회남재 고갯길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하동시장 등을 연결하는 산업활동 통로이자 산청과 함양 등 지리산 주변 주민들이 널리 이용하던 소통의 길이었으며 지금은 주변의 뛰어난 풍광을 즐기며 등산과 걷기 동호인으로부터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회남재 숲길 걷기가 시작되는 곳에 삼성궁이 있는데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곳으로 삼성궁은 예전에는 외부인 출입이 제한되었는데 지금은 출입이 가능하도록 개방이 되어 있다.

회남정으로 올라 잠시 배낭 벗어 물기를 닦아내고 젖어 있는 등산복을 벗어 째 낸 후 간식과 식수로 허기와 갈증을 달래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생각인데 해발고도가 낮아지니 지독하게 짙게 덮혀있던 안개도 많이 벗겨져 제법 뚜렷한 풍경과 조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잠시 더 회남정 정자에서 물기를 말리고 허기를 달랜 후 잠시 회남정 뒷쪽으로 남서 방향을 살펴보니 박무속에 악양면 등촌리 마을이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 형제봉과 좌측으로 잠시 후 만나야 할 삼신지맥의 구재봉 줄기를 찾아보니 좌우측으로 우거진 나무들에 막혀 보이지 않고 악양면 넘어 높게 솟아 있어야 할 호남정맥의 백운산 줄기 역시 안개인지 구름에 덮혀 있어 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선답자들의 산행후기를 확인해 보면 멋진 풍경과 조망들로 인해 힘든 줄 모르게 진행을 했다고 하는데 이 산객에게는 그런 행운은 없는 듯 그저 힘들고 고통스런 추억들만 가득 남기는 시간이지만 이 또한 좋아서 하는 산행이니 다시 등로를 찾아 떠나는 순간이다.

최참판댁으로 유명한 악양면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북부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면으로서 동쪽으로 청암면과 적량면, 서쪽으로 구례군 화개면, 남쪽으로 하동읍 및 섬진강을 건너 광양시 다압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청암면 및 화개면과 접한다.

북쪽으로 지리산의 삼신봉에서 뻗어 나온 거사봉을 등지고 동쪽의 칠성봉과 구재봉, 서쪽의 형제봉 지맥이 양면을 좌우로 에워싸고 있는데 산에 둘러싸인 가운데에 비옥한 토질의 분지와 들판(악양뜰)을 형성하였다.

북쪽 산지에서 발원하여 면을 종단하며 남쪽으로 흐르는 악양천은 노덕천과 신성천, 하덕천의 지류와 합수하여 면의 남부 가장자리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에 이어진다.

악양면(岳陽面)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의 악양현(嶽陽縣)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삼국사기지리지에 악양현(嶽陽縣)은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에 이속되었고 1702년(숙종 28)에 하동에 이속되어 악양면이라 하여 15개 리를 관할하였으며 1914년 하동군 악양면과 화개면, 덕양면 일부를 통합하여 악양면이 되었다.

악양면은 미점리와 축지리, 신대리 등의 14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30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회남재의 회남정이란 사각정자에서 젖어 있는 등산복과 등산화의 물기를 대충 짜 내고 말린 후 악양면 방향으로 희미하게 펼쳐진 마을까지 살펴본 후 다시 회남재를 출발해 능선으로 진입하니 우거진 산죽들 사이로 잘 정리된 등산로가 보이고 편안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과 감정으로 그 산죽 등로를 따라 올라간다.

한구비 가파르게 올랐다가 잠시 평이한 능선에서 숨고르기를 한 후 가파르게 오르기를 몇번인가 진행하니 굵은 참나무 두그루가 등로 양쪽으로 서 있는 지점에 도착을 해 물 한모그 마시고 출발하는데 해발고도가 934.5미터로 제법 높게 걸어 올라 온 지점이다.

 

지독하게 우거진 산죽등로를 뚫고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진행을 했지만 다시 정리된 산죽 등로를 보니 어느새 고통은 사라지고 쉽게 접하지 못하는 풍경과 모습에 그저 그 등로조차 즐기고 있으니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기만 하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산죽등로를 잘 정리해 놨는지 알수는 없지만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산죽 등로를 타고 무심으로 걷다보니 산죽 사이로 제법 굵은 참나무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한동안 더 고도를 높이니 어느 순간 갑자기 산죽들이 사라지고 편안하게 걸어가니 또 다시 파란 산죽 등로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잠시 후 낙엽송들이 보이는 곳을 지나 참나무 등로를 따르니 짧은 바위너덜 등로가 나타나는데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어 주의가 필요한 등로이다.

 

그 바위너덜 등로를 타고 오르니 930.2 바위 무명봉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오늘 처음으로 깃대봉과 그 뒤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그 산줄기를 타고 넘는 하얀 안개의 춤사위가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예상한 산행시간보다 많이 걸렸지만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산행 조건에 비하면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기에 잠시 더 머물러 몇장 사진에 더 담고 출발하는데 새벽 일찍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날머리에 애마를 두고 산행을 진행하고 있어 시간에 구애받음 없이 안전하게 천천히 진행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많은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보이는 풍경으로는 마루금이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질 듯 하지만 첫번째 보이는 깃대봉 정상 직전에서 삼신지맥 마루금은 우측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방향으로 방향을 크게 꺽여 가파르게 내려가야 하니 직접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ㅗ한 지맥 마루금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바위암릉에서 진행 방향으로 오늘 처음 제대로 된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다시 잡목 사이로 잘 관리되고 있는 뚜렷한 등로를 따라 전진하니 거대한 바위암벽이 등로 좌측으로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다시 키가 작은 산죽등로가 이어지는데 누군가 그 산죽 등로를 잘 정리를 해 놔 편안하게 걸어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산죽 사이로 나 있는 뚜렷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칠성봉까지 5.5 Km 거리이고 그 옆으로 해발981미터의 깃대봉이란 화강암 원통 정상석이 서 있는 곳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긴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 정상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도옥으로 조금 더 진행된 지점에 982.7봉이 보이는데 그쪽 방향으로 진행이 가능한지 확인해 보니 우거진 산죽들에 막혀 전혀 진행이 불가능하다.

이곳 깃대봉 정상에서 마루금은 우측인 남쪽으로 크게 꺽어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어 도상 982.7봉을 들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깃대봉 정상에서 우측인 남쪽으로 크게 꺽어 가파르게 내려가니 정상에서 우거졌던 산죽등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굵은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혼재되어 있고 그 사이마다 관목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평이한 내리막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내려가니 점점 소나무들이 사라지고 참나무 등로로 바뀌는데 그 아래 뚜렷한 등로에는 제법 크게 자란 파란 사초들이 흐느끼듯 쓰러져 있어 개인적으로 너무 기분 좋게 걸어가는 시간이다.

한동안 더 참나무 아래 사초 등로를 따라 전진하니 다시 굵은 낙엽송들이 보이고 안부인지도 모를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통과하니 우거지지 않은 미역줄기나무들이 보이는데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진행하니 아직은 줄기들이 우거지지 않아 편안하게 걸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직은 우거지지 않은 짧은 미역줄기나무 군락지를 통과해 완만하게 오르니 다시 굵은 소나무 아래 파란 사초들이 한들거리는 786.2 무명봉에 도착을 하니 선답자의 산행띠지 한장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 무명봉을 지나니 고사목이 보이는 무명봉을 다시 넘고 우거지지 않은 미역줄기 군락지를 통과하니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 아래 잡풀들이 보이는 뚜렷한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평이하게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잡목들 사이로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고 그곳을 지난 지점에는 굵은 소나무들이 보여 잠시 발걸음 멈추고 지도를 확인해 보니 도상 741.9봉으로서 정상부를 살펴보니 이정판은 보이지 않고 법광님이 띠지에 고도를 적어 놔 목례를 하고 사진에 담은 후 곧바로 출발한다.

 

봉우리같지 않은 능선 상 741.9봉을 지나 굵은 소나무 사이로 약간의 관목 활엽수들이 보이고 그 아래 파란 잡풀들 사이로 뚜렷한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진행하니 등로는 어느새 굵은 소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큰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굵은 소나무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완전히 젖었다 말라가는 등산복 속 피부가 쓸렸는지 쓰라려 오기 시작하고 발바닥과 발가락에는 물집이 잡혔는지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해 고민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잠시 후 나즈막한 무명안부를 지나 이어지는 굵은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굵은 소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오는 578.8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본다.

 

굵은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늘어선 뚜렷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조금은 속도를 내보지만 발가락 물집과 사타구니에 생긴 쓸린 피부의 고통으로 인해 다시 발걸음이 느려지고 어짜피 날머리에 애마를 두고 진행하는 산행이다 보니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진행하기로 한다.

특히나 이슬비에 흠뻑 물기를 머금은 키가 큰 산죽지대를 빠져 나오며 회남재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어짜피 지금부터 서두른다고 해도 어둡기 전 하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니 발걸음도 덩달아 느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굵은 조선소나무 아래 키작은 잡목들과 잡풀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뚜렷하게 나 있는 편안한 등로를 따르니 금새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배티재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의 하동군 청암면 상이리와 우측의 악양면 중대리를 이어주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인데 자료를 찾아 보지만 보이는 자료가 없어 왜 배티재일까 궁금한 시간이다.

아직 준비한 식수와 음료수가 남아 있지만 지난 밤 어둠속에 식수와 음료수를 숨겨놨기에 찾아 보니 온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음료수 한병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칠성봉 3.2 Km 거리라는 남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산행을 이어간다.

 

돌계단을 올라 굵은 소나무 앞에 식수 2병을 남겨 두고 조금은 가벼운 배낭을 둘러메고 뚜렷한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좌측으로 굵은 소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지만 우측으로는 관목의 잡목들과 활엽수들이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등로 좌측인 북동 방향으로 청암면 상이리 방향의 무명봉 좌측 뒤로 낙남정맥 산줄기가 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와 나뭇가지에 막혀 있지만 어렵게 사진에 담으며 진행한다.

 

등로 좌측으로 무명봉과 낙남정맥 마루금을 살펴보며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이제 뚜렷한 등로 양쪽 모두에 굵은 소나무들이 줄지어 지나는 산객을 환영하듯 반겨주고 곧이어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를 걸어 둔 나뭇가지가 잘려있는 574.7 무명봉에 도착을 해 띠지들을 새로 걸어 두고 진행한다.

이제 오전과는 완전히 다른 편안한 등로를 타고 전진하니 굵은 소나무 사이로 낙엽송도 보이고 키 작은 잡목들도 더욱 우거져 보이는 등로로 바뀌면서 나즈막한 무명안부로 내려가는데 등로 바로 좌측 아래로는 배티재에서 이어져 온 비포장임도가 바짝 따라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 무명안부 지나 이제 참나무와 소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파란 잡풀등로를 따르니 오르막 경사도가 심해지기 시작하고 곧이어 통나무 계단이 나타나는데 지도를 보니 잠시 후 만나야 할 680 삼각점봉은 좌측 직진으로 올라야 할 듯 싶은데 잡목들이 우거져 진행이 어려워 보이고 뚜렷한 계단 등로는 자꾸만 우측 사면으로 이어지고 있어 두어번 좌측 잡목능선으로 오르려고 시도하다 포기하고 능선에 올라 좌측 삼각점봉을 잠시 다녀오기로 한다.

 

한동안 길게 이어지는 통나무 오르막 계단을 타고 어렵게 전진하니 계단이 사라지고 우측 사면 방향으로 평이한 등로가 열리고 잠시 후 680 삼각점봉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만나는 주능선에 도착을 해 좌측 680 삼각봉 방향을 살펴보니 희미한 등로의 흔적이 보인다.

그곳에 배낭 내려 놓고 스틱만 들고 좌측인 북쪽 방향으로 잡목들을 헤치며 오르니 관목의 소나무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680 삼각점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정판은 보이지 않고 보여야 할 삼각점도 소실되었는지 찾을 수 없어 선답자들이 걸어 둔 몇장의 띠지들만 사진에 담고 확인해 보니 법광님이 산행띠지에 고도표시만 해 놨다.

 

잠시 680 삼각점봉에 머물며 사진을 남기고 뒤돌아 내려와 벗어 둔 배낭을 찾아 어께에 둘러메고 조금은 더 우거져 있는 잡목 등로를 헤치며 남쪽 방향으로 전진하니 이곳 역시 등로 좌측 가까운 지점까지 넓은 비포장임도가 따라 와 있어 사진에 담고 진행하니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에 통나무계단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 통나무계단을 통과하니 등로는 다시 우측 사면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잠시 편안하게 걸어가니 다시 오르막 등로가 시작되는 지점 옆으로 이정표가 서 있어 살펴보니 진행방향인 칠성봉까지 2.2 Km 거리라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그 이정표를 지나 우측 능선 좌측으로 나 있는 사면 등로를 따르니 키가 큰 우거진 잡풀들이 발걸음을 막고 있어 살펴보니 예전에 뚜렷하게 나 있는 등로가 묵으면서 잡풀들이 자라고 관리가 되지 않으니 다시 등로가 사라지고 자연화가 진행되고 있는 곳처럼 보인다.

잠시 더 우거진 잡풀들을 헤치며 전진하다 좌측 앞으로 보니 잠시 후 올라 만나야 할 마루금이 이어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 와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한발자국 전진하기도 힘든 잡풀지대가 펼쳐지는데 어느 선답자는 이곳을 불이 났던 고사목 등로로 표기를 해 놨는데 고사목은 보이지 않고 불이 난 듯한 흔적들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지독하게 우거진 잡풀지대를 어렵게 통과하니 우측 주능선으로 이어지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좌측으로 진행하니 굵은 소나무들이 짧게 나타나는데 그 아래로는 약간의 잡목과 잡풀들이 보이지만 그 사이로 나 있는 뚜렷한 등로가 보여 진행이 훨씬 수월해 보인다.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잡목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우측 경사진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는데 불이 났던 지역임을 알려주듯 고사목들이 보이고 굵은 나무 밑등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들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곳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키 작은 잡목과 우거진 잡풀 등로를 따라 가파르게 오르다 잠시 키 큰 나무들이 사라진 곳에서 뒤돌아 보니 여전히 박무가 드리워진 날씨속에 배티재 넘기 전 들렸던 981미터의 깃대봉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고 그 좌측으로 회남재 방향으로 이어지는 삼신지맥 마루금과 낮아진 회남재 그리고 회남재 지나 시루봉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몇장의 사진에 담으며 잠시 쉬어간다.

 

북쪽으로 배티재 넘어 솟아 있는 깃대봉과 회남재 지나 이어지는 시루봉 줄기를 확인하고 눈을 조금 더 좌측인 북서 방향으로 돌리니 악양천을 따라 형성된 악양마을들이 연무속에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 짙은 안개인지 구름속에 오늘 이 산객이 산행을 시작한 삼신봉 방향의 산줄기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연무가 심해 정확한 위치까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여 지리산 주능선은 찾는 것을 포기하니 아쉽기만 하다.

지나온 삼신지맥 마루금 좌측 끝자락을 살펴보니 봉긋하게 솟아 있는 바위봉 옆으로 출렁다리가 보여 지도로 확인해 보니 바로 형제봉 신선대 구름다리로서 오래 전 산친구들과 올라 고운 추억을 남겼던 곳이라 그때의 추억도 소환해 본다.

 

잡풀들이 우거진 오르막 등로에서 생각지도 못한 조망들을 살펴보고 간식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 잡목과 잡풀 등로를 따라 많은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상처난 피부와 물집이 생긴 발가락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해 남아 있는 구간 산행이나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키가 큰 잡목들과 가시나무들이 없어 쉽게 잡풀들을 헤치며 오르니 등로는 다시 좌측인 동쪽 방향으로 크게 꺽여 진행되고 잠시 후 칠성봉 정상까지 1.64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786.1 잡풀 무명공터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물 한잔으로 갈증도 달랜 후 출발한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무명공터봉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잡목들이 우거진 능선 등로를 따르니 제법 굵은 고사목들이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오래 전 정상부만 살짝 불이 났었는지 밑등이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계속 이어지는 굵은 소나무 사이로 약간의 고사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에는 이제 키가 큰 잡목들과 잡풀들이 다시 우거지기 시작하고 잠시 더 힘들게 전진하니 굵은 소나무에 이끼가 껴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오는 790 무명봉에 도착을 해 잠시 주위를 줄러 보지만 잡목들에 막혀 풍경이나 조망은 전혀 없다.

 

그 무명봉 지나 남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잡목 능선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의 비포장임도를 타고 진행하다 올라 오는 등로와 만나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굵은 밑등이 썩어가고 있는 739.6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그 무명봉을 넘으니 소나무들은 사라지고 가끔 보이는 굵은 참나무 아래 우거진 잡목들이 길을 막고 잠시 후 빛이 변하기 시작한 미역줄기 군락지도 짧게 보인다.

그곳에서 진행 방향으로 잠시 후 올라 만나야 할 칠성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과 칠성봉이 살짝 머리를 내밀어 사진에 담고 능선 잡목 등로를 따르니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과 종이코팅지가 걸려있는 도상 812.6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긴다.

 

잡풀이 무성한 좁은 공터 참나무 가지에 종이코팅지로 이뤄진 이정판을 사진에 담고 도상 812.6봉을 내려가니 관목의 활엽수들이 보이고 곧이어 등로 우측으로 희미하게 악양면 마을들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 뒤로 솟아 있는 형제봉 능선은 이제 짙은 안개인지 구름에 막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악양면(岳陽面)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16년(757) 때의 악양현(嶽陽縣)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악양면에 있는 하천이므로 악양천이라 하였다.

악양면은 본디 신라 경덕왕 때 소다사현(小多沙縣)이었는데 우리말에서 어린아이를 아가 또는 악아(岳兒)로 쓰기에 악양의 악(岳)은 작다라는 뜻이므로 소다사(小多沙)의 소(小)에 해당하고 볕을 뜻하는 양(陽)은 따사롭다에서 접미사 롭다를 뺀 다사가 되므로 악양은 곧 소다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악양면은 중국에 있는 웨양[岳陽]과 이름이 같으며 동정호와 악양루 등의 이름도 웨양에 있는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악양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 몸에 받은 땅으로 평사리가 위치한 지명인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중국에 있는 지명을 따와서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다.

악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중에 소상팔경이 있으며 평사리에 위치한 동정호와 악양의 소상팔경은 이곳 사람들의 자랑거리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풍경을 자아낸다.

또한 형제봉 중턱 300m에 위치한 사적 고소성은 신라시대 축성한 것으로 섬진강과 동정호를 발 아래 두고 천년의 발자취를 말해준다.

동학혁명에서 근대사까지 우리 한민족의 대서사시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이곳 평사리에 소설속의 최참판댁이 한옥 14동으로 구현되었으며 조선후기 우리 민족의 생활모습을 담은 초가집과 유물 등 드라마 토지 세트장도 조성되어 있다.

매년 가을이면 전국 문인들의 문학축제인 토지문학제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문학마을로써 자리매김될 전망이며 또한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을 캐릭터로 개발하여 관광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섬진강을 따라 마련된 박경리 토지길은 소설 토지의 실제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평사리를 지나는 1코스(18km)와 19번 국도를 따라 꽃길을 걷는 2코스(13km)로 나뉜다.

 

희미하게 내려다 보이는 악양면을 어렵게 사진에 담고 약간의 잡목과 참나무 능선 등로를 따르니 가지가 많은 소나무와 관목의 참나무 사이에 바위가 보이는 무명봉도 넘어 나즈막하게 내려갔다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바위 주위에 잡목들이 우거진 818.8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무명봉 지나 이끼 낀 바위지대를 지나 짧지만 가파르게 오르니 멋진 분재형 거대한 소나무 한그루가 반겨주고 좌측으로 짧게 걸어 진행하니 우거진 가시잡풀 속에 무너진 돌담들이 보여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그곳을 지나니 원통형 금강석에 해발 880미터의 봉수대라는 정상석이 박혀있다.

봉수대 표석(880m)이 박혀있는 악양 봉수대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던 신라 시대의 봉수대로서 건립 경위는 악양 봉수대의 축조에 대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하동 고소성(河東姑蘇城)의 축성 연대가 신라 시대이므로 그 당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해안 특히 백제와의 경계 지점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감시하고 보고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칠성봉(900m)에 위치하고 있고 하동군 악양에서 금봉사(金鳳寺)와 동점재를 경유하여 봉수대에 이르는데 서쪽은 악양면이고 동쪽은 청암면이며 남쪽은 적량면이다.

2011년 현재 악양 봉수대는 남아 있지 않아 형태를 잘 알 수 없고 망대나 연대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만 약 132㎡(40평) 정도 산재해 있으며 개인 소유로 하동군이 관리하고 있다.

해안 지방에는 규모가 작은 성곽들이 많이 축성되어 있는데 성곽들의 주 임무는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적들을 방어하고 감시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 연안 가까이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해안 상황을 보고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봉수대의 기록이 잘 남아 있지 않아 설치 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군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곳이기에 악양 봉수대를 포함한 여타 봉수대들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봉수대 정상석을 사진에 담고 잠시 더 평이하게 남동 방향으로 걸어가니 갑자기 눈 앞으로 이정목과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데 살펴보니 우측으로 동점재 하산 등로가 있는 갈림삼거리로서 직진인 동쪽으로 가면 905.8미터의 칠성봉으로 가는 갈림삼거리로서 잠시 칠성봉을 다녀 와 우측 동점재로 진행을 해야 할 갈림삼거리이다.

칠성봉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암면 중이리와 악양면 신흥리 및 적량면 서리 일대에 걸쳐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891m이고 칠성봉의 산줄기는 지리산 삼신봉에서 남동쪽으로 거사봉과 시루봉 및 회남재를 거쳐 칠성봉에 이르렀다.

칠성봉 서사면 기슭에는 악양분지가 펼쳐지고 악양면으로 이어지며 동사면과 남사면의 좁은 골짜기에는 자연마을이 형성되었고 하동호가 인접하였다.

칠성봉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 기거하다 칠불사로 건너가 수도했으며 칠성봉 아래에는 칠성암(七星庵)이 있었다고 한다.

칠성봉의 옛 이름은 검남산(劒南山)인데 검남산이라는 지명 유래는 칠성봉 서사면 기슭의 검남마을 혹은 칼남재(劍南)와 관련 있다.

검남마을은 칼(劍) 지명이 마을 이름으로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금남(金南)으로 개명하였으며 조선시대 하동의 주요 관찬지리지와 지도에는 검남산에 관한 기록이 없다.

하동지에는 검남산은 군의 북쪽에 있고 남쪽 산록의 아래에 경천묘(敬天廟)가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경천묘는 신라 경순왕을 모신 사당으로 중이리 검남산 아래에 있었으나 1988년의 하동댐 건설로 평촌리로 옮겼다.

 

우측으로 동점재 갈림삼거리에서 그냥 마루금을 타고 진행할 수 없어 배낭 벗어 내려놓고 직진의 칠성봉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약간의 고도차이를 극복하고 잡목들이 둘러싼 좁은 공터 한쪽에 커다란 정상석과 이정표가 서 있는 도상 905.8미터의 칠성봉 정상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몇장 남겨본다.

하지만 사진 촬영 후 주위를 둘러보니 잡목들에 막혀 풍경이나 조망이 전혀 없어 조금은 답답함을 느끼고 이정표만 사진에 다시 담은 후 곧바로 출발한다.

칠성봉(905.8m)은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청암면·악양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명칭 유래를 보면 칠성봉(七星峰, 900m)은 칠성이라는 이름을 볼 때 민속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정북(正北)을 바라보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며 별점을 보던 사당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지리산 주능선인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는 삼신봉을 지나 거사봉(1,100m)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서쪽 줄기는 성제봉(1,115.2m)과 신선대(903m)로 이어지는 1,000m급 산줄기이며 동쪽은 시루봉(993m)과 칠성봉(900m) 및 구자산(767.6m)으로 이어지는 좀 더 낮은 산줄기이다.

이 두 산줄기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악양분지로 두 산줄기는 악양분지의 배후 산지이자 악양면과 다른 면의 경계선 구실을 한다.

칠성봉(900m)은 악양분지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동쪽으로 이보다 높은 봉우리가 없어서 하동군 동부의 지형과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칠성봉은 구자산과 같은 반상 변정질 편마암으로 비탈면은 가파르고 정상부는 기암괴석이 노출되었으며 비탈면에 전체적으로 얇은 토양층이 덮여 있어 식생 밀도가 높다.

반상 변정질 편마암은 특히 산 정상부 부근에서 가파른 경사를 보이는 지형적 특성이 있어 7~8부 능선까지는 단조롭다가 마지막 정상부에서는 경사가 가파르다.

칠성봉은 청암면과 적량면의 경계 구실을 하며 이들 두 개 면과 악양면이 만나는 곳에 봉수대 터(880m)가 있다.

 

칠성봉 정상에서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다시 뒤돌아 내려 와 동점재 갈림삼거리 이정표 앞에서 벗어 둔 배낭을 찾아 어께에 둘러메고 이제는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가끔 보이는 굵은 소나무와 주로 관목의 참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갑자기 잡목들이 사라진 참나무 내리막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눈 앞으로 갑자기 커다란 바위암릉이 나타나 우회하며 살펴보니 현위치 칠성봉-2라는 이정목이 서 있고 바위암릉은 전면에서 봤던 모습보다 훨씬 더 크고 길게 펼쳐져 있어 잠시 더 우회등로를 통해 통과한다.

 

바위암릉을 우회하며 통과하니 다시 등로 좌우측으로 바위들이 보이는 무명봉을 넘고 제법 굵은 소나무와 바위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를 따르니 금새 사초들이 보이는 무명안부로 내려간다.

무명안부를 지나니 굵은 소나무와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곧이어 관목의 활엽수 등로를 따라가니 현위치 칠성봉-3이란 이정목이 서 있는 동점재 안부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다.

이곳 동점재에 관한 자료는 많이 보이지 않는데 다만 이곳 지명인 적량면 서리에서 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동점재(580m)는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서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하나였던 동점마을에서 차용된 이름이지만 현재는 동점마을이 사라져 찾기가 더욱 어렵게 된 듯 보인다.

서리의 명칭 유래는 상서동(上西洞)과 중서동(中西洞) 및 하서동(下西洞)의 공통 음절인 서자를 따서 서리(西里)라 하였는데 적량면 동쪽에 있는 동리(東里)에 대해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붙인 이름으로 여겨지며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삼서촌(三西村)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진주목(晉州牧) 관할이었다가 1702년(숙종 28) 하동군 적량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상서동과 중서동, 하서동, 동점동(銅店洞) 등이 통합되어 적량면 서리가 되었다.

북쪽의 칠성봉(七星峰, 885m)을 중심으로 높이 500~700m 산지가 좌우로 양팔을 벌리듯 뻗어 내리며 동과 서, 북 삼면을 둘러싸고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동점마을 아래에서 삼화저수지를 이룬 뒤 남쪽으로 흐르며 골짜기 아래 여러 마을로 흘러든다.

 

등로 좌우측으로 안부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등로로서의 기능은 산실된 듯 보이는 동점재 안부를 지나 관목의 참나무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다시 등로 주위 잡목 사이로 굵은 소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 더 뚜렷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굵은 소나무들이 잡목 사이로 자라고 있는 도상 651.7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정판은 커녕 선답자들의 산행띠지 한장 보이지 않아 사진에 담고 잠시 더 전진하니 억새와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헬기장에 도착을 하고 확인해 보니 이곳 헬기장 정상에도 아무 표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산행 전 선답자들의 산행후기를 확인한 결과 이곳 헬기장 정상을 도상 651.7봉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 지도를 보면 도상 651.7봉과 헬기장은 약간의 거리차이가 있다.

 

억새와 잡풀들이 우거진 헬기장으로 이뤄진 도상 651.7봉 지나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혼재되어 있고 그 아래 키 작은 잡목들이 보이는 뚜렷한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점점 잡목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파란 사초들이 길게 누워있는 모습으로 펼쳐진다.

잠시 더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무명안부 지나 바위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커다란 바위는 좌측으로 우회하며 통과한다.

 

바위를 우회하며 통과하니 등로는 남쪽빙향에서 자꾸만 남동 방향으로 휘어져 이어지고 다시 굵은 소나무 아래 누군가 등로를 정비한 듯 잡목들이 모두 제거된 뚜렷한 등로가 펼쳐진다.

그렇게 잠시 더 편안하게 걸어가니 법광님이 걸어 둔 산행띠지 한장만 보이는 도상 712.8봉에 도착을 해 살펴보니 역시나 법광님이 띠지에 고도를 적어 놔 목례로 감사함을 전하고 진행을 이어간다.

 

나무들에 막혀 풍경과 조망이 전혀 없는 도상 712.8봉 지나 현위치 칠성봉-4 이정목을 통과하고 곧이어 관목의 참나무와 바위가 보이는 708.4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진행하니 다시 바위암릉들이 나타나 우측으로 우회하며 조심스럽게 넘는다.

바위암릉을 지나니 등로는 다시 굵은 소나무와 관목의 잡목들 그리고 잘 정비된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어 오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과 편안한 마음으로 산행을 이어가는 시간이다.

 

잠시 더 뚜렷한 등로를 타고 편안하게 진행하니 등로가 갑자기 우측으로 휘어지고 직진 방향의 봉우리를 우측으로 우회하며 진행되는데 우측으로 오를 수 있는지 확인해 보니 잡목들이 우거지고 선답자들도 모두 우회를 했는지 진입할 수 있는 등로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우회등로가 끝나는 지점에 굵은 소나무들이 보이고 몇장의 선답자들 산행띠지들이 걸려있어 사진에 담고 내려가니 사각계단이 길게 설치되어 있다.

사각계단이 끝나니 굵은 소나무 사이로 굵은 바위암릉이 이어지고 곧이어 벌초가 되어 있는 무명묘지 지나 뚜렷한 등로를 타고 한동안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굵은 참나무 두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631 무명봉에 도착을 해 물 한모금 마시고 출발한다.

 

굵은 참나무 두그루가 서 있는 무명봉 지나 다시 나타나는 사각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무명산소로 오르면서 후손들이 등로를 정비하였는지 걷기 편안한 등로가 계속 이어지고 곧이어 등로 좌측으로 편백나무들이 식재된 지점도 통과한다.

잠시 후 현위치 칠성봉-5 이정목을 지나 또 다시 나타나는 사각나무계단을 지나 바위무명봉을 넘으니 좌측으로 동점마을로 갈 수 있는 이정표와 칠성봉 등산로안내판이 서 있는 넓은 비포장임도에 도착을 하는데 지명이름으로는 악양면 신성리 임도로서 좌측의 적량면 서리 동점마을과 우측의 악양면 신성리 상신대 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점이다.

신성리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 위치한 리()로서 칠성봉 기슭에 자리한 산골마을이고 자연마을로는 고랑몰, 복숭나뭇골, 진사내곳, 성두마을 등이 있다.

고랑몰마을은 마을 앞에 도랑이 있다 하여 고랑몰이라 칭하게 되었고 복숭나뭇골마을은 옛날 이곳에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진사내골마을은 옛날 이곳에서 진사가 났다 하여 부르게 된 명칭이다.

성두(星頭)마을은 신성리의 으뜸가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성두라 하였다.

 

넓은 신성리 비포장임도가 지나는 곳에서 잠시 쉬면서 음료수 한모금 마시고 구제봉 2.2 Km 방향의 능선으로 진입하니 이곳 역시 굵은 소나무 사이로 잡목들이 우거져 보이는데 그 사이로 뚜렷한 등로를 정비해 놔 오르막 등로인데도 편안하게 올라가는 시간이다.

한동안 잘 정비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다 보니 여전히 물집이 생긴 발가락과 사타구니 양쪽이 쓸리면서 고통이 밀려 와 준비한 약품으로 사타구니만 치료를 하고 오르니 굵은 소나무들이 보이는 곳 잡목 나뭇가지에 법광님이 산행띠지에 고도를 적어 둔 도상 622.5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지난 해 신산경표 상 전지맥 완주를 완주한 법광님도 이곳 삼신지맥은 지난해 봄에 지났음을 알리고 다시 평이하게 이어지는 굵은 소나무와 관목의 활엽수들이 혼재되어 있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잘 정비된 등로 위에 태풍으로 꺽인 많은 나뭇가지들이 쌓여 있어 태풍의 위력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살펴보니 이곳 역시 방금 전 만났던 비포장임도처럼 좌측의 적량면 서리와 우측의 악양면 신성리의 경계지점인 무명안부이다.

 

면 경계를 나누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진입하니 이곳 역시 잘 정비된 등로가 이어지고 그 등로에는 파란 나뭇가지들이 꺽여 쌓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그렇게 잠시 더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선답자의 산행띠지가 걸려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굴고 있는 587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직진의 좌측 등로가 더 발달되어 있지만 마루금은 우측 잡목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할 길주의 지점이다.

우측 잡목 방향으로 내려가니 다시 뚜렷한 등로가 살아나고 곧이어 관목의 활엽수들이 보이는 무명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은 여전히 적량면 서리지역이고 우측은 악양면 신대리 지역으로 바뀐 경계지점이다.

 

무명안부 지나 다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타고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혼재되어 있는 뚜렷한 등로로 오르니 굵은 참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평이한 등로에 도착을 하고 가지치기가 되어 있는 굵은 소나무를 지나 무명안부를 통과하니 갈림삼거리에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이제 진행해야 할 방향인 좌측으로 구재봉까지 1.5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데 지나 온 방향으로는 휴양관 1.1 Km 란 거리 표시가 되어 있어 지도를 확인해 보니 적량면 서리에 있는 구재봉 자연휴양림의 숙박시설을 휴양관이라 부르는 듯 보인다.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이곳 역시 굵은 소나무 사이로 관목의 활엽수들과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사이로 잘 정비된 뚜렷한 등로가 펼쳐져 있는데 그 등로 위에는 강한 태풍의 영향으로 잔가지들이 부러져 쌓여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 온다.

나즈막한 안부 같은 곳을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법광님의 띠지가 걸려있고 그 띠지에는 고도가 적혀 있는 도상 633.9봉에 도착을 하는데 굵은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로 고사목도 보이는 봉우리 같지 않은 능선 상 봉우리이다.

 

법광님의 산행띠지가 걸려있는 도상 633.9봉 지나 잠시 더 진행하니 이제 진행 방향으로 구재봉까지 1.2 Km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고 큰 고도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넓고 뚜렷한 등로를 타고 조금은 속도를 내보지만 성치 않은 발가락과 사타구니로 인해 전혀 속도가 나질 않는다.

잠시 후 현위치 구재봉-11이란 이정목을 지나고 조금 ㄷ 전진하니 잡목과 잡풀들이 제거된 뚜렷한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적량면 서리와 악양면 신대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무명안부이다.

 

무명안부 지나 오후 6시 20여분이 지나면서 산속은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며 사진 한장 남기기도 쉽지 않은 환경이 되었다.

잠시 후 나즈막한 언덕 넘어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시 현위치 구재봉-10이란 이정목과 그 옆 우측으로 상신대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는 도상 삼화실재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다.

하동군 적량면의 동리(東里)와 서리(西里)의 7개 마을을 합하여 삼화실이라고 하는데 동촌마을은 존티재에서 넘어와 삼화실의 첫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삼화실 동촌마을에 있는 구삼화초교에 지리산둘레길 안내센터를 리모델링할 계획이며 준비가 끝나면 게스트하우스와 편익시설이 갖추어져서 이용객들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신대마을은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신대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신대리의 위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상신대와 구재봉 자연휴양림 갈림사거리 안부인 삼화실재를 지나 굵은 활엽수가 보이는 뚜렷한 등로를 타고 잡목의 방해없이 진행하니 아직 일몰시간은 아닌데 날씨가 흐려 산중에는 벌써 어둠이 밀려오며 사진 한장 남기는 시간도 주의가 필요하다.

다시 평안하게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이제 구재봉까지 0.3 Km 남아 있고 지나 온 방향과 좌측으로 구재봉 자연휴양림 휴양관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와 함께 현위치 구재봉-9이란 이정목도 서 있는 무명안부에 도착을 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긴다.

이제 헤드렌턴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사진 한장 남기기 어려워 보여 잠시 배낭 내려 헤드렌턴을 꺼내 사진을 담을 때 사용하기로 하고 다시 출발한다.

 

이정표와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무명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활공장과 미동마을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이제 구재봉까지는 150미터 거리라는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그곳을 지나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헤드렌턴으로 등로를 밝히며 걸어 오르니 목책이 끝나는 지점에 바위봉이 나타나는데 한쪽으로는 눈사람을 닮은 바위가 보여 사진에 담아본다.

 

바위암릉에서 잠시 북북동쪽으로 지나 온 마루금을 살펴보니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안개가 드리워진 삼신지맥 마루금이 아련한 추억으로 쌓이는데 다만 또렷한 풍경과 조망이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바위 바로 뒤로 삼화실재와 신성리 비포장임도의 무명안부 지나 동점재로 이어지는 마루금 뒤로 안개인지 구름이 덮혀 있는 칠성봉이 솟아 있는데 그 뒤로 보여야 할 삼신봉과 지리산 주능선은 더 이상 박무와 연무로 인해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어 다음에 기회되면 꼭 한번 다시 들려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바위암릉에서 지나 온 방향으로 칠성봉까지 이어지는 마루금을 확인하고 사진에 담은 후 다시 평이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진행 방향으로 신촌재를 이정표에서는 먹점재까지 2.0 Km 남아 있다는 거리와 방향 표시가 반갑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팔각 화강암 기둥 6개가 원형으로 박혀있는 지점 지나 도상 해발 773.7미터의 구재봉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화강암 정상석에는 해발 767.6미터의 구재봉으로 표기되어 있고 그 정상석 위로는 커다란 뚜껑에 덮혀있다.

구재봉(773.7m, 龜在峰 또는 鳩在峰 표석, 구재정 정자, 무인산불감시카메라)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악양면 신대리 일대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768m미터로서 옛 이름은 구자산(龜子山)인데 구자산은 구재산(봉)으로 발음이 바뀌었다.

구재봉의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인 악양뜰이 펼쳐져 있고 산의 동북쪽으로 악양천이 흘러들어와 서남쪽으로 빠져 섬진강에 합류한다.

하동지에 구자산은 군의 북쪽에 있고 지리산으로부터 왔으니 곧 군의 진산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하동의 읍터(邑基)가 양경산에서 옮겨온 후로 구자산을 진산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선지지자료에는 구자산(龜玆山)으로도 표기되었다.

구자산이라는 지명 유래에 대하여 산의 형상이 거북이가 기어가는 모습에 연유되었다거나 혹은 산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무인산불감시카메라를 찾아 보지만 벌써 짙은 어둠이 내리면서 가까이 있는 구조물도 분간하기 쉽지 않아 포기하고 곧바로 구재봉 정상을 출발한다.

 

구재봉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는 정상을 내려가니 진행 방향으로 문암정까지 1.0 Km 거리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잡풀들이 무성한 공터를 통과하니 등로는 다시 좌측의 바위 옆 안전목책과 로프가 보이는 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며 이어진다.

잠시 더 내려가니 안전목책과 로프가 끝이나고 안부 지나 잠시 완만하게 오르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뚜렷한 우측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희미한 잡목 능선을 타고 진행을 해야 할 길주의 지점이다.

좌측 잡목 능선으로 진입하니 다시 사각나무계단이 길게 설치되어 있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지리산 둘레길이란 이정목과 구재봉자연휴양림 가는 화살표 안내판이 서 있는 무명안부에 도착을 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지리산둘레길 중 경상남도 하동군 지리산 둘레길 하동 구간은 총 7개 구간으로 78.9 Km에 이르는데 전체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 도(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의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에 21개 읍과 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74 Km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環形)으로 연결하였는데 하동군 옥종면 위태 마을에서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송정 마을까지 이어지는 총 길이 78.9 Km에 이르는 길 중에서 하동에는 7개 구간이 있다.

지리산 둘레를 잇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는 동시에 관광 명소로 만들기 위해 산림청이 사단 법인 숲길과 함께 2007년부터 5년 계획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개통하였다.

 

지리산둘레길이란 이정목이 서 있는 무명안부 지나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자마자 등로 좌측으로 725봉이 있지만 확인도 못하고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진행하니 좌측으로 나즈막한 돌담이 길게 나타난다.

그 돌담 등로를 지나니 다시 오르막 사각나무계단이 길게 설치되어 있어 힘들게 오르는데 다행스럽게도 발가락 물집과 사타구니 쓸림으로 인한 고통은 많이 사라져 꾸준히 오르니 굵은 소나무와 고사목이 보이는 633.9 무명봉에 도착을 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무명봉을 지나니 구재봉 현위치 하동6이란 이정목이 보이고 완전한 어둠속에 특이할 것 없는 평이한 능선 등로를 따르니 굵은 벗나무 가지에 독도님과 법광님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어 확인해 보니 고도를 적어 놓은 도상 596.5봉에 도착을 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긴다.

지도를 보니 오늘 삼신지맥 마루금 산행으로는 마지막 봉우리로서 잠시 후 만나는 비포장임도의 신촌재 또는 먹점재에서는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흥룡리 먹점마을까지 길게 걸어 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안심하기 이르지만 그래도 그 끝이 보인다는 사실에 조금은 힘을 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도상 596.5봉 지나 커다란 바위와 관목의 활엽수가 보이는 무명봉도 통과하니 구재봉 현위치 하동7이란 이정목이 다시 보이고 약간의 바위지대를 지나 구재봉 현위치 하동8이란 이정목을 통과하니 드디어 사각나무계단을 따라 비포장임도 가장자리에 이정표와 지리산둘레길이란 이정목이 서 있는 오늘 삼신지맥 마루금 산행의 종착지인 신촌재 일명 먹점재에 도착을 한다. 

신촌재는 하동군 적량면 우계리에 있는 신촌마을이란 자연마을 중 한곳에서 불려진 이름으로 신촌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삼화실과 대축 구간에 있는 마을로 우계천을 옆에 끼고 농로를 따라 걸어 올라오다 보면 만나게 된다.

이곳은 1700년경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신촌마을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마을 입구에 물레방아촌 신촌이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기다란 돌 사이에 물레방아가 있고 그 옆으로 나무로 만든 쉼터 가운데에 지리산 성모상이 있어 오가는 이들이 이곳에 들러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물레방아 뒤편 마을회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정자가 있어 쉬어가기에 좋으며 신촌마을에서 우계저수지를 거쳐 서당마을까지는 둘레길 중에서 산책길 수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수월한 편이다.

임도 건너 내일 새벽에 올라야 할 들머리를 확인하니 좌측으로 화장실이 보이고 능선 입구에는 먹점골매실농장 안내판과 지리산둘레길 이정목 및 민박 안내판들이 보여 사진에 담고 잠시 물 한모금 마시고 우측인 서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마지막 먹점마을로 향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무심으로 걸어가니 다시 발가락에 생긴 물집에서 고통이 가중되기 시작하고 쓸린 사타구니 상처에서도 고통이 시작되기 때문에 속도를 늦춰 천천히 진행한다.

한동안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먹점마을의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벤취들이 설치된 지점을 지나 임도 통행제한 안내판을 통과하자마자 우측으로 마지막 민가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가 나타난다.

 

마지막 민가 갈림삼거리를 지나 이제부터 흥룡리 먹점마을의 민가들 가까이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매실로 유명한 것을 알리듯 매실을 광고하는 안내판과 띠지들이 자주 보이고 있다.

잠시 후 마지막 갈림삼거리의 이동통신탑에서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한동안 걸어가니 드디어 먹점마을회관 앞 매화골먹점길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새벽에 주차시킨 애마에서 배낭 정리하고 등산복 상의를 갈아입은 후 준비한 물로 간단히 씻고 어젯밤 하루 묵었던 모텔고성을 예약하고 천천히 하동읍으로 들어가니 저녁 9시가 가까워진 시간이다.

먹점마을은 묵점이라고도 하는데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먹이 많이 생산되었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며 특히 먹점마을은 봄이 되면 온 마을이 매실꽃속에 묻히게 되어 외부관광객의 사진촬영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먹점마을은 하동읍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약 10 Km 거리의 구자산 중턱에 자리한 산골마을이며 봄이면 하얀 매화꽃들로 별천지 세상이 된다.

먹점마을의 매화나무들은 광양처럼 대규모 농장의 위엄을 자랑하거나 관광객을 위해 잘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시골마을 사람들의 질박한 삶의 향취가 베어난다.

먹점마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이 지점에서 둘레길은 마을을 들르지 않고 바로 먹점재와 미동고개로 이어진다.

먹점재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을 수 있는데 저 멀리 섬진강이 보이는 곳으로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이다.

등산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가파른 산길을 좋아한다면 구제봉에서 먹점 등산로를 따라 걸어도 된다.

지리산 둘레길의 맛은 인근의 등산로나 걷는 길을 찾아 걷기 계획을 세우면 자신만의 지리산 둘레길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모텔고성에서 샤워와 환복을 하고 가까운 곳에서 주인장이 함께 운영하는 엉터리해장국 식당으로 가 선지국으로 허기를 달래며 시원한 맥주 한병으로 하루를 마감하니 모든 세상이 이 산객의 것이 되었다.

다시 모텔로 돌아 와 잔무를 처리하고 사진까지 정리한 후 잠자리에 드는데 쓸린 사타구니와 발가락 물집이 심해 내일 산행이나 가능할지 걱정이 앞서지만 내일 새벽에 일어 나 도저히 산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아쉽지만 서울로 귀가한 후 다음에 다시 한번 더 내려오기로 하고 마음 편히 하룻밤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 보니 사타구니는 약이 좋아서 그런지 거의 완벽하게 좋아졌고 발가락 물집은 아직도 고통이 있지만 산행을 하가에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아 남아 있는 삼신지맥 산행도 마무리를 하고 올라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기대했던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은 구경도 못하고 최악의 산행 조건에 예상보다 훨씬 힘들고 어렵게 짙은 어둠속에 산행을 마무리했지만 무탈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으로 또 하루의 시간을 고운 추억으로 남겨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