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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맥과 중요 지맥 산행(완료)/금남기맥(호남·완)

대동금강기맥 제3구간 누항재에서 23번 국도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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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전라북도 완주군과 익산시의 대동금강기맥(금남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6월 06일 (금요 무박 토요일 산행)

산행날씨 : 맑고 화창한 날씨에 약간의 바람이 불어 산행하기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영상 15도에서 영상 31도

산행인원 : 3450온누리산악회 금남기맥 종주대 총 5명

산행코스 : 누항재(천호터널 위 비포장 임도)-50번 송전탑-광산절개지-천호동굴 석회석 채광지 복구공사장-공원묘지지대-천호산성 안내판-천호산(501.1봉)헬기장-벤취4개 쉼터-육군부사관학교 독도교육판-이정표(천호산정상 279 m)-벤취3개 쉼터-헬기장-전망대(전주 야경)-갈매봉(350봉, 산불초소)-비포장 임도-문드러미재(741번 2차선 지방도로)-이동통신탑-산불감시초소-묘지 전망대(용화산과 미륵산 조망)-소나무 군락지-동물이동통로(호남고속도로 통과)-묘지지대(일출)-양동재(799번 2차선 지방도로)-양동마을 빗돌-공원묘지-벌목지대-비포장 임도-쉼터봉(통나무벤취)-벌목된 잡목구간-36번 송전탑-동물이동통로(1번 4차선 지방도로 위 통과)-파밭-쑥고개(구1번 2차선 지방도로)-소나무 군락지-편백나무지대-140봉 이정표(소세양 신도비길,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 3.1 Km, 대나무 숲길 1.9 Km)와 삼각점 및 벤취 쉼터-172봉-이정표(편백나무숲 쉼터 0.7 Km, 상양마을, 등산로)-안부-안전목책과 로프구간-용화산(342봉) 정상판과 묘지 및 이정표(서동공원 2.6 Km, 아리랑고개 2.6 Km)-군부대 출입금지 경고판과 철조망-전망바위-돌탑들-아리랑고개(다듬재, 15번 2차선 지방도로)-군부대 접근금지 경고판과 철조망-정정열 명창길(미륵사지 시작점 10.1 Km, 미륵사지 도착점 5.3 Km)-미륵산성-안전로프구간-미륵산 우제봉(405봉) 헬기장-미륵산(돌탑과 삼각점, 430.2봉)-미륵산성 발굴조사 안내판-이정표(장군봉 140 m, 장항교 2 Km, 별장가든 2050 m)-기양리 갈림 삼거리-바위 전망대-아름다운 순례길 이정목-장항동마을 갈림 삼거리 이정표(간재선생 묘지 1.7 Km, 미륵사지 2.1 Km, 장항동마을 둘레길)-기양저수지 갈림 삼거리 이정표(기양저수지, 간재선생 묘소 1.2 Km, 미륵사지 2.6 Km)-간재선생길 이정목-간재선생길 이정표(간재선생묘소 1.1 Km, 미륵사지 2.7 Km)-묘지지대-간재선생길과 둘레길 안내목-간재선생길 이정표(미륵사지 3.4 Km, 죽청마을)-왕버들 고목-시멘트 포장도로-옥수도예-2차선 지방도로-인삼 밭-비포장 임도-인삼밭과 고구마밭-삼기주유소-23번 2차선 지방도로-삼기농협-합동택배-석불사거리(23번 지방도로와 718번 지방도로 교차점)-삼기성민교회-풍성슈퍼 휴게실-석불사-23번 4차선 지방도로-석불사거리 버스정류장-송나라 중국집-나들목가든-석불회산 중화요리-산단오릉길-삼기공단지구-구정마을 도로 표지판-옥실마을과 검지마을 도로 표지판-검지 버스정류장-익산 제3일반산업단지 20-구정 버스정류장-새말공원-산단도마마을 빗돌-광성벽돌공장-KTX 호남선 고속철도-낭산면 도로 표지판-상마사거리 도로 표지판-1차선 포장도로와 수로-형제농원-다송리마을-진주정씨 공동묘지-23번 4차선 지방도로-정금주유소-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5.69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산행하기 좋은 날씨에 많은 사진 담으며 조금은 빠르게 진행하며 09시간 07 (03시 29부터 12시 36분까지)

교통편 : 애마와 포터 트럭 이용

금남기맥(금강정맥)이란 ???

금남기맥(금강정맥)이란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지나 백운산에 내려서기 전에 영취산에서 장안산, 신무산, 팔공산, 성수산 및 마이산을 거쳐 진안과 전주 사이의 모래재고개 위 조약봉(주줄산 또는 주화산)에서 두줄기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남서쪽 만덕산으로 해서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 제암산, 존제산, 조계산과 백운산등 전라남북도를 휘돌아서 섬진강하구의 망덕산까지 이어지는 호남정맥이고 또 한줄기는 북진하여 연석산, 운장산, 장군봉을 지나서 싸리재와 봉수대 사이의 싸리재 분기봉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줄기는 북진하여 인대산, 대둔산, 계룡산을 지나서 부여 부소산에서 맥을 다하는 산경표의 금남정맥이고 또 한줄기는 서진하여 왕사봉을 거쳐 칠백이고지, 시루봉, 장재봉, 작봉산, 천호산, 미륵산, 함라산, 망해산, 고봉산을 지나 장계산에서 서해바다로 잠긴다.

이산줄기를 보통은 금남기맥 혹은 원 금남정맥이라고 부르는데 신산경표는 조약봉 분기봉에서 군산의 장계산까지 가는 산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부르고 싸리재 분기봉에서 부여의 부소산까지를 금남정맥이라고  부른다.
거리는 조약봉에서 부소산 조룡대까지나 군산의 장계산까지나 신기하게도 같은 도상거리로 131.4 Km이다

그렇게 이름지어진 이유는 정맥은 강을 구획하는 경계가 되고 맥이 바다에 닿아야 하는데 신산경표의 금남정맥은 이 모두를 충족하지 못하니 온전히 금강의 남쪽과 만경강의 북쪽 울타리를 이루고 이 줄기를 금강정맥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산줄기이기에 걸어가면서 그 의미를 새겨보고 실제 마루금을 살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산행하기 좋은 날씨에 마음 맞는 산친구들과 즐겁게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마루금을 걸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메르스 정국과 가랑비로 인해 지난주에는 계획되었던 산행도 포기하고 집에서 쉬다 보니 나태해지고 몸의 균형이 무너져 조금은 힘든 나날을 보내고 말았다.

오늘은 만 3주만에 만나는 산친구들과 다시 진행하던 대동금강기맥 제3구간 산행을 위해 떠나는 시간인데 무더워진 날씨와 세번의 가파른 오르막길 그리고 포장도로를 타고 10여 Km를 걸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부담으로 다가오지만 잘 훈련된 종주대이니 큰 무리없이 마무리하고 귀가할 수 있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늘 하던대로 날자가 바뀌는 밤 시간에 사당에서 만나 뻥 뚫린 도로를 따라 산행 날머리인 23번 4차선 지방도로 옆 상금주유소에 도착을 하니 새벽 3시를 넘기고 있고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또 다른 산친구 한명을 기다려 늘 도움을 받았던 포터 트럭을 타고 산행 들머리이자 지난 3주전 떠나왔던 천호터널 위 누항재에 도착을 해 또 다른 추억을 만들기 위해 어둠속을 헤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어둠을 헤치며 잡목과 잡풀이 우거진 등로를 따라 가파른 천호산과 갈매봉을 지나 문드러미재를 통과하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고 호남고속도로 위 동물이동통로 위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야생화와 잠시 친구가 되다 보니 지나온 등로 저 멀리 밝아 오는 또 다른 하루의 장엄한 일출을 가슴속에 담아 보는 시간이다.

맥 잇기 산행이 아니라면 들리지도 보지도 못했을 양동재를 지나 벌목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잠시 오르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대동금강기맥 마루금의 천호산과 갈매봉이 막 떠오른 일출 아래 몸을 낮추고 골짜기마다 엷은 안개를 드리운채 황홀한 풍경을 만들며 산객의 마음을 흔들고 있어 진행하지 못하고 한동안 머물며 많은 사진을 가슴속 깊이 고운 추억으로 남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대동금강기맥 산행도 세번째인데 이곳 익산이 고향인 산친구 한명의 지인분이 운행하는 포터 트럭의 도움을 받아 오늘 새벽에도 무사히 이곳 누항재 고갯마루에 도착을 해 어둠속에 보이지 않은 추억을 되새기며 흔적 한장을 남겨 본다.

누항재(작은독고개)는 여산면 호산리와 태성리 및 완주군 화산면으로 가는 고갯마루이다.

태성리는 익산시 여산면에 있는 법정리로서 1914년 전동, 현천리, 신사리, 덕곡리, 화산리, 노동, 태성리, 관동, 누동의 각 일부로 구성되었는데 여산군 천동면에 속했을 때에는 대성리였는데 뒤에 대자를 약자로 쓰면서 태로 쓰게 되자 태성리로 읽게 되었다.
누항마을은 시어목 또는 세목이라 불리는 마을이고 성치는 성잿골이라고도 불려지는데 1972년 성치와 합쳐 한 분리가 되었다.

누항은 시어목의 한문자 표기고 시어목은 물이 새어(시어) 들어가는 목(좁은 부분)이라는 말로서 천호산 북쪽 근처에 지형이 삿갓을 뒤집어 놓은 듯한 곳이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그 속으로 흘러 들어감으로(천호동굴 속으로) 시어목이라 했다.

성치에는 나백전 때 쌓았다는 천호성이 있어 성잿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인연이었기에 어둠을 헤치며 출발하는 누항재에서의 시간은 아쉬운 여운이 남아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곳 누항재는 또한 바로 밑으로 천호터널이 뚫려 있는 곳이기도 한데 누항재 아래 뚫려있는 천호터널은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서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을 잇는 740 2차선 지방도로이다.

지난 2008년 12월 지방도 정비사업 일환으로 착공한 지 4년 5개월여 만인 2013년 5월에 완공된 천호터널은 사업비 169억원이 투입된 이 도로가 완공됨에 따라 익산 여산에서 신설된 천호터널을 통과해 곧바로 완주 화산으로 넘어갈 수 있어 주민들의 경제적 그리고 시간적 부담이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이 도로는 비포장인데다 도로 폭이 좁아 시내버스 등 차량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고 겨울철 눈이 많이 오거나 결빙되면 인근 지역주민은 1시간 정도 더 걸리는 우회도로를 이용해 나들이를 하는 등 큰 불편을 겪어 왔다.

 

 

짧지만 가파른 절개지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지난밤 내린 이슬이 잡목잎에 머물다 산객의 발걸음에 비산하며 등산복을 적시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기에 기분좋게 출발을 하지만 역시나 등로를 막아서는 잡목의 저항으로 인해 조금은 고민도 해 보는 시간이다.그렇게 잠시 진행하니 송전탑 50번을 지나 곧바로 등로 우측으로 천길낭떠러지가 존재하는 광산절개지를 지나는데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괜시리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등로 우측으로 계속 이어지는 절개지 등로를 따르니 천호동굴 석회석 채광지 복구공사란 안내판이 보인다.

천호동굴은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석회동굴로서 대전광역시에서 전주로 접어드는 호남고속도로상의 여산휴게소에서 서쪽으로 1 Km 거리에 있으며 천호산(500) 북서쪽 기슭에 있다.

굴 안의 냉기가 대류하여 여름에는 밖으로 서늘한 바람이 나오고 겨울에는 훈훈한 바람이 나온다고 하여 바람굴(풍혈)이라고도 하는데 생성연도는 약 4억에서 2 5000만년 전으로 추정되며 총길이 약 600미터에 주굴의 길이는 약 250미터인데 동굴탐사에 의해 길이가 더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 동굴은 복류수에 의해 용식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석회동굴로 1966 2 28일 천연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었다가 1965년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자 동굴의 환경이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비공개로 보호되고 있다.

협소한 사행 터널로 된 동굴 입구를 들어서면 한쪽으로 동굴류가 흐르고 천장에는 많은 박쥐가 서식하고 있는 동굴 내부가 나타나고 이곳에는 종유석, 석주, 석순, 석회화단구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들이 발달해 있다.

입구에서 250미터 정도 들어가면 높이 약 30미터에 너비 약 15미터의 광장이 나타나는데 동굴 내부에서 가장 화려한 동굴경관을 보여 수정궁이라고 한다.

수정궁에서 동굴은 협소하게나마 약 200미터쯤 계속되다가 낙석으로 막히고 도중에 몇 군데의 지굴이 보이는데 우기에는 동굴 속에 동굴폭포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동굴 내에 서식하는 동물상은 박쥐를 비롯해 곱둥이, 톡토기, 딱정벌레 등을 비롯해 1016종이 보고되고 있다.

동굴 옆에는 천호산 일대의 석회석을 채석하기 위한 익산석회광산이 가동되고 있으며 이 일대는 마한, 백제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으로 미륵사, 용추사, 문주사 등의 고찰과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 익산왕궁리5층석탑(보물 제44) 등의 탑을 비롯해 왕릉, 사지 등의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교육적 효과가 높은 관광지이다.

밝은 대낮에 오르며 그 풍경을 눈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함이 아쉽지만 이어가는 맥 잇기 산행 상 무더워지기 전에 많은 거리를 진행하기로 결정을 하였으니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세상의 이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얼굴을 때리는 잡목의 저항을 뿌리치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하늘이 열리는 곳에서 잠시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밝은 달을 올려다 본다.

바쁘다는 핑계로 때로는 밝은 불빛들로 인해 생각지도 못하던 달빛 구경이었는데 이렇게 어둠을 헤치며 걸어가는 새벽 산행에는 늘 고마운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오니 그 친구의 불빛으로 외롭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더 진행하니 등로 옆에 잘 조성된 많은 묘지들이 보이는 공원묘지지대를 지나 잡목이 사라진 좁은 전망공간에서 잠시 흐르는 땀방울 닦으며 뒤돌아 보니 서쪽 바로 발아래 호남고속도로와 여산쪽 불빛들이 반짝이며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많이도 지나다녔던 호남고속도로인데 이렇게 어둠속 불빛으로 만나니 또 다른 세상인듯 그렇게 가슴속에 남겨지는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여산과 호남고속도로의 아름다운 불빛을 내려다 본 후 다시 걸어가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천호산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는지 좁은 소로의 등로가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땀방울 흘리다 보니 등로 옆에 천호산성 안내판이 서 있다.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이 성은 천호산 최고봉을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서 서쪽으로 미륵산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 뗀돌을 이용하여 경사면을 따라 쌓았다.

성벽의 둘레는 669m이며 현재 보존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이고 잔존 높이는 2.5m 내외이다.

이 산성은 성 주변에서 백제시대 수막새기와와 토기조각 등이 수습되어 백제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격전지라고도 전해지는 곳이다.

 

 

천호산성 안내판 주위에는 작은 돌들이 깔리면서 널려있어 이 천호산성과 관련이 있을까 둘러 보지만 지식이 없어 분간은 어렵다.

잠시 등줄기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넓은 헬기장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천호산 정상에 도착을 해 잠시 추억 몇장 남겨 본다.

천호산(501.1)은 전라북도 익산시의 여산면 호산리와 완주군 비봉면 대치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여산)의 호산은 군의 동쪽 5리에 있는데 진산이다라는 기록으로 당시에 천호산이 호산으로 통칭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지(여산)에는 호산은 군의 동쪽 8리에 있는데 진산이며 일명 문수산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천호산의 다른 명칭으로 문수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여산)의 천호산, 문수사, 여지도서(여산)의 천호산, 대동여지도(여산)의 문수산, 1872년지방지도(익산)의 천호산, 문수암이 기재되어 있어 18세기 중반경에 호산이 천호산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구대조(익산)에는 호월리와 유점리 등을 통합하여 호산리가 신설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산 지명인 호산에서 촌락 지명인 호산리가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한국지명총람에는 천호산에는 문수사와 깊은 굴이 있으며 호산리는 천호산 밑이 되므로 호산리라 해서 익산군 여산면에 편입되었고 호월은 죽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천호산 정상에는 제대로 된 정상석 하나없이 이정목에 정상 표시를 해 놔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던 시간이다.

 

 

천호산 정상에서 사진 몇장 남기고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거목 아래 네개의 벤취가 놓여 있는 쉼터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계속 걸어 내려가면 육군부사관학교에서 걸어 놓은 독도법이란 종이 코팅지가 자주 눈에 들어 온다.

잠시 더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천호산 정상에서 279미터 내려왔다는 조금은 생뚱맞은 이정표를 지나고 곧이어 벤취 3개가 놓여 있는 무명봉에 도착해 잠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그 벤취를 지나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금새 넓은 헬기장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467.9봉을 지난다.

 

 

헬기장을 지나 잡목속 마루금을 따라 잠시 내려가니 이제 등로 앞 좌측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나뭇가지에는 여전히 독도법에 대한 종이 코팅지가 붙어 있다.

어둠속 눈 앞에 보이는 갈매봉으로 가는 도중 등로는 다시 나즈막한 안부로 떨어지는데 그 안부로 내려가는 등로에서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야경을 살펴 본다.

바로 발아래 완주군 비봉면이 내려다 보이고 수봉산과 옥녀봉을 가운데 두고 우측 저 멀리 전주시내의 화려한 불빛과 좌측의 화산면쪽 불빛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산객의 가슴으로 파고 들고 있다.

 

 

생각보다 화려한 전주의 야경을 살펴보며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 좌측의 야경은 여전히 이 산객의 발걸음을 따라오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가파르게 오르니 갑자기 눈 앞에 녹슨 철구조물과 산불감시초소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해발고도 350미터인 갈매봉에 도착을 한다.

운제산 갈매봉(350)이중환이 쓴 택리지(숙종 40 1714)에 운제산 하나가 나오는데 속리산 맥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추풍령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다시 솟아나서 황간의 황악이 되었다다시 전라도에 들어와서 무주의 덕유산이 되고 또 장수남원 사이에서 크게 끊어졌다가 서쪽으로 가서 임실 마이산이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석산 한 맥이 거꾸로 북편에 가서 주류산, 운제산, 대둔산이 되었다가 다시 충청도에 들어와서는 금강을 뒤에 두고 돌아서 계룡산이 되었는데 남북으로 통해서 한 줄기의 영이다.

이 글처럼 운제산이 이름만 나올 뿐으로 그 이름 유래는 전해지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 고산현 산천편에 운제산은 운제현에 있는데 산이 극히 높고 험하다라고 만 소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곳 운제산 갈매봉은 잡목으로 인해 조망이 없으며 하산길도 두갈래가 있어 독도에 주의를 해야 할 곳이기도 하다.

 

 

운제산 갈매봉 정상에서 좌측인 완주군 비봉면 원곡제가 있는 내월리 방향으로 내려가다 짧은 알바를 하고 다시 올라 우측인 정상 등로를 찾아 내려가 본다.

잠시 더 내려가니 이곳 역시 잡목의 저항이 심하고 그 저항을 뚫고 내려가니 등로는 뚜렷하게 나 있는데 그곳에서 앞쪽 우측을 바라보니 이제 오늘 걸어가야 할 대동금강기맥 마루금의 용화산과 그 뒤로 얼굴만 내밀고 있는 미륵산이 어둠을 뚫고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명의 빛과 마루금에 한동안 머물며 많은 사진을 남겨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진행 방향의 마루금을 조망하며 내려가니 등로는 갑자기 잡목과 잡풀이 가득한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하고 이제부터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완만하게 내려가 본다.

계속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문드러미재란 이정석이 보이는 741번의 2차선 지방도로에 도착을 해 물 한모금 마셔 본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고향이 이곳인 산친구 한명은 이곳 문드러미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아버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러 가고 나머지 4명은 잠시 사진을 담으며 휴식을 취한 후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며 진행을 이어가 본다.

문드러미재는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와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를 잇는 741 2차선 지방도로가 통과는 고개로 고개위 능선에는 3개 이동통신사의 중계탑이 세워져 있고  익산 둘레길이 이어지는데 문드러미재의 유래는 산이 높아서 극난하고 예전 서울에서 옛 고산으로 올 때 고개가 높고 고산으로 가는 문과 같다 하여 문드러미재라 한다고 한다.

아버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는 산친구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다.

이 산객도 역시 금북정맥 산행을 하면서 동네 뒷산이자 고갯마루인 여주재를 지나며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문드러미재의 741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나즈막한 콘크리트 옹벽을 넘어 능선으로 오르니 수많은 이동통신장비들이 달려있는 탑을 지나고 곧이어 산불감시초소가 보이는데 왜 이런 산불감시초소가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다.

그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능선 넘어 묘지지대가 나타나는데 그 묘지 위에서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쑥고개를 지나 올라야 할 용화산이 아름다운 능선으로 다가와 있고 그 용화산 줄기 넘어에는 고개만 내밀고 있는 미륵산도 보이기 시작한다.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에 이렇게 조망을 즐기는 것 역시 색다른 느낌으로 용화산과 미륵산으로 남겨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제 등로 우측으로는 자주 들렸던 여산마을이 여명의 빛을 받아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다시 걸어 진행을 하니 이제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가파르게 내려가게 된다.

잠시 내려가니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더니 저 멀리 호남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부터 걸어 건너야 할 동물이동통로도 내려다 보인다.

그곳으로 걸어 내려가니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만발해 있고 그 호남고속도로 위 동물이동통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어 본다.

호남고속도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비월리(서순천 인터체인지)에서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에 이르는 고속도로로 총 길이는 195.16 Km에 너비는 13.2미터의 왕복4차선으로 1973 11월에 개통되었다.

1971 8 31일 노선이 지정되었고 2002 5 1일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 변경에 따라 고속국도 제3호에서 제25호로 바뀌었다.

구간도 원래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대동(경부고속도로의 회덕분기점)에서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까지 총 길이 249 Km이던 것이 회덕분기점에서 논산까지 53.84 Km 구간은 호남고속도로지선(고속국도 251)으로 분리되고 천안에서 논산까지 80.96 Km의 논산천안간고속도로가 편입되었다.
전국의 간선도로
망 구성계획에 따라 경부고속도로(고속국도 1)에 이어 계속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며 이 노선이 완성됨으로써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이 서울과 부산 등지와 1일생활권으로 연결되었고 경유지 연변의 공업개발 효과도 거두었다.
고서 분기점에서는 88올림픽고속도로(고속국도 12)와 연결되고 종점에서는 남해고속도로와 이어진다.

호남고속도로 지선도로를 이용하면 서대전 분기점에서 대전남부순환선고속도로(고속국도 300)를 통하여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고속국도 35)와 연결되고 회덕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와 이어진다.

익산 분기점에서는 익산과 포항고속도로와 대덕분기점과 장성분기점에서는 고창담양고속도로(고속도로 14)와 이어진다.

참으로 많이도 지나다녔던 호남고속도로인데 이렇게 또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기도 하다.

 

 

여산휴게소 가기 2 Km 전 동물이동통로이였기에 앞으로 이 호남고속도로를 통과할 땐 꼭 오늘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호남고속도로를 동물이동통로를 통해 통과한 후 능선으로 오르니 고압송유관매설지역이란 경고판이 나타나고 잠시 평이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호남고속도로와 지나온 기맥 마루금 넘어 저 멀리 금북정맥 마루금도 가물거린다.

다시 능선을 타고 걸어가니 148봉 넘어 멋진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여유롭게 진행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잠시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걸어가니 다시 등로는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곳에는 벌목된 나무들이 쌓여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그 간벌된 지역을 지나니 벌목된 구간이 보이고 그곳 벌목된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 좌측으로 묘지가 보여 그곳으로 내려가 잠시 등로 좌측으로 떠 오를 일출을 기다리며 발 아래 펼쳐진 왕궁면 동봉리 마을을 살펴본다.

한동안 기다리며 일출을 기다리는데 나머지 3명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진행을 하고 두명만 남아 조금 더 기다리니 드디어 등로 좌측 뒤 저 멀리 운제산 갈매봉과 천호산 사이의 능선 위로 아름다운 일출이 밝아 온다.

 

 

한동안 묘지지대에 머물며 멋진 일출을 사진에 담은 후 나오는데 예쁜 야생화가 인사를 나누는 멋진 아침이다.

묘지를 지나 다시 정상적인 마루금을 타고 잡목을 헤치며 내려가니 금새 799번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양동재에 도착을 해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생각보다 많은 통행량이 있는 양동재는 익산시 여산면과 왕궁면의 경계에 있는 나즈막한 고갯마루로서 도로 좌측에는 양동버스정류장이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전주최씨경모제와 양동마을 및 연안이씨세장 이정석이 보인다.

더 상세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왕궁면 동봉리 양동마을에 대한 자료가 없어 더 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양동고개의 799번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잡풀이 우거진 묵밭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잡목의 저항이 심하다.

잠시 그 잡목들을 헤치고 오르니 능선 주위에는 녹슨 철조망이 보이는데 그 용도는 알 수가 없다.

잠시 주능선으로 오르니 잘 관리된 묘지 한기를 만나고 그 묘지 뒷쪽 잡목을 헤치고 들어가니 뚜렷한 정상 등로를 만나 좌측으로 진행을 해 본다.

잠시 진행을 하니 종교와 관련된 공원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지대를 지나니 등로 우측은 평이한 산하의 숲과 좌측으로는 벌목된 지대가 교차하는 마루금을 따라 비포장 임도로 진행을 해 본다.

비포장 임도를 타고 한동안 진행을 하다 보니 임도 우측 능선에 있는 돌탑을 만나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음도 이해를 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벌목된 지대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한동안 완만하게 올라 벌목지대가 끝나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잠시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동봉리쪽 마을을 내려다 보니 농촌은 벌써 보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듯한 그런 풍경들을 보는 시간이다.

그 동봉리 마을 뒷쪽 저 멀리에는 동상쪽 대부산 지나 호남정맥 마루금이 희미하게 보일듯 말듯 다가온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에 잠시 더 머물며 많은 사진을 담아 보는 시간이다.

 

 

바로 발 아래 펼쳐진 동봉리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을 살펴 본 후 우측 저 멀리 바라보니 그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지도를 살펴보니 완주군 봉동읍의 희미한 풍경이다.

전북 완주군 봉동읍의 읍소재지는 장기리로서 읍 동북부에 봉실산(372봉)과 옥녀봉(300봉)이 솟아 있을 뿐 대체로 50미터 내외의 낮은 구릉지와 넓은 평야를 이룬다.

고산천이 동남부를 흐르며 곳곳에 소규모의 관개용 저수지가 분포하고 쌀과 오이, 수박, 시금치, 포도 등이 많이 생산되며 봉동생강이 유명한 곳이다.

발 아래에는 용궁저수지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드리워져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이제 지나온 천호산 방향을 살펴보니 엷은 안개가 드리워진 마루금이 아름답고 그 천호산 좌측 저 멀리에는 지난 구간 걸었던 마루금도 펼쳐져 있다.

그렇게 한동안 조망과 풍경을 즐긴 후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 진행을 하니 멋진 소나무에 덩쿨식물이 자라며 열대우림의 풍경도 잠시 선물을 해 준다.

시대산 영모묘원 종이 코팅지를 보고 진행을 하니 갑자기 넓은 공터에 통나무로 만들어진 나무의자 3개가 길게 설치되어 있어 그곳에서 잠시 배낭 내려 물 한모금 마셔 본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통나무 벤취가 인상적인 풍경이다.

 

 

다시 벤취 쉼터를 지나 진행을 하니 181.1봉이라 생각되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고 살펴보니 봉우리 아래에는 묘지가 보이며 조망이 열려있다.

살펴보니 가야 할 마루금은 우측으로 열려있고 그곳 역시 벌목된 지대에 잡목이 자라면서 새로운 등로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끝자라 넘어 저 멀리에는 지금부터 올라야 할 용화산이 뾰족한 봉우리의 형태로 다가와 있다.

이제 온 산하는 완전히 파란 잎새가 뒤덮어 완전한 성하의 계절이 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좌측은 벌목지대이고 우측은 키큰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의 경계를 따라 진행을 하니 곧이어 36번 송전탑을 만나 통과를 해 본다.

송전탑을 지나 계속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더니 갑자기 콘크리트 수로가 나타나며 그 수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간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가끔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고 넓은 비포장 임도가 보이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1번 4차선 지방도로가 지나는 쑥고개 근처이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뽕나무를 만나 너무나 알맞게 익은 달콤한 오디를 따 먹으며 어린시절로 돌아가 보는 시간도 만들어 본다.

 

 

한동안 그 1번 지방도로 절개지 위에서 달콤한 오디를 따 먹으며 옛 추억을 떠올려 보고 다시 그 절개지를 타고 내려 와 1번 4차선 지방도로 위에 설치된 동물이동 통로를 타고 건너다 우측을 살펴보니 익산 IC가 가깝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번 지방도로는 목포와 신의주선이라고도 하는데 목포시를 기점으로 호남 지역의 인구와 산업이 밀집된 서부 평야지대(무안, 함평, 나주, 광주, 장성, 정읍, 김제, 전주, 완주, 익산)와 충청남도 중심부(논산, 공주, 연기, 천안) 및 대전광역시 그리고 수도권 남부(평택, 오산, 화성, 수원, 의왕, 안양)와 서울특별시를 관통한 다음 경기도 서북부(고양, 파주)를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시까지 뻗은 도로이다.

원래 구간 종점은 평안북도 신의주시이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후 구간은 군사분계선 및 북한 지역이라 자세한 정보를 구할 수 없는데 국도 제1호선의 많은 구간은 근대 이전부터 주요 도로로 이용되었다.

서울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어지던 의주로는 오랫동안 중국과의 사신왕래 및 교역에 이용되는 도로였고 서울에서 수원까지 구간은 조선시대 정조가 건설한 시흥로와 중복된다.

현재 국도 제1호선 노선은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설치한 것을 근간으로 하는데 충청남도 천안 이북 구간은 조선시대 대로와 거의 일치하지만 이남 구간은 일본의 미곡 수탈과 식민 통치의 목적에 따라 일부 변형되어 오늘에 이른다.

국도중에서는 가장 많이 이용했던 도로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동물이동통로를 타고 자동차 전용도로인 1번 4차선 지방도로를 통과하니 파와 고추를 심어 놓은 밭이 나타나고 그 밭 가장자리를 통해 작물이 다치지 않토록 조심하며 통과해 이제 잊혀져 가는 옛1번 2차선 구도로인 쑥고개에 도착을 해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 한모금 마셔 본다.

그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온 밭이 보이고 그 밭을 지나 1번 국도 위 동물이동총로를 지나 저 멀리 160봉으로 이어지는 지나온 마루금이 올려다 보인다.

쑥고개(1 4차선 차량전용 지방도로)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과 왕궁면의 경계로 도로 위의 동물이동통로를 건너서 마루금을 이어가는데 이곳보다는 옛 2차선 1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 쑥고개로 변한듯한 느낌이다.

이곳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를 징벌할 때 견훤의 아들 신검과 문무관졸에게 항복을 받았다는 탄현(숯고개)이라는  곳이기도 하는데 이곳을 쑥고개라 부르게 된 이유는 옛날 산적이 많이 출몰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항상 수비병을 배치한 곳이라 하여 수고개라 부르다 지금은 쑥고개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잠시 휴식 취한 후 거대한 은행나무 옆으로 나 있는 능선진입 등로를 타고 기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소나무 등로가 열리면서 아주 편안하게 진행을 해 본다.

경사가 급하지도 않은 좋은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다시 등로는 편백나무 등로로 변하면서 조금은 거칠어지고 가파라진다.

잠시 그 편백나무 등로를 타고 가파르게 오르니 많은 벤취들과 의자가 보이는 소세양신도비길 이정표를 만난다.

가람이병기선생 생가와 대나무숲길이 갈린다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이정표이다.

그 이정표 옆에는 둥근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삼각점 하나가 박혀있는데 낡아 잘 보이지도 않는데 지도를 살펴봐도 특이한 것이 없다.

어느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은 삼각점봉(172)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확실한지는 고증할 수 없을 듯 하다.

 

 

그 벤취 쉼터를 지나 한동안 오르막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온몸에선 굵은 땀방울이 샘물솟듯 끊임없이 흘러 내리며 등로를 적시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진행을 하니 다시 소세양신도비길이란 이정표가 서 있는데 살펴보니 상양마을과 대나무숲길이 갈리는 사거리 안부이다.

이곳 이정표 역시 가람 이병기 선생이란 이름이 자주 등장을 하는데 살펴보면

이병기(1891년 3월 5일에서 1968년 11월 29일)는 대한민국의 시조 작가 겸 국문학자로서 본관은 연안이고 호는 가람이며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는데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서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문헌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민족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과 서울대학교 강사 및 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는데 대표작으로 초, , 냉이 꽃 등이 있으며 저서에 국문학 개설과 국문학 전서 등이 있다.

 

 

이정표를 지나니 다시 멋진 소나무 군락지가 펼쳐지고 곧이어 활엽수 등로로 바뀌고 있다.

다시 온 몸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기 시작하며 등로는 점점 더 가파라지기 시작을 하는데 갑자기 안전 목책과 로프가 달려있는 곳도 나타난다.

그렇게 잠시 더 빡세게 오르니 오늘 산행 중 두번째 어려운 난관인 용화산 정상에 무탈하게 도착을 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추억의 사진 몇장 남기며 주위를 둘러 본다.

정상에는 잡목들로 인해 조망이 막혀있고 한가운데엔 무명 묘지 한기가 있으며 우측 나뭇가지에 종이 코팅지 하나 그리고 좌측에 이정표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용화산(342)은 전북 익산군 여산면, 왕궁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익산시지의 용화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초기까지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합하여 용화산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옥녀봉, 선인봉(선인), 노승봉(노승), 성태봉(성태)의 산줄기만 용화산이라 한다.

옥녀봉은 320미터인데 성인 30여명 정도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자연석굴이 있고 북쪽 후미에 있는 성태봉에는 둘레가 약 500보 정도의 석성이 남아 있으며 또 선인봉 동쪽 기슭에는 도산사 터가 남아있다.

그리고 이산에는 동산사 터, 상원사 터 등 몇 개의 옛 절터가 남아 있으며 서쪽 기슭에는 일산의 명승중의 하나인 황각동계곡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산군 산천조에는 군의 남쪽 12리에 군 입산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징벌 할 때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산관아에서 남족으로 12리쯤에 있는 산은

천호산에서 용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탄현(숫고개)에 해당한다.

이 탄현은 고려사의 추백제 군 정벌기에 우리군대는 황산군에 이르러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는데 신검과 그 동생 그리고 문무관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는 기사에서 보이는 황산군의 탄현을 가르키는 것이며 태조 왕건의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는 마성은 용화산의 석성으로 보인다.

지금도 용화산의 석성아래에는 견훤의 밑터라고 하는 마산 진터가 있다.
용화산의 동굴은 원수리 샘골인 동쪽기슭의 중턱에 20미터쯤 되는 암벽 중간지점에 있는 30평정도의 자연석굴이다.

굴 내부의 높이는 2미터에 깊이는 10미터로서 작은 샘이 있는데 약수로 이용된다.

혹자는 현재의 위치와는 반대편이 용화산쪽 기슭에 잇는 상원사 마을앞의 작은 동굴과 위로 통하는 굴이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로 이 굴에서 불을 때면 그 연기가 저쪽에서 나온다는 것을 들고 있다.

굴의 높이는 10미터쯤 되는 암벽에 있다.

이곳에 기생하고 있는 소나무뿌리를 이용하여 굴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통로를 만들었다.

이곳 정상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맛난 아침식사를 하고 과일로 허기를 달래니 이제서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용화산 정상에서 아침식사와 간식을 먹는 동안인 이른 아침에도 많은 지역 주민들이 정상에 도착을 해 얼마나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용화산인지 알려주고 있는듯 하다.

그렇게 용화산에서의 추억을 남기고 다시 배낭 메고 묘지를 지나 출발하니 붉은 색의 이정목이 서 있고 잠시 후 바위를 지나 직사공용화기 사격장 경고판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잠시 더 진행을 하니 주등로 앞에는 경고판과 함께 철조망이 쳐져 있어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우회하며 그 사격장을 통과해 본다.

 

 

잠시 사면 등로를 타고 진행해 다시 주능선으로 올라가 조금 더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전망바위가 보이고 그곳에서 바라본 미륵산과 미륵산성이 그림처럼 다가와 몇장의 사진을 담으며 조망을 즐겨 본다.

진행 방향인 우측으로 나즈막한 봉우리 하나가 보이고 그곳에서 좌측 미륵산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이 아름다운데 그 끝자락 우측에 KT중계소와 군통신탑이 올려다 보이고 그 좌측으로 이제부터 올라야 할 미륵산 우제봉이 보이고 그 바로 좌측으로 미륵산 정상부도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그 정상을 오르기 직전 하얀 바위로 쌓아 올린 미륵산성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며 강렬한 햇살을 받아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그 미륵산 좌측으로는 신룡리마을과 저 멀리 금마면의 고층아파트들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을 한다.

금마면의 유래는 백제때에는 금마저라 했으며 신라 경덕왕때에는 금마군으로 고쳤고 고려초에는 전주에 속했으며 고려 충혜왕 5년(1344)에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씨의 외향이라 하여 익주로 승격되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익산군이라 하였으며 군청의 소재지였다.

1914년 3월에 실시한 부, 군, 면의 폐합조치로 통폐합하면서 군내면(동고도리, 서고도리)과 미륵면(기양리,신용리,산북리,용순리,갈산리)을 합쳐 금마면이라 하였다.

일 때문에 내려 와 스치듯 지났던 곳인데 다시 이렇게 산상에서 내려볼 수 잇음에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그곳에서 조망을 즐긴 후 내려가니 또 다시 군부대 경고문이 보이고 곧이어 쌓다만 돌탑 2개가 보이는데 살펴보니 직진으로 용리산과 선인봉으로 갈 수 있는 갈림 삼거리이다.

잠시 용리산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기온이 오르면서 앞으로의 진행 상황이 걱정이 되어 포기하고 좌측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가 본다.

한동안 평이한 내리막 등로를 타고 묵은 헬기장 같은 공터를 지나 금새 15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아리랑고개 일명 다듬재에 도착을 해 잠시 쉬어 간다.

다듬재(아리랑 고개)는 익산시 금마면과 낭산면을 잇는 15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가고 있고 길 건너에는 또 다른 군부대가 보인다.

일명 아리랑고개라고도 하며 통신철탑과 수원백씨 세천비가 있고 오른쪽으로 여러 기의 묘지가 있다.

이곳은 다듬잇돌이 많이 나오는 고개라 하여 다듬재라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과 한쪽을 먹고 있는데 생각보다 큰 트럭들이 많이 통행을 해 곧바로 배낭메고 도로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산행을 이어간다.

 

 

지도에는 다듬재로 나와 있는데 이곳 주민들과 주변 설명판에는 모두 아리랑고개로 되어 있어 확실한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잠시 오르니 도로 우측으로 묘지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능선으로 접어드니 이곳도 역시 군부대 철조망이 등로 옆을 따라 오고 있다.

다시 계속 오르니 이제는 정정렬 명창길이란 이정목이 보이는데 조금은 특이한 형상이다.

정정렬은 근대 5명창에 넣기도 하는 사람으로 7세 때 이미 소리에 소질을 보여 부모의 뜻을 좇아 한집안 사람인 명창 정창업으로부터 소리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나 14세 되던 해에 정창업이 죽었기 때문에 이날치를 찾아가 사사했다.

이날치마저 2년 후 세상을 뜨자 마침내 독공을 시작해 40세 무렵까지 익산의 심곡사와 충남 홍산의 무량사 그리고 공주 갑사 등에서 독공을 마친 다음 마산에서 활동했는데 이미 그때 서울까지 명성을 떨쳤고 친지들의 권유로 1926년 상경하여 송만갑과 이동백 및 김창룡 등과 같이 활동했다.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조직되고 상무이사를 맡으면서 부터인데 그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판소리의 창극화에 힘써 1935년 춘향전, 심청전, 1936년 홍부전, 숙영낭자전, 1937년 별주부전, 1938년 배비장전과 옹고집전 등의 창극을 편극하여 공연하여 한국의 창극은 이때 전형을 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소리는 수리성 중에서도 가장 좋지 않다는 떡목이었는데 그는 이러한 성대의 약점을 다양한 리듬의 변화를 주는 이른바 부침소리를 개발함으로써 극복했으며 그가 40세가 넘어서야 활동을 시작한 것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창조의 과정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판소리에 계면조를 많이 도입했는데 이러한 그의 소리의 특징은 현대 판소리의 방향타가 되었고 춘향가와 심청가 및 적벽가를 잘했는데 특히 춘향가는 신식소리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정정렬이 중심이 된 소리로는 오케레코드판의 춘향가, 빅타레코드판의 춘향가, 폴리돌레코드판의 적벽가, 폴리돌레코드판의 심청가 등 전집이 전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당대 최고의 명음반으로 꼽힌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 신관사또 도임 대목으로 김소희, 김연수, 김여란, 박녹주, 이기권 등이 그의 소리를 이었으며 춘향가의 경우 김여란으로부터 최승희, 박초선이 배워 계승하고 있으나 그밖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이 명창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는 둘레길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정정렬 명창길이라 붙였다.

 

 

이제부터 뜨거운 태양열을 받으며 등로 좌측에 미륵산성을 두고 가파르게 올라 본다.

다시 온몸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리고 그 땀방울을 닦으며 한발 두발 오르니 드디어 그 복원된 미륵산성 위로 올라 지나온 용화산에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마루금을 살펴 본다. 

익산미륵산성은 1973 6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는데 고조선시대 기준왕이 이곳으로 내려와 쌓았다고 하여 기준성 또는 용화산성이라고도 부르며 마한 여러나라 중 하나가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산성도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이를 토벌하여 마성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이 바로 이 미륵산성이다.

산성의 길이는 약 1822미터에 높이 4에서 5미터이고 폭은 약 5미터로 익산지역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능선을 따라 성이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는 물 흐르는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데 여기에는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에는 작은성을 따로 쌓아 방어에 유리하게 하였으며 성안에서는 돌화살촉과 포석환 등 기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아직도 일부만 복원된 형태로 남아 있는 미륵산성에서 바라는 마음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제대로된 복원 사업으로 역사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래보는 시간이다.

 

 

미륵산성에서의 고운 추억을 몇장 남기고 다시 능선 숲으로 들어가니 그늘이 생기면서 조금은 시원한 기온이 느껴진다.

우제봉을 향해 오르는 도중 등로 우측 저 멀리 빼꼼히 올려다 보이는 KT 중계소와 군부대 통신탑을 올려다 보고 오르니 등뒤로 지나온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도 몇장의 사진을 남겨 본다.

다시 오르니 이제는 등로에 제법 큰 바위와 암릉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로프구간을 지나 드디어 미륵산 우제봉에 올라 주위 풍경을 살펴본 후 등로 우측인 북쪽으로 인공구조물들을 살펴 본다.

 

 

방금 전 지나온 용화산 좌측으로 천호산과 지난 구간 지났던 까치봉 쪽 마루금이 보이고 한가운데에 용화산을 두고 우측 저 멀리 금남정맥의 연석산과 운장산 자락이 박무속에 희미하게 다가온다.

너무나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에 취해 쉬지도 않고 또 다시 많은 사진을 남겨 본다.

지도를 살펴보면 어느 지도에는 이곳을 우제봉이라 하지만 또 어떤 지도에는 우측인 북쪽으로 통신탑이 있는 곳을 우제봉이라 부르기도 하기에 이곳 역시 통일된 지명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미륵산 우제봉에서 조망을 즐기며 과일로 목마름과 허기를 달랜 후 좌측 능선을 타고 오르니 금새 미륵산 주봉인 장군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정상은 문화재 발굴을 위해 정상부 상당부분이 출입 통제되고 있어 하루 빨리 발굴 후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몇 년전 올라 담았던 정상석은 사라지고 커다란 돌탑과 삼각점만이 외롭게 그 정상을 차지하고 있고 토요일을 맞아 많은 시민들이 올라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미륵산 장군봉(430.2)은 전북 익산시 금마면과 삼기면 및 낭산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평지 돌출형의 암산으로 흡사 호남평야에 홀로 솟은 삿갓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래 이름은 용화산이었으나 601(백제 무왕 2) 남쪽 기슭에 미륵사가 창건된 이후부터 미륵산이라고 불렸으며 봉우리가 사자 형상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자봉이라고도 한다.
미륵사는 17세기 무렵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지만 미륵산 북쪽 중턱의 심곡사는 건재한데 김제 금산사의 말사인 심곡사는 본디 현 위치에서 정상 쪽으로 200미터쯤 올라간 곳에 있었으나 100여 년 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신라 문성왕(재위 839에서 857) 때 무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심곡사의 그 후 연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미륵산 정상부인 장군봉에서 잠시 사진 몇장 담은 후 그늘에 설치된 벤취로 돌아 와 휴식을 취하며 과일을 먹고 있는데 이곳이 고향인 산친구 한명이 산불감시초소에서 판매하고 있는 시원한 캔 맥주 하나씩을 사 너무나 맛있게 마셔 본다.

그렇게 더위를 날리고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 추억을 남긴 후 북쪽을 살펴보니 화강암채석장으로 변해 산 자체가 통째로 사라질 위기에 빠진 낭산산이 보이고 그 앞쪽으로는 낭산저수지도 내려다 보인다.

바로 미륵산 아래에 있을 것으로 상상해 보는 심곡사를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심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서 신라 말기에 무염이 창건한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조선시대 중기에 허주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당우로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7호인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고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좌상과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조선 중기 중건 때에 조성된 것으로서 그 조각 솜씨가 빼어난 것이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7층 석탑 1기와 석종형부도 9기가 있는데 석탑의 기단부는 원형이 보존되어 있고 그 위의 7층탑신은 후대에 와서 새로 안치한 것이다.

기단부에는 정교한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어서 원래의 석탑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음에 잠시라도 들려 이 역사 깊고 아름다운 심곡사를 둘러 볼 수 있기를 바래 본다.

 

 

한동안 그곳 미륵산 정상부인 장군봉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이제부터는 비산비야도 아닌 고속도로와 같은 포장도로를 타고 한동안 진행을 해야 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뜨거운 태양과 지열로 인한 무더위를 걱정도 해보는 시간이다.미륵산성 발굴조사를 위해 파헤쳐진 등로 옆 우회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직진하여 남쪽으로 가면 미륵사지 발굴 현장으로 하산할 수 있지만 오늘은 그곳이 아닌 우측 내리막 등로를 타고 서쪽으로 진행을 해야 하기에 복원중인 미륵사지터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의 터로 익산 금마면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에서 641)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 때까지도 성황을 이루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석탑의 시원으로 불리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과 통일신라대의 당간지주(보물 제236), 건물지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마치 세 개의 절이 합쳐진 모양의 삼원일가람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한 사찰이며 막새 기와류와 명문이 있는 기와, 토기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완벽하게 복원이 되면 제일 먼저 내려가 둘러보며 백제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비포장 임도같은 넓은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미륵산 정상부로 오르고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미륵산인지 알 수 있었던 시간이다.

한동안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멋진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추억한장 남기며 살펴보니 금마와 삼기을 지나 저 멀리 익산시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다시 한동안 더 내려가니 등로가 온순해지고 곧이어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미륵사지 하산길과 우측으로 간재선생 묘소가는 등로가 갈리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종주대는 우측 간재선생 묘지방향으로 들어가는데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직진의 미륵사지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 갈림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등로 양옆으로는 식재된 나무들이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같은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보이지 않던 등산객들이 반대방향에서 미륵산을 향해 걸어 오는데 살펴보니 미륵산 정상보다는 둘레길을 걷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그렇게 한동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또 다시 갈림 삼거리에 이정표 하나가 서 있고 살펴보니 간재선생묘소가는 갈림 삼거리로서 우측으로가면 간재선생 묘소가 직진 방행으로는 종주대가 진행해야 할 기양저수지 방향 표시가 되어 있다.

이곳에서 간재선생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간재 전우선생(1841에서 1922)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로 고향이 전북 익산이며 호가 간재인데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은 계화도이고 묘지는 이곳 고향 익산에 있다.

선생은 임헌희 문하에에서 20년간 학문을 배웠으며 고종19(1882) 벼슬에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강탈되자 선생은 통분하였으며 스스로 귀향하여 도학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도학만을 이야기한다고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22년까지 이곳에서 도학을 가르치며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정기를 진작하는데 일생을 바쳤던 전우선생의 성리학적 연구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되어 있다.

 

 

다시 우측 간재선생 묘지가는 등로를 버리고 직진의 기양저수지 방향으로 진행을 하니 간재 선생길이란 이정목이 등로 옆에 서 있다.

미륵사지 출발점과 미륵사지 조착점으로 이정표가 되어 있는데 어디에서 아디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나즈막한 능선을 타고 조금 더 진행을 하니 다시 갈림 사거리가 나타나고 그곳에도 이정표 하나가 서 있는데 우측으로 여전히 간재선생 묘지가는 방향과 지나온 방향으로 미륵사지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잠시 능선으로 들어 진행을 하니 큰 소나무에 덩쿨식물이 올라가며 넓은 잎을 나풀거리는 모습이 마치 원시림에 들어 온 듯 기분 좋은 시간이다.잠시 나즈막한 봉우리를 넘어 내려가니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그 묘지지대 넘어 저 멀리 연등리 마을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익산시 삼기면 연등리는 1914년 연동, 채산리, 석불리, 장항리의 전 지역과 죽청리, 여산군 서산면의 신동 각 일부로써 구성되었는데 연동마을은 본시 방죽 연등동제가 있던 곳으로 연등동은 이두자로 로 읽어야 하니 연들골의 표기다.

그 묘지지대를 내려가니 다시 간재 선생길이란 둘레길 이정목이 보이고 곧이어 죽청마을 이정표를 만난다.

삼기면 연등리 죽청과 장항동 마을은 대밭이 많아서 푸르다 하여 대파라니에서 죽청이라는 설과 또 바로 옆 골짜기 이름이 큰골이고 예전에 넓직한 곳을 대판이라 했으니 그런 뜻의 대판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장항동은 그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길게 빠져있어 본시 이름이 노루목인데 그것을 한문자로 표기한 마을이란 설이 있다.

그 이정표를 지나니 넓은 논에 모내기를 막 끝낸 들판이 나타나고 그 논둑을 타고 거목의 왕버들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해 본다.

 

 

한동안 그 민가 뒷쪽에 있는 거목의 왕버들 아래에서 휴식을 취한 후 그 민가를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돌아 나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가니 이곳 민가는 옥수도예이다.

잠시 걸어가니 도로 양편에는 키 큰 쑥이 하얀 꽃을 피워 밭을 이루고 지나온 등로 저 멀리에는 방금 전 내려 온 미륵산 정상부가 벌써 까마득히 멀어져 가고 있다.

잠시 걸어가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 사거리에 도착을 하고 그 도로를 건너 인삼밭을 우측에 두고 소로를 통해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도로 우측으로는 연등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도로를 건너 오르니 등로 좌측으로는 묘지지대가 나타나고 이제부터 등로 우측에 인삼밭을 두고 좌측에는 식재된 듯한 소나무 사이를 통해 걸어 본다.

다시 인삼밭이 끝나고 묘지와 밭이 나타나는데 밭에는 비닐을 씌운 고구마밭이 많이 생소하게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가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지나 온 비산비야의 마루금과 그 끝자락에 드높게 솟아 있는 미륵산의 인공구조물과 우제봉 그리고 장군봉이 아름다운 산줄기를 만들며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게 뜨거운 태양열을 온몸으로 받으며 걸어가니 산행의 어려움은 덜었지만 발바닥이 불이 난듯 뜨거워지고 온몸에 열기가 가득 채워지며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다시 등로 좌측으로 인삼밭과 우측으로 드넓은 고구마밭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이제 등로에는 개망초가 완전히 뒤덮어 영화 한편 찍으며 진행을 해 본다.

그 개망초 밭을 지나니 좌측으로 공장인듯 민가같은 큰 건물을 지나 삼기주유소가 있는 23번 2차선 지방도로에 도착을 한다.

그 23번 지방도로에서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한참을 걸어가 보는데 기온이 오르면서 무척 무더위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23번 2차선 지방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300미터 전방에 718번 도로와 만나는 사거리가 나타나고 좌측으로는 황등을 우측으로는 심곡사와 낭산으로 가는 방향 표시가 되어 있고 진행 방향인 직진으로는 함열 지나 논산으로 갈 수 있다는 도로 표시판이 눈에 보인다.

잠시 더 걸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커다란 삼기농협 창고가 보이고 도로 좌측으로 합동택배 지나 드디어 석불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그곳 석불사거리에서 도로 좌측에 있는 풍성슈퍼 휴게소에 들려 아이스께끼 하나씩 물고 시원한 막걸리 한잔으로 더위를 달래며 잠시 쉬어 간다.

석불사거리는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도로로서 석불리는 전에는 연동에 속했었는데 1985년 한 분리로 독립되었고 보물 45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있다.

태봉사는 현재에도 석불리에 있는 절이고 근처는 마을이다.

그렇게 더위를 식히고 잠시 석불사거리 좌측에 있는 석불사에 들려 석불좌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불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 돌아가니 도로 바로 옆에 석불사가 보이고 그 앞에는 빗돌과 함께 미륵산석불사 일주문이 보인다.

석불사는 본래 대한불교화엄종에 소속된 사찰이었으나 1994년 정운이 주지로 부임한 뒤 한국불교화엄종으로 소속을 바꾸었고 현재 한국불교화엄종의 본산이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백제 무왕(600에서 641)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3년에 폐사로 남아 있던 절터에서 석불이 발굴되어 이를 보호하기 위해 미륵전을 짓고 사찰 이름을 석불사라 했으며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 때의 기와도 많이 발굴되었다.

1976년 휴암이 주지로 부임하여 10여년 동안 대웅전과 요사, 산신각, 일주문 등을 세우는 등 크게 중창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종각, 요사채, 일주문 등이 있는데 이 중 대웅전은 1990년에 새로 지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 석불좌상을 비롯하여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의 삼존불과 지장보살, 신중, 독성, 산신, 제석천룡의 탱화가 있으며 괘불함과 소종, 법고 등도 놓여 있다.

1908년에 제작된 제석천룡탱화 이외에는 모두 최근에 만든 것들로서 1992년에 세운 일주문에는 서경보가 쓴 미륵산석불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보물 제45호로 지정된 익산연동리석불좌상이 전하는데 1963년에 이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0년에 대웅전의 주불로 모셔졌다.

이 석불좌상은 얼굴 부분이 파손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칼로 얼굴을 내리쳤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하며 현재의 얼굴은 새로 만든 얼굴이다.

 

 

다만 석불사의 명물인 석불좌상은 문을 닫고 염불을 하고 있어 보지 못하고 나와 아쉽기만 하다.

이제 석불사를 나와 다시 23번 도로를 타고 서쪽의 익산외국인투자지역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뜨거워진 포장도로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장난이 아니다.

잠시 걸어 진행하니 도로 우측으로 몇개의 중국요리식당이 보이고 한식식당 입간판도 보여 후답자들은 간식만 준비한 후 이곳에서 매식을 하면서 진행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그 23번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익산외국인투자 지역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일부분에만 큰 건물들이 들어 와 있어 최근에 분양을 하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그 익산외국인투자 지역의 거대한 건물들이 보이는 첫번째 삼거리에서 직진의 23번 도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꺽어 산단오룡길을 따른다.

최근에 지어진듯한 깨끗한 건물이지만 어떤 용도의 무슨 건물인지는 알 수가 없어 궁금하기만 한데 그 건물지역을 지나자 분양이 안되었는지 넓은 공터가 덩그란히 남아 있어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던 시간이기도 하다.

 

 

한동안 산단오룡길을 타고 걸어가니 구정마을 가는 도로 이정판이 보이고 그곳 삼거리에서 이제 직진의 산단오룡길을 버리고 우측으로 꺽어 진행을 해 본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바람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사용하지도 않고 사람도 살지 않는 곳에 돈만 들여 조성된 공원이 탁상공론의 일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다시 뜨거운 태양열을 받으며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옥실마을과 검지마을 가는 방향의 도로 표지판이 보이고 그곳에서 옥실마을과 검지마을 가는 방향의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90도 꺽어 진행을 해 본다.

삼기면 오룡리는 1914년 오룡리, 구정리, 제내리, 검지리, 옥실리의 전 지역과 사오랑리, 사제면의 원촌리 각 일부로 구성되었는데 오룡리란 이름은 풍수설에 오룡쟁주형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오룡리에는 여러 마을이 있는데 옥실은 전에는 검지에 속했었는데 1985년 한 분리로 독립되었다.

검지와 제내, 북간도 및 서당터는 익산 구지에도 검지에 방죽 저제제가 있고 제내에는 금음조제가 있다고 했는데 검지는 본시 검지로 썼으니 목과 관계된 이름일 것이고 제내는 금음조제의 안쪽마을이며 북간도는 북향한 마을로 만주의 북간도처럼 춥다는 뜻에서 익살스럽게 일컫는 이름이다.

도마리와 큰뜸, 작은뜸 및 푸다리의 도마리는 텃마을이라는 뜻으로 도는 옛 지명에 터라는 말로 많이 쓰이고 마을의 준말로서 말에 접미사 이가 붙어 마리가 되었다.

텃마을은 근처에서 먼저 이루어진 오래된 마을에 붙는 이름으로 푸다리에는 푸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다.

구정은 근처에서 오래된 우물이 있어 묵은샘 즉 구정이 되었고 사오랑은 마을 형태가 사오리와 같아서 일컫던 이름이다.

 

 

공단으로 조성된 지역에 기업들이 입주를 하지 않아 드넓은 공터엔 잡풀들만 자라고 있어 어느 세월에 완공된 공단을 볼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잠시 걸어 올라가니 검지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그곳 삼거리에서 직진의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나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본다.

그런데 모든 버스정류장마다 사리장엄이란 도자기 그림과 설명이 되어 있어 찾아보니

사리장엄이란 부처님이나 스님들의 법신을 다비하고 나온 사리를 봉안하는 갖가지 장엄으로 사리를 담는 사리구와 이 사리구를 탑 속에 봉안하는 사리장치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사리는 진신사리와 법신사리로 구분되는데 진신사리는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것을 말하고 법신사리는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과 대승 및 소승불교의 모든 경전을 말한다.
일반적인 사리장엄으로는 사리를 담는 사리병이 있고 다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합이 있다.
이제서야 사리장엄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시내버스가 지나가고 몇가구의 민가들을 지난다.

최근에 새로 지은듯한 멋진 민가가 보이는가 하면 오래된 건물이 허물어져 귀신이 나올듯한 사람이 살지 않는 민가들도 함께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그 민가가 몇채 있는 마을을 지나 걸어가니 다시 최근에 세워진듯한 건물 몇동이 보이는 사거리 도로가 보이고 그 도로 건너에는 새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새말공원 내로 들어가니 보이는 사람 한명 없이 종주대 5명이 전세를 놓고 놀이를 하듯 걸어가는 시간이다

잠시 걸어가니 공원 중앙에 수돗물이 보이고 다가가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물이 제법 잘 나온다.

시원하게 물 한모금 마시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으며 무더위를 식히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남아 있는 등로도 모두 포장도로에 뜨거운 태양열이 있는 곳이기에 조금은 걱정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말공원의 수돗가에서 무더위를 식히고 도로로 나가니 민가가 보이는데 민가 담에는 산단도마2길이란 도로명이 붙어 있다.

그도로에서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니 다시 사거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도 포장도로에서 나오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공단을 조성하기 위해 정리된 공장부지의 공터를 지나 방향만 보고 진행을 한다.

익산외국인투자 지역으로 공단이 조성되면서 대동금강기맥 마루금도 완전히 바뀌어 후답자들은 또 새로운 등로와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산단도마마을 이정석이 서 있는 사거리에서 도로 건너 남겨진 공터를 따라 걸어가니 좌측 진행 방향으로 웅포와 삼례 및 전주가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넓은 공터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성광벽돌공장의 높은 굴뚝을 목표로 걸어가니 다시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그곳에서 잠시 발길 멈추고 뒤돌아 보니 지나온 익산외국인투자 단지의 드넓은 공터와 건물들이 보이고 그 저멀리 끝자락에는 아름다운 익산의 진산인 미륵산이 멀어지고 있다.

 

 

산단도마마을 이정석이 서 있는 사거리에서 도로 건너 남겨진 공터를 따라 걸어가니 좌측 진행 방향으로 웅포와 삼례 및 전주가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넓은 공터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성광벽돌공장의 높은 굴뚝을 목표로 걸어가니 다시 1차선 포장도로와 만나 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도로 좌측으로는 몇명의 아주머니들이 빈 밭에 비닐을 씌우며 고구마순을 심고 있고 그 반대쪽 저 멀리에는 경운기로 로타리를 치고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잠시 더 걸어 들어가니 도로 좌측으로 인삼밭이 보이고 잠시 들려보니 파란 인삼 잎이 아름답게 잘 자라고 있다.

 

 

높은 굴뚝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그 굴뚝은 성광이란 벽돌제조공장의 굴뚝이었는데 벽돌을 포장한 포장지에는 현대요업이라 적혀있다.

사진 한장 남기는데 트럭에 벽돌을 옮기던 트럭기사가 사진을 담는다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데 왜 트럭을 사진에 담느냐고 한소리 한다.

트럭은 전혀 관심이 없고 벽돌을 사진에 담는다고 하니 이해불가라면서 여전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데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진 한장 남기는 것도 불쾌해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잠시 더 걸어가니 호남선 KTX 철로가 보이고 그 아래 도로에는 상마와 상지원 그리고 부여를 가는 방향의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KTX 철로를 건너니 그 좌측 2차선 포장도로 위에는 낭산면 도로 표지만이 보이고 도로 우측으로는 밀밭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걸어가고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 좌측으로는 723번 2차선 포장도로가 보이고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방금 전 지하통로를 통해 건넜던 KTX 철로 위로는 고속철도가 긴 기적소리를 남기며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계속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나고 좌측으로 사거리가 보이는데 그 위에는 상마사거리란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지도에는 향남사거리라 되어있는데 실제 도로 위에는 상마사거리라 되어 있으니 상마사거리라 따르기로 한다.

상마사거리는 전북 익산시 삼기면 상마리 사거리로 삼례와 웅포를 잇는 723 4차선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교통량이 상당히 많은 곳이다.

벽돌공장 소로에서 나와 좌측으로 꺽어져 723번 도로를 건너서 우측 도로로 가면 좌측에는 인공수로가 있다.

 

 

상마사거리에서 도로를 건너 상마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니 2차선 도로가 이어지고 그 도로 좌측으로는 인공수로가 많은 물을 담아 흐르고 있다.

사거리를 건너 도로 표지판을 살펴보니 방금전 지나온 직진 방향으로는 상지원 방향이 우측인 남쪽으로는 전주 방향이 그리고 좌측인 북쪽으로는 부여가는 방향이 보인다.

도로 우측으로는 드넓은 평원의 밭을 두고 좌측으로는 인공수로를 두고 걸어가니 다시 도로는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고 2차선 도로는 좌측으로 보내고 이곳에서 우측의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온몸에선 덥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이 전부이다.

도로 우측으로 수많은 비닐하우스를 지나 논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도로 좌측 인공수로 건너편에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에는 형제농원이란 입간판이 서 있다.

그 앞을 지나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을 하는 시간이지만 무더위로 온몸에선 다시 굵은 땀방울이 도로 위로 점점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 도로 우측에는 모내기를 막 끝낸 논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자 거대한 비닐하우스 한동이 나타난다.

그곳을 지나니 도로 좌측 인공수로 넘어에는 인삼밭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드넓은 밭에 마늘과 고구마가 심어져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계속 그 지루한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시간이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고도차이가 없어 그나마 진행에 큰 어려움은 없다.

앞서가던 산친구 한명이 뒤돌아 서서 사진을 담으며 장난을 치고 있어 얼마나 심심한지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진행하니 다송리 마을의 민가가 보이고 그 민가를 지나니 인공수로를 좌측으로 건너 시멘트 도로를 따라 진행되는 등로와 직진의 비포장 등로가 갈리는데 일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직진으로 또 일부는 좌측 다리를 건너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는 시간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주변에는 드넓은 고구마 밭이 나타나고 그렇게 다시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는 우측 나무 다리를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로 이어지고 있다.

즉 방금 전 만났던 민가에서 좌측 다리를 건너 포장도로를 따르지 말고 그냥 직진을 해 비포장 임도를 따르면 결국 이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다송리 방교마을 역시 지형을 본떠 동네 이름을 붙인 것으로 대개 세 갈래로 갈라진 곳의 지명은 방아다리로 불리는데 방교란 방아다리의 음과 새김을 일부 따서 표기한 것이다

상마마을은 마을입구에 심은 2그루의 향나무가 마을의 상징이 되어 향나무 마을로 불렸다고 한다

이 지명이 형님을 성님이라고 하는 전라도 지역의 구개음화로 인해 향나무가 상나무로 바뀌면서 상나무 마을로 여기에서 다시 상말과 상마로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시멘트 포장도로로 나와 좌측으로 걸어가니 도로 우측에 진주정씨 공동묘지가 보이고 진행 방향 앞 저 멀리에는 오늘 산행 날머리인 23번 지방도로와 그 옆에 오일뱅크의 정금주유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 그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가니 드디어 23번 4차선 지방도로에 도착을 하고 높은 중앙분리대를 불법으로 건너지 못해 우측으로 돌아 공사중인 도로 앞 작은 중앙분리대를 건너 다시 정금주유소 방향으로 뒤돌아 내려간다.

 

 

드디어 오늘 산행 날머리인 상금주유소 앞에 도착을 해 산행을 마무리 한다.

 

23번 지방도로는 전남 강진에서 충남 천안을 잇는 23번 국도가 지나가는 도로를 만난다.

주차된 애마로 가 신발을 갈아 신고 배낭을 벗으니 그나마 살것 같지만 점심이 다가오면서 뜨거운 태양열과 지열 그리고 무더운 기온으로 인해 점점 더 산행에 어려움이 가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보다 일찍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애마를 몰아 함열로 들어가 샤워 후 색다른 먹거리인 토끼탕으로 허기를 달래고 조금은 이른 시간에 서울로 출발해 일찍 복귀할 수 있었다.

 

이제 대동금강기맥도 두번만 더 내려오면 마무리가 될 것이고 남아 있는 팔공기맥만 가을에 마무리를 하게되면 올해 계획했던 9기맥 산행도 마무리가 될 것이니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진행을 이어가 보도록 하는 시간이다.

다음 구간도 무더위 잘 극복하며 즐거운 산행이 되길 바라며 산행후기를 정리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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