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맥산행(완료)/기룡지맥(낙동.완)

기룡지맥 마지막 제2구간 영천시 오미동에서 신녕천 합수점까지 산행후기

칠갑산 사랑 2022. 4. 2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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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영천시의 기룡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일자 : 2022년 04월 23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맑고 화창한 초여름 날씨에 무덥고 약간의 박무가 있었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 13도에서 영상 23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죽영천시 오미동 삼귀마을-지하통로(28번 4차선 포장도로 통과)-영일정공 묘지들-186.3 무명봉(참나무 관목)-뚜렷한 등로-벤취쉼터1 갈림삼거리(우측)-비포장임도-36번 송전탑-로프 내리막등로-185.9 무명봉(183봉, 운동시설들과 벤취쉼터들) 이정표(청구아파트, 창신아파트, 316전경대)-176.9 작은돌탑 무명봉-176.3 삼각점봉 갈림삼거리(망가진 별빛 산책로 이정표)-시멘트 포장도로-군부대사격장 경고판-176.3 삼각점봉(이정판, 영천310 삼각점)-갈림삼거리 복귀-167.6 작은돌탑 무명봉-그물망 비포장임도(좌측 조망)-164 사각탁자 무명봉(동부동 행정복지센터 플랭카드)-홀스파크(말과 공원)-길주의(갈림삼거리 우측)-갈림삼거리(우측) 이정표(삼밭골길 0.7 Km, 창산길 창신APT 3.8 Km)-136.2 사각탁자 무명봉-동물 생태이동통로(4차선 포장도로 통과)-길주의(갈림삼거리 우측)-무명안부-길주의(갈림삼거리 좌측, 금곡님 띠지)-영천이씨 묘지들-시멘트 포장도로-야사동고개(야사오미길 2차선 포장도로, 영천이씨시조공제단소)-묵은 밭경작지-밭경작지-능선진입-그물망 밭경작지-142 무명봉(법광님 띠지)-운동시설과 벤취쉼터들-비포장임도 오거리(우측)-그물망 밭경작지-155.4 삼각점봉 갈림삼거리-155.4 삼각점봉(155.7봉, 이정판, 건설부 삼각점)-갈림삼거리 복귀-갈림삼거리(좌측)-비포장임도(좌측 밭경작지)-길주의(전봇대 갈림삼거리 우측)-무명묘지2-무명묘지1-뒷고개(1차선 포장도로)-천문로 4차선 포장도로(영천중학교)-높은 철망 우회-능선진입-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철망-운동장로 2차선 포장도로-절개지 능선진입-운동장로 2차선 포장도로-능선진입(무한띠지)-146.5 삼각점봉(이정판, 인식불가 삼각점, 마현산 띠지)-경주김씨 묘지-무명묘지2-마현산공원 체육시설 안내판 갈림사거리(천문로 2차선 포장도로와 운동장로 2차선 포장도로 및 마현산길 2차선 포장도로) 역사문화탐방로 이정표(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170m, 근대역사길 금호강 1.29 Km, 한방향토길 한의마을 1.05 Km, 충효의길 둘레길)-시멘트 포장도로(우측 태양광 발전시설)-육각정자와 민족통일기원비-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체험관-시멘트 계단-영천지구전적비-월남전 참전기념탑-역사문화탐방로 코스안내판-영천지구전승비-하근찬 소설가 수난이대 표지석-마현산공원(마현산 설명판)-영천 역사문화탐방로 졸합안내판-이정표(충혼탑 250 m, 전투메모리얼파크 100 m와 전승비 100 m)-영천배수지-마현산길 시멘트 포장도로(우측 영천시민운동장)-역사문화탐방로 이정표(근대역사길 금호강 710 m, 영천시민운동장 140 m,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380 m, 영천한의마을 1.63 Km)-서명사-충혼탑-영천전투 공원입구-왕평길 1차선 포장도로-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이정표(충혼탑 130 m, 영천시민운동장 320 m)-새말리길 골목길-운동장로 4차선 포장도로-영천시민운동장입구 버스정류장-서문육거리(장수로와 최무선로 통과)-수원지길 1차선 포장도로-갈림삼거리(좌측)-사각정자-성내새길 시멘트 포장도로-나루터길 시멘트 포장도로-폐철길-구터2길 시멘트 포장도로-이정표(하근찬 징검다리 610 m, 충효의길 2,38 Km, 폐철길 260 m, 신녕천 고향의강 1.43 Km)-고공철로-금호강 표지판-하근찬 징검다리-신녕천 합수점(유봉지맥 조망)-산행종료

산행거리 : 10.59 Km (영천시 오미동 삼귀마을에서 신녕천 합수점까지)

             지맥산행 : 23.82 Km (모릿재터널 위 마루금에서 청옥산 정상까지)

             접속구간 : 00.85 Km (00.48 Km-오미동 삼귀마을에서 28번 4차선 포장도로까지와 00.37 Km-신녕천 합수점에서 나루터길까지) 

산행트랙 :

20220423 기룡지맥 제2구간 오미동-신녕천 합수점.gpx
0.12MB

산행시간 : 03시간 01분 (05시 51분부터 08시 53분까지)

교통 및 숙박편 : 갈때 - 04시 00분 영천시 정양호텔에서 기상

                            04시 30분 근처 편의점에서 누룽지와 햇반 및 김치 구매 후 호텔 복귀

                            05시 00분 아침식사 후 신녕천 합수점을 향해 정양호텔 출발

                            05시 25분 신녕천 합수점 근처의 나루터길에서 카카오택시를 호출해 오미동으로 출발

                            05시 51분 영천시 오미동 삼귀마을에서 하차 후 산행 준비 후 출발 (8,000.-원)

                    올때 - 08시 58분 신녕천 합수점을 다녀 와 나루터길에서 산행종료

                            09시 10분 배낭 정리 후 곧바로 귀가

기룡지맥이란?

기룡지맥은 보현지맥  보현산(1123.9봉) 동쪽 1.64 Km지점에서 분기하여 갈미봉(786.5봉), 외미기재, 기룡산(965.5봉), 시루봉, (익산과 포항간 고속도로), 28번 국도를 건너 신령천이 금호강(자호천)에 합수하는 영천시 오수동에서 유봉지맥과 마주보며 끝나는 도상거리 32.2 Km 되는 산줄기로 신령천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고속도로 같은 마루금을 따라 영천시의 문화와 역사를 탐방하며 여유롭게 또 하나의 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즐겁게 귀가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산경표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이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인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이론 역시 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내려진 올바른 해답이 없기 때문에 이 산객은 옛 문헌에 나타난 이론인 관아를 기준으로 설정된 산줄기를 그 끝으로 하고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관아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기룡지맥 산행을 한 후 이 산행후기를 기술하면서 경상북도 영천시와 그 주변 지자체에 수록된 지명유래 및 네이버의 지식백과, 다음의 백과사전, 산림청,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된 부분들이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혹시라도 지적재산권에 저촉이 되어 삭제나 변경이 필요한 경우 연락주시면 언제라도 즉시 삭제 및 수정해 드릴 수 있음도 알린다.

 

몇군데 지점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등로가 너무 좋아 어제 첫구간을 길게 진행하면서도 너무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게 28번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하통로 지나 영천시 오미동 삼귀마을에서 마무리를 했기에 오늘은 여유가 생겨 새벽에 조금 늦게 진행을 한다.

진행하다 보니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봉우리 하나 없이 큰 고도차이도 느끼지 못하는 동네 산책로 같은 등로를 타고 빠르게 진행하면서도 조망처에서는 발걸음 멈추고 많은 사진과 추억을 남기다 보니 오랫만에 아침 9시 전후로 산행이 마무리되고 토요일인데도 집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라 가족들과 즐거운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동안 지독한 가시잡목들이 우거진 보이지 않는 등로에서 헤매다가 산책로 같은 등로를 따라 진행하다 보니 모든 지맥 마루금이 기룡지맥만 같으면 좋겠다는 어웅한 생각도 해 본 시간이었다.

 

여유를 가지고 새벽 조금 늦게 산행을 시작했는데도 등로가 워낙 좋아 발걸음이 덩달아 빨라져 몇군데의 잡목 구간을 빠져 나와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와 영천시민운동장 넘어 기룡지맥 날머리인 신녕천 합수점과 그 건너 지난해 마무리를 한 유봉지맥의 날버리를 확인할 수 있는 충혼탑 앞 계단에 도착을 해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니 이제 아침 8시 20여분도 되지 않았다.

이제 영천시내를 타고 우측 옆으로 보이는 유봉지맥의 마지막 산줄기 앞으로 흐르는 신녕천과 좌측으로 흘러가는 금호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이틀간 진행한 기룡지맥이란 이름의 지맥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남아 있는 구간도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 시간이다.

 

드디어 이틀간 걸어 그 산줄기의 마지막 지점인 좌측의 금호강과 우측의 신녕천이 만나 더 이상 산줄기를 따라 걸을 수 없는 합수점에서 기룡지맥 산행을 마무리하며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우측으로 솟아 있는 유봉지맥 마지막 합수점도 확인하다 보니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산행 거리와 시간이다.

그래도 이렇게 새로운 또 하나의 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뒤돌아 나가는 시간은 늘 자신을 뒤돌아 보고 또 새로운 산줄기를 찾아보는 시간이기에 노력에 대한 희열과 그 결과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여관이나 모텔에는 뜨거운 온수기와 전자렌지가 비치되어 있어 식사 시 편리한데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가까운 편의점에서 누룽지와 햇반 그리고 김치를 구매해 호텔로 돌아 와 필요한 물과 전자렌지에서 데워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산행 날머리인 신녕천 합수점 가장 가까운 곳에 애마를 잘 주차시키고 카카오 택시를 부르니 5분여가 지나 택시가 도착을 한다.

택시를 타고 어제 산행을 마무리한 오미동 삼귀마을에 도착을 하니 새벽 5시 50여분이 지나고 산행 준비랄 것도 없이 배낭 둘러메고 곧바로 기룡지맥 마지막 제2구간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 오미동 삼귀마을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삼귀마을에 대한 자료는 오미동의 자연마을 중 한곳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 오미동을 찾아 본다.

오미동은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동으로 조선 후기 영천군 명산면(鳴山面)에 속한 지역이고 외머리 또는 오미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삼귀리(三歸里)와 녹전리(錄田里)의 일부를 통합하여 오미리가 되어 화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37년에는 영천읍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영천읍이 시로 승격하여 영천시 오미동이 되었다가 1995년 영천군과 영천시가 통합되어 도농복합형의 영천시가 되어 영천시 오미동이 되었는데 오미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중앙동(中央洞) 관할하에 있다.

도동고개와 큰골고개 등의 고개, 도봉동(道峯洞)과 삼귀 및 절골 그리고 점골 등의 자연마을, 삼귀들과 오밋들 등의 들판, 골짜기인 진골 등이 있는데 절골마을은 사찰이 있었다고 해서 점골은 도요지가 있었다는 데 명칭이 연유한다.

유적으로는 두산정(斗山亭)이 있는데 김응상(金應商)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이 지은 정자이다.

 

오미동 삼귀마을의 삼귀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동쪽 방향으로 걸어가니 금새 28번 4차선 포장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나타나고 그 통로를 지나 조금 더 전진하니 콘크리트 수로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좌측 위로 보이는 28번 4차선 포장도로 위로 올라 그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드디어 어제 기룡지맥 산행을 마무리한 또 다른 지하통로와 연결되는 지점에 도착을 해 우측 도로 아래로 내려가니 28번 4차선 포장도로를 통과한 지하통로 앞에 도착을 해 본격적인 기룡지맥 마지막 제2구간 산행을 시작한다.

 

지하통로 앞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오르니 영일정씨 묘지들이 언덕 상단부까지 길게 보이고 그 묘지 사이를 타고 올라 마지막 묘지 뒤로 보이는 약간의 잡목 능선으로 진행하니 굵은 참나무 사이로 제법 키가 큰 잡목들이 우거져 진행에 어려움을 느낀다.

약간의 잡목들과 잡풀들 그리고 등로에 쓰러져 있는 고사목들을 피해 천천히 오르니 관목의 아카시아 군락지 넘어 파란 잎이 무성하게 피어난 관목의 참나무가 서 있는 186.3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계속 산행을 이어간다.

 

무명봉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다시 비포장임도 같은 뚜렷한 등로가 펼쳐지고 이제부터 편안하게 동네 산책하듯 걸어가니 다시 언덕같은 오르막 등로를 타고 넘어가니 공터에 벤취쉼터 하나가 설치된 지점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부터 등로는 더욱 넓은 산책로가 펼쳐져 등산이 아닌 산책을 하듯 걸어 보는 시간이다.

멋진 리끼다 소나무 등로를 따라 고도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걸어가니 36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에 소나무들이 보여 사진에 담으며 오르니 언덕 넘어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데 굵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그 로프등로를 내려가니 등로는 우측인 서쪽으로 크게 꺽여 진행되고 잠시 후 등로 좌측으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이 보여 지도로 확인해 보니 영천시 망정동과 야사동 방향의 신설된 아파트들이다.

 

등로 좌측으로 영천시의 거대한 신설 아파트 단지들을 조망하고 계속 이어지는 넓은 등로를 따라 전진하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좌측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동네 주민 한분이 올라 와 운동을 즐기고 있는 많은 운동기구들과 벤취쉼터들이 보이는 185.9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 산객이 가지고 있는 지도에는 183미터봉으로 표기된 봉우리이다.

그 운동기구가 보이는 봉우리에서 우측인 남서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며 산행을 이어간다.

 

여전히 넓은 비포장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아름다운 소나무 등로가 펼쳐져 있어 편안하고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우측에 작은 돌탑이 보이는 무명봉을 통과한다.

이어지는 큰 고도차이가 없는 평이한 임도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등로 우측 앞으로 마루금에서 벗어나 있는 176.3 삼각점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 보여 사진에 담고 조금 더 전진하니 이정표의 표지판이 사라진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우측으로는 176.3 삼각점으로 갈 수 있는 삼거리로서 이정목에는 별빛산책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갈림삼거리에서 고민할 것도 없이 우측 내리막 등로를 타고 빠르게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지명을 보니 이곳도 여전히 영천시 오미동 지역이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일반 등로로 변해 있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군부대 사격장 경고판이 나타나고 사진에 담고 계속 흐릿한 등로를 찾아 잡풀 사이로 오르니 영천310이란 삼각점이 박혀있고 그 뒤 굵은 소나무에 준희님이 이정판을 걸어 둔 176.3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을 남기고 곧바로 뒤돌아 갈림삼거리로 복귀한다.

 

별빛산책로라는 부서진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삼거리로 복귀해 다시 몇발자국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작은 돌탑이 있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이번에는 우측 등로를 타고 진행을 이어간다. 

넓은 비포장임도를 타고 산책하듯 걸어가니 동네 주민들이 새벽 일찍 산책을 나와 자주 만나게 되니 그 동안 배낭속에 넣어 뒀던 마스크를 꺼내 착용하고 조금 더 진행하니 등로 좌측 그물망 넘어 사과과수원과 민가들 그리고 그 뒤 남동 방향으로 방금 전 봤던 우로지자연생태공원 주변과 야사동 방향으로 드높게 올라간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좌우측으로 펼쳐져 있고 그 좌측 가장자리 방향으로는 이제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등로 좌측으로 영천시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을 살펴보며 사진에 담고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임도를 따라 가끔 산책나온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며 전진하니 여전히 굵은 소나무 등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쓰레기 수거를 알리는 커다란 플랭카드와 그 옆으로 사각탁자가 보이는 164 무명봉에 도착해 사진에 담고 다시 좌측으로 크게 꺽어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좌측인 동쪽 방향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그 로프 넘어 커다란 건물들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 용도를 궁금해하며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쉼터와 특이하게 생긴 마차가 보이고 그 뒤 저 멀리로는 울타리가 쳐진 넓은 공터가 보여 지도로 확인해 보니 홀스파크로서 의미는 말과 공원의 합성어이고 이용 가능한 체험은 승마와 마차타기 및 먹이주기 그리고 키즈카페 등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는 날공원이다.

 

홀스파크를 확인하고 둘러 본 후 남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우측의 소로를 따라 능선 방향으로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도 같은 등로가 보이는데 동네 주민이 강아지 두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어 조심스럽기만 하다.

주민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합수해 좌측에 서 있는 이정표를 사진에 담고 우측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니 소나무 등로 좌측의 공터에 플랭카드와 사각탁자가 설치되어 있는데 방금 전 강아지 두마리와 올라 온 주민이 쉬고 있어 사진만 남기고 출발한다.

 

갈림삼거리 지나 사각탁자를 사진에 담고 이어지는 리끼다 소나무들이 보이는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갑자기 눈 앞으로 야자매트가 깔려있는 동물생태통로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올라 좌우측을 살펴보니 통로 아래로는 최근에 생긴 듯한 이름없는 왕복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다.

생태통로 좌측인 동쪽으로는 야사동 방향의 아파트 단지들과 우로지자연생태공원 근처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도로 양쪽으로 나즈막하게 펼쳐진 야산들이 보이고 있다.

 

동물생태통로를 통과하자마자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좌측의 등로가 더 넓고 뚜렷하지만 마루금은 우측의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소로의 등로를 따라 내려가며 진행을 해야 한다.

나즈막한 안부 지나 언덕을 넘으니 굵은 아카시아나무 2그루가 서 있는 132.7 무명봉에 도착하고 사진에 담은 후 완만하게 내려가니 일직선의 소나무 등로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시 후 만나는 갈림삼거리에서는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는 좌측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해야 할 길주의 지점이다.

 

좌측으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올라 언덕을 넘으니 잘 관리되고 있는 영천이공 묘지들이 보이는 지점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야사고개에 도착을 한다.

야사고개는 공식명칭이 아니고 이곳 지명인 야사동을 차용해 임의로 붙여진 이름처럼 보여 야사동을 찾아보니 야사동(1차선 포장도로)은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동으로 조선 후기 영천군 내동면에 속하여 야사골 또는 야사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보목동 일부를 통합하여 야사리가 되어 영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37년 7월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영천읍 야사리가 되었다.

1981년 7월 영천읍이 시로 승격하여 영천시 야사동이 되었고 1995년 영천군과 영천시가 통합되어 도농복합형의 영천시 야사동이 되었으며 야사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동부동 관할하에 있다.

자호천과 고경천이 흐르며 죽은나무골, 삼밭골, 분통골, 보목골(일명 버들골), 화지대 등의 자연마을과 골짜기인 새못골 및 바위인 탕건바위 등이 있다. 버들골이라고도 불리는 보목골마을은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있었다는 데서 죽은나무골은 가뭄으로 나무들이 모두 고사하였다는 데서 분통골은 장마철이면 못의 둑이 무너져 주민들이 분통이 터졌다는 데서 탕건바위는 탕건처럼 생겼다는 데서 화지대마을은 화전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명칭이 연유한다.

공공기관으로는 동부동사무소가 있으며 상설시장으로는 제법 큰규모의 문화시장이 있고 사찰로는 용화사가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영동중학교, 영동고등학교, 영천고등학교 등이 있다.

 

야사고개에서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인 북서 방향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도로 좌측으로 들머리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오르니 잡풀지대 지나 밭경작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공유지에 누군가 좁은 밭을 일궈 사용하는 듯 보이는 풍경이다.

다시 밭둑을 타고 넘어 오르니 조금 더 넓은 밭경작지가 나타나고 그 밭경작지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굵은 참나무와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언덕 넘어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각 밭경작지마다 그물망이 설치된 밭경작지 사이로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그 그물망이 설치된 밭경작지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야사동의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천시청 방향인 남동쪽으로는 구름속에 숨어 빛내림을 강하게 보내고 있는 태양 아래 영천시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천시내를 살펴보며 계속 이어지는 밭경작지 사이로 나 있는 밭둑을 따라 진행하니 갈림사거리 지나 밭경작지가 끝이나는 지점에서 언덕같은 능선으로 들어 소나무와 잡목들이 혼재되어 있는 등로 좌우측의 풍경들을 사진에 담으며 진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법광님의 산행 띠지가 걸려있는 142 무명봉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많은 동네 주민들이 올라 와 운동과 담소를 즐기는 많은 운동기구들이 설치된 장소에 도착을 해 다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그곳을 빠져 나간다.

 

운동기구들이 보이는 지점을 지나며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을 살펴보며 전진하니 갈림오거리에 도착을 하고 우측인 북서 방향으로 나 있는 소로의 등로를 따르니 또 다시 그물망이 설치된 텃밭들이 나타나고 그 텃밭 사이로 보이는 등로를 따르니 텃밭에서 고사리와 나물들을 채취하는 주민들의 모습들도 보이고 진행 방향 우측 앞 저 멀리 잠시 후 올라야 할 155.7 삼각점봉이 살짝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한동안 그 그물망이 설치된 텃밭 경작지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그 텃밭이 끝이나고 다시 능선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능선으로 들어가자마자 갈림삼거리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마루금은 좌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을 해야 하지만 우측으로 155.4 삼각점봉을 잠시 다녀오기 위해 고민도 없이 우측으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오른다.

 

우측으로 오르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좌측 등로를 따르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보여 이제는 좌측으로 걸어가고 잠시 후 나타나는 갈림삼거리에서는 우측의 언덕 방향으로 걸어 오르니 금새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과 그 뒤 굵은 참나무에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155.4봉에 도착을 해 사진과 추억 한장 남기고 곧바로 갈림삼거리로 뒤돌아 내려간다.

 

마루금과 접속되는 갈림삼거리로 복귀해 남쪽과 남서방향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임도를 따라 진행하니 굵은 소나무 사이로 파란 잎새들이 돋아나는 잡목들이 혼재되어 풍경들이 눈에 들어 온다.

계속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곧이어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우측의 능선 방향이 정상 마루금으로 착각해 들어갔다 나와 좌측의 밭경작지가 보이는 방향으로 진행을 이어간다.

 

좌측으로는 밭경작지를 두고 우측으로는 나즈막한 야산이 보이는 사이로 나 있는 넓은 비포장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밭경작지에서 농부 한분이 밭고랑을 만들고 이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고구마을 심으려고 하는데 너무 가물어 걱정인데 몇일 내 비가 내린다고 해 농사를 짓기 위해 밭고랑을 만들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고 있어 인사 드리고 진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밭경작지가 끝이나고 언덕으로 오르니 좌측으로 전봇대거 보이는 곳에서 다시 갈림삼거리가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좌측의 뚜렷한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좁지만 뚜렷한 등로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우측 능선 방향으로 들어가니 무명묘지 2기 지나 또 다른 무명묘지 1기가 보이고 그 묘지를 지나 내려가니 1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뒷고개로 표기된 곳으로 영천시 화룡동에 있는 나즈막한 고개이다.

뒷고개에 관한 자료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인터넷에서 어렵게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보여 인용을 해 본다.

뒷고개는 영천시내를 남북으로 관류하는 국도 제35번이 영천에서 청송방면으로 연결되는 곳에 제법 높은 고개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뒷고개이고 일제가 만든 신작로로서 이 도로는 옛 영천의 객사를 관통한다.

이 고개가 영천을 서북으로 에워싸는 마현산을 관류하며 그 방향 또한 북쪽에서 연유한 듯하다.

원래 이 길은 구불구불하게 산을 감돌아 가지만 지난 1980년대 초에 지금과 같이 산을 잘라 직선화했으며 예전엔 사람들만 이 도로를 왕래하였고 고개 정상에 성황당이 있어 고개를 넘나드는 나그네들의 고단함과 기복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무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높던 고개는 거의 평지로 바뀌어 옛 모습은 유추조차 어렵다.

이 뒷고개는 그동안 북촌 사람들의 수 많은 애환을 간직한 고개로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우니 세월의 흐름이 안타깝기만 하다.

 

1차선 신설 포장도로가 지나는 뒷고개에서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짧지만 드높은 절개지 위로 원 마루금이 지나는데 새로 생긴 천문로 4차선 포장도로가 생기면서 가파른 절개지가 생겨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하기에 그냥 마음 편히 1차선 포장도로를 따르기로 한다.

곧이어 천문로 4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차량 통행이 적고 중앙분리대도 없어 편안하게 도로를 건너는데 건너편으로는 높은 철망과 콘크리트 계단 옹벽이 생겨 도저히 오를 수가 없어 좌측으로 그 높은 옹벽이 끝나는 곳까지 내려가 다시 능선을 타고 올라야 하는 난해한 곳으로 변해있다.

영천시 창구동으로서 좌측인 남쪽으로는 여전히 영천시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우측인 북쪽으로는 도로 양쪽으로 드높은 절개지와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 접근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좌측인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 콘크리트 옹벽이 낮아진 곳에서 능선으로 올라 다시 우측 절개지 상단부로 이동을 하면서 우측인 동쪽을 살펴보니 방금 전 뒷고개에서 내려 온 마루금과 그 우측으로 영천중학교와 고층 아파트들이 보이기 시작해 사진에 담고 능선으로 진입한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지독한 잡목들이 우거져 힘들게 맥잇기 산행을 이어가는데 갑자기 눈 앞으로 철망이 보이고 그 철망 안쪽으로는 예비군 훈련장처럼 생긴 지휘부와 전술 훈련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이 보여 처음에는 영천시 예비군 훈련장이라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진행하면서 보니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체험장이었다.

그 정상에서 사각정자처럼 생긴 지휘소 뒷편에서 내려다 보니 영천시내가 보이고 지휘소 우측 뒷쪽으로는 드디어 기룡지맥과 유봉지맥의 마지막 합수점 근처의 모습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체험장 철망을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다 그 철망과 헤어져 서쪽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에서 올라오는 신설된 운동장로 2차선 포장도로가 바로 지척으로 동행하고 그 도로 좌측 능선으로 진행하니 마루금은 다시 운동장로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반대편으로 보이는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모든 도로와 체험관들이 생긴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선답자들이 걸었던 마루금과는 다르게 많이 변해 버려 정상적인 등로를 찾아 진행하기 힘들게 되었다.

 

운동장로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진입하니 잠시 뚜렷한 등로가 보이더니 금새 지독하게 우거진 잡목드릐 저항이 거쎄 진행에 어려움을 느끼고 그래도 힘들게 잡목들을 헤치고 오르니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 뒤로 준희님의 이정판이 걸려있는 146.5 삼각점봉 정상에 도착을 해 어렵게 사진과 추억 한장 남겨 본다.

사진을 담고 출발하려다 선답자들이 걸어 둔 산행띠지들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 선답자는 이곳을 마현산이라 했는데 실제적으로 진행하다 보니 마현산은 영천지구 전승비 아래 마현산공원이 조성된 곳이었다.

 

힘들게 146.5 삼각점을 확인하고 다시 이어지는 가시잡목들을 헤치고 어렵게 빠져 나오니 경주김씨 묘지가 보이고 그 묘지로 통하는 등로를 따라 조심해 진행하니 무명묘지들 지나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천문로 2차선 포장도로와 운동장로 2차선 포장도로 및 마현산길 시멘트 포장도로가 만나는 교촌동 갈림사거리로서 마루금은 사거리 건너 마현산공원 체육시설 안내판이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진행되고 있다.

 

교촌동 갈림사거리 건너 마현산공원 체육시설 안내판을 우측에 두고 시멘트 포장도로로 진입하니 좌측으로는 역사문화탐방로라는 이정표가 서 있고 살펴보니 진행방향으로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와 근대역사길 금호강 방향과 거리 표시가 보인다.

사진에 담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마루금이 우측으로 휘어지는 곳 좌측으로 팔각정이 보여 잠시 쉬면서 물한모금 마시고 시원스럽게 펼쳐진 영천시내를 조망하고 진행을 이어가기로 한다.

제일 먼저 북쪽과 북동 방향을 살펴보니 천문로 2차선 포장도로 건너 방금 전 힘들게 들렸다 내려 온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체험장을 사진 가운데에 두고 좌측 나즈막한 능선따라 146.5 삼각점봉을 지나 이곳으로 진행된 기룡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사진 우측 가장자리 방향으로는 영천중학교 뒤로 뒷고개 방향의 마루금과 고층 아파트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눈을 동쪽과 남동 방향으로 돌리니 여전히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와 영천중앙초등학교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영천시내의 거대한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서울의 어느 마을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게 펼쳐져 있다.

영천시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350 Km 지점에 위치하고 경상북도의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은 청송군과 군위군이 접하고 있는 경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이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온대몬순기후권에 속하며 동하절기의 기후가 현저히 다른데 하절기에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고온다습하고 동절기에는 대륙성 기후로 인하여 한랭건조하여 한서의 차가 큰편이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에서 출토된 많은 청동기 유물과 유적을 통해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팔각정에서 잠시 더 휴식을 취하는 사이 연세 드신 어르신분들이 산책을 한고 있는 모습들이 보여 다시 마스크를 꺼내 착용하고 우측인 남쪽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출발하려는데 우측으로는 민족통일염원비가 보이고 그 뒷편으로는 녹색철망 넘어 태양과 발전시설들도 보인다.

이제 마음 편히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설명이 아주 잘 되어 있는 운동기구들을 살펴보며 걸어가니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체험장의 넓은 공터와 쉼터 그리고 건물이 보이고 우측 계단을 타고 오르니 영천지구 전적비가 나타난다.

영천지구 전적비는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의 마현산 정상에 있는 6·25 전쟁 때 영천지구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6·25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국군의 총반격의 기회를 마련하고 북진을 할 수 있었던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의미 깊은 유적이다.

일명 영천대첩(1950년 9월 4일~1950년 9월 13일)으로 불리고 있는 영천지구 전투는 9월에 발생하였는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을 감행 후 계속적인 퇴각으로 밀리던 국군은 8월 칠곡과 왜관의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미군은 왜관지구에 제1기병사단을 배치했고 국군은 다부동지구에 제1사단, 신녕지구에 제6사단, 영천지구에 제8사단, 기계에서 안강 지구에 수도사단, 포항지구에 제3사단을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해 조직적인 방어전을 전개했는데 이 방어선은 아군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국가의 국운이 걸린 최후의 보루였다.

UN군은 영천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면 울산과 밀양을 잇는 이른바 데이비드슨 방어선(맥아더 장군이 계획한 경상남북도의 경계 90 Km에 설치한 낙동강 방어선의 후방 방어선)으로 철수할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증강된 5개 연대와 전차를 앞세우고 제2군단(군단장 준장 유재흥) 제8사단 정면으로 돌진해 영천이 함락되었다.

제8사단장 준장 이성가는 영천 북쪽에 21연대와 6사단의 16연대를 배치해 적의 증원 부대와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케 했고 남쪽으로는 7사단 5연대로 하여 아화리(경주시 서면, 영천시 북안면 고지리와 접경 지역)를, 8연대로 유상리(영천시 북안면) 일대를 고수케 해 반격하도록 하고 예하 16연대와 1사단 11연대로 하여금 적의 주력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포항 전선에 참여한 예하 10연대도 긴급히 원대 복귀하여 작전에 참여하였는데 퇴로가 차단당한 적은 포위망 속에서 큰 타격을 입고 일부의 패잔병만이 도주했고 국군은 마침내 10여 일간의 필사의 공방 끝에 빼앗긴 영천을 탈환하여 9월 이전의 낙동강 방어선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영천 전투는 전쟁 발발 후 최초의 국군 대승이었고 또한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 진격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후일 김일성은 영천 전투의 패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는 말을 남겼다 하니 영천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전투였나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

이 영천 대첩에 소요된 아군과 북한군을 비교해 보면 한국군은 병력이 1만 5천 명, 북한군은 1만 2천 명으로 한국군이 많았다.

 

영천지구 전적비를 읽어보고 조형물을 사진에 담은 후 계단을 타고 내려가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우측 옆으로 특이한 모습의 구조물이 보여 들어가 보니 월남전 참전기념탑이다.

그 기념탑을 사진에 담고 나오자마자 역사문화탐방로 안내판이 서 있어 살펴보니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에 대한 설명들이 보인다.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는 한국전쟁 당시 영천전투를 배경으로 한 전시, 추모, 체험장으로 호국안보를 테마로 한 추모와 전시, 영상물과 전투체험시설의 조화로운 운영으로 이뤄지고 있다.

 

역사문화탐방로 코스안내판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운동시설들과 안내판들이 보이고 곧이어 영천지구전승비도 나타난다.

영천지구 전승비는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의 영천문화원 내에 있는 6·25 전쟁 때 영천지구 전투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1950년 9월 4일 파죽지세로 남침한 북한군 제2군단은 일거에 부산을 석권할 목적으로 전략의 요충지인 영천을 점령하고자 최후의 공세를 폈다.

북한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공격해 옴으로써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전쟁 발발 후 70여 일 만인 9월 6일에 남한의 남쪽 지역 영천이 적의 손에 넘어갔는데 이때 국군 제2군단(군단장 유재흥) 장병이 필사적인 공격을 가하여 적을 퇴각시켰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모든 전선에서 국군의 총반격 의지를 되새기게 되면서 북진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계속적인 수호가 어려워지자 잠시 북한군에게 영천을 내어주었으며 이에 분노한 영천의 주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총을 잡고 공격에 가담하여 국군 제2군단은 다시 재정비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50년 9월 9일 총반격을 감행하고 금호강 변에서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고 영천 탈환에 성공했으며 이런 중요한 전투를 기리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비문을 쓰고 1958년 10월 20일 육군 제1205 건설공병단에서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영천지구 전승비는 6·25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국군의 총반격의 기회를 마련하고 북진을 할 수 있었던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의미 깊은 유적이지만 누구나 지나가면서 또 강 건너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높게 세운 이 비는 현재 오래된 나무와 최근의 조경 등으로 가려져 있어 그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

원래의 건비 의미를 되새겨 이에 맞게 주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영천지구  전승비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옆으로 수난이대라는 특이한 조형물과 단어가 보여 살펴보니 이 지역 소설가 하근찬의 단편소설로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었다.

수난이대의 내용을 보면 징용에 끌려 가 한쪽 팔을 잃은 박만도가 6·25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온 아들 진수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 작품은 민족적 수난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6·25전쟁의 참극을 겪어나가는 두 세대의 아픔을 동시에 포착하면서 민족적 수난의 역사적 반복성을 의미있게 함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에 끌려가 비행장을 닦는 노역을 하다가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 박만도는 6·25전쟁에 참전한 아들 진수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바람이 나서 마중을 나가지만 한쪽 다리를 잃고 나타난 아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그 아들을 업고 건널 만큼 안정을 되찾으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수난의 역사가 어떻게 한 개인이나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를 부자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전쟁을 다룬 상당수의 작가들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결합시킬 수 있었던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고 더구나 그것을 부자 2대의 수난사로 연결시킴으로써 한순간의 일회적인 비극이 아니라 민족의 공통적인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두 차례의 전쟁과 2대에 걸친 비극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응축시켜 감동적으로 극화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전쟁이나 역사가 우리 민족에게 남겨준 처절한 아픔과 불행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약간 우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상처를 당한 이들이 상처를 준 역사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버지는 팔을 아들은 다리를 잃었다는 단선적 대비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는 설화성이 첨가됨으로써 이 작품은 우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하근찬 소설가의 단편소설인 수난이대를 확인하고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로 나오니 마현산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어 확인해 보니 마현산(馬峴山)은 경상북도 영천시 문외동 일대에 있는 산으로 영천 시민 운동장 뒷산을 말하며 높이는 155.7m 정도로서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시민들의 휴식처로 널리 이용되어 꽃동산이라고도 불린다.

마현산은 해발고도 155.7m 미만의 낮고 완만한 구릉성 산지 지형으로 산지의 서사면은 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밭과 과수원으로 널리 이용된다.

마현산의 서쪽은 고현천과 신녕천이 합류하여 범람원을 형성하며 동쪽은 금호강(琴湖江)이 이들 지류와 합류하며 마현산을 에워싼다.

마현산 정상은 비교적 넓은 면적이 평평하게 나타나며 등산로뿐 아니라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도로가 형성되어 있다.

마현산 산지 북쪽에는 의머리못이라는 저수지가 있으며 남쪽 중턱에는 청소년 수련관이 서쪽 중턱에는 영통사가 위치한다.

마현산 일대는 근린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인근에 시민 운동장과 수영장 등 각종 체육 시설이 있어서 시민들의 심신 휴식과 체력 단련을 위한 산림 휴양 공간으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한편 마현산 충혼탑과 영천지구 전적비 등의 시설물을 중심으로 영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공원도 조성하고 있는데 마현산 충혼탑은 6·25 전쟁 등 나라를 수호하다 숨진 영천 지역 출신 호국 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3년 시민들의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또한 영천지구 전적비는 6·25 전쟁 당시 영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후세에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1980년 건설교통부에서 건립한 것이다.

 

마현산 설명판을 확인하고 읽어 본 후 다시 나타나는 연천 역사문화탐방로 종합안내판을 보니 이곳 영천 출신을 중심으로 고려때부터 그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전투나 인물을 중심으로 공원을 조성하고 산책로를 새로 개설한 안내판이다.

종합안내판을 지나니 특이하게 생긴 이정표를 지나 도로 좌측으로 영천배수지가 나타나고 그 배수지를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산책하듯 산행을 이어간다.

 

배수지 옆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이곳은 능선의 등로와는 달리 완연한 봄을 지나 성하의 계절린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으로 푸르름을 감상하며 전진하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우측 도로 방향으로는 영천시민운동장과 이어지는 도로이다.

역사문화탐방로란 이정표가 서 있어 확인하니 진행 방향으로 이제 근대역사길 금호강까지는 710 m 거리가 보여 이제 기룡지맥 합수점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이정표로서 사진에 담고 조금 더 걸어가니 눈 앞으로 서명사라는 커다란 글씨가 보이는데 아마도 작은 사찰인 듯 보인다.

 

서명사란 글씨가 보이는 사찰건물을 좌측에 두고 조금 더 전진하여 좌측 시멘트 계단으로 오르니 호국영령봉안당 지나 충혼탑이 나타난다.

영천 충혼탑은 이곳은 6.25 전쟁 등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장렬히 산하하신 영천지역 출신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된 탑으로 치열했던 6.25전쟁 중 영천전투에 대한 설명이 잘 설명되어 있다.

충혼탑 양 옆으로는 생생한 모습으로 6.25 당시의 모습들이 재연되어 있는데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는 모습부터 다부지게 총을 잡고 수류탄을 투척하기 전의 표정 하나까지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

 

충혼탑을 사진에 담고 호국영령들을 간단하게 추모한 후 그 앞으로 보이는 시멘트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 남쪽 방향을 살펴보니 영천시내 지나 저 멀리 영천 남쪽을 감싸고 있는 400미터급의 산줄기들이 길게 펼쳐져 있다.

잠시 지도로 확인해 보니 좌측의 411.8미터의 금오산부터 예향산 지나 499.1미터의 채악산 방향으로 산줄기가 이어지지만 채악산은 바로 앞 나뭇가지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그 산줄기 뒤로 오래 전 홀로 힘들게 걸었던 비슬지맥의 사룡산과 구룡산 줄기를 찾아 보지만 앞의 능선에 막혔는지 아니면 거리가 멀어 볼 수가 없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우측인 남쪽과 남서 방향으로는 이제부터 걸어 만나야 할 교촌동과 성내동 마을 지나 신녕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합수점과 신녕천 넘어 지난해 만났던 유봉지맥의 마지막 산줄기가 살짝 얼굴을 내밀며 옛 추억을 들려주고 있다.

 

이제 충혼탑을 내려 와 계단 우측에 조성된 주차장과 벽면을 보니 한국전쟁의 반격 영천전투라는 커다란 글씨와 함께 벽면에 다양한 영천전투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놨다.

잠시 둘러보고 바로 앞 왕평길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인 남서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는 낡은 기와집들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최신식 거대한 빌딩들이 공존하면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잠시 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라는 빌딩 앞에서 좌측의 도로로 바꿔 짧게 들어가니 새말리길이라는 골목길이 나타나고 그 골목길을 따라 옛 건물들 사이로 빠져 나가다 보니 오래 전 고향의 시골장터에서 골목길을 걷던 추억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한동안 오래된 낡은 민가들 사이로 나 있는 좁은 새말리길이란 골목길을 따라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민가 옆으로 작은 텃밭을 가꾸는 주민도 만나고 곧이어 성내안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 우측으로 걸어가니 운동장로 4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그 도로를 타고 좌측인 남쪽 방향으로 진행한다.

주변에 상가 건물들을 살펴보며 잠시 더 내려가니 도로 옆으로 영천시민운동장 입구란 버스정류장 지나 서문육거리에 도착을 해 복잡한 도심의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주위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본다.

 

서문육거리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도로 건너 우측으로 잠시 후 걸어 들어가야 할 골목길을 확인하며 서문육거리를 찾아보니 지명에 관한 자료는 전혀 보이지 않아 이곳 지명인 교촌동을 찾아 본다.

교촌동(校村洞)은 경상북도 영천시 서부동에 속하는 법정동으로서 명칭 유래는 마현산(馬峴山) 비탈에 영천 향교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교촌동은 조선 후기 영천군 내서면(內西面)에 속한 지역으로 향굣골 또는 교촌이라 하였다가 조선 말기 13도제 실시로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영천군과 신녕군을 영천군으로 통폐합하였다.

이에 따라 노상동(路上洞)과 내동면(內東面) 및 창구동(倉邱洞)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교촌동이 되어 영천군 영천면에 편입되었다.

1937년 7월 1일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면서 영천읍 교촌동이 되었다가 1981년 7월 1일 영천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영천시 교동이 되었다.

교동은 1981년에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면서 교촌동과 성내동(城內洞) 및 화룡동(化龍洞)을 통합하여 만든 동이며 1983년 2월 15일 오수동과 쌍계동이 교동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영천시 일원과 영천군 일원을 관할로 도농 복합 형태의 영천시가 설치되어 새로운 영천시에 속하였고 1998년 교촌동은 서부동 관할로 되었다.

교촌동은 마현산(馬峴山) 서남쪽에 형성된 마을로 작은 분지로 야산이 마을을 잘 감싸고 있는데 교촌동의 북쪽은 마현산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고 남쪽은 금호강(琴湖江)을 바라보며 과전동과 성내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배산임수의 명당에 위치한 마을이다.

교촌동은 영천 시가지의 관문이며 영천성(永川城)의 본 터로 서문오거리 상업 지역과 오수 공업 지역, 북부 농업 지역으로 형성된 도농 복합 지역이다.

교촌동의 서쪽 분지 속에는 복합 문화·체육 시설들로 가득 차 있으며 시민 운동장·시민 체육관·마현산 게이트볼장·영천 민속관 등이 있다.

 

횡단보도 신호를 따라 서문육거리를 통과한 후 수원지길 1차선 포장도로로 들어가니 바로 눈 앞으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수원지길을 우측으로 보내고 이름없는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오르니 경주세무소 영천지서 앞에 많은 세무사 사무실들과 광고판들이 보이고 곧이어 우측으로 사각정자와 진행 방향 좌측 앞으로 영천서부교회의 십자가도 보이기 시작한다.

 

사각정자 지나 계속 이어지는 무명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남서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이제 진행 방향 정면으로 유봉지맥의 유봉산과 그 마지막 산줄기가 빤히 보이기 시작해 사진에 담으며 여유있게 천천히 진행한다.

좌측으로 성내새길 가는 화살표 표시가 보이는 골목 갈림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앞에는 커다란 트럭이 정차되어 있어 그곳에서 좌측 수원지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마지막 합수점으로 향한다.

 

수원지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직진 방향으로는 바로 금호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우측의 좁은 나루터길을 따라 걸어가니 바짝 붙어 있는 민가들 사이로 소로의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 나루터길 소로를 따라 조금 더 전진하니 옛철길이 나타나는데 이제 철길은 완전히 사라지고 자갈들이 깔려있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옛철길을 건너 조금 더 내려가니 구터2길 도로명이 나타나고 계속 낡은 민가 사이로 이어지는 그 구터2길을 따라 전진하니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그 도로 좌측으로 이정표가 보여 확인해 보니 진행 방향으로 잠시 후 만나야 할 하근찬 징검다리까지 610 m 거리라는 표시가 보인다.

이정표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드디어 머리 위로 2개의 철로가 교차하며 지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오며 오늘 산행도 막바지에 접어 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철교를 지나 이어지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해 있고 좌측으로는 금호강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 옆으로 금호강이라는 커다란 표지판도 서 있다.

잠시 후 시멘트 포장도로가 끝이나고 비포장임도로 바뀌는 지점 좌측으로 이정표와 함께 영천을 빛낸 하근찬 징검다리라는 설명판이 보여 읽어 보니 하근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되어 있어 하근찬을 찾아 본다.

하근찬은 1931년 10월 21일 경북 영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전주사범학교와 동아대 토목과를 중퇴한 후 수년간 교사 생활과 잡지사 기자를 하였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수난이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후 7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창작집으로는 수난이대(1972), 흰 종이 수염(1977), 일본도(1977), 서울 개구리(1977), 화가 남궁씨의 수염(1988), 내 마음의 풍금(1999)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는 야호(1972), 월례소전(1973~1975), 제복의 상처(1981), 산에 들에(1984), 여제자(1987), 은장도 이야기(1986) 등이 있다.

제7회 한국문학상, 제2회 조연현문학상, 제1회 요산문학상, 유주현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소시민의 내면 세계에 침잠하던 동시대 대부분의 작가와는 달리 인정과 향토성이 짙은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이 겪는 민족적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역사적 현실 속에 드러난 사회의 모순에 대하여 강한 고발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전란 과정을 통해서 민족의 수난을 집약한 수난이대, 한국전쟁부터 종전까지를 배경으로 마을 청년들에게 소집 영장을 전하러 온 경관의 배 타기를 거절한 나룻배 이야기(1959), 한국전쟁 때 노무자로 동원되어 팔 하나를 잃고 돌아와 얼굴에 흰 수염을 붙이고 극장 광고판을 메고 다니는 동길이 아버지의 이야기인 흰 종이 수염(1959), 들고 있는 편지 뭉치가 집집마다 통곡소리를 자아내는 전사 통지임을 알고 냇물에 띄워 보냈다가 해고되는 배달부 이야기인 홍소(1960), 한국전쟁이 끼친 파괴적 영향력과 그 문화적 의미를 하나의 상징적 축도로 보여준 왕릉과 주둔군(1963), 한국전쟁 직후 격전장이었던 지역 근처 국민학교에서의 불발탄 피해를 묘사한 붉은 언덕(1964), 전후 어느 빈민촌의 판잣집과 부잣집의 개집을 견주어 같은 모양의 삼각집들이 일으키는 묘한 갈등을 다룬 삼각의 집(1966)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엄격한 구성과 적절한 토착어의 사용으로 소설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 영천 주민들이 자랑하는 소설가처럼 보이는데 이 산객에게는 조금 생소한 인물이라 책 한권 읽어 보기로 한다.

그 하근찬 설명판 뒤로 흐르는 금호강에는 작은 징검다리가 실제 설치되어 있어 평소에는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곳 하근찬 징검다리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드디어 우측의 신녕천과 좌측의 금호강이 만나 남쪽으로 금호강이란 이름으로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며 더 이상 산줄기를 따라 진행이 불가능하다.

그 합수점 앞에서 추억 한장 남기며 이틀간 걸었던 기룡지맥 산행을 모두 마무리하며 그곳에서 만들었던 고운 추억을 가슴속에 묻어보는 시간이다.

금호강은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화원유원지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의 가사령과 기북면 성법령에서 발원하여 영천과 경산 등지를 거쳐 흐른다.

금호강이 지리지 관련 고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경상도지리지로 금호(琴湖)이고 대구읍지에도 금호로 표기되다가 대동지지 이후부터 금호강으로 표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구읍지에 금호는 대구부에서 서북쪽으로 약 10리쯤 거리에 있고 발원하는 곳이 두 곳인데 하나는 영천(신령) 보현산(1124m)이고 다른 하나는 모자산에서 나오며 영천에 이르러 합쳐지므로 쌍계라고도 하고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호강의 금(琴)은 금호강 주변의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가야금을 뜯을 때 나는 소리와 같다는 의미이고 호(湖)는 금호강의 지세가 낮고 평평하여 이곳을 흐르는 금호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금호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합수점 우측으로는 잔잔하게 흐르는 신녕천이 보이고 그 신녕천 넘어 바로 지척으로는 유봉지맥의 유봉산 지나 우측으로 흐르는 마지막 산줄기가 빤히 올려다 보인다.

신녕천은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유산리 시루봉에서 발원하여 청통면 단산리에서 고현천을 합류하여 금호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으로 지명유래를 보면 신녕천은 본래 신녕군 지역으로서 신녕현청이 있어 이름 지어진 신녕면을 관류하므로 신녕천이라 하였으며 영천 주민들은 신녕내, 신령천, 신령내라고도 부른다.

신녕천(27.50 Km)은 영천시 신녕면 유산리 시루봉에서 발원하여 부산리를 거쳐 화남리에 이르러 여러 골짜기에서 오는 물을 합한 후 왕산리와 화성리와 매양리의 넓은 들을 지나 청도면과 화산면과 청통면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가 청통면에서 고현천과 합류해 금호강으로 흘러간다.

신녕천은 남동 방향으로 곡류하며 지류 하천인 신양천(7.0 Km), 용호천(7.0 Km), 삼부천(9.5 Km), 용연천(6.0 Km), 청통천(10.85 Km)을 합류하면서 하천 및 하구에 비교적 넓은 곡저 평야와 충적 평야를 형성한다.

신녕천은 지방 하천으로 분류되며, 유로 길이는 27.50 Km에 유역 면적은 180.59 Km2이다.

신녕천 유역은 영천시 북서부 지역을 포함하며 주변의 다른 하천에 비해 유역 면적이 넓고 유역의 북쪽 분수계는 보현산에서 방가산 지나 화산이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상당히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서쪽 분수계는 팔공산을 지나고 있다.

신녕천은 행정구역상 화북면과 화남면 및 청통면과 영천 시내 일부를 포함하며 다른 유역에 비해 상당히 험준한 산악 지대와 다소 좁은 곡저 평야 지대로 구분되는데 좁은 곡저 평야 지대에서는 신녕양파와 신녕마늘이 재배된다.

신녕천 서쪽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 신녕 향교가 있다.

 

신녕천 합수점에서 기룡지맥이란 이름으로 걸었던 산행을 모두 마무리하고 시간을 보니 이제 오전 9시로서 이렇게 일찍 산행이 마무리 된 것도 산행 이후 처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왔던 도로를 타고 갈림삼거리였던 구터2길까지 올라 주차해 둔 애마에서 배낭 정리하고 등산복 상의만 갈아 입은 후 곧바로 출발하니 귀가시간이 오후 12시 20분으로 찍힌다.

토요일이지만 급할 것 없이 여유를 가지고 영천을 출발하며 다음 주 역시 토요일에 모임이 있기에 조금 이른 주중에 짧은 지맥 하나 마무리하고 올라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