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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맥산행(완료)/호미(낙동·무·완)

호미지맥 마지막 제5구간 흰날재에서 호미곶까지 산행후기

by 칠갑산 사랑 201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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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포항시의 호미기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2015년 03월 21일(토)과 22(일)-토요 무박 일요일 산행

산행날씨 : 따뜻한 봄처럼 갑자기 오른 기온으로 약간의 박무가 있었지만 산행하기 좋았던 날씨

산행온도 영상 03도에서 영상 15도

산행인원 : 총 19명-3450 온누리산악회 호미기맥 종주대 8명과 해파랑길 제14코스 기획테마팀 11명과 함께

산행코스 : 흰날재 육교(31번 4차선 지방도로 위 육교)-(재)동산공원묘원 2.3 Km 이정판-시멘트 포장도로-무우시래기건조장-월성손씨묘지입석-

                 비포장임도-동산공원묘지 1 Km 전방 이정판-동산공원묘지입구-동산공원묘지-동산공원묘지 관리건물-(재)동산공원묘원안내판-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나무계단-금오산(230.4봉) 삼각점과 산불감시초소-무명묘지-복수초군락지-무명묘지-비포장임도-해파랑길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15.7 Km, 동산공원묘지 2.5 Km와 동해면 마산리 5.3 Km, 동해면 상정리 2.7 Km와 포항시청 20.3 Km)-

                 해파랑길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15.4 Km, 동해면 흥환리 3.1 Km, 동해면 상정리 3.0 Km와 포항시청 20.6 Km)-능선진입-암릉등로-

                 포란산(212봉)-201봉-잡목구간-무명묘지-일출-윷판재-무명묘지-시멘트포장도로-능선진입-처사해주오공과 전주이씨 합장묘지-

                 잡목구간-무명묘지-잡풀초목지대-공개산 갈림 삼거리-공개산(213.8봉) 정상판과 삼각점-공개산 갈림 삼거리 복귀-무명묘지-이장된

                 묘지-잡목구간-낙엽등로-비포장임도-호미곶둘레길안내도 옆 벤취에서 아침식사-해파랑길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11.9 Km, 구룡포

                 해수욕장 5.0 Km, 동해면 상정리 6.5 Km와 포항시청 24.1 Km)-능선진입-까치바위 전망대-말목장성 감사나눔 둘레길 이정표(봉수대

                 300미터, 전망대와 봉수대)-말목장성-이정표(말목장성탐방로와 말목장성옛길)-장기목장의 석성 설명판-구룡포 말 목장성 안내도-

                 이정표(전망바위 300 m, 봉수대 팔각정 150 m, 말봉재 1.2 Km와 정자박바위 1.5 Km)-발산봉수대 설명판-말 형상-봉수대팔각정-

                 능선진입-전망바위-비포장임도-시멘트포장도로-해파랑길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10.1 Km, 동해면 상정리 8.3 Km)-비포장임도-

                 해파랑길 제15코스 이정표(대보저수지 7.8 Km와 임도사거리 2.2 Km, 도구해변 15.8 Km와 흥환보건소 4.1 Km)-능선진입-

                 명월산 (189봉) 산불감시초소-능선진입-소나무 군락지-장임랑진양하공묘지-비포장임도-해파랑길 15코스  9 Km 지점 안내판-

                 우물재산(180.1봉)-잡목지대-무명묘지-호미곶 둘레길 안내도와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7.5 Km, 동해면 상정리 10.9 Km, 동해면 발산리

                 학달비재 해안도로 2.4 Km, 구룡포감사연수원 4.0 Km와 절골 해봉사 2.0 Km)-시멘트 포장임도 갈림 삼거리-비포장임도-능선진입-

                 무명묘지-180.6봉 삼각점-소나무 군락지-무명묘지-비포장임도-둘레길 1, 2코스 안내판-소나무 등로-무명묘지-이정판(호미기맥

                 끝자락 포토존과 1코스 둘레길)-묘지지대와 포토존-고금산(122봉) 우회등로-지뢰매설 안내문-묘지지대-원형철조망-시멘트 포장도로-

                 해파랑길 제15코스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1 Km, 삼정해변 12 Km, 대보저수지 1.5 Km, 흥환보건소 13.4 Km)-929번 4차선 지방도로

                 지하통로-해파랑길 제15코스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0.8 Km, 삼정해변 11.8 Km, 대보저수지 1.7 Km, 흥환보건소 13.6 Km)-

                 해맞이광장 버스정류장-2차선 지방도로 통과-호미곶마을 이정판-해파랑길 제15코스 이정표(호미곶해맞이광장 0.5 Km,

                 삼정해변 11.5 Km, 대보저수지 2 Km, 흥환보건소 13.9 Km)-호미곶 이정석-새천년기념관-등대박물관-육지의 상생의손-바다의

                 상생의 손-호미곶-산행종료-호미곶해수탕에서 샤워-기획테마팀 만나 단체사진-포항 죽도시장으로 이동-점심식사 및 호미기맥 해단식-

                 서울복귀

산행거리 : 약 21.08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잘 훈련된 호미기맥 종주대와 발 맞춰 봄 기운을 맞으며 여유롭게 06시간 06 (04시 31부터 10시 37분까지)

교통편 : 3450온누리산악회 호미기맥 전용 넓은 25인승 버스 이용

호미기맥이란???

부산 몰운대에서 북진하는 낙동정맥이 영축산,가지산,고헌산,백운산을 지나 경주의 단석산으로 이어지며 북진해 올라간다.

단석산에 이르기전의  백운산은 붕우리가 4개 있는데 맨 아랫쪽의 892m봉이 주봉이고  그 북쪽으로  860m봉, 845m봉, 855m이 연이어 있는데 호미기맥은 그중 아래에서 세번째 봉인 845m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천마산(620.5미터 봉)과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치술령(766.9미터 봉)에서부터는 북동진하여 포항의 호미곶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호미기맥이라 부른다.

이 산줄기는 도상거리 약 98 Km나 되는 산줄기로 형산강의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여 일부에선 형남기맥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통상은 땅끝기맥과 같이 지역의 특수성을 살려 호미기맥이라 부른다.

이산줄기 북으로 흐르는 물은 형산강으로 들고 남쪽으로 흐르는물은 태화강으로 들며 일부는 장기천, 대화천으로 들어 동해바다로 들어간다.

 

 

호미기맥 산행을 마무리하며 또 다른 맥 산행을 꿈꿨던 아쉽고 즐거웠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어제 회사 Outing으로 공주와 대전의 계룡산 삼불봉을 산행 후 밤새 이야기 나누며 마셨던 참이슬을 뒤로하고 오늘 온누리산악회에서 실시하는 시산제에 불참하게 돼 아쉽지만 먹고 사는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어렵게 집으로 복귀해 잠시 잠을 청한 후 다시 호미기맥 마무리를 위해 떠나는 몸이 무겁지만 많은 산우님들의 호응으로 인해 마음만은 가볍게 출발하는 시간이 되었다.

원래 계획은 땅끝기맥 산행을 마무리 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하려고 계획을 잡았었는데 남녘에 내린 폭설과 등로 상 암벽에 붙어 있는 빙판으로 인해 땅끝기맥 산행을 다 마무리 하지도 못하고 이곳 호미기맥을 시작하고 또한 일정도 예상과 달리 두어번 변경이 이뤄지며 많은 종주대들이 함께하지 못하다 보니 산행을 진행시키는데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무탈하게 마지막 구간을 출발할 수 있게 되니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로운 기맥으로 기억이 될 듯 하다.

 

산행 초반부터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하다 보니 쉬엄 쉬엄 천천히 걸어 보지만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고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금오산을 어둠속에 아쉬움을 남기며 통과를 한다.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다 보니 임도 좌측으로 212봉이 올려다 보이는데 많은 종주대들이 오르지 않고 그냥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하였는지 제대로 된 자료가 많지 않아 시간도 충분하기에 올라가 보기로 한다.

오르다 보니 암릉구간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잠시 등줄기에 땀방울 흘리며 오르니 잡목이 우거진 정상에 누군가 포란산이란 띠지를 걸어 놨다.

그 포란산을 지나 다시 201봉을 가 보니 이곳 역시 잡목만 무성하고 아무 표식도 없어 우측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내려가다 무명 묘지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두꺼운 구름을 뚫고 힘들게 올라오는 아침 일출이 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또 하루의 찬란한 아침을 맞이한다.

매일 만날 수 있는 일출중 하나이지만 어렵게 땀방울 흘리며 만날 수 있는 오늘 아침같은 일출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고운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다.

 

시간이 걸려 산행 들머리에 도착을 하던 애마도 오늘이 마지막 구간임을 알고 있는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인 새벽 3시 40여분에 산행 들머리인 흰날재 육교 옆에 도착을 해 30여분 간 더 취침 및 휴식을 취한 후 새벽 4시 20여분에 버스에서 내려 산행 준비 후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3시 30여분이다.

기획테마팀을 구룡포항으로 보내고 천천히 그 흰날재 31번 4차선 포장도로 위에 설치된 낡은 육교를 통해 (재)동산공원묘원 2.3 Km란 이정판 옆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간단한 단체 사진 한장 남기고 호미기맥 마지막 구간을 출발해 본다.

 

흰날재는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석리와 상정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포항과 구룡포를 잇는 31번 국도가 지는 곳으로 희날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백토광산이 있어서 예전부터 하얀 가루가 많이 날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다른 전설은 신라 어느 왕이 이곳을 돌아보다가 봉상현(장기현의 옛 이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양이 빛을 잃고 밤과 같이 캄캄해졌다고 한다.

놀란 왕이 일관을 불러 그 이유를 물어 보니 일관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몸으로 경솔하게 나다니면서 오랫동안 궁을 비워 두었기 때문에 하늘이 크게 노하여 빛을 거두어 간 것이라고 말하였기에 왕은 크게 뉘우치고 환궁을 서둘게 되었다

어둠 속으로 막 고개를 넘자 태양이 다시 빛을 얻게 되어서 밝은 날이 되었다는 뜻의 흰날재, 희날재, 히나리재 등으로 불려졌다고 하는 고개 이름이 붙은 곳이다.

신라 때 해가 빛을 잃었다가 다시 밝아졌다는 전설을 간직한 히날재(흰날재, 히나리재)에 유래한 이름이다. 외적의 침입을 받아 피를 많이 흘렸다는 또 다른 전설에 따라 피날재로 불리기도 한다.

히날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흔히 백토라고 불리는 벤토나이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 몇몇 광산업체가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흰날재 육교를 건너 들머리인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간단히 단체사진 한장 남기고 (재)돈산공원묘원 방향으로 오르기 직전 방금 전 건너 온 31번 4차선 포장도로와 육교를 사진에 담은 후 곧바로 산행을 출발 한다.

잠시 넓은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기온이 오르며 새벽 시간인데도 산행하기에 아주 좋은 기후조건이다.

잠시 걸어 들어가니 둔덕을 넘어 평이하게 걸어가고 곧이어 임도 좌측에 활짝 핀 매화꽃과 무우시래기건조장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임도 좌측으로 월성손씨묘지가는 비포장 임도와 그 앞에 묘지석이 서 있다.

 

여전히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으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평이하게 걸어가니 동산공원묘원까지 1 Km 남아 있다는 이정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곧이어 입산통제 안내판이 서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좌측으로 흐르는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우측의 동산공원묘지 방향으로 오르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더 들어 올라가니 나뭇가지에 많은 선답자들의 띠지가 반갑게 반겨 준다.

 

잠시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임도 우측으로 드넓은 동산공원묘지들이 어둠속에 희미하게 펼쳐진 모습이 눈에 들어 오는데 아직도 어둠이 짙어 그 규모는 정확하지 않다.

잠시 더 올라 잡목으로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묘지 제일 윗단에서 묘지 앞 잔디를 따라 우측으로 한동안 걸어가니 등로 우측 저 멀리 지난 구간 통과한 조항산의 이동통신탑과 방송국 송신탑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어 어렵게 사진 몇장 남겨 본다.

 

그 묘지들을 지나 진행하니 묘역 좌측으로 봉우리가 보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발길을 돌려 보지만 잡목이 가득해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묘지들을 따라 우측으로 내려가 본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묘지 우측 아래에 공원묘역을 관리하는 듯한 민가 건물 한채가 보이고 그 좌측 등로 바로 옆으로 파란 지붕을 한 또 다른 건물 한채가 보이는데 아마도 공원묘역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들을 관리하는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그 파란 지붕을 한 건물 좌측으로 내려가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그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니 커다란 (재)동산공원묘원 안내도가 서 있는 갈림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도로 우측으로 여전히 묘지들이 보이더니 금새 차량 차단막이 있는 곳을 지나 진행하게 된다.

 

그 차량차단막이 있는곳 우측으로 능선 진입 등로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올라 걸어가면 나무 계단이 설치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이마에 땀방울이 흐를 정도로 걸어 오르니 잡목지대를 지나 소나무 등로가 이어지더니 금새 금오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 표시판도 전혀 없이 삼각점 하나와 산불감시초소만이 정상을 지키고 있다.

해발고도 230.4봉인 금오산은 오늘 진행하는 호미기맥 마지막 제5구간에서 가장 높은 높이로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상정리와 입암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우리나라에는 동명이산의 유명한 금오산이 여섯 군데나 있다.

구미의 금오산과 밀양 삼랑진의 금오산(730), 하동 진교의 금오산(849), 전남 여수의 금오산(323) 그리고 경주 남산의 금오산(468)이 그것이다.하지만 이곳 포항 금오산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추측을 해 보면 일반적으로 금오란 해를 달리 이르는 말로서 태양 속에 세 개의 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금오산은 까마귀 오가 아닌 자라 오자를 쓰고 있기에 더욱 헷갈리는 이름이기도 하는데 어찌되었던 산 정상에 산불감시초소와 작은 돌탑 그리고 4등 삼각점(△불국사 425 1995 재설)만이 어둠속에 이곳이 금오산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정상석이나 정상 표지판 하나쯤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 부분이 조금은 아쉬운 시간이다.

 

 

한동안 그 금오산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며 몇장의 사진을 남긴 후 조금은 아쉬운 마음에 열려있는 산불감시 초소로 올라가 보니 북서서쪽 잡목 사이로 포항 시내의 화령한 불빛이 이곳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야경을 잠시 흔들리는 사진기에 담은 후 그 산불감시초소를 내려 와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가 본다.

어둠이 사라지고 뚜렷한 조망과 풍경을 볼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나마 포항의 야경을 볼 수 있어 다행인 시간이다.

 

잠시 내려가니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는데 생각보다 봉분이 커 혹시나 고관대작의 묘지가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디에도 묘비 하나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을 해 본 시간이기도 하다.

그 무명묘지를 지나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생각지도 못한 노란 복수초 군락지가 나타나고 몇송이가 어둠속에서도 곱게 피어 활짝 웃어주고 있어 그냥 진행하지 못하고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영원한 행복과 슬픈 추억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는 복수초는 하얀 눈을 헤치고 올라오는 모습에 인동초로 인식되는 꽃으로 더 잘 알려진 꽃이기도 하다.

 

그 복수초 군락지에서 허리를 굽혀 몇장의 사진을 담고 내려가니 또 다른 복수초 군락지가 나타나고 어렵게 몇장의 사진을 다시 담아 본다.

그 복수초 군락지를 지나니 다시 등로는 순해지더니 잡목 구간으로 변하고 있다.

잡목 구간을 지나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하니 소나무가 식재된 등로로 이어지더니 금새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한다.

넓은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 등로 좌측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금오산이 그 뒷편에 포항의 화려한 불빛을 받아 희미한 실루엣을 보여주고 있어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주위 산군들을 살펴보지만 아직도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이다 보니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보여 그냥 넓은 임도를 따라 빠르게 걸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진행하니 임도 한쪽에 동해면 상정리와 포항시청으로 갈 수 있는 갈림 삼거리 이정표를 처음으로 만나 사진에 남겨 본다.

포항시 동해면 상정리는 금오산(230.4m) 남쪽에 위치하여 흰날재(히날재)와 운장산(200m)에 둘러싸인 마을로 1리인 안골, 대박, 흰날재, 2리인 새암리, 거무골, 3리인 구정 등 6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골은 골짜기 안쪽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마을회관 앞에 느티나무 정자가 한 그루가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매년 10월초에 당목에 동제를 지고 대밭은 마을 뒤 야산에 대나무가 많아 불리게 된 이름이며 흔히 대박이라고도 한다.

날재(백일령)은 신라 때 빛을 잃었다가 다시 밝아졌다는 전설을 간직한 히날재(흰날재,히나리재)에 유래한 이름으로 외적의 침입을 받아 피를 많이 흘렸다는 또 다른 전설에 따라 피날재로 불리기도 한다.

히날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는 흔히 백토라고 불리는 벤토나이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어 몇몇 광산업체가 채광작업을 하고 있다.

새암은 물이 맑고 차서 여름철에 마시면 생기가 솟는다는 샘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상양리라고도 한다. 매년 12월 3일 느티나무 당목에 있는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다.

금오산 남동거무골은 쪽 산골짜기에 위치하는 마을로 산중턱에 검은 빛이 나는 돌이 많아 흔히 거무산 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 이름에 연유한 명칭으로 이 마을 동북쪽에는 현재의 국도가 뚫리기전 포항과 구룡포 간 주통로였던 헛재가 있다.

구정은 옛날 이씨성을 가진 한 정승의 후손이 마을을 개척한 후로 구성이 모여 살았는데 모두가 정승의 후손인을 자처한다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이 마을 남쪽에 옛날에 장이섰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장터가 있다.

이렇게 또 다른 지방에 내려 와 그 지방 지명유래를 알아 보는 시간은 다시 언제 올지 모르기에 더욱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다시 넓은 임도를 따라 편안하게 진행하니 임도 좌측으로 능선을 타고 진행할 수 있는 희미한 등로가 내려다 보인다.

이제 짙었던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며 주위 사물들과 아름다운 호미기맥 마루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정도로 여명이 밝아 오고 있다.

잠시 더 진행하니 동해면 흥환리 갈림 이정표가 서 있고 호미곶해맞이광장까지는 이제 15.4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우측으로 능선을 두고 좌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며 뒤돌아 보면 오늘 걸어 온 마루금이 저 멀리 희미하게 눈에 들어 온다.

그러다 임도 우측 능선으로 올라 뾰족봉을 올라보지만 마루금은 다시 좌측 임도로 이어지기에 그곳 능선에 피어 있는 진달래꽃만 후레쉬를 이용해 담고 내려온다.

 

능선에서 내려 와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다시 여유롭게 걸어 본다.

잠시 진행하다 등로 좌측 뒤를 살펴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뾰족봉이 벌써 저 멀리 사라지고 그 우측으로 어둠속에 올랐다 내려 온 금오산 정상이 아름답게 높아 보인다.

임도 앞 우측으로는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구름속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아름답고 그 좌측 저 멀리 오늘 걸어 가야 할 호미기맥 마루금이 비산비야를 이루며 끊어질듯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넓은 임도를 진행하다 우측으로 흐르는 임도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진입해 212봉으로 오르니 잠시 후 짧은 암릉구간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다시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뾰족봉과 그 우측으로 금오산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등로 우측으로는 구룡포읍의 후동리와 눌태리가 내려다 보이는데 그 한가운데에 눌태저수지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누워있다.

그 저수지 저 멀리에는 희미하게 구룡포 앞바다가 눈에 들어 오는데 황사인지 박무로 인해 동해바다가 희미하게 보여 아쉬운 시간이기도 하다.

 

눌태저수지 우측으로는 포항구룡포일반산업단지와 온천랜드가 있지만 나즈막한 산자락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금새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특별한 이정판이나 정상 표식이 없어 아쉬운데 잘 살펴보니 선답자의 띠지 뒷편에 누군가 해발고도 212미터의 포란산이란 글씨가 보인다.

이곳은 동해면 중흥리에 속한 흥환리에서 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로서 본래 장기군 내북면 지역으로서 마을 뒷산이 배를 엎어 놓은 모양과 같다고 하여 혹은 옛날부터 이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일본을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일골 또는 배일곡이라 불러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일본인들이 이름이 좋지 않다고 중흥리라 고쳐 영일군 창주면이 구룡포읍으로 승격될 때동해면에 귀속시켰다.  

마을 앞 화전들에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어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남족 골짜기에 진불사가 있는데 매년 11월 마을 어귀에 있는 제당에서 김해김씨 터주할배와 월성이씨 골목할배를모시고 동제를 지낸다.

이곳 포란산에 있는 진불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된 사찰로 전하고 있으나 고려시대 때 산사태로 폐사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신라나 고려시대 때의 유지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근대에 들어 1912년 최대명화 보살이 중창하였는데 당시 최대명화 보살이 꿈에 포란산 자락에서 별이 밝게 비추는 것을 현몽받았다.

다음날 꿈에서 본 터를 찾아나서 터를 잡고 가람을 개창하기 시작하여 1945년부터 운제스님이 주지로 주석하며 가람을 정비하였고 현재는 달해스님이 주지를 맡아 불사를 일구고 있다.

왜 포란산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산 아래에 있는 진불사 또는 포란사과 함께 알려져 있는 산인 듯 하다.

 

포란산 정상에서 진불사 또는 포란사를 생각해 보고 다시 그 잡목 정상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잡목이 우거진 201봉에 도착을 한다.

201봉 정상에도 역시 잡목이 우거져 있는데 직진 방향으로 등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알바하기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드는 정상이기도 하다.

그곳 201봉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꺽여 가파른 잡목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그 잡목과 낙엽을 타고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간다.

 

잠시 내려가다 잡목이 사라진 곳 바위 위에서 앞으로 진행해야 할 방향을 살펴보니 저 멀리 동해에서 구름속을 뚫고 솟아 오려는 하루의 해가 꿈틀거리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에서 일출을 기다려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지만 구름이 두껍게 드리워져 있는듯 해 언제 해가 올라 올지 모르기에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타고 낙엽을 헤치며 내려간다.

앞으로 올라야 할 공개산이 뱀처럼 꾸불거리는 산판도로를 타고 저 멀리 그러나 가깝게 다가와 있다.

 

그렇게 낙엽을 헤치며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자꾸만 우측으로 돌아 진행되더니 금새 평이한 등로로 변한다.

그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무명묘지가 한기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배낭 정리 후 걸어 내려가니 잠시 그 무명묘지에 남아 있던 종주대원 2명이 일출이 시작된다며 부르기에 달려 올라가니 이제 막 생각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언제 만나도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일출이 아닐 수 없다.

 

한동안 묘지 위에서 일출을 감상한 후 다시 완만한 등로를 따라 넓은 임도를 우측에 두고 걸어 전진하니 돌무덤이 있는 윷판재를 통과하는데 이름이 신기하여 그 유래를 찾아 본다.

윷판재는 포항시 구룡포읍 후동리와 동해면 중흥리를 잇는 고개로 희미한 길이 보이고 길옆에는 조그만 돌무더기가 하나 보인다.

이곳을 윳판재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옛날 흥환사람들이 구룡포를 넘나들다 지루하면 이 재에서 윷놀이 한 판 벌이고 간다고 해서 윳판재라고 불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이 지명유래가 진실이든 아니든 이렇게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남아 있음에 맥 잇기 산행의 묘미를 더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윷판재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우측으로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따라 온다.

잠시 더 걸어가 이장된 듯한 묘지지대를 지나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포란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고 다시 앞으로 전진하니 무명묘지 한기가 보이는 곳에서 잠시 후 올라야 할 공개산 줄기를 살펴 본다.

잡목과 소나무가 섞여있는 진달래꽃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바로 눈 앞에 시멘트 포장 임도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등로 우측 저 멀리 전망대 위로 방금 전 떠 올랐던 아침해가 걸려 올라오고 있어 잠시 발걸음 멈추고 다시 찬란한 일출을 담아 본다.

다시 일출을 사진에 담고 시멘트 포장도로로 내려와 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포장도로 좌측으로 소나무 한그루와 몇기의 묘지가 보이고 그곳으로 진입하며 공개산으로 올라본다.

 

처사해주오공과 전주이씨 묘지를 지나 오르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212봉의 포란산과 그 우측으로 201봉이 시원하게 올려다 보인다.

약간의 잡목 구간을 지나 오르니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진분홍빛 진달래가 곱게 피어 이 산객의 발걸음을 반겨주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오르니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생강나무 꽃을 사진에 담고 오르니 잡풀이 가득한 공터가 나타나는데 예전에 이장된 묘지지대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쓰였는지는확실하지 않는 공터이다.

 

그 잡풀지대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금새 등로 좌측에 있는 공개산으로 갈 수 있는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나뭇가지에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남양주의 금곡님이 걸어 놓은 새로운 띠지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금곡님 여전히 잘 지내시고 계시겠지요 ???

덕분에 오늘 공개산까지 잘 다녀 올 수 있어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 전해 드립니다.

이곳 갈림 삼거리에서 호미기맥 마루금은 우측이지만 멀지 않은 좌측의 공개산 정상을 다녀 오기 위해 좌측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해 본다.

 

갈림 삼거리에서 좌측 공개산 방향으로 걸어가니 완만한 내리막 등록 나타나고 곧이어 이장된 듯한 공터를 지나 잡목 구간이 이어지고 곧이어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진다.

그렇게 키 작은 잡목 구간을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금새 해발고도 213.8미터인 공개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정상 직전 나뭇가지에 준.희님이 달아 놓은 공개산 이정판이 보이고 몇미터 ㄷ 오르면 잡목이 우거진 정상에 표식을 알 수 없는 삼각점 하나가 박혀있다.

공개산은 경북 포항시 동해면 중흥리에 있는 산으로 호미기맥 등로에서 200여미터 정도 좌측으로 벗어나 있고 잡목들로 인해 조망이 없는 산으로 .희님이 걸어둔 표지판만 없으면 이곳이 공개산 정상인지도 모르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그런 산이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아 있는 공개산 정상의 모습이다.

 

그 공개산에서 잠시 추억 몇장 남기고 다시 잡목지대를 지나 이장된 듯한 공터를 통해 오르니 공개산 갈림 삼거리로 복귀를 한다.

이제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 등로를 버리고 좌측의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며 진행을 해 본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내리막 등로에 봉분이 나즈막한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이장된 묘지를 통과한 후 이름없는 안부를 지나 오르니 무명봉 직전에서 등로는 우측으로 크게 꺽여 내리막 낙엽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조심하며 그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다시 올망졸망한 등로를 따라 높지 않게 오르락 내리락하며 걸어가고 곧이어 넓은 비포장 임도를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가 본다.

 

드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212봉인 포란산을 들리지 않고 진행한 선두팀이 봉수대와 말목장성 그리고 전망대로 오르는 임도 갈림 삼거리에 아침상을 펴 놓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어 잠시 쉬면서 식사 후 출발을 하기로 한다.

살펴보니 호미기맥 등로는 좌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해도 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우측 전망대와 우측 임도를 따라 올랐다 전망대와 말목장성 그리고 장기목장의 석성 및 발산봉수대를 들렸다 진행하기로 한다.

 

식사 후 먼저 일어 나 임도 삼거리로 가 보니 호미곶둘레길 안내도와 우측으로 구룡포해수욕장 갈림 이정표가 보인다.

이제 호미곶해맞이광장까지는 11.9 Km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기도 하다.

우측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포장도로 우측 능선으로 전망대 가는 등로가 열려있어 그곳으로 오르니 금새 안전목책이 설치된 나무데크의 전망대가 올려다 보인다.

 

그 전망대로 오르니 일망무제 거칠것 없는 풍경과 조망이 압권이다.

제일 먼저 서쪽을 바라보니 방금 전 아침식사를 한 임도 갈림 삼거리가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공개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 온다.

그 공개산 좌측 저 멀리 212봉인 포란산과 201봉도 저 멀리 멀어져 가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조망에 잠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닦으며 즐겨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공개산과 포란산 지나 좌측인 북서쪽 저 멀리 오늘 우리 종주대가 걸어 온 호미기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 저 멀리 포항의 금오산이 우뚝 솟아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금오산과 조항산 지나 희미한 마루금이 너울대고 있지만 박무인지 황사인지 분간하기 힘든 날씨로 인해 산 이름을 불러 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등로 우측인 남동쪽으로는 생각보다 깊은 골짜기가 저 멀리 동해바다까지 이어진 듯 길게 누워있고 그 골짜기 주위로는 깊은 심심산골 같은 모습으로 올망졸망한 산들이 이어져 있어 이곳이 비산비야인 곳임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등로 우측인 동쪽을 바라보니 떠 오른 아침 햇살이 강하게 비추고 그 아래 희미하게 구룡포 앞바다가 눈에 들어 온다.

북쪽으로는 지금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호미기맥 마지막 마루금이 산판도로와 뒤엉켜 넘실거리고 있다.

 

그렇게 그곳 전망대에서 환상의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올랐던 등로를 타고 내려가 이제는 좌측 임도 갈림 삼거리가 아닌 직진의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전망대와 봉수대 갈림 이정판이 서 있는데 직진으로 봉수대까지 300미터 거리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이정판을 지나 걸어가니 금새 돌들로 쌓아 올린 말 목장성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돌담을 우측에 두고 좌측 등로를 따라 걸어간다.

 

그 돌담같은 말 목장성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말목장성옛길과 말목장성탐방로 갈림 삼거리 안내판이 나타나더니 금새 임도 갈림 삼거리가 나타난다.

그 임도로 내려가니 임도 좌측에 장기목장의 석성 안내판이 서 있어 한번 읽어 본 후 사진에 담아 본다.

장기목장의 석성은 말을 카우던 장기목장의 돌 울타리로서 구룡포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 Km의 장기반도를 가로질러 쌓은 것으로 아직은 약 5.6 Km나 남아있는 현존 국내 최대 규모로 여지도와 경주도회좌통지도 등 고지도에도 전한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못을 박지 못하지만 조선 세종실록에 목장 감목관을 장기수령이 겸염한 기록이 있어 이미 세종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유사에는 장기반도 안에 있는 호미곶면 강사리 명월암이 신라 선덕여왕 5(636)에 지역 수장의 군마사육을 기원하는 사찰로 창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이 현재의 석성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장기목장의 근원은 간접적으로 약 1400여년의 역사성을 갖게 된다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는 당시 호랑이의 피해가 극심해 산행장이 목장에 배치되고 포수와 창군도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구룡포돌문 당시 말의 출입과 수를 헤아리던 문지기 2명이 있었다고 하며 또한 구룡포 삼정리레는 목아문을 설치해 양육하는 말을 관장했고 장기반도에는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개소와 눈과 비를 비할 수 있는 마구 19개소도 있었다.

특히 관찰상의 지휘아래 있는 종 6품의 관직을 가진 관리가 목장을 관리했으며 목자군이 목장 안에 살면서 말의 분뇨를 치우거나 관리에 동원됐다

효종실록에서는 효종 6(1655) 울산 감목관이 관할하는 울산 남목 휘하에 장기목장을 두게 했다.

하지만1894년 갑오경장이후에는 탐관오리들이 들끓으면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경상관찰사가 직접 적목을 만들어 공포했다.

이와 관련 동해면 흥환리에는 목장의 폐해를 일소했다는 흥인군 이최응의 영세불망비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듯 서 있다.

참으로 거대했던 말 목장에서 마음껏 뛰어 놀던 말들을 생각해 보니 괜시리 웃음이 나오는데 지금은 볼 수 없어 안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 장기목장의 석성 설명판 옆에는 구룡포 말목장성 안내도가 서 있다.

포항의 구룡포와 울산의 장기목장성은 신라시대 부터 말을 키워왔던 유서 깊은 포항 장기목장으로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대의 국영목장으로 244명의 목자가 1000여 필의 말을 사육하던 곳이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관리상의 어려움 등으로 점차 축소돼 울산 방어진목장 소속으로 편입하게 됐다.

울산 목장은 울산의 방어진과 포항의 장기목장을 함께 관리하였고 현재 울산 동구의 남목초등학교에 있었던 관아에서는 당시 두 곳의 목장 전체를 종 6품직 관원인 감목관이 함께 관리하였다.

포항의 장기 목장은 방어진 목장에 비하여 국토의 위쪽에 위치해 북목, 또는 동배곶 또는 동을배곶이라고도 불렀다.

동을배곶은 이두식 표현으로 겨울동에서 뜻을 취하고 을의 음차 하면 돌이 되고 이후 곶을 훈차하면 곶이 되는데 결국 동을배곶이나 동배곶은 같은 지명이다.

동배곶은 한반도 지형으로 볼 때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곳으로 호미곶이라 부르기도 하며 동배곶 목장은 또 당시 장기현에 소속된 까닭에 장기목장이라고도 불렀다.

장기 목장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장기면, 구룡포읍, 대보면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한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해안과 하천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로 덮여 있다.

장기 목장의 마성은 구룡포읍 구룡포 3(창주리)에서 작은 산 능선을 따라 눌태리 계곡을 거쳐 응암산 서쪽과 공개산 서북편 산정을 지나 동해면 흥환리 진골 산 계곡을 지나 바다에 까지 연결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흥환리 해안 약 2 Km부터는 마성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마을의 밭둑이나 담장 등에서 마성의 돌로 추정되는 것이 쉽사리 발견되는 점으로 미뤄 인위적으로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기 마성의 길이는 약 25여리이며 높이는 10척이고 석성으로 되어 있으며 호미곶을 가로질러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 있는 장성이다.

목장의 둘레는 대략 120(45 Km)정도인데 얼마 전까지 구룡포에는 높이 10여미터의 자연 돌문이 있었다.

이 돌문이 시외버스 터미널과 가깝고 돌문 사이가 약 5미터 정도여서 좁아 차량통행상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여 낙석 위험으로 1988년 하나를 해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해체한 돌문의 윗부분은 구룡포 읍사무소에 전시되고 있어 아쉬움을 들어주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당시 돌문의 용도는 말의 출입을 통제하며 그 수를 헤아리던 곳이었으며 문지기 2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마성이 지역개발로 훼손이 심각한 상황인데 반해 장기 마성은 해병대 군사 작전지역의 영향과 계곡안쪽에 위치해 마성 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게 특징이다.

특히 섬을 제외한 내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드문 마성이라는 점과 조선 초기에 건축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본다.

장기 목장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개소와 눈비를 피할 수 있는 마구 19개소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까지 그 유적을 발견되지 않았다.

대보면 강사3리 절골 해봉사 맞은편에는 화재로 소실된 명월암(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 추정)이 있었으며 이곳은 울산 방어진의 월봉사와 마찬가지로 목장 마필의 번창을 위한 국마 축원당으로 쓰였다.

포항 장기지역에는 이밖에 군소목장으로는 흥해 곡강리 일대의 봉림목장지, 초곡리 일대의 마장목장지, 해병사단일대의 일월목장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장기 마성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해동지도 장기부에는 신라부터 말을 키웠던 유서 깊은 목장이다라는 해제가 있다.

또 세종실록의 세종 14(1432 12 1)의 기록에 이제 경상도 동을배곶에 이미 목장을 설치하였사오니 청컨대 영일과 장기의 두 고을 수령으로 감목관을 겸임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미뤄 장기목장에서 말을 방목한 시기는 최소 1432년 이후로 보이며 인근 지역의 영일과 장기의 수령이 함께 관리하였다.

즉 동배곶 목장은 영일현과 장기현의 수령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겸감목관제의 형식으로 운영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목장의 규모와 보유한 마필 수에 있어서 훨씬 많은 장기 목장이 울산 목장으로 편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지리적 위치로 보아 장기목장은 울산 방어진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지역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로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곳에 유배됐었다.

승정원일기 숙종원년 6 19일 기록에 송시열은 1675 6 10일께 장기에 유배됐고 정약용은 1801 3 9일께 유배됐으며 그 외 수 많은 사람들이 장기에 유배됐다.

두 번째로는 장기 목장이 연일과 장기현의 사이에 있어서 관리 방식과 운영에 있어서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1625)에 의하면 장기 동배곶 목장은 말의 품종이 좋아서 경상도에서 제일로 불리고 있다. 현재 8명이 1066필을 방목과 관리하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원래 목자의 인원은 280명이다.

목자의 수가 적은 까닭으로 성이 무너진 것이 한계를 넘었고 성 끝 변경으로 말들이 넘어가서 흩어지니 혹 지역사람들이 쏴 잡아먹기도 한다.

목자를 충정하고 마성을 쌓는 일은 사복시로부터 행동으로 옮길 것이나 각도의 감사는 눈치를 보며 살피기만 할 뿐 시행하지를 않는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전국의 각 목장은 봄과 여름에 태어난 말에 대해 국가에서 정해준 도목의 예에 의해 태어난 말들의 털색으로 책을 만들어 사복시에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이러한 책자를 통해 그 목장 관리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평가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1 6 10(1633)에는 황해도 백령첨사의 경우 목장의 실질적인 감목관이지만 태어난 말에 대해서 책을 만들어 보내지 않았으며 전라도의 나주와 영광 및 옥구 그리고 경상도의 장기 등의 4개의 읍도 모두 겸감목관 수령들임에도 불구 감목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책을 만들어 보내지 않았다.

이같은 이유로 당시의 장기 현감은 징계를 받기도 했으니 목장 운영에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는 증거다.

세 번째로는 행정적인 관점에서 영남청사례에 의하면 경상도 71(좌도 40, 우도 31)은 토지결수에 따라 6000결 이상은 대읍, 4000결 이상은 중읍, 2000결 이상은 소읍, 1000결 이상은 잔읍으로 분류됐다.

울산은 중읍, 장기는 잔읍에 해당됐기에 장기목장은 도시의 규모가 더 큰 울산목장으로 편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1625년 이후 국가의 마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후 전국의 목장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1653년 이후 울산(방어진) 목장이 체제를 갖추면서 울산 목장에도 감목관을 파견했다.

이후 관리상의 어려움이 많았던 장기 목장은 울산 방어진 목장 소속으로 편입하게 되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던 이곳 말목장성까지 알아보는 시간이 있어 더욱 뜻깊은 산행의 시간으로 남겨 보는 순간이다.

 

그렇게 장기목장의 석성과 구룡포 말목장성 안내도를 읽어 본 후 비포장 임도를 건너 봉수대 200미터란 작은 이정표 방향으로 들어가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 올라 본다.

우측으로는 말봉재와 정자 박바위(응암산) 방향으로 가는 등로 표시가 되어 있고 올라가는 방향으로는 봉수대팔각정까지 150미터란 이정표가 보인다.

소나무 등로를 타고 오르니 낮은 돌담이 보이고 그 안을 지나 걸어가니 발산봉수대 설명판이 서 있다.

발산봉수대의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으며 우역제와 더불어 신식우편과 전기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전근대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역마나 인편보다 시간적으로 단축되었고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상황이나 국경지방의 적의 동태를 상급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했다.

봉수제는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인 의사표시나 서신을 전달할 수는 없는 것으로 국가의 정치와 군사적인 전보기능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 13세기)이다.

그러나 서로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지혜는 일찍부터 발달하였을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이미 주나라시대부터 시작하여 전한시대에 봉수가 있었다고 하며 그것은 점점 발달하여 당나라시대에는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치세중에 이미 봉화를 사용하였다고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 10년 조의 봉현을 비롯하여 봉산과 봉산성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수로왕이 유천간을 시켜서 망산도 앞바다에 나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면 봉화로써 통지하게 하라고 한 기록은 일반적 의미의 봉화임에 틀림이 없겠고 삼국사기에 보이는 봉산성 등의 기록도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한대 이전에 이미 봉수제가 확실히 성립하였고 당시 두 지역 사이의 문물교류로 미루어 군사적 의미의 봉수제는 실시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 고려 중엽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관계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우리 나라에서의 봉수제 기원은 역제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록상으로 우리 나라 봉수제의 확실한 출발은 고려 중기로 보아야 한다. 고려시대의 봉수제는 삼국시대보다 월등히 발전하였다.

조선 초 동해면 중흥리 공개산(214)에 조성했던 발산봉수대는 순조때인 1819년에 지금의 구룡포리 산1번지로 옮긴다.

그 뒤 고종 31(1894)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연해봉수의 신호를 받아 서울 남산으로 왜적의 침입을 전달하던 간봉이었다고 한다.

둘레 약 70여미터가 되는 타원형의 봉수대 바로 옆에는 오장의 지휘아래 봉수군이 거주했던 곳으로 짐작되는 500여평의 평지가 있다.

 

발산봉수대 설명판을 지나 걸어가니 벤취 2개가 보이고 곧이어 어미말 두마리와 망아지 한마리가 서 있는 포토존이 나타난다.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서 자주 만났던 풍경이기에 낯설지 않게 사진 몇장 남기며 이곳이 옛날 말을 키우던 목장 지대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본다.

그 옆에는 어느 시인들의 시가 나뭇판에 적혀 걸려있어 시를 읽어 보는 재미 역시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그 말 인공 구조물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2층으로 이뤄진 팔각정이 보이고 그곳으로 올라 가 주위 조망과 풍경을 감상해 본다.

생각보다 멋진 조망과 풍경에 진행 할 생각도 없이 한동안 머물며 시간을 보내 본다.

주위 조망을 즐긴 후 그 팔각정 2층으로 올라 가 조금 더 멋진 풍경들을 사진에 담으며 즐겨 본다.

 

먼저 앞으로 진행해야 할 호미기맥 마지막 구간의 마루금이 있는 북동쪽을 살펴 보니 명월산 지나 나즈막한 산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산줄기 우측 바로 발 아래에는 산자락 하나가 통째로 잘려나가는 채석장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허기진 풍경으로 남아 있어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호미곶쪽 동해바다가 보일까 찾아 보지만 호미곶 쪽 바다는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등로 우측인 동쪽으로는 구룡포쪽 동해바다가 희미하게 보이고 그 위로 붉은 태양이 바다에 비춰져 또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다.

구룡포읍에서 올라 이어지는 박바위인 응암산 자락이 아침 햇살이 얼비춘 바다의 붉은 빛을 받아 아름답게 다가온다.

너무나 멋진 풍경과 조망으로 인해 맥 잇기 산행을 진행 할 생각도 못하고 한동안 그 팔각정자에 머물며 많은 사진을 남겨 본다.

이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그 2층 팔각정을 내려 와 방금 전 올라 왔던 발산봉수대 설명판을 지나 임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 본다.

 

잠시 소나무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니 함께 진행하는 종주대 한분이 오르며 봉수대 팔각정 옆에서 원 기맥 등로를 따라 진행하자고 해 내려오며 아무리 찾아 봤지만 오르는 등로 좌측으로 등로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자 분명히 원 기맥 등로가 있다는 소식에 다시 발걸음 돌려 말 포토존과 2층 팔각정 방향으로 올라 본다.

올라오며 아무리 찾아 보지만 등로를 찾지 못하고 팔각정까지 올라가 보니 좌측 말라 있는 잡풀 속 저 아래에 선답자의 띠지가 보인다.

드디어 큰 한숨을 내쉰 후 조심스럽게 말라 있는 잡목을 뚫고 내려가니 금새 희미하지만 낙엽진 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노란 생강나무 꽃을 바라보며 낙엽진 미끄러운 등로를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등로는 좌측으로 꺽여 내려가다 비포장 임도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는데 등로 우측으로 거북을 닮아 있는 바위 전망대가 보여 그 위로 올라가 등로 우측 아래의 거대한 채석장을 다시 한번 내려다 본다.

전망바위에서 내려오기 전 진행 방향을 살펴 보니 저 멀리 명월산이 보일듯 말듯 다가온 느낌이다.

 

조심하며 그 거북을 닮아 있는 전망바위를 내려 와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 위로 내려가고 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가며 진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진행하니 비포장 임도 우측으로는 키 큰 산죽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잠시 헤맸던 발산봉수대의 2층 팔각정이 저 위로 올려다 보이는데 벌써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이제 또 한동안 그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는 산책 시간이 되었다.

 

비포장 임도는 다시 시멘트 포장 임도로 바뀌고 포장도로 우측에 키 큰 산죽들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나즈막한 둔덕을 넘는다.

비포장 임도와 시멘트 포장도로가 번갈아 나타나더니 조금 더 걸어 둔덕을 넘어 가니 차량 차단기가 있는 갈림 사거리가 나타나는데 이제 호미곶해맞이광장까지의 거리는 10.1 Km로 거리가 좁혀져 있다.

동해면 상정리와 흥환리(지방도 929번 해안도로) 및 대보저수지 가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보이는 몇개의 이정표가 서 있다.

포항시 동해면 흥환리는 공개산(241미터)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발원되어 영일만으로 흐르는 하천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마을로 1리인 배일, 피고지, 주막과 2리인 진골, 장태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시작하여 눌태리를 거쳐 이 마을까지 연결된 옛 장기목장성의 흔적이 말봉재(140미터) 일원에 남아 있다.

배일마을은 마을 앞바다에 밸(불가사리)이 많이 난다 하여 불려지게 된 이름이며 흔히 아랫배일이라고 불리는 피고지 위쪽에 있으므로 웃배일이라고도 한다. 

피고지 마을은 옛날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가끔 말을 도살할 때 피를 본다 하여 혹은 옛날 이 지역에 피를 많이 재배하였다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목장에서 뛰쳐나온 말을 골목으로 몰아놓어 붙잡은 곳이라 하여 말골목이라고도 하며 웃배일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아랫배일 또는 아랫각단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는 안곶으로도 불렀었고 매년 9월 9일 마을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다.

주막마을은 옛날 행인이 묵어가던 주막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며 지형이 연꽃이 피어 있는 형상과 닮았다고 하여 연화라고도 하는데 흥환초등학교가 이마을에 있으며 매년 12월에 마을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다.

진골마을은 긴골짜기에 위치한다 하여 불려지게 된 이름이며 아랫진골이라고도 하며 매년 삼월 삼짇날 고씨 할배신위를 모시고 동제를 지낸다.

장태마을은 옛날 장이 섰던 곳이라 하여 불려진 명칭으로 매년 삼월 삼짇날 마을 제당에서 골목할매를 모시고 동제를 모신다.

 

그 임도 갈림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 호미곶해맞이광장 방향으로 임도를 따라 걸어 가 본다.

원 등로는 걸어가는 비포장 임도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일 듯 하지만 큰 의미가 없어 임도를 따라 걸어 본다.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비포장 임도 우측으로 노란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활짝 피어나기 시작해 잠시 발걸음 멈추고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이제 완연한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개나리 꽃이고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개나리 꽃이기에 반갑기 그지없다.

 

개나리 임도를 지나 계속 걸어가니 임도사거리와 대보저수지 이정판이 보이고 그 이정판의 대보저수지 방향으로 계속 걸어 가 본다.

별 특징 없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한동안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가야 할 앞쪽으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명월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앞서 진행했던 종주대 몇명이 그 산불감시초소에 올라 주위 조망을 즐기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더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그 비포장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지는 부분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갈리는 삼거리가 나타나고 이제부터 명월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우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포항 청소년수련원과 절골 방향의 작은 이정판과 사유지 출입금지 경고판이 서 있는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산불감시초소가 서 있는 해발고도 189미터의 명월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해발고도 189미터인 명월산은 포항시 대보면 강사리에 있는 산으로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름이 명월이라 명월산이라고 부른다.

포항시 대보면 강사리는 장기군의 외북면 지역에 속했는데 1914년 명월, 강금, 사지, 송림촌을 합하여 강사리라 칭하여 창주면에 속했었다가 1942년에는 구룡포읍에 다시 1986 4 1일 대보면이 탄생하면서 이 대보면에 이속하게 되었다.

이 명월산이 속해 있는 강사리에는 다음과 같은 마을이 있다

다목포와 다목계는 송림이 우거진 계곡 어귀에 형성된 마을이라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하며 조선말엽에 감씨가 정착하면서 외진 곳에 숲만 무성하고 없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풍자하여 다무포라고도 칭하였다 한다.

서편 계곡을 막아 강사지를 축조하였으며(1982) 지석묘 1기가 마을 언덕에 남아 있다.

원래 이 부근에 모여 살았는데 지금은 3호와 4호만 남고 큰길 건너 바닷가로 옮겨 20여 호가 취락을 이루어 있다.

강금리와 깽금이 마을은 강사리 북쪽 마을로서 마을 지형이 깡깡이(방언=깽금, 깡금)같다 하여 계금 또는 강금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새기와 사기 마을은 사지라는 뜻의 발음이 와전되어 새기라 불리어 졌는데 마을 앞에 큰 모래 더미가 있었다 하며 가장 큰 자연부락으로서 강사초등학교(폐교)와 강사교회가 있다.

송림촌 마을은 해안방풍림인 번디기숲 속에 산재하는 자연부락이며 1950년경부터 송림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1.2 Km에 걸친 해안에 흑송림이 빽빽이 자리하고 있다.

명월과 절골 및 사리 마을은 다목포 서편 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 산촌으로 산속 마을이지만 달 그림자가 없는 마을이라 명월이라고 하며 해봉사가 있어 절골이라 한다.

 

명월산에 도착해 과일로 목마름과 허기를 달랜 후 그 산불감시초소로 올라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겨 본다.

먼저 남쪽으로 방금 전 지나 온 호미기맥 마루금을 살펴보니 뱀처럼 꾸불거리는 임도와 함께 끊어질듯 이어지는 끈질긴 마루금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방금 전 걸어 온 비포장 임도 진 저 멀리 채석장과 그 채석장 우측으로 발산봉수대의 2층 팔각정이 보이고 그 우측 저 멀리 공개산도 아련히 보인다.

 

평생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올 수 없다면 오늘 볼 수 있는 이 풍경이 평생의 풍경으로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겨질 것이니 한 장면이라도 더 담아 보려 노력해 본다.

 

명월산 정상에서 조망을 즐긴 후 다시 배낭 둘러메고 비포장 임도를 건너 능선으로 들어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잡목이 무성한 능선으로 들어가니 진입부와는 달리 소나무가 빼곡히 자라고 있는 멋진 등로와 이어지고 잠시 치톤피드를 들이 마시며 무상무심으로 걸어 본다.

그렇게 걸어가니 장사랑진양하공 묘지가 나타나 사진 한장 남기고 통과한다.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걸어가니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꺽여 이어지고 곧이어 다시 비포장 임도를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본다.

다시 한동안 그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임도 옆 나뭇가지에 해파랑길 제15코스 안내판이 보이는데 오늘 기획테마팀도 해파랑길 제14코스를 걷고 있기에 잠시 사진 한장에 담아 본다.

해파랑길 15코스는 한반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호미곶 일대를 순환하며 절경을 감상하는 코스다.

사진으로 익숙한 모습의 상생의 손과 호미곶등대이지만 실제로 감상할 때는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상생의 손 너머의 푸른 바다에서 솟구치는 웅장한 일출이 장관이다.

 

해파랑길 제15코스 안내판을 사진에 담고 종주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비포장 임도 우측 능선에 있는 우물재산을 오르지 못하고 그냥 진행하는 시간이다.

종주대에게 이야기 해 보지만 이미 약간 지나쳤기에 누구도 오를 생각이 없어 홀로 우측 능선을 타고 잡목을 헤치며 어렵게 올라 해발고도 180.1봉인 우물재산에 도착을 하니 아무 표식도 없는 잡목 구간에 어느 산악회에서 달아 놓은 띠지 하나에 이곳이 우물재산 임을 알려주고 있다.

단지 우물재산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한데 이곳이 아닌 180.6봉에도 누군가 우물재산이라 적어 놔 헷깔리기만 하지만 이곳이 확실히 우물재산임은 맞은 듯 하다.

우물재산이 속해 있는 호미곶면 강사리는 북으로 대포리와 남으로는 구룡포읍에 경계를 접하는데 서쪽으로는 사지봉수대가 있던 봉오재가 있다.

절골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구룡포의 석병리와 강사 1리와 3리 사이를 갈라 놓은 어촌과 산촌을 갖는 고장으로 1리에는 다목포와 강금이 있고 2리에는 새기와 송림촌이 있으며 3리에는 명원리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다목포 마을은 송림 우거진 계곡 어귀에 형성된 마을이라 그렇게 이름지었다 하며 조선말엽에 감씨가 정착하면서 외진 곳에 숲만 무성하고 없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풍자하여 다무포라고도 칭하였고 서편 계곡을 막아 강사지를 축조하였다.

깽금이 마을은 강사리 북쪽 마을로서 마을 지형이 깽금(깡깡이의 방언)같다 하여 계금, 강금, 깽금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새기 마을은 사지라는 뜻의 발음이 와전되어 새기라 불리어졌는데 마을 앞에 큰 모래더미가 있었다 하며 가장 큰 자연부락으로서 강사초등학교와 강사교회가 있다.

송림촌 마을은 해안방풍림인 번디기숲 속에 산재하는 자연부락이며 1950년경부터 송림촌이라 칭하였다 하며 1.2 Km에 걸친 해안이 흑송림이 빽빽이 자리하고 있다.

명월과 절골 마을은 다목포 서편 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 산촌으로 산속 마을이지만 달그림자가 없는 마을이라 명월이라고 하며 해봉사가 있어 절골이라 한다.

해봉사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에 이 지역 목장의 군마사육을 기원하는 사찰로 창건되었다가 고려때 폐사된 것을 조선 명종대에 상선선사가 불당 13동의 거찰으로 중건하였다가 철종말기에 토호의 방화로 7동이 소실되었으며 고종말년 장기군수의 명으로 명월담 하나 남기고 철폐되었는데 1970년에 이것마저 불에 타고 1972년에 다시 건립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한때 이 절에 머물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우물재산이 속해 있는 강사리를 찾아 봐도 우물재산에 관련된 설명만 없으니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이다.

 

어렵게 우물재산에 올랐다 잡목을 헤치고 다시 진행을 하니 금새 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 묘지를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걸어 내려가니 방금 전 헤어졌던 비포장 임도와 만나는데 갈림 삼거리 임도이다.

호미곶둘레길 안내판과 호미곶해맞이광장까지 7.5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 그리고 사유지 출입금지 경고판이 보인다.

이곳에서 차량통행 차단기 같은 인공 구조물이 설치된 좌측 임도를 따라 걸어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차량 통행이 가능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임도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좌측에 많은 묘지들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임도 타고 계속 우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그 비포장 임도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 갈림 삼거리가 나타난다.

호미기맥은 이제 그 넓은 비포장 임도를 우측으로 보내고 좌측으로 90도 꺽어지는 시멘트 임도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시멘트 임도는 금새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다시 만나는 비포장 갈림 삼거리에서 우측의 차량 차단막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 들어간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그 임도 우측 능선 방향으로 등로가 나 있고 그곳으로 오르니 빼곡한 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그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무명묘지인지 아니면 이장된 공터인지 모를 곳을 지나 소나무 군락지를 오르니 대보 301이란 삼각점이 있는 180.6봉에 도착을 한다.

하지만 이곳 준.희님의 180.6봉 이정판에 누군가가 우물재산이라 적어 놓아 의아스럽기만 하다.

 

180.6봉을 넘어 빼곡히 자라고 있는 소나무 군락지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시 무명묘지 한기를 지나 잡목 구간을 통과한 후 다시 비포장 임도와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진행을 한다.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한동안 걸어가니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둘레길 1, 2코스 안내판이 서 있는 갈림 삼거리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우측 등로를 버리고 직진같은 좌측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간다.

 

넓은 비포장 임도 주위에 자라고 있는 멋진 소나무를 친구 삼아 걸어가니 소나무들은 점점 더 빼곡히 서 있고 그렇게 한동안 무심으로 걸어 본다.

종주대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치톤피드를 가슴속 깊이 들이 마시며 걸어가는 시간은 그저 황홀하기만 하다.

잠시 등로가 우측으로 완만하게 이어지더니 작은 계곡 같은 등로를 건너 완만하게 올랐다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니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나는데 그 묘지 주위에는 차량바퀴들이 널려있어 의아하기만 하다.

 

그 무명묘지를 지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니 또 다른 무명묘지 한기가 나타난다.

그 묘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나즈막한 언덕에 많은 선답자들의 띠지가 달려있고 그 우측으로는 벌목된 장소에 많은 묘지들과 식재된 듯한ㅇ 키 작은 소나무들이 보인다.

묘지들이 많이 보이는 등로 우측을 바라보니 저 앞에 안내판이 보이고 그곳으로 가 보니 둘레길 1코스와 호미기맥 끝자락 포토존이란 글씨가 보여 무조건 우측의 포토존으로 올라가 본다.

올라보지 않았으면 후회할만한 멋지고 황홀한 풍경이 그곳에 펼쳐져 있다.

 

남쪽 호미곶 방향으로 이제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앞으로 오늘 산행 날머리인 호미곶과 새천년기념관 그리고 호미곶해맞이광장이 내려다 보인다.

어렵게 진행한 호미기맥 산행도 이제 그 막바지를 향해 조금만 더 걸어가면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시간이다.

저곳에 가 시원하게 탁배기 한잔 마시며 자축하는 시간도 가지게 될 것이다.

 

등로 바로 좌측 앞으로는 오르지 못하는 고금산 정상부의 공군부대가 아주 가깝게 다가온다.

해발고도 122미터인 고금산은 경북 포항시 호미곶면 대보리에 위치한 호미기맥 마지막 봉우리로서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해안가에 위치해 군사적 요충지라서 현재는 산 정상 전체를 공군 방공포 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안타깝게도 오르지 못하는 산이 되었다.

이곳 고금산 정상은 일제강점기에 혈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던 곳으로 미군이 사용하던 것을 1964년 우리군이 인수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쉽지만 포토존에서 호미곶과 고금산을 조망한 후 다시 내려 와 등로를 타고 고금산을 좌측에 두고 우측 우회 등로를 따라 내려가는 심정이 참담하기만 하다.

다만 진분홍빛으로 곱게 피어있는 진달래꽃 만이 안타까운 이 마음을 아는지 달래주고 있는 듯 하다.

잠시 더 내려가니 지뢰매설 경고판이 나타나고 금새 철판다리를 건너니 묘지 몇기가 보인다.

그 묘지를 지나 진행하니 다시 지뢰 경고판 2개가 보이고 작은 개울에 흐르는 물길을 건널 수 있는 철 다리를 넘는다.

 

이제 임도 좌측의 고금산 방향으로는 원형 철조망이 보이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또 다시 물길을 건널 수 있는 철다리를 건너 원형 철조망을 따른다.

한동안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 예전에 불이 났었는지 고금산 정상부는 거목이 모두 죽어가고 키 작은 관목과 잡풀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금산 방향으로는 계속해서 지뢰 경고판이 보이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 등로 좌측 위를 올려다 보니 고금산 정상부가 안타깝게 올려다 보인다.

 

이제부터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포장도로 좌측으로 고금산 정상이 그리고 우측으로는 민가와 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이제 곱게 피어난 매화가 화사함을 자랑하고 등로 우측 앞으로는 새천년기념관과 풍력발전기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렇게 진행하다 등로 좌측 논 넘어 저 멀리 호미곶면 마을이 동해바다와 맞닿은 곳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호미곶면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의 면소재지로서 행정구역상으로 호미곶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에 속해 있다.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추령을 넘어 양남으로 빠져나온 뒤 문무대왕릉에서부터 31번 국도를 타고 구룡포에 이르기까지 지방도 제929번(호미로)를 이용하면 해맞이로 호미곶을 갈 수 있다.

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 Km)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따라서 정치망 어업이 활발하고 오징어, 꽁치, 고등어, 김, 미역, 전복 및 성게 등 각종 수산자원이 풍부하며 또한 이곳은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중요한 군사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다.

바다 바람이 강한 호미곶은 2001년 경북 지역에선 최초로 풍력발전기를 세우고 시험가동을 하고 있으며 1903년에 만든 국내 최대 규모의 등대와 1985년 준공한 국내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위치한 이 곳은 전국에서 일출을 가장 빨리볼 수 있는 곳이다.

차후 국가적인 관광휴양지로 개발될 예정으로 해맞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들 또한 매년 늘어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계속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도로 우측 앞 저 멀리 풍력발전기와 새천년기념관이 여전히 가깝게 다가오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갈림 사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고금산 정상부는 공군 제8530부대가 차지하고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해파랑길 제15코스 안내판이 서 있는데 이제 흥환보건소와 대보저수지는 우측으로 보내고 호미곶해맞이광장 1 Km 방향으로 계속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간다.

그렇게 걸어가니 929번 4차선 지방도로를 통과하는 지하통록 나타나고 그 지하통로를 통해 4차선 지방도로를 건너 본다.

 

929번 4차선 지방도로를 지하통로를 통해 건너니 도로 앞 저 멀리 새천년기념관이 보이고 곧이어 해파랑길 제15코스 이정판에는 이제 호미곶해맞이광장까지 800미터만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반가운 시간이다.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다 해파랑길 제15코스 이정판에서 다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니 거대한 비닐하우스 지나 풍력발전기와 새천년기념관이 아주 가깝게 다가 와 있다.

 

계속 걸어가니 포장도로 좌측으로 호미곶면 대보리 마을이 아름답게 보이고 호미곶정보화 마을도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우측에 거대한 비닐하우스를 지나 좌측으로 민가를 두고 우측으로는 멋진 소나무 몇그루를 보며 진행하니 그 소나무 뒷편으로 거대한 풍력발전기와 새천년기념관이 이제 손에 잡힐듯 다가와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해맞이로 2차선 포장도로를 만나고 살펴보니 이곳은 해맞이광장 버스 정류장으로서 우측으로는 구룡포를 좌측으로는 동해면으로 갈 수 있는 도로이다.

포항 호미곶마을 이정판을 지나 해파랑길 제15코스 이정표에는 호미곶해맞이광장까지 이제 500미터 남아 있다는 거리 표시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니 도로 좌측으로 호미곶이란 아담한 이정석이 서 있고 그 뒤로 새천년기념관과 풍력발전기가 위로 올려다 보인다.

계속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상가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도로 좌측으로 등대박물관이 보이는데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제법 눈에 들어 온다.

등대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가치와 해양안전에 기여하는 역할과 해양사상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전문박물관으로 동해안의 푸른바다와 일출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지형상 호랑이 꼬리(호미곶)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국립등대박물관은 산업기술의 발달과 시대적 변화로 사라져가는 항로표지의 시설과 장비를 영구히 보존 전시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관람객들이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보면서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된 체험 학습공간으로서 항로 표지와 해양수산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꿈을 키워주는 공간이다.

 

등대박물관을 지나 종주대 버스가 서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해 배낭을 내려 놓고 갈아 입을 옷을 챙긴 후 호미곶 상생의 손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호미곶해맞이광장을 통해 걸어간다.

호미곶 해맞이광장은 새천년 한민족해맞이 축전 개최장소로 만여평의 부지에 상생의 손, 성화대, 불씨함, 연오랑세오녀상, 햇빛채화기, 공연장, 주차장, 관리소 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광장 진입로에 조성된 유채꽃 단지에는 매년 4월에서 5월경에 유채꽃이 만개하고 있다.

상생의 손은 사람의 양손을 청동소재로 바다와 육지에 각각 설치하여 서로 마주보는 형상으로 상생과 화합을 상징하고 있으며 변산반도의 천년대의 마지막 햇빛,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의 새천년 첫햇빛, 그리고 이곳 호미곶 새천년 첫햇빛 등이 합화되어 안치된 성화대의 불씨는 각종 국제대회 등의 성화의 씨 불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연오랑 세오녀상은 우리고장의 해와 달 설화의 주인공으로 금슬좋은 부부상으로 잘 알려진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마주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해맞이 광장은 호미곶의 상징이 돼버린 상생의 손이 바다에 우뚝 서 있다.

오른손은 바다에 왼손은 해맞이공원에 있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진 두 손이 마주보고 있으며 상생의 손 조형물 앞에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씨함이 인상적이다.

1999년 12월31일 변산반도의 해넘이와 2000년 1월1일 날짜 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과 호미곶의 해맞이 때 채화한 불꽃이다.

그곳에서 동해 수평선을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쉬어 보고 가슴속으로 소원도 빌어보는 장소로 유명하다.

 

드디어 지난 1월 중순에 시작했던 호미기맥 산행을 마무리하는 날머리인 상생의 손 앞에 서니 감회가 남다르다.

때로는 어려운 조건에서 또 때로는 즐거움과 행복에 겨운 시간으로 기억되며 추억되는 호미기맥 산행이 돨 것임을 생각하며 무탈하게 완주했음을 자축해 보는 시간이다.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99년 6월 제작에 착수한지 6개월만인 그해12월에 완공됐다.

상생의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인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인 상생의 손은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한다.성화대의 화반은 해의 이미지이며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하며 상생의 두손은 새천년을 맞아 화해와 상쇄의 기념정신을 담고 있다.

재질은 청동과 화강암이고 성화대(15m x 20m)와 함께 오른손(H8m x L4m x W4m)과 왼손(H3m x L6m x W4m)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상생의 손에서 호미기맥 산행의 마지막 의식을 행한 후 뒤돌아 오면서 저 멀리 새천년기념관을 담아 본다.

새천년 국가 지정 일출행사개최를 기념하고 민족화합을 통한 통일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새천년기념관은 2009년말경 개관예정이며 호미곶의 또하나의 명물로 거듭날 것이다.

연면적 5101㎡ 규모의 새천년기념관은 1층에 빛의 도시 포항속으로 전시실이 2층에 포항바다화석박물관 및 3층 영상세미나실과 시청각실 그리고 지하1층 공예공방체험실과 옥탑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또한 연오랑세오녀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되어 있다.

연오랑세오녀상은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우뚝 솟아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호미곶 마을을 상징하고 있다.

해와 달을 소재로한 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해가 뜨는 호랑이 마을로 일컬어지는 호미곶마을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

높이 8미터로 청동을 이용해서 조각한 연오랑과 세오녀상은 두 사람이 정답게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조각상 좌대는 두사람을 일본에 싣고 간 바위를 암시하고 있으며 또 바닥 조형물은 영일만과 동해의 물결(파도)을 상징하고 있다.

원형의 둥근 조형물은 이 땅을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을 상징하며 원형 조형물 중앙의 검은 부분은 일본에 전파한 선진문물인 비단을 의미하고 있고 비단은 특히 일월정을 상징하는 국가제천행사의 제물이다.

연오랑세오녀상에 연관된 설화를 생각해 본다.

신라 아달라왕 즉위4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가서 해조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고 하여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이리저리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으며 일본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를 왕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정기를 잃어 빛이 없어지니 일관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버린 연오랑 세오녀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 났다고 했다.

이에 왕은 사자를 일본으로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아 오도록 했으나 연오는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필시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예전과 같이 빛을 찾을 것이라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뢴후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그전과 같이 돌아왔다.

이후 그 비단은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하며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했다.

지금도 매년 포항문화원에서 일월신제를 올리고 있다.

참으로 볼 것도 많고 읽을 거리도 많은 호미곶이란 생각이다.

 

이제 해파랑길 제14코스를 걷고 있는 기획테마팀에게 전화를 해 보니 아직도 1시간 가량 시간이 더 필여하다는 전언에 호미기맥 종주대는 호미곶해수탕으로 가 샤워를 하기로 한다.

약간의 D/C로 기분 좋게 해수탕으로 들어 가 샤워 후 나오니 이제사 세상이 제대로 보이며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부자가 된 기분이다.

종주대 모두 샤워 후 해변도로를 따라 바닷바람을 맞으며 잠시 걸어 본다.

 

바다를 좌측에 두고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좌측 동해바닷가에 세개의 등대가 보이고 그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풍경에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간이 매점이 보이고 그곳에서 잠시 탁배기 한잔에 해산물로 호미기맥 마지막 자축을 해 보는 시간이다.

 

탁배기 한잔으로 기분 좋게 자축을 한 후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도로 우측에 이육사가 지은 청포도 시가 보이고 살펴보니 청포도 시비이다.

이육사 시이늬 청포도에서 청포도으 의미는 단순한 과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시인 자신의 현실 여건과 대비되는 것으로 풍성한 결실을 뜻하기도 하고 2연에서처럼 역사적 및 사회적 운명을 같이한 공동체의 원형적 연대 의식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시인의 정서가 청포도하늘이라는 푸른 색감의 시각적 표현을 통하여 선명히 드러나고 주절이 주절이알알이와 같은 첩어적 부사로 강조되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청포도를 통해 풍요롭고 평화로운 미래 세계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청포도라는 사물 속에는 화자의 꿈과 소망이 담겨 있으며 선명한 색채감도 드러나 있으며 이 마을 전설은 잊혀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찾아올 청포도와 같은 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시인은 청포도를 푸른 바다와 연결 지으면서 미래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는 손님은 그가 기다리는 대상으로 미래 세계를 상징하는 소재로서 역사적으로는 광복을 일반적으로는 평화로운 세계를 상징한다.

희망한 평화의 세계가 찾아온다면 화자는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을 만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렇게 즐기며 다시 상생의 손으로 가니 드디어 기획테마팀이 해파랑길 제14코스를 잘 마무리하고 그곳에서 만나 단체 사진 몇장 남기고 추억을 만들어 본다.

한동안 즐긴 후 버스로 돌아가다 유채꽃이 하사하게 피어 있는 밭으로 가 또 다시 추억 몇장 만드는데 그 한쪽에 영일군민의 노래와 영일만친구 노래 가사가 적혀 있는 영일노래비가 서 있다.

이곳 고장의 자랑을 노래비에 적어 기념하는 것은 고향을 찾는 일이라 생각되니 갑자기 이 산객의 고향인 칠갑산이 그리우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호미곶에서의 의식을 모두 마치고 이용하던 미니 버스를 타고 포항의 최대 수산물 시장인 죽도 시장으로 이동해 예약된 식당에서 맛난 회와 대게로 맛난 점심을 먹는다.

탁배기 한잔을 앞에 두고 호미기맥 산행과 해파랑길 산책을 안주 삼아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벌써 오후 3시를 넘기고 잠시 산우님들에게 자유시간을 줘 해산물을 구입하도록 해 본다.

죽도시장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도동 소재에 있는 수산 시장으로서 포항시를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다.

외지에는 신선한 회와 물회로 잘 알려져 있지만 수산물시장은 일부분이고 포항 시민의 일상생활과 빼놓을 수 없는 종합 재래시장이다.

포항시의 성장과 포항 시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녹아 있는 시장으로 2000년대 한 차례 화재를 겪고 나서 이후 내부에 아케이드를 설치하고 깔끔하게 정리하여 관광상품화하였다.

수산물시장 및 회타운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고 경상도 아지메들의 걸쭉한 사투리와 무례하기까지 한 호객 행위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데 요즈음은 많이도 정화된 느낌이다.

부산광역시의 자갈치 시장과 맞먹는 크기와 수산물을 자랑하니 아주머니들의 호객행위에 흔들리지 말고 느긋하게 한 바퀴 돌아 보고 즐긴 후 씽씽한 회나 물회 또는 대게로 맛 기행을 즐길 수 있는 큰 시장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기맥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또 다른 산행을 꿈꿔 보는 시간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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