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충청남도 공주시와 논산시의 노성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9년 02월 02일 (토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하루종일 흐리고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가 제한되었으며 간간히 찬바람이 불어 약간 쌀쌀함을 느꼈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하 04도에서 영상 05도
산행인원 : 칠갑산 포함 총 3명(칠갑산, 니고나오, 인연)
산행코스 : 반송고개(697번 2차선 포장도로)-노성지맥 분기점(금남정맥 상 성정산 부근)-반송고개 복귀-130.7봉-벌목 후 조림지-194.3봉-밭 경작지-범복이(비포장임도)-개코빽이산(195.1봉)-이정표(두루봉과 지장정사, 수리고개)-돔뱅이쉼터(176.9봉)와 벤취쉼터 이정표(동네들쉼터 0.35 Km와 두루봉쉼터 0.76 Km 및 지장정사 1.37 Km, 등산로입구 0.56 Km)-동네들쉼터와 벤취쉼터 이정표(두루봉쉼터 0.41 Km와 지장정사 1.02 Km, 돔뱅이쉼터 0.35 Km)-턱골갈림삼거리 이정표(두루봉쉼터 0.11 Km와 지장정사 0.72 Km, 동네들쉼터 0.3 Km와 돔뱅이쉼터 0.65 Km, 턱골)-안전철봉과 로프 및 나무계단-두루봉쉼터(169.4봉)와 사각탁자 이정표(동네들쉼터 0.41 Km와 돔뱅이쉼터 0.76 Km, 등산로입구 0.43 Km와 지장정사 0.61 Km)-이정표(월곡리와 지장정사, 수실가는길, 두루봉과 수리고개)-밤나무과수원-안전로프구간-수실고개(2차선 포장도로) 이정표(지장정사 0.18 Km, 공주 계룡면, 동네들쉼터 0.84 Km와 돔뱅이쉼터 1.19 Km 및 두루봉쉼터 0.43 Km)-175.1 삼각점봉(공주447)-비포장임도-밀머리고개(1차선 시멘트포장도로, 수목원농장)-비포장임도-능선진입-156.1봉-송전탑-구야고개(2차선 포장도로) 이정표(노성산 2.23 Km, 구암리)-255.2봉(256봉?)-253.6봉(255봉)-노성산성석축-노성산(348.9봉, 정상석과 삼각점, 무인산불감시카메라, 정자, 국기계양대) 이정표(애향탑 1.99 Km, 구암리 2.23 Km)-짧은 알바(헬기장)-노성산성 이정석과 설명판-금강대도노성본부-일월당 갈림삼거리 비포장임도-봉우재산(204.5봉)-비포장임도-육군항공학교 담과 원형철조망-창공아파트앞 버스정류장(645번 2차선 포장도로)-송당리 버스정류장-한우축사-비포장임도-동양기계실습농장-시멘트포장도로-논산평야로 2차선 포장도로)-육군항공학교입구-읍내2리 둥덩골 이정석-으뜸농원-읍내2리 버스정류장-하도3리 버스정류장-하도1리 버스정류장 갈림삼거리(오일뱅크 노성주유소)-두사1리 버스 정류장-사월3리 버스정류장-항월리입구 버스정류장-회전교차로-이배영농조합-동부팜-온새미농업회사-노성육묘장-대성FRP산업-(주)TC-신당회전교차로-광석초등학교-광석보건지소-광석면사무소-신당리 버스정류장-광리더운들마을이정석-한울타리영농조합법인-양일농원-유정TMI연구실험목장-갈산리경로회관-갈산교회-무지개농장-백제대로 지하통로통과-논산천안고속도로통과-산업단지로-성동산단3길-성동로(2차선 포장도로)-정지리4리(삼정마을)-화정1리 버스정류장-금박재-화정1리(중리마을) 버스정류장-화정리 버스정류장-화정2리 (화상마을) 이정석-성동면사무소-원남1리 이정석-성동치안센터까지 약간알바-원남길-비포장임도-수탕원로(2차선 포장도로)-원남4길(1차선 시멘트포장도로)-비포장임도-월성길-밭 경작지-능선진입(녹색그물망)_50.3봉-대나무 숲-상리 1차선 포장도로-월명산(76봉, 삼각점과 정상판)-비포장임도-71.4봉(팔각정과 공터)-64.7봉-장판고개(금백로 2차선 포장도로)-61.6봉-이정표(불암산 1.22 Km, 우곤1리, 성광초등학교)-이정표(정자 0.1 Km와 개척리 0.74 Km, 우곤1리 0.65 Km, 병촌성결교회 0.3 Km)-팔각정자 전망대-이정표(개척2리 0.85 Km, 정자 0.05 Km와 우곤1리 0.82 Km, 개척1리 0.57 Km)-이정표(개척2리 0.6 Km, 개척1리 0.82 Km, 우곤1리 1 Km)-이정표(개척2리 0.42 Km, 개척1리 1 Km)-금강올레길 임도 이정표(불암산 0.38 Km, 우곤1리와 성광초등학교, 우곤1리, 개척2리 금성마을)-이정표(불암산 0.32 Km, 개척1리 1.1 Km, 개척2리 0.32 Km)-불암산(59.5봉, 삼각점과 정상판)-팔각정자-계단-개척길-이정표(불암산 0.28 Km과 불암산등산로입구, 강경)-금강올레길-옥녀봉과 논강평야 설명판-논산천과 금강이 합류하는 합수점-노성지맥 산행종료-강경 태평식당에서 복탕으로 뒷풀이-강경역에서 기차로 귀경-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35.30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트랙 :
산행시간 : 때로는 빡쎄게 때로는 여유롭게 꾸준하게 걸어 진행하여 10시간 43분 (06시 50분부터 17시 33분까지)
교통편 및 숙박 : 갈때 - 2/1 11:00 경부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공주가는 23:00 임시버스로 공주터미널까지 이동
2/2 01:00 공주건강랜드 찜질방에서 1박
06:00 터미널 앞 콩나물국밥식당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아침해결
06:30 택시로 산행들머리인 공주시 계룡면향지리의 반송고개까지 이동
올때 - 2/2 18:00 도보로 강경시내에 있는 태평식당까지 이동
20:12 강경역에서 영등포역까지 새마을열차로 이동
2/3 01:00 산친구들과 생맥주로 뒷풀이 후 택시를 이용해 귀가
노성지맥이란 ???
금남정맥 성정산((성항산.237.1봉)동쪽 약 1.5 Km지점의 표고 약 140미터 되는 곳에서 남진하며 반송고개, 개코빽이산(195.4봉), 수실고개, 175.1 미터삼각점봉, 밀머리고개, 256미터인 구야고개를 지나 노성산(348.1봉)에 오른 후 봉우재산(205봉)를 지나 쇠지기(645번도로 항공학교후문)에 내려선다.
여기서 부터는 산다운 산은 없고 어디가 맥인지도 모르게 얕은 구릉지로 대부산분 도로가 맥이되어 소곡저수지앞, 등등골 도로(항공학교입구), 23번 4차선 국도, 69미터봉, 두사리 두사교회, 광석면입구 사거리, 광석면사무소앞, 갑산리, 서논산JC 높은점고개, 고속도로 원남교, 성동면사무소뒤, 월성리 뒷능선, 51미터, 상리, 75.9미터, 장판고개, 불암산(59봉),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32 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논산천의 좌측 분수령이 되며 지맥의 절반정도는 산이고 절반정도는 도로를 따라간다.
생각지도 못했던 산친구들의 합류로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며 한방에 완주한 노성지맥에서의 행복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현존하는 맥 잇기 산행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산행 트랙이 존재하지만 이 산객은 신산경표를 보고 맥 잇기 산행을 처음 진행하였기에 가능하면 신산경표의 산행 이론에 따라 산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산줄기의 마지막 끝부분이 물과 만나는 지점은 그 어느곳에서도 올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기에 이 산객은 옛 관아를 기준으로 한 그 이후의 산줄기는 산행을 하는 산객 각자의 기준에 맞춰 진행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주에는 한국에 처음 들어오는 기계 설치 및 시운전이 있고 새로운 Item을 소개하는 Mr. Leon이 싱가포르에서 내한하는 일정이 중첩되어 정신없는 일주일이 될 듯 하다.
기술팀장에게 새로운 기계의 설치와 시운전을 부탁하고 새롭게 한국을 방문한 Mr. Leon과 업체를 방문하여 Spiral Freezer에 대한 Presentation을 진행하다 보니 금요일 오후 늦게 귀가를 하게 되었고 어렵게 공주가는 고속버스표를 구매하여 이미 약속된 산친구 2명과 함께 금요일 밤에 공주시로 출발을 하였다.
마침 구정 연휴가 시작되면서 금요일 늦은 시간에 임시버스 한대가 증차되어 걱정되었던 고속버스표를 쉽게 구하고 나니 이제부터는 그 긴 거리를 내일 하루에 마무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지만 모두 경험이 많은 산친구들이니 웃으며 걷다가 힘들면 중단하고 다시 한번 더 내려오기로 하니 마음은 편안하다.
새벽 1시에 가깝게 있는 공주건강랜드까지 걸어 도착을 하고 샤워 후 잠자리에 들려고 하지만 젊은 친구들의 대화로 잠들지 못하고 또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에 뒤척이다 새벽에 잠시 선잠을 자고 일찍 나오는 몸 상태가 편안하지 않아 걱정이다.
버스터미널 근처까지 다시 되돌아 와 콩나물해장국에 이슬이 한잔으로 몸을 데우고 택시를 이용해 반송고개에 도착을 하니 아직 어둠이 사라지지 않아 주위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벽 6시 40여분을 지나고 있다.
어둠속에 반송고개에 도착을 해 산행 준비 후 잠시 노성지맥 분기점을 다녀온 후 크게 높지 않고 잘 정비된 등로를 따라 산친구 2명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산행을 진행하니 생각보다 빨리 잘 진행되고 있어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힘들지 않게 구야고개까지 진행한 후 노성산으로 오르는 등로에서 제법 굵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며 숨이 목구멍에 찰 쯤 드디어 황산벌이 신라의 손에 함락되고 계백장군이 고귀한 목숨을 유린당하는 모습을 애통한 심정으로 바라만 봐야 했던 노성산성의 정상에 도착을 해 그때를 회상해 보며 귀한 추억 한장 남기는 시간이 귀하기만 하다.
늘 홀로 오르던 지맥 산행을 이렇게 산친구들과 함께 오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미세먼지에 희미한 풍경으로 남아 있는 곡창지대인 황산벌을 내려다 볼 수 있음에 또한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멀고도 긴 35 Km 이상을 10시간 넘게 걸어 드디어 강경대교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무탈한 완주를 축하하며 추억 한장 남기는 모습이 늠름하기만 하다.
올 한해 온누리호를 맡아 수고해 줄 니고나오 회장과 오랫동안 함께 산행을 즐기고 있는 연인님이 있어 조금은 힘들고 어려운 산행이었지만 이렇게 기대했던 시간내에 완주를 하고 웃으며 사진 한장 남길 수 있어 다행이었던 시간이기도 하였다.
앞으로도 가끔 좋은 산행지에서 오늘처럼 멋진 추억 남기고 좋은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오늘 산행 들머리인 반송고개에 도착을 하니 정상에는 찬바람만 불고 도로 한쪽에 반송리라는 이정석만이 서 있어 이 산객들을 맞이해 준다.
이곳에서 잠시 북쪽의 금남정맥 마루금 방향으로 올라 노성지맥 분기점을 다녀 온 후 이곳에서 다시 남쪽인 금강 방향으로 본격적인 산행을 이어가야 하기에 산행 준비를 하면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공주시 계룡면 반송리와 향지리를 이어주는 69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반송고개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는데 아마도 이곳이 반송리이고 반송리에 있는 고개라서 반송고개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 보는 고개이다.
반송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 아래쪽에 병촌소류지가 자리잡고 있고 마을에 반송이 있어서 반송골 또는 반송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은 반송 1, 2, 3리로 되어있고 자연마을은 거북정이, 당너머, 동신대, 반송, 병천, 부처댕이, 비석거리, 옷박골 등이 있는데 거북정이는 반송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거북바위 위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부처댕이는 돌부처가 많고 병천은 전에 평천역에 있었다고 하고 옷박골은 전에 은산현의 옥이 있었는데 그 바깥쪽이 된다는 뜻이며 반송리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흔날 9시경에 위왕제를 지낸다.
약간의 성애가 내려 앉아 미끄러운 등로를 타고 잠시 북쪽의 분기점 방향으로 오르니 공주시답게 밤나무 과수원이 제일 먼저 반겨주고 그 옆으로 명당인지 많은 묘지들이 산행 초기부터 이 산객들과 눈맞춤을 해 본다.
밤나무지대와 묘지들을 지나 금남정맥 상 분기점으로 오르니 약간의 잡목들이 방해를 하지만 진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선답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오르니 드디어 어둠속에 오래전 지났을 성정산 옆 분기점에 도착을 해 준.희님의 정성이 깃든 이정판을 만나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금남정맥은 주화산(600봉)에서 시작하여 왕사봉과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으로 이어지고 부여의 부소산에서 끝나는 산줄기의 옛 이름으로 오래 전 이 산객이 완주한 산줄기이기에 추억이 깃든 산줄기이기도 하다.
산친구들과 함께 올라 이렇게 사진 한장 남기며 추억할 수 있음에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해 본다.
분기점에서 잠시 사진 한장 남기는 사이 짙은 어둠이 엷어지며 좌측 저 멀리 희미한 실루엣으로 성정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리 옛 기억을 되살리려 해 보지만 잘려진 기억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듯 기억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다시 올랐던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반송고개로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반송리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곧이어 반송고개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긴 후 낙엽이 푹신하게 쌓여 있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오르니 금새 130.7봉에 올라 밝아오는 새벽에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다시 평이한 낙엽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며 산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목지에 나무가 식재된 장소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등로 좌측으로 저 멀리 희미하게 계룡산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계룡산 우측으로는 향적산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과 여맥이 길게 이어지며 예전에 걸었던 추억을 회상해 본다.
등로 우측으로는 계룡면의 나즈막한 산줄기와 마을들 그리고 좌측으로 KTX 철로와 공주역이 새벽 여명속에 희미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좌우측을 조망하며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벌목지 상단에 잡목들이 보이는 194.3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잠시 주위를 살펴본 후 그 무명봉을 내려가 본다.
잠시 내려가니 여전히 벌목지대가 이어지고 등로 좌측으로는 계룡면쪽 비닐하우스와 마을들 그리고 저 멀리 계룡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계룡면은 충청남도 공주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북부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약 200-300미터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면의 중앙부에는 혈저천과 월암천이 남북으로 연이어 흘러 연변에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고 특히 월암천 연변의 충적 평야는 금대들, 상평들, 산정들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평야로 화평들과 이어진다.
계룡산이 있는 지역으로 갑사의 창건과 들이 펼쳐져 있어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백제 때에는 웅천, 신라 때에는 웅주, 고려 때는 공주목에 속하였고 현재 월암리, 봉명리, 기산리, 화은리 등 17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하고 익구곡면과 진두면 지역으로 익구곡의 이름을 따서 익구곡면이라 하였으며 1914년 익구곡면과 진두면의 일부를 병합하고 계룡산의 이름을 따서 계룡면이라 하고 면사무소를 경천리에 두었다.
1995년 도농통합으로 공주시에 편입되었으며 대동여지도에 계룡면 일대에 경천, 진두, 판치, 계룡산 등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약간의 미세먼지인지 박무가 끼어 있는 계룡면쪽 풍경이 환상적으로 내려다 보인다.
그렇게 좌우측으로 조망을 즐기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갑자기 등로가 사라지고 잡목이 우거지고 낙엽이 쌓여 미끄러운 등로를 찾아 어렵게 내려가고 잠시 후 밭 경작지와 인삼포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 그 밭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니 절개지 아래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범복이 안부에 도착을 한다.
이 고개는 좌측의 죽곡리와 우측의 반송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지금도 제법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듯 보이는 고갯마루로서 등로 좌측의 죽곡리 방향으로 범복이라는 마을이 있어 붙은 고갯마루 안부처럼 보였다.
비포장 임도인 당고개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오르니 이곳 역시 밤나무 낙엽이 등로에 가득 쌓여 있어 약간은 미끄러워뒤로 밀리고 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낙엽 등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195.1미터의 개코빽이산에 도착을 하는데 준.희 선생님의 산패가 걸려있고 많은 선답자들의 띠지가 그 산패 주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다만 개코빽이산은 국토지리원에 명기된 정식 명칭이지만 이 산에 대한 자료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개코빽이산에서 추억 한장씩 남기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엽깔린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벤취쉼터들이 보이고 이정표가 서 있는 돔뱅이쉼터에 도착을 한다.
돔뱅이는 등로 우측의 죽곡리에 있는 마을로서 죽곡리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 있는 리이며 평지가 대부분의 지대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중앙으로 원산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주위에 비옥토로 조성된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죽곡, 서당골, 범보기 마을 등이 있는데 죽곡 마을은 대나무가 많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돔뱅이 마을은 삼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서당골 마을은 영청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서당이 있었다 해서 서당골 마을이라 불리고 범보기 마을은 영청이 옆에 있는 마을이며 범이 엎드린 형국이라 해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둠뱅이라는 이름은 우측 아래 죽곡리의 마을이름에서 따 온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는 쉼터이다.
둠뱅이쉼터를 지나니 등로는 다시 낙엽이 푹신하게 쌓여 있는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고 잠시 후 동네들 쉼터를 만나는데 이곳 역시 둠뱅이쉼터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그 동네들쉼터를 지나니 우측으로 턱골 하산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 옆으로 이정표도 서 있다.
턱골 갈림삼거리를 지나 안전철봉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계단을 타고 오르니 사각탁자가 설치되어 있고 조망이 좋은 두루봉쉼터에 도착을 해 계룡산을 배경으로 이정표를 사진에 담아 본다.
두루봉쉼터라는 이정판을 보면 이곳의 이름이 두루봉이었거나 근처에 두루봉과 관련된 지명이 있을 듯 한데 알 수가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잠시 그 두루봉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며 아름다운 계룡산과 향적산 방향을 살펴보고 출발하려는데 진행방향 저 멀리 노성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잡목 사이로 언뜻 눈에 들어 와 잠시 사진 한장 더 남겨 본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연이어 밤나무 단지가 나타나고 수실가는길이라는 이정판도 보인다.
또 다시 나타나는 안전로프를 타고 진행하니 금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수실고개에 도착을 한다.
수실이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화곡리의 한마을로서 마을이름에서 차용된 이름처럼 보인다.
마을이 들에 자리잡고 있고 동쪽으로 월산천이 흐르는 곳으로 자연마을로는 독적골, 상전말이 있다. 독적골은 턱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큰절이 있었다하여 독적골 또는 석적곡이라고 했고 상전말은 수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뽕나무 밭이 있었다 하여 상전말 또는 상전리라고 부른다.
참샛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수실 입구에 있는 골짜기로 찬샘이 있어서 참샛골이라 한다.
지나다니는 차량도 별로 없는 수실고개에서 사진 몇장 남기고 도로를 건너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능선을 타고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진행하다 보니 이곳 공주시와 논산시의 경계를 타고 진행되는 노성지맥 마루금은 온통 활엽수 낙엽이 여전히 수북하게 쌓여 있고 밤나무 과수단지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이곳이 밤의 주산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잠시 걸어 오르니 산패가 깨진채 남아 있는 175.1 삼각점봉에 도착을 하는데 공주447이란 표식을 봐서 4등급 삼각점이다.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등로 좌측으로 키 작은 잡목들이 키자랑을 시작하고 그넘어 드넓게 펼쳐진 계룡평야를 지나 우뚝 솟아 있는 계룡산이 우측으로 향적산을 거느리고 봄으로도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으로 자주 올랐던 계룡산인데 최근엔 마음 먹고 내려가도 오르기 쉽지 않은 산이 되었으니 열정이 식었는지 아니면 체력적인 문제가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향적산 우측 끝자락으로 보여야 할 화산벌은 아직 미세먼지인지 아니면 거리 때문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등로는 이제 비포장 임도같은 넓은 비포장임도로 이어지고 등로 우측으로는 계속 따라오는 계룡산 원경이 산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진행하니 등로는 갑자기 키큰 소나무 등로로 변하더니 등로 우측으로 작은 공동묘지 지대를 지나 거대한 수목원농장이 자리하고 있는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밀머리고개에 도착을 한다.
밀머리고개는 이곳이 논산시 노성면 구암리의 밀머리마을에 속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되며 구암리의 동북부 구릉성 산지에 자리잡고 있는 고개이름이다.
우측으로 거대하게 내려다 보이는 양계장에서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한쪽에 보이는 강아지들은 이방인의 출현에 밥값을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다.
잠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다시 능선 방향으로 걸어 진행을 하니 잡목들이 보이는 좁은 등로로 이어지며 검정천막이 그 기능을 잃은 채 등로 옆에 널부러져 있다.
키큰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금새 선답자들의 띠지가 붙어 있는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156.1 무명봉으로서 선답자들의 띠지에도 고도 표시를 해 뒀다.
다시 등로 우측으로 벌목된 경계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진행하니 높은 철탑이 보이고 그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을 해야하는 길주의 구간이다.
묘지들이 보이는 등로를 찾아 내려가니 구암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구야고개에 도착을 한다.
이곳 구암리 남동부의 구릉성 산지에는 구야고개가 있는데 유래를 찾아 보니 그 어디에도 자료가 나타나질 않지만 자연마을 중 구야마을이 있어 그 마을이름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구야고개에서 도로를 건너 철조망이 쳐져 있는 시작점 우측의 비포장 임도를 타고 다시 노성산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노성산까지 2.23 Km 남아 있으니 여유있게 진행을 한다해도 한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하리란 생각으로 걸어 오르니 이곳 등로 역시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길이 열려있어 진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완만하게 오르니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 좌측 앞 저 멀리 잡목 사이로 올라야 할 노성산 전위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잠시 더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넓은 공터같은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나뭇가지에 255미터라는 여영님의 산패가 걸려 있다.
하지만 255미터봉이라는 산패 옆으로 맨발님은 같은 봉우리에 256미터봉이라는 또 다른 산패를 걸어 놔 후답자로서 헷깔리기만 하다.
지도를 보면 지도에는 255.2미터봉이란 표기가 보여 늘 이런 산패를 걸 땐 정확한 고증과 장소를 확인하여 걸어 두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눈 앞으로 올려다 보이는 노성산 전위봉을 잡목사이로 올려다 보며 천천히 고도를 높히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바위들도 지나 봉우리같지 않은 지도상 253.6봉을 통과한다.
일반 능선같은 253.6봉을 지나 계속 가파르게 치고 오르니 낙엽이 깔린 무명안부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노성산성의 성벽이 보이고 어렵게 그 성벽으로 오르니 드넓은 공터에 산불감시초소와 팔각정 그리고 그 사이에 노성산이라는 앙증맞은 정상석과 삼각점이 보인다.
오늘 산행 중 최고봉이자 산줄기 이름을 낳게한 노성산이기에 함께하는 산친구들과 추억 한장 남기고 각자 증명 사진들도 남겨 본다.
노성산(348.9봉)은 충청남도 논산시의 노성면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348미터이며 세종실록지리지(은진)에 노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산)에 노산(현재의 노성산)은 현 북쪽 5리 거리에 있는 진산으로 일명 성산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자료에 노성산에 노산성(현재의 노성산성)이 있는데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 4개가 있다. (중략) 노성산에 탑사가 있다고 하였다.
또 노성산의 성산봉수는 남쪽으로는 은진현 황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공주의 월성산에 응한다 라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이산)에 노산은 이산현의 진산이다. 계룡산 서쪽 기슭에서 뻗어 와 공주 판치를 이룬 다음 서쪽으로 뻗어 논산을 이룬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 노성산은 또한 노성산성으로 더 유명한 곳인데 노성산성은 백제 때 산 정상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과 북쪽면 및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미터에 높이가 2.4미터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고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으며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와 기와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노성산 정상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다시 나와 둘러보니 제일 먼저 등로 우측인 서쪽으로 금남정맥과 오늘 걸어 마지막 완주를 해야 할 노성지맥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보이고 그 가운데를 언젠가 다시 한번 더 올라야 할 원진지맥 마루금이 빙 둘러 멀지만 제법 뚜렷한 산줄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미세먼지인지 박무로 인해 아쉬움이 남지만 저 원진지맥 산줄기를 걸으며 이곳 노성산과 노성비맥 산줄기를 바라보는 마음과 눈빛은 어떨련지 벌써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제 팔각정이 서 있는 남쪽 끝자락으로 가 살펴보니 향적산 우측 끝자락으로 보여야 할 황산벌은 아직도 보일듯 말듯 산객의 애간장만 태우고 그 좌측으로 향적산에서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만이 그 옛날 기억을 되살리며 고운 추억으로 다시 채워주고 있다.
황산벌은 660년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일대의 벌판을 말하는데 황산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 태종무렬왕조에는 황산지원,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연산현 산천조에는 황산지야라는 내용에서 확인되며 따라서 황산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있었으며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논산시 연산면 신량리에 황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황산벌은 신양리 일대의 분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벌은 660년 백제와 신라가 대규모 전투를 벌였던 당시 백제의 행정구역이었던 황등야산군의 벌판으로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일대의 벌판을 말한다.
936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일리천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도망가는 적군을 추격하여 끝내 이곳에서 후백제의 항복을 받았다고 전한다.
후백제 멸망 후 이를 기념하고자 태조는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개태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의 마지막 보루였던 계백과 5000열사가 무너지자 결국 백제라는 나라 이름도 맥없이 무너지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무너지는 마지막 보루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이곳 노성산성에서의 시간은 아마도 죽음보다 더한 피비린내나는 황산벌 전투의 마지막 몸부림을 마음으로 느꼈을 시간은 아니였을까 생각을 해 본다.
나라를 걸고 벌였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황산벌 전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7세기 중반에 백제는 신라 남부에 있는 40여 개의 성을 빼앗으면서 고구려와 함께 신라를 압박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보내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이윽고 660년 당은 소정방과 1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둥 반도를 출발했고 신라는 김유신과 품일 및 흠춘 등이 이끄는 5만여 명의 병력이 백제로 향했다.
나당 연합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 백제의 의자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의논했지만 백제의 관리들은 당나라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과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으로 맞서고 평야에서 싸우자는 의견과 강어귀에서 싸우는 게 낫다는 의견이 엇갈리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 당나라군은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 지역)에 도착했고 곧이어 백제군을 공격해 승리했으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어느새 황산벌로 진군하고 있었다.
의자왕은 더 이상 대응을 미룰 수 없어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신라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에 계백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가족까지 죽이면서 각오를 다진 뒤 황산벌로 향했다.
계백은 신라군보다 일찍 황산벌에 도착한 뒤 가장 험준한 세 곳에 진을 쳤고 뒤늦게 도착한 신라군도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눈 뒤 백제군을 공격했지만 죽기를 각오한 백제군에 밀려 4차례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흠춘의 아들 반굴과 품일의 아들 관창이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 죽었고 젊은 화랑들의 희생은 신라군의 사기를 높였으며 이후 신라군의 총공격이 이어졌다.
이에 백제의 결사대도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5만 신라군에게 패배했고 이 전투에서 계백과 수많은 백제군이 전사했고 좌평 충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 노성산 정상에서 추억을 남기고 쉬면서 주위 풍경과 그 옛날 치열했던 전쟁터를 살펴본 후 다시 진행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는데 헬기장을 지나면서 어딘지 이상해 확인해 보니 정상 마루금에서 좌측으로 벗어난 등로를 따라 내려가고 있기에 다시 어렵게 뒤돌아 올라 와 정상 마루금으로 복귀를 한다.
가파른 내리막 등로에 보이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저 아래 커다란 암자형태의 건축물이 보이고 곧이어 노성산성이라는 작은 이정석과 설명판이 보인다.
노성산성은 노성면 소재지에서 서쪽에 있는 노성산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자연적인 지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둘레 약 1Km를 석축으로 거의 완벽하게 쌓은 성지이다.
동면 북면과 서면을 할석을 다듬어 네모지게 하여 쌓았고 봉우리 정상에는 장대지로 추정되는 곳과 동벽으로 약간 내려온 곳에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남아 있다.
영조 때의 기록 여지도서에 의하면 노성산 봉수는 남쪽으로는 은진의 황화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는 공주 월성산 봉수로 신호를 전달해 준다고 되어 있다.
은진에서 노성을 거쳐 공주로 통하는 중요 길목에 자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내에는 우물지가 4곳이 있고 건물지로 보이는 여러 개의 유지가 있으며 동문과 서문이 있었던 곳이 발견되었는데 최근에는 남문지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이곳에는 백제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이 성은 동쪽으로 계룡산이 막아서고 남쪽으로는 논산평야가 바라다 보이며 북쪽으로는 공주, 서쪽으로는 부여방면이 한눈에 조망되는 요지로 연산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대치했던 방어선에 위치한 산성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노성산성은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지금은 남아있는 석축도 얼마 남지 않아 하루 빨리 복원하고 관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노성산성에 대한 설명판을 읽어 본 후 다시 조금 더 내려가니 좌측 비위들에 암각이 그려져 있고 우측으로는 금강대도노성본부라는 멋진 이정석과 절처럼 지어진 건물들이 보인다.
네이버에서 금강대도를 찾아보니 1874년 이승여가 창시한 종교로 나오고 이승여는 고려시대 이색의 18세 손으로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포항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898년 서자암과 결혼하여 자신은 금강도사라 하고 서자암은 연화도사라고 하면서 금강산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포교의 길에 나섰다.
1910년 계룡산 신도안 백암동으로 옮겨 많은 제자를 얻었으며 1923년에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리(구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성전을 짓고 교화에 힘쓰다가 1934년에 사망하였다.
이때 수많은 제자들이 군사부일체의 뜻으로 3년간 중복을 입었다고 하며 1937년에 장남인 이성직이 도통을 계승하였다.
이성직은 교리 및 예법의 체계화에 주력하였고 1941년에는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정책에 의해 성전이 헐리고 10여 명의 제자가 순교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57년 2세 도주가 죽고 1964년에 3세 도주로 장남인 이일규가 도통을 계승하였는데 3세 도주는 도장의 성역화 및 종단조직의 확대에 주력하여 현재 전국에 1백여 개의 본원과 분원 및 회관을 두고 있다.
잠시 글 한번 읽어 보고 사찰을 확인하고 사진 한장 남긴 후 그 금강대도 아래 석축 밑으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노성지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금강대도 노성본원까지 둘러보고 그 아래 쌓아 놓은 석축을 따라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호젓한 솔길로 변해 있어 편안하게 걸어 본다.
좌측으로 묘지가 있어 우측으로 우회하듯 걸어 내려가니 갈림삼거리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는데 우측으로는 작은 일월당이라는 암자가 보인다.
규모를 키우고 있는지 공사 자재들도 보이고 입구쪽으로는 널부러진 공사 현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잠시 더 비포장 임도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낙엽 깔린 능선 등로로 이어지며 편안한 산행을 이어가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다 낙엽 등로로 바뀌고 거의 높낮이를 분간할 수 없는 등로를 따르니 등로가 좌측 나즈막한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우측 사면 등로로 이어지듯 비켜 진행된다.
살펴보니 좌측 나즈막한 봉우리가 바로 해발 204.5미터인 봉우재산이기에 그곳으로 살짝 올라 지나가는 산친구들을 불러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봉우재산(204.5봉)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는데 위치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에 있는 산으로 송당리는 노성산 동남쪽 자락에 있는 마을로 여기에 있던 산신당을 속칭 속당이라 하였는데 점차 송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송당리의 북부는 해발 고도 200여미터에 이르는 옥재봉, 옥리봉, 봉우재산이 있는 비교적 높은 구릉성 산지로 곡간에는 월명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다.
서부는 해발 고도 120여미터의 구릉성 산지이며 남부와 중부는 해발 고도 60여미터의 평야 지대이고 중부 평야 지대에도 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는 마을이다.
봉우재산을 지나니 잠시 벌목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어 진행에 약간의 지장을 줬지만 곧바로 고속도로 같은 비포장 임도가 열려있어 큰 무리없이 진행을 한다.
다만 이 부근에서 선답자의 산행 트랙이 이상하게 되어 있어 정신 바짝 차리고 진행을 하니 큰 어려움이 없는 등로이지만 오래 전 등로가 개설되기 전 지나간 선답자는 어려움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등로 좌측 잡목 가지 사이로 월명저수지를 내려다 보며 조금 더 진행을 하니 금새 좌측으로 거대한 축사가 보이는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해 이제부터 도로를 타고 사라진 마루금을 찾아 도보 순례를 하듯 걸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 잠시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많은 논 경작지들을 지나 금남정맥 산줄기가 미세먼지 속에서도 아름답게 다가와 있고 우측으로는 또 다른 송당리 마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방향으로 거대한 축사 지나 노성산이 나즈막한 뒷동산처럼 올려다 보이고 그 아래 월명저수지의 뚝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 송당리 마을을 찾아 보니 송당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리로서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엔 송당저수지, 동쪽엔 소곡저수지를 두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문다리, 불무고개, 소곡, 소라실, 월명골이 있는데 대문다리는 송당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99칸 집이 있어 여기에 대문이 있었다 하고 불무고개는 부엉바위 아래에 있는 마을로 고개의 경사가 심하여 이 고개를 넘어가려면 불무를 불 듯 이리저리 비틀거리지 않고서는 넘어다닐 수 없다 하여 불무골 고개라고 부른다.
소곡은 월명동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고 소라실은 마을의 모양이 소라와 같다 하여 소라실 또는 송아리 라고 부르며 월명골은 송당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옥토망월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그 인물이 옥을 물고 망월한다는 뜻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될 명당자리라 하며 월명동 이라고도 한다.
지나온 노성산 방향을 뒤돌아 보고 다시 비포장 임도를 따라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으로 콘크리트 담벽이 보이고 그 위에 원형 철조망이 쳐져 있어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곳이 바로 육군항공학교 담벼락이다.
육군 항공학교(Army Aviation School)는 대한민국 육군 항공대의 교육 및 훈련 기관으로 1957년 1월 1일에 설립되었고 현재 육군훈련소와 거리가 가까운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에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육군항공학교 정문방향으로 나가니 645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노성로와 만나고 그 노성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내려가면 창공아파트앞 버스정류장을 지나 송당리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송당리 버스 정류장 옆으로는 노성면 송당리 마을회관이 보이는 곳을 지나 곧바로 우측으로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곳을 통해 645번 노성로와 헤어져 마을 방향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한우축사가 보이는데 최근 경기도에서 발생한 구제역 때문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한우축사를 좌측으로 가로질러 통과한 후 밭 가장자리를 지나 오르니 비포장 임도로 이어지고 있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며 좌측 앞을 살펴보니 저 멀리 노성산 정상부가 보이는데 벌써 저 멀리 멀어지는 풍경이라 아쉽기만 하다.
지나 온 축사 방향도 돌아보고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이제부터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 진행한다.
인삼포가 보이는 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우측으로 멋진 민가 한채가 보이고 갈림사거리를 지나 우거진 대나무 숲 가운데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도보같은 산행을 이어가지만 가끔은 왜 이런 도로까지 꼭 걸어가야 하는지 의문점도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다.
노성어린이집도 지나 걸어가니 논산평야로라는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그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 진행을 한다.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오르니 우측으로 육군항공학교로 들어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 우측으로는 종주대들이 가끔 점심식사를 이용했다는 솔나무식당 입간판도 보인다.
이곳은 이제 노성면 읍내리 마을로서 옛날 노성현의 소재지여서 읍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육군항공학교 정문 앞 도로 건너에는 이곳이 읍내2리를 알리는 이정석이 보이고 다시 이어지는 논산평야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으뜸농원도 보인다.
잠시 후 읍내2리 버스정류장에서 배낭 내려 준비한 빵과 음료수로 오늘 두번째 식사시간을 가지고 쉰 후 다시 배낭 둘러메고 출발하니 도로 좌측으로 항아리보쌈이라는 최근에 생긴듯한 깨끗한 식당도 보인다.
하도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리로서 너드리들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하도리라고도 하며 노성천을 따라 내려오는 큰길을 아래 위로 나누어 윗쪽을 상도, 아랫쪽을 하도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문턱골이 있는데 승적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 앞에 물을 뿜던 물턱이 있어 문턱골이라 부른다.
계속 걸어가니 하도3리 버스정류장을 통과하고 하도1리 버스정류장이 있는 갈림삼거리에서 좌측의 주유소 방향으로 공주와 논산방향으로 꺽어지는 도로를 버리고 직진의 광석과 두사리 가는 도로를 따라 진행을 한다.
계속 이어지는 논산평야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유피씨 공장 건물들이 보이고 곧이어 두사1리 버스정류장을 통과한다.
두사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리로서 대부분의 지형이 비교적 평탄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자연 마을로는 물레 고개, 산정, 중산 마을 등이 있는데 물레 고개 마을은 옥녀가 물레를 잣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는 물레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산정 마을은 명재 윤증의 아내 권씨의 묘소가 있다 하여 큰 산소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지명이며 중산 마을은 대산 아래 중간 마을이라는 뜻에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니 이제는 사월3리 버스정류장을 통과해 항월리입구 회전교차로에 도착을 한다.
사월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리로서 자연부락으로는 당산, 새롤, 안산, 월디, 헛골 등이 있는데 기름진 전답이 많아 논밭에 곡식이 풍성하여 새들이 많이 모여들어 서식했다 하여 새들 또는 새롤이라 하였고 또 모래가 많은 지역이라 해서 사동이라 하였다.
이곳 회전교차로에서 우측의 광석과 광석면사무소 방향으로 틀어 진행을 이어가 본다.
이곳 회전교차로에는 항월리입구라는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찾아보니 항월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리로서 풍수지리에 따르면 운중명월이란 명당이 있고 또 지형이 반달 모양이라 하여 항월이라 이름 하였다.
합정리, 오류동, 서변리, 대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형성된 곳이고 자연부락으로는 큰골, 망정, 반월, 서변, 오릿골, 주막거리, 풋개 등이 있다.
계속 이어지는 논산평야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농원들이 이어지고 곧이어 우측으로 거대한 동부팜 시설하우스가 보이는 곳에서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저 멀리 희미하게 노성산이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미세먼지속에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거대한 시설하우스를 자랑하는 동부팜을 지나 이어지는 농업회사들을 통과하니 도로 좌측으로 광활한 밭 경작지가 펼쳐지고 그 중간에 인삼포도 간간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지루한 도로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며 함께하는 산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은 외롭지 않게 걸을 수 있어 다행이다.
잠시 후 갈림사거리가 보이는 대성 FRP산업을 지나 천동길과 사계로로 갈라지는 사거리를 지나니 도로 좌측으로 주)TC라는 회사가 나타나는데 세워진 건물들이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아 잠시 구경을 하고 다시 출발한다.
도로 우측으로는 계속해 노성산이 조망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는지 아니면 미세먼지의 농도가 짙어지는지 그 모습이 희미해지며 실루엣으로만 보이고 있어 조금은 아쉽다.
계속 이어지는 농원과 인삼포 그리고 광활한 밭 경작지들을 살펴보며 걸어가는 발바닥에 다시 불이 붙은 듯 따갑기 시작하고 조심하며 걷다보니 신당교차로 회전사거리 에 도착을 해 직진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가 본다.
신당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리로서 자연부락으로는 골당디, 구당, 당너머, 대당, 덕포, 소당, 월당, 장승배기 등이 있다.
신당이 있었다 하여 신당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당리, 소당리, 사동리의 각 일부와 장구면의 덕포리를 병합하여 신당리라 했다.
그 신당교차로를 통과하니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광석면 민가들이 번잡한 마을이 보이고 잠시 후 광석초등학교와 광석보건지소 그리고 광석면사무소가 차례로 나타난다.
광석면은 충청남도 논산시 북서부에 있는 면으로 서쪽으로 석성천을 끼고 부여군 초촌면, 남동쪽으로 논산천을 끼고 논산시내와, 남서쪽으로 국도를 끼고 성동면, 북동쪽으로 노성면에 접한다.
면 전역이 평야지 또는 낮은 구릉지이며 가장 높은 구릉이 70미터에 평균 높이 10미터 내외여서 면의 대부분이 농경지로 이용되어 동남부는 딸기, 토마토, 채소단지가 많고 서북부는 축산, 과수, 채소, 잎담배, 땅콩 등이 재배되고 중서부는 미곡과 영농기계화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교통은 4번 국도와 23번 국도가 지나며 논산과 공주간 고속화도로와 논산과 천안간 고속도로가 지나 편리하며 문화재로는 노강서원(충남유형문화재 37)이 있다.
오늘 노성지맥 산행이 아니라면 들릴 기회조차 없었을 이곳 광석면을 둘러보며 잠시 자료를 찾아 보는 것 역시 산행에서 얻는 것중 하나일 것이다.
광석면사무소 앞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사계로를 따르니 예전 이 산객이 어릴적 보았던 작은 시골마을의 장터가 생각나고 그 풍경을 생각하며 걸어 진행을 이어가니 신당리 버스정류장이 나타난다.
광석면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신당리였는데 여기도 신당리라는 것을 보니 광석면의 주요 시설들은 모두 신당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시 후 광석면사무소의 작은 소도시를 완전히 빠져 나가니 도로 우측으로 남양홍씨 묘지로 가는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곧이어 사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 진행을 이어가야 할 수봉암과 광리 가는 방향의 화살표가 표기된 이정석이 보인다.
이제 양쪽으로 갈리는 사계로를 버리고 그 한가운데로 이어지는 1차선 시멘트 도로인 갈산길을 따라 산행을 이어가 본다.
광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리로서 자연부락으로는 안더분들, 밧더분들 등이 있는데 넓은 들이 있어서 너분들이라 하였고 또 인심이 훈훈하여 이 마을에 가면 더운 물과 더운 밥을 준다 하여 더분들 또는 더운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광리는 넓은 돌이 있다 해서 광석이라 하던 것이 빛나는 바위가 있다는 광석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서당이 많이 생겨 배우는 사람이 많아 마을을 빛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광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로 우측으로 한울타리영농법인이라는 사료를 만드는 공장이 있어 렌더링 냄새가 지독하고 계속 이어지는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이곳 역시 인삼포가 생각보다 많아 깜짝 놀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거대한 축사단지를 지나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황톳빛 밭 경작지가 드넓게 펼쳐지고 그 넘어 저 멀리 희미하게 논산의 아파트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주위로 보여야 할 고속도로와 논산천은 아직도 동면에 든 듯 조용히 잠들어 있다.
참으로 멀리 도로를 따라 걸어 왔지만 아직도 능선으로 들기에는 더 많은 도로가 남아 있기에 지루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유정TMI연구실험목장이라는 커다란 이정판을 지나고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축사동을 통과하니 도로 좌측 앞으로 오래된 듯한 갈산리경노회관 건물이 보이고 그곳 갈림삼거리에서 이제 직진의 갈산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크게 꺽어 갈산3길을 타고 논산천안간고속도로 방향으로 진행을 이어가 본다.
갈산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리로서 자연부락으로는 갈미, 큰동네, 날근터, 도래뜸, 산정말, 은동골, 쟁미턱 등이 있는데 마을 앞 넓은 들에서는 쌀이 나오고 산에서는 칡이 많이 나온다 하여 갈미 또는 갈산이라 하였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은동리와 입석리의 각 일부와 상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갈산리라 했다.
우측으로 크게 꺽어 들어가니 가을철 벼를 수확하고 잘 쌓아 둔 볏짚을 트럭에 실고 축사로 이동시키는 농민들의 바쁜 일손들이 보여 재빨리 그곳을 통과하니 도로 좌측으로 갈산교회도 보인다.
잠시 호젓한 1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마을길을 빠르게 걸어가니 인공으로 만든 작은 개을 위 다리를 건너 억새와 갈대가 무성하게 피었다 고개 숙이고 있는 도로도 걸어 본다.
도로 우측으로 거대한 한우농장이 보이는 무지개농장을 바라보고 걸어가니 다시 비포장 갈림삼거리가 나타나고 그 앞으로는 높고 거대한 다리 교각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살펴보니 대백제대로와 논산천안간고속도로 및 그 도로들과 이어지는 접속도로가 어지럽게 얽혀있는 서논산IC근처의 도로 교각 아래이다.
그 갈림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무지개농장을 두고 우측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 호남선KTX철로를 통과하니 좌측으로 대백제로와 논산천안간 고속도로를 통과할 수 있는 지하통로가 보이는데 그 위 대백제로에는 직진방향으로 서천부여와 좌측으로 꺽어 성동산업단지라는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지하통로를 이용해 대백제로와 논산천안간 고속도로를 통과하니 도로는 우측으로 빙 돌아 결국 대백제로 위 4차선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하고 그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우측으로 논산일반산업단지라는 커다란 도로표지판이 보이는 곳 우측으로 산업단지 방향으로 들어가며 맥을 찾아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걸어 들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거대한 논산일반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현황판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도로를 따르니 나즈막한 둔덕을 넘어 논산일반산업단지를 우측에 두고 좌측 도로를 따라 걷게 된다.
잠시 더 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는 호남선 KTX 철로가 계속 따라오고 그렇게 그 도로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며 이 산객이 잘 알고 있는 경쟁업체의 공장과 건물들을 살펴보며 감회에 젖어보는 시간도 가져본다.
논산일반산업단지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남리, 원북리, 정지리 일원에 조성되었으며 국토균형발전 시대에 부응하여 지역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구축과 지역경제 활성화 및 고용증대를 도모하며 지속적인 성장유지를 위해 개발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산업도로를 따라 입주업체와 좌측의 호남선 KTX 철로 교각을 살펴보며 걸어가니 드디어 그 논산일반산업단지 끝자락에 도착을 해 우측으로 휘돌아 가는 2차선 포장도로를 버리고 좌측 직진의 호남선 KTX 철로 교각 아래로 나 있는 작은 시멘트 도로를 타고 사라져 버린 맥을 찾아 힘겨운 산행을 이어가 본다.
호남선 KTX 철로를 지탱하는 교각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을 하였으면 되었는데 작은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산업단지를 에워싸는 듯한 수로가 있는 우측 도로를 따르니 트랙과 멀어지고 어렵게 거대한 이동통신탑이 있는 곳에서 좌측 논 경작지를 통해 다시 호남선 KTX 철로 교각 아래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로 복귀하여 사라진 맥길을 찾아 본다.
그렇게 힘들게 그 호남선 KTX 교각 끝부분에서 다시 등로응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성동로 방향으로 걸어가다 지나온 방향을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논산일반산업단지와 이곳으로 이어진 호남선 KTX 철로를 받들고 있는 교각이 묘한 풍경을 만들며 이 산객의 시야에 들어 온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호남선 KTX 철로를 좌측 직진으로 보내고 도로는 우측으로 휘어져 2차선 성동로와 만나 우측으로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정리4리라는 앙증맞은 이정석이 맞이해 준다.
정지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고 서북쪽으로 황하천이 흐르며 정지리 마을은 동지미란 산이 있어 정지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정지1, 2, 3, 4리가 있고 자연마을은 견티, 구듬재, 난말, 동라, 동지미, 불뭇골 6개 마을이 있는데 구등재는 정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산이 둘러 있어서 우묵하므로 구등재 또는 구등현이라 하며 이것이 변하여 구토리라 하고 동지미는 동지미라 하는 산 밑에 있는 마을이며 동라는 동편나촌과 서라는 서편나촌을 뜻하는 마을이다.
좌우측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의 민가들을 살피며 걸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화정1리 버스정류장이 또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화정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리로서 오늘 산행 후 만나야 할 논산천의 지류가 마을 앞에 흐르고 있으며 화정리 마을은 들 가운데에 통뫼와 홧대벌이 있어 화정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에는 연화부수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연화부수형은 풍수지리학 용어로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흡사하다는 뜻으로 풍수지리학 상으로 길지에 속하며 행정구역은 화정 1, 2리로 되어 있고 백자동, 중리, 평전말, 화상, 화정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백자동은 씨아샘 위쪽의 마을인데 씨아샘은 씨아샘고라당에 있는 샘으로 깊고 물이 풍부하다고 하고 중리는 화정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화정1리 버스정류장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성동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르니 약간의 식당들도 보이고 곧이어 도로 우측으로 금박재라는 도로 표지판도 서 있다.
금박재가 궁금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찾아보니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정지리에서 금박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서 1988년 논산문화원에서 간행한 놀뫼의 전설에 실려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옛날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성동면 정지리 즉 지금의 금박재 고개 아래의 마을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왜적이 침입하여 약탈까지 하였다.
이 마을은 주위에 농토가 적고 토질도 나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항상 가난에 쪼들리며 살았고 그래서 이웃 마을 사람들이 부황난 고라실이라고 불렀지만 사람들의 마음씨만은 순진하고 아름다워 한번도 다투는 일 없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금박재 바로 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어렵게는 살지만 항상 남을 돕고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던 어느 날 노부부가 들에서 일을 하고 막 고개를 넘어오려고 하는데 보지 못했던 박이 탐스럽게 넝쿨을 뻗으며 자라고 있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고개였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더욱 이상스럽게 생각해서 노부부는 그 박이 보통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가꾸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커다란 박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하더니 잘 익어갔고 그중 잘 익은 박을 하나 따다가 켜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지 박씨가 박혀 있어야 할 곳마다 금씨가 박혀 있었다.
노부부는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하며 하늘에 감사드렸고 그 금씨를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왜적이 마을에 찾아와 노부부에게 금씨의 출처를 대라고 고문하였으나 노부부가 끝까지 말하지 않자 이들을 가두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 하나가 왜적들에게 박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왜적들은 그 고개에 열려 있는 박들을 따기 시작하였으며 익지도 않은 박들까지 전부 따다가 박을 타니 맑게 개었던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억수같이 비를 뿌리며 천둥번개까지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삽시간에 왜적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박이 열려 있던 그 자리에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었으며 이러한 일이 있은 뒤부터 이 고개는 금박재로 불렸고 또 바위는 금박바위라고 불렀다.
이 금씨가 열린 금박재의 주요 모티프는 우연한 횡재와 바위가 된 악인으로 왜적이 금씨가 든 호박을 빼앗자 벌을 받아 왜적은 그 고개에서 바위로 변하였다는 지명유래담이자 악인징계담이다.
금씨가 든 박을 발견한 노부부는 우연히 횡재한 인물로서 보통 설화에서의 우연한 횡재는 횡재한 인물의 적덕이나 선행이 전제가 되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금씨가 열린 금박재의 노부부는 어렵게는 살지만 항상 남을 돕고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사는 인물인 것을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 바위가 된 악인의 이면에는 하늘이 내린 징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선한 인간의 의지가 핍박당할 때 하늘의 개입이 나타나는데 이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된다.금박재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니 또 다른 화정1리 버스정류장을 통과하고 화정리와 화정2리를 지나 좌측의 넓은 잔디가 보이는 곳에 올라 잠시 준비한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휴식을 취한 후 진행하기로 한다.
휴식 후 다시 출발하니 금새 성동면사무소가 있는 작은 소도시를 통과하고 도로 우측으로 원남1리 이정석이 서 있는 곳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원남1리 방향으로 꺽어 진행을 해야 하지만 직진으로 걷다가 약간의 알바 후 뒤돌아 와 정상 도로를 따른다.
성동면은 동쪽은 논산시내와 광석면 및 서쪽은 금강을 경계로 부여군 세도면, 남쪽은 논산천을 경계로 강경읍, 북쪽은 부여군 석성면과 접한다.
면 전체가 화정들과 개척들 등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산은 면의 서부에 나즈막한 월명산이 있을 뿐으로 이와 같은 지형조건으로 전체 면적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어 전형적인 농업지구를 이룬다.
쌀과 보리를 중심으로 수박과 딸기 및 채소류 재배가 활발하며 부여와 논산 국도 연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남양전씨 종중문서(보물 727)와 불암산성이 있고 개척리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순교사적지 제1호인 66인 순교기념탑이 있다.
한동안 원남길을 따라 걸어가니 좌측으로 좁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곳을 통해 조금은 직선으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논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농로를 따르니 다시 임도 좌우측으로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고 잠시 휴식도 취하고 종교에 대한 열띤 토론도 벌이며 걸어 진행을 하니 임도 우측으로 거대한 태양열 발전판과 인삼포가 펼쳐져 있어 잠시 살펴보고 출발한다.
나이드신 어르신들만 사는 농촌이 많아지다 보니 예전처럼 땅 경작에 대한 의무감도 많이 사라지고 농사를 지을 사람들도 없다보니 가능하면 매년 가꾸고 수확하는 농작물보다는 오랫동안 시설물을 이용해 한번 수확하는 인삼이나 이런 태양열 시설물들로 바뀌고 있는 듯 하여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이 산객의 시골에도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들이 없어 논이 있어도 묵히기 일쑤이니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해갈지 걱정도 해 본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비포장 임도를 따라 논과 밭 경작지 사이로 난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인공으로 만든 수로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바람이 멈춘 따뜻한 장소에 다시 자리펴고 앉아 남아 있는 빵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있으니 변산쪽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온누리산우님들로부터 연락이 오고 그 산우님들과 산행 후 강경에서 저녁식사 약속을 하고 나니 괜시리 마음만 바빠진다.
어렵게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다시 수탕원로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좌측으로 조금 걸어 오르니 원남4길과 성동로 181길이 지나는 갈림사거리를 통과한다.
월성리의 수탕원로 갈림사거리에서 직진의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원남4길이라는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니 등로 우측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도로를 타고 걸어 온 비산비야의 사라진 마루금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월성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월성리 마을은 예부터 성벽에 비추어진 달빛의 수려함이 으뜸이라 하여 월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월성 1, 2, 3리가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동촌, 월성, 소란말, 자곡매, 삼성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촌은 월성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소란말은 동촌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자곡메는 소란말 뒤에 있는 마을이다.
이제 지나온 방향으로 노성산을 찾아 보지만 너무 멀어져 있는지 그 노성산은 시야에서 벗어난지 오래된 느낌이다.
계속 이어지는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포장도로가 이제 비포장 임도로 바뀌면서 임도 좌측으로 기울어가는 태양 빛에 나즈막한 산줄기 능선들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하고 이제서야 조만간 도로와 임도 산행도 끝이 날 것임을 감지한다.
멋진 소나무와 민가 임도를 지나 지나온 등로쪽도 살펴본 후 계속 걸어 진행하니 농기구와 거대한 창고같은 건물들이 보이는 곳을 지나 월성길이라는 도로 표지판도 확인을 해 본다.
민가들이 몇채 보이는 그 작은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지는 곳 좌측으로 최근에 조성된 듯한 묘지 한기가 있는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묘지 방향으로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등로는 좌측에 논 경작지를 두고 그 우측의 가장자리 논둑을 따라 진행되는데 우측 논둑 방향으로는 파란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 그 목적이 궁금하다.
드디어 그 논 경작지 둑을 타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능선으로 이어지고 나즈막한 능선을 따라 오르니 그물망은 여전히 뒤따라 올라오고 있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살펴보니 묘지 아래 원남리에 거대한 신축 한우 목장건물들이 내려다 보인다.
등로 우측으로 펼쳐진 원남리 풍경을 조망하고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어 그 동안 도로를 타고 힘겹게 걸어 온 시간을 보상 받듯 즐겨 본다.
잠시 후 등로 우측으로 녹슨 철조망이 있고 굵은 콘크리트 말뚝이 보이는 50.3봉에 도착을 하지만 특별한 것이 없기에 정상부 사진 한장 남기는 것으로 대신하고 곧바로 출발한다.
특별할 것 없는 50.3봉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대나무 밭이 펼쳐지고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 숲을 통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우곤리 마을 넘어 거대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 뒤로 보여야 할 석성천을 찾아 보지만 아직은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우곤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 동쪽으로 금강의 지류인 석성천이 흐르고 있다.
우곤리 마을은 뒤에 있는 산의 형태가 마치 소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곤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행정구역으로는 우곤 1, 2, 3, 4리가 있고 자연마을로는 내우곤, 안소곤, 밧소곤, 다르매, 서당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밧소곤은 소곤 바깥에 있는 마을로 석성천 갯가에 있으므로 포전 또는 포전리라 불리었다.
이제 논산천과 금강이 만나는 강경대교 쪽 합수점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조금 더 힘을 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주위 풍경을 조망하며 내려가니 등로는 민가 바로 앞 마당으로 내려간다.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도로로 내려가 우측으로 몇발자국 걸어가니 다시 갈림삼거리가 보이고 삼거리 좌측 앞으로 계단이 보이는데 등로는 그 계단을 타고 오르며 진행이 되고 있다.
지도를 보니 이곳 역시 아직도 우곤리 마을이다.
계단을 타고 오르니 등로는 다시 활엽수 낙엽이 푹신한 등로로 이어지고 잠시 억새가 한들거리는 능선다운 능선을 걸어가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느낌이다.
몸은 힘들고 어려워하지만 마음은 그 긴 거리를 무탈하게 걸어 완주점이 눈 앞에 다가왔음을 느끼기에 편안하게 즐기는 마음이다.
잠시 뒤 뒤돌아 보면 지나온 등로도 살펴보고 등로 우측으로 펼쳐진 나즈막한 산줄기 뒤로 오래 전 걸었던 금남정맥 산줄기도 살펴보는 시간이다.
다시 나타나는 묘지 뒷쪽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니 또 다른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등로 우측을 보니 저 멀리 금남정맥 마지막 부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북쪽인 우측으로 금남정맥 산줄기를 살펴보고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는 등로 좌측인 남쪽으로 월성리의 거대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에 논산천이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다.
미세먼지인지 박무가 사라져 시원한 조망을 살펴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이렇게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고 이제부터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둔덕이 나타나는데 그 둔덕정상 우측으로 삼각점 표시가 보이고 그곳으로 오르니 논산301이라는 삼각점과 그 위에 해발고도 76미터인 월명산이라는 준.희님의 산패가 걸려있다.
이곳은 월성리 산성이 있던 곳으로 그 월성리 산성의 정상부가 바로 월명산이다.
월성리 산성은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월성리 월명산에 있는 시대 미상의 산성으로 월성리 산성이 자리한 월성리 일대는 논산 강경 일대에 펼쳐져 있는 이른바 논강평야의 일부로 주변 지역이 드넓은 평야로 되어 있다.
이 평야 지대에 해발 76미터의 월명산이 있고 월성리 산성은 월명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월명산은 해발 76미터에 불과하지만 주변 지역이 온통 평야로 되어 있어 주변을 손쉽게 내려다볼 수 있다.
월성리 산성은 최근에 학계에 알려져 정확한 규모와 현황은 아직 불분명한 상태이며 더구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축성 시기를 알 수 없어 산성의 건립 경위 역시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북쪽으로 1 Km 거리에 금강의 지류인 석성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고 서쪽으로 2 Km 거리에 금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어 하천을 이용한 물류의 운송과 관련 있는 시설이 아니었을까 추정되고 있다.
강경에서 부여 석성으로 통하는 지방도 799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논산천이 나오고 이 논산천을 건너 약 4 Km쯤 올라가면 개척리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우회전하여 약 2 Km 정도 더 나아가면 월성리에 닿게 된다.
월성리 마을의 뒷산이 월명산인데 월명산은 산의 형태가 반월과 같아 반월산이라고도 부르며 산성은 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월성리 산성은 완전히 붕괴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며 전체 둘레도 지형을 고려하여 추측한 수치로서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은 테뫼식 형태이나 전체 성벽의 둘레를 고려해 볼 때 테뫼식보다는 포곡식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정상부 가까이에 밋밋하게 토루의 잔존 형태가 남아 있을 뿐으로 여기에서 보면 성벽의 두께가 약 6미터 정도에 이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흔적을 기준으로 하여 전체 성벽 둘레는 약 1.4 K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성의 입지나 주변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산성으로서는 지나치게 규모가 큰 감이 없지 않다.
월성리 산성은 나지막한 야산에 자리하고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더구나 현재 남아 있는 성벽도 토루의 형태가 밋밋하게 남아 있어 이것이 진짜 토루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하루 빨리 정밀 조사가 이루어져 산성 여부부터 확실하게 판단하고 뒤이어 축조 배경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월명산에서 추억 한장 남기고 다시 넓은 비포장 이도로 내려와 산행을 이어가니 영락당과 월명공원 가는 이정석도 보이는 갈림삼거리를 통과한다.
군산의 월명공원은 잘 알고 있지만 이곳 논산에도 월명산이 있고 월명공원이 있다는 이정석에 많이 놀라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진행을 하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놀이터와 월명산 신제단 그리고 육각형 정자도 보이는 71.4미터봉에 도착을 해 주위를 살피며 잠시 쉬어 간다.
다시 별 특징없는 낙엽깔린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큰 고도 차이없이 곧바로 64.7봉에 도착을 한다.
그 64.7봉에는 커다란 밤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다른 특이한 것이 없어 포인트만 확인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빠르게 그 정상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른다.
이제 등로 앞 소나무 사이로는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햇살이 반짝이고 그 눈부심을 온 몸으로 받으며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태양광 판넬과 저 멀리 거대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약간의 밤나무 낙엽이 푹신한 등로를 따르니 절개지를 우측으로 돌아 묘지지대를 타고 내려가 799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금백로의 장판고개에 도착을 하는데 장판고개라는 이름이 왜 생겼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병촌리와 개척리의 경계지점으로 이제부터 병촌리를 지나 마지막 개척리로 진행하는 마지막 지대이다.
병촌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아래는 정리된 경작지가 있다.
병촌리 마을은 지형이 마치 병과 같이 생겨 병골 또는 병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은 병촌 1리와 2리, 자연마을로는 까치말, 대중리, 병골, 삼잿골 등이 있다.
까치말은 중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까치와 같다고 하고 삼잿골은 중리와 까치말 중간에 있는 마을로 낮은 재가 있다고 하며 관광지로는 66인 순교 기념탑이 있다.
6.25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양민들을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집단학살 했는데 이 때 병촌교회 신자 66명도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참히 학살되었는데 성서적이고 성결교회적인 신앙고백을 하면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제 이 금백로를 넘어 능선으로 올라 불암산을 지나면 오늘 산행 날머리인 금강과 만나게 될 것이다.
2차선 포장도로인 금백로의 장판고개를 건너 오르니 많은 묘지들이 나타나고 그 묘지지대를 타고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 병촌리 마을이 평화롭게 내려다 보인다.
다시 묘지지대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금새 묘지들이 보이고 향나무 한그루가 그 묘지 뒷편에 보이는 61.6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 아래 땅바닥에는 홀대모의 대부인 죽천님의 빛바랜 띠지가 떨어져 있어 나무에 잘 걸어 본다.
그 61.6봉 정상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묘지지대를 우측에 두고 좌측 능선을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는 여전히 병촌리 마을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무명 안부를 지나 오르니 좌측으로 성광초등학교로 내려갈 수 있는 이정표가 서 있고 이제 마지막 봉우리인 불암산까지는 1.22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잠시 후 다시 등로 좌측으로 병촌리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조망처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더 남기고 진행을 이어가 본다.
이제 소나무와 밤나무가 적당히 섞여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대나무 숲과 우측으로 묘지들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른다.
등로 좌측으로 최근에 새로 개설된 듯한 멋진 계단이 보이고 이정표를 살펴보니 병촌성결교회로 하산할 수 있는 등로이다.
정자와 개척리를 표시한 이정표를 지나 잠시 걸어 오르니 등로 옆에 팔각정자가 보이고 그 우측으로 우곡리와 금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자를 지나 평이한 넓은 임도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이어가니 개척1리로 하산할 수 있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서 있고 벤취쉼터를 지나 우측으로 우곤1리 하산갈림삼거리 이정표가 보이는 무명 안부도 통과한다.
개척리는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에 있는 리로서 개척들에 자리잡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가 마을 옆에 흐르고 있으며 개척리 마을은 물이 흐르고 낮은 산등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개척이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개척 1, 2, 3리로 자연마을은 개자, 금성, 나루개, 새말, 딴펄로 이루어져 있는데 딴펄은 개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 펄이 외따로 있다고 하고 불암은 동쪽 신촌리에 불암산이 있고 앞에는 개가 있다고 하며 기념물로 제 152호 성동 은행나무가 있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전우치가 이 곳을 지나가다 은행나무 지팡이를 꽂았는데 이것이 잘 자라면 전씨가 계속 번창할 것이라고 했으며 그 후 은행나무의 잎이 돋고 가지가 나와 무성한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계속 뚜렷하고 편안한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드넓은 비닐하우스 단지 지나 희미하게나마 논산천이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어 합수점이 가까이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다.
그렇게 주위를 조망하며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좁은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한쪽에는 자가용이 올라 와 주차되어 있다.
우곤1리와 개척2리의 갈림사거리로서 한쪽에는 금강올레길 안내판이 서 있다.
금강올레길은 우리나라 6대 하천인 금강이 흐르는 주변으로 역사가 깊은 병촌성결교회와 개척리와 우곤리 등 인근 마을을 연결하며 몸과 마음의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힐링과 동시에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1.5 Km의 산책로를 말한다.
안부 우측으로 민가들이 보이고 그쪽으로 몇발자국 걸어가니 좌측 능선 방향으로 넓은 비포장 임도가 열려있어 그 임도를 따라 산행을 이어 가 본다.
잠시 오르니 임도는 불암산 정상을 두고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돌아 오르기에 좌측 직선 능선을 타고 올라 다시 만나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듬새 59.5미터의 불암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논산시에 있는 불암산을 찾아보니 불암산은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미상의 불암산성 정상에 있는 산을 말한다.
불암산과 불암산성은 강경읍의 북쪽으로 금강의 지류인 논산천이 동에서 서로 흘러 금강에 유입되고 그 논산천을 건너 금강 본류를 타고 북쪽으로 2 Km 정도 올라가면 해발 60미터의 나지막한 독립 구릉인 불암산이 나타나는데 불암산성은 불암산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불암산성은 산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길게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성벽은 동벽과 북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길이가 약 360미터 정도 확인된다.
서쪽과 남쪽은 성벽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지형상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성한 것으로 생각되며 전체 성벽의 둘레는 이 부분까지 합하면 약 700미터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축조 방법은 내부를 삭토해서 토루를 쌓아 올린 것으로 보이고 성 내부에서는 성문이나 건물지, 우물터 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불암산성은 현재 성벽의 대부분이 이미 붕괴된 상태이며 산성과 관련된 부대시설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주변에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경질 토기편이 확인된다.
논산의 산성은 동부 지역에 높고 험준한 산봉에 자리하고 있는 반면에 서부 지역에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인데 불암산성은 서부 지역에 속한 산성으로 금강과 접해 있고 드넓은 논강평야를 끼고 있는 점으로 보아 금강의 방비와 관련되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에 대한 정확한 축조 시기와 성격은 발굴 조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불암산에서 추억 몇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저 멀리 팔각정이 보이고 그곳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른 후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길게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오래되었는지 조금은 위험해 보이기도 한 나무계단이다.
한동안 그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드디어 강경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한강 둑방길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 금강이 도도하게 흐르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마지막 산길을 내려 와 그 금강 둑방 도로를 타고 저 멀리 보이는 강경의 옥녀봉을 목표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본다.
금강 둑방도로를 타고 걸어가다 잠시 후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오늘 마지막으로 들렸다 내려온 불암산과 정자가 있던 능선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그 우측으로는 개척리의 비닐하우스 단지들이 그리고 좌측으로는 금강이 흐르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들어 온다.
금강올레길에 대한 안내판과 좌우측 조망을 즐기다 보니 한쪽에 금강역사 이야기와 옥녀봉과 논강평야에 대한 설명판도 보인다.
옥녀봉과 금강은 논산8경 중 7경으로서 강경읍 북옥리에 강경산이 있는데 이 산을 옥녀봉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아서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
한번 다녀간 선녀들은 영광으로 알고 자랑을 하였지만 옥황상제의 딸은 한번도 내려오지를 못했는데 선녀들이 어찌나 자랑하는지 꼭 가보고 싶었고 그러던 어느 해 팔월 보름날 옥황상제의 딸은 허락을 받아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으나 그 선녀는 다시 못올 길을 떠나고 마는데 끝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이 산 위에는 봉우리진 곳이 있는데 이 곳을 옥녀가 죽은 자리라 하여 옥녀봉이라 부르고 그녀가 들여다보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강경읍내와 멀리 논산시내, 드넓게 펼쳐진 논강평야와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진 금강 둑방도로를 따르니 드디어 마지막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우측 강변도로를 따라 내려가며 앞을 보니 저 멀리 강경의 옥녀봉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드디어 금강 둑방 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저 멀리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강경의 옥녀봉이 정상에 커다란 활엽수를 부채살처럼 펼쳐 보이고 그 우측으로 강경의 아파트 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지명유래집을 보니 강경읍은 충청남도 논산시의 남부에 위치하는 읍으로 서쪽 경계를 따라서 금강 본류가 흐르며 논산경찰서와 죽림서원이 소재한다.
도지정 유형문화재인 임리정과 팔괘정이 황산리에 위치하는데 특히 팔괘정은 이중환이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학 서적인 택리지를 완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고 읍사무소는 남교리에 소재하며 현재 황산리, 염천리, 중앙리 등 13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원래 조선 시대의 은진현에 속했으며 금강 본류에 인접해 있으면서 넓은 논산평야를 배후에 두고 있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수산물과 농산물의 집산지로 발달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평양 및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고 서해안 최대의 수산물 시장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은진)에서 강경포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강경포 나루는 일명 강경산 봉화대라고 불리는 옥녀봉 아래에 위치하였으며 새나루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진)에는 강경포는 강경산 아래에 있는 바닷가 나루터(해진)이며 강경산 봉화는 전라도 용안현 광두원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황화산에 응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은진)를 보면 김포면에 강경산, 봉대, 강창 등의 지명이 확인되고 여지도서(은진)에는 강경산은 관아 서쪽 20리 거리에 있는데 임천과의 경계 부근이고 강가에 홀로 솟아 있다 라고 되어 있으며 같은 자료에 강경포는 관아 서쪽 20리 거리의 강경산 아래에 있는데 바다 포구이다 라고 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강경대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는 강경산의 봉수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은진군 김포면에 속했다.
조선지지자료(은진)에 강경산, 강경시장, 강경포 등의 지명이 확인되며 특히 강경시장에 대해서는 병촌리와 월포리 일대에서 열리는 매우 유명한 큰 시장이다 라고 되어 있다.
1914년 채운면 성서리를 병합하여 논산군 강경면으로 재편되었다가 1931년 채운면 산양리와 제내리 및 채산리를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옛날 강경젓갈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던 곳인데 이제는 그 명성도 많이 퇴색되어 그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듯 활기가 사라졌다.
드디어 좌측의 논산천과 우측의 금강이 만나 좌측 뒤로 흐르는 강경대교 위 합수점에 도착을 해 마지막 완주를 자축하는 사진 한장 남기는 것으로 멀고도 긴 노성지맥 산행을 마무리한다.
논산천은 길이 57.10 Km에 유역면적은 667.16 Km2로서 공주시 계룡산 서쪽과 논산시 연산면 산지에서 발원하고 논산시 북서부를 남서쪽으로 흘러 강경읍 서쪽을 횡류하여 금강 본류에 흘러든다.
논산천은 그 지류인 성평천 및 방축천과 주변에 펼쳐진 논산 준평원을 관개하고 호남선의 일부가 이 하천과 평행하게 달린다.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서해의 군산만으로 유입하는 한국 6대 하천의 하나로서 유역면적 9885 Km2이고 유로연장 401 Km로 남한에서는 한강과 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본류는 구리향천과 정자천 등의 지류들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전라북도 북동부에서 남대천 및 봉황천과 합류하고 충청북도에서 송천 및 보청천과 합류한 뒤 다시 충청남도 부강에 이르러 미호천과 합류하고 공주와 부여 등 백제의 고도를 지나 강경에 이르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은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 등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상류지역은 높이 1000미터이상의 산들이 진안고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덕유산(1594미터), 백운산(1279미터) 등 험준한 산들을 깎아 흐르는 많은 지류들은 감입곡류하면서 무주구천동과 영동의 양산팔경 같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룬다.
중류와 하류는 금산분지, 보은분지, 청주분지, 대전분지 등 분지들과 미호평야 및 논산평야 등 기름진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어 일찍이 우리 민족의 정착지 중 하나였고 백제문화의 본고장이었다.
하류지역은 서해안의 계속적인 침강으로 익곡이 발달하여 하구가 넓고 깊기 때문에 하항의 발달과 내륙수운 이용에 유리한데 원래 금강은 호남평야의 젖줄로서 백제시대에는 수도를 끼고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수로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관광공사를 찾아보니 이곳 강경의 옥녀봉은 논산 8경 중 하나로 송재정(정자)과 봉수대에서 강경읍내나 금강을 조망하기에 좋은 곳인데 옥녀봉 정자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거칠 것이 없이 훤하고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부여와 익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평야와 강이 조화를 이루고 저멀리 산이 배경처럼 서 있어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았다고 하며 때문에 옥녀봉은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옥녀봉 봉수대는 전북 익산 광두원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과 노성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곳이다.
송재정 바로 아래편에는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터가 자리하고 있어 성지순례지로도 유명하다.
저 옥녀봉으로 올라 잠시 둘러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장거리 산행으로 인한 피곤함과 다른 산친구 2명의 불확실한 답변으로 인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논산천과 금강이 만나는 합수점 위 강경대교를 건너 강경읍내로 들어가니 젓갈시장이 펼쳐지고 그 주위로 많은 식당들이 보이는데 우리가 찾은 식당은 태평식당이다.변산반도를 다녀 온 다른 온우리산우님 4명이 합석하여 총 7명이 복탕과 이슬이로 허기를 달래고 이곳에서 유명한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다는 우어회를 시켜 남아 있는 이슬이를 비운다.
우어는 일명 웅어라고도 하는데 웅어는 임금님이 드시던 물고기로서 조선 말기에는 사옹원 소속의 위어소를 두어 웅어를 잡아 진상하게 하였으며 웅어를 잡아 석빙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한국 수산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양군지 등에 웅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난호어목지라는 고서적을 보면 웅어는 한강의 행주나 대동강 및 임진강 등에서 많이 생산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송남잡지에는 위어는 행주에서만 나오므로 지금 사옹원이 이를 잡아 진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어의 다른 이름인 위어의 뜻은 갯벌이나 낮은 물에서 잘 자라는 갈대 속에 많이 살아서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라고 하며 웅어의 또 다른 이름은 도어, 제어, 열어, 멸어라고도 한다.
웅어는 기름기가 많으면서도 담백하고 다른 생선류와 비교하여 칼슘, 인, 철분 등의 무기질이 매우 풍부하며 비타민 A의 함량도 높아 무기질과 비타민의 좋은 급원이라고 할 수 있다.
웅어는 한강하류 행주 지역에서 생산되며 오월 단오절 시기에 많이 잡히는 생선으로 회로 먹기도 하고 고추장을 넣고 끓여서 매운탕으로 쌈을 싸서 먹기도 한다.
웅어를 깨끗이 씻어 다듬고 웅어를 가늘게 채썰어 놓은 후 손질해 놓은 웅어에 후춧가루와 참기름을 넣어 버무린 뒤에 참깨를 뿌려 고소한 맛을 낸다.
오랫만에 장거리 산행 후 맛난 강경의 복탕과 우어회로 이슬이를 비우며 배를 채우니 온 세상이 우리것이 되었고 마음 편히 옆지기가 준비해 준 8시 12분 발 새마을 열차에 승차해 꿀잠으로 꿈나라를 다녀오니 벌써 서울에 도착을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산친구 2명이 합류해 외롭지 않게 예상된 시간에 노성지맥 산행을 완주하고 강경읍내로 들어가 기다리던 또 다른 온누리 산우님 4명을 만나 저렴하지만 맛난 강경의 복탕과 우어회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니 참으로 행복한 하루가 지나고 있다.
옆지기에게 부탁해 생각보다 적당한 열차표를 예매해 영등포역으로 올라 오고 헤어지기 아쉬워 그곳 영등포역 근처에서 생맥주에 흑태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날이 바뀌고 어렵게 택시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 온 후 멀고도 긴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게 되었다.
조만간 다시 만나 멋진 산행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함께해 즐겁고 행복했던 노성지맥에서의 환상의 시간을 갈무리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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